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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43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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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3.1운동 발상지
통영 3.1운동 발상지이다. 1919년 3월 8일 밤 송정택(宋正宅 1885.5.26.~1950.1.13)의 집 사랑채에서 진평헌(陳平軒)을 위시한 청년 19명이 모여 3월 13일(음력 2월 12일 장날) 남망산 공원에서 거사하기로 함으로서 통영의 3.1운동은 각계각층에서 불붙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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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조 순교기념비
이상조(1913-1945)는 경남 통영(統營) 사람이다. 1938년 일본 동경의 입교(入敎)대학 재학중 원용오(元容五) 등과 10수회에 걸쳐 만나 항일사상 고취 방안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졸업 후 귀국하여 독립자금 모집 및 학교를 건설하여 교원을 양성, 독립운동의 기반을 조성할 계획을 세웠다. 1942년 3월 입교대학 졸업 후에는 동경의 회사에 취직하여 교포 회사원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등 지하운동을 계속하였다. 1943년 4월 귀국하여 그의 형이 경영하는 동방흥약사에 근무하면서도 이러한 지하활동을 계속하다가 1944년 1월 부산에 출장 중, 화가산(和家山) 경찰 형사대에 붙잡혀 일본으로 압송되었다. 그는 결국 같은 해 3월 26일 화가산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모진 고문과 옥고의 여독으로 1945년 9월 20일에 순국하였다. 그의 유해는 광복후 1946년 5월 윤봉길·백정기·이봉창 의사의 유해와 함께 봉환 되었으며, 동년 6월 2일 부산의 영도(影島)교회에서 추도식을 갖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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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면민 만세운동기념비
고전면 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은 박영묵(朴永默)·이종인(李宗仁)·정상정(鄭相正)·정의용(鄭宜鎔)·정재기(鄭在基) 등 33인으로 조직된 일신단(一身團)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들은 4월 6일 주교리 장날을 기하여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는데, 독립선언서를 구하러 다니던 정재기가 일경에 검거되었으나 거사를 발설하지 않아 계획대로 진행될 수 있었다. 4월 6일 오후 1시 40분경 배다리장터에 1000여 명이 모이자 박영묵이 군중 앞에 나서서 의거의 취지를 설명한 뒤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곳곳에 배치된 일신단원들과 장꾼들이 일제히 호응하였다. 일제 경찰과 조선인 순사가 시위를 저지하려 하자 군중이 그들의 총검을 빼앗고 구타하여 기세를 올렸으나 증파된 일본군 수비대의 무력 진압에 시위대는 강제로 해산되고 말았다. 다음날 주동자 색출에 나선 일제 군경 수십 명이 지소마을에 들이닥쳐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최알밤(최혁진)이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에 박영묵·이종인·정상정·정의용은 부녀자와 아이들을 대피시킨 뒤 주동자를 자처하여 체포되었다. 박영묵·이종인·정상정은 징역 2년 6월 형을 언도받았으며, 정상정은 고문의 여독으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재기는 징역 6월 형의 옥고를 치렀으며, 정의용은 태형 90대의 형벌을 받았다. 정상정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박영묵·이종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정재기·정의용에게는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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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 의거기념비
고전면 성천리 지소마을 3.1운동은 박영묵과 이종의, 정상정, 정의용 등이 인근 동지들을 규합해 33명으로 구성된 일신단(一身團)을 구성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4월 6일 장날 오후 1시 40분 경 박영묵은 미리 준비된 단상에 큰 태극기를 잡고 올라가의거의 취지를 설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하였고, 이에 매복하던 33명이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외치며 저지하려던 일경을 제압하였다.다음 날 아침 일경이 총을 난사하며 마을로 들이닥쳤고 박영묵은 자신을 포함한 주동자 4명에게 책임을 돌리며 피체되었다. 이 때 최알밤(본명 미상)은 총격에 숨졌고, 정세기는 진주 경찰서에서 2개월간 구류되었으며 박영묵, 정상정, 이종의, 정의용은 2년 6개월 형을 받고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3.1독립의거기념비는 이러한 고장의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하여 1982년 삼일절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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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정 구 묘
경상남도 하동(河東) 사람이다. 1919년 4월 6일의 고전면 주교리(古田面舟橋里)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같은 마을의 이종인(李宗仁)·박영묵(朴永默)·정의용(鄭宜鎔) 등 33인과 더불어 일신단(一身 )을 조직하고, 목숨을 바쳐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는 이들과 함께 4월 6일의 주교리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일신단 동지인 정재기(鄭在基)에게 하동읍에 가서 독립선언서를 구해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정재기가 도중에 체포되어 일제는 더욱 삼엄한 경계를 펴게 되었다. 4월 6일 오후 1시 40분경, 주교리 장터에 1천여명의 장꾼이 모이자, 박영묵이 미리 만들어 놓은 태극기를 들고 단상에 올라가 간단한 연설을 한 뒤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장터의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있던 일신단원 및 장꾼들이 일제히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조선인 경찰 박도준(朴道俊)과 일본 헌병 3명이 출동하여 제지하자, 시위군중은 그들의 총검을 탈취하는 한편 모자와 제복을 벗기고 구타하였다. 그러나 급거 응원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의 무력행사로 시위대열은 해산하였다. 다음날 아침 일본 헌병 20명과 경찰 10명이 주동자를 체포하기 위하여 그의 고향인 성천리(城川里) 지소부락(紙所部落)에 총을 난사하며 들이닥치자, 그는 미리 부녀자와 아이들을 동리 뒤의 삼봉산(三峰山)으로 대피시킨 뒤, 박용묵·이종인·정의용과 함께 주동자임을 자처하며 체포되었다. 그는 결국 이해 5월 16일 부산(釜山)지방법원 진주(晋州)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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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묵 묘
박영묵(朴永黙)은 경상남도 하동(河東) 사람이다. 1919년 4월 6일의 고전면 주교리(古田面舟橋里)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같은 마을의 이종인(李宗仁)·정상정(鄭相正)·정의용(鄭宜鎔) 등 33인과 더불어 일신단(一身)을 조직하고, 목숨을 바쳐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는 이들과 함께 4월 6일의 주교리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일신단 동지인 정재기(鄭在基)에게 하동읍에 가서 독립선언서를 구해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정재기가 도중에 체포되어 일제는 더욱 삼엄한 경계를 펴게 되었다. 4월 6일 오후 1시 40분경, 주교리 장터에 1천여명의 장꾼이 모이자, 그는 미리 만들어 놓은 태극기를 들고 단상에 올라가 간단한 연설을 한 뒤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장터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있던 일신단원 및 장꾼들이 일제히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조선인 경찰 박도준(朴道俊)과 일본 헌병 3명이 출동하여 제지하자, 시위군중은 그들의 총검을 빼앗는 한편 모자와 제복을 벗기고 구타하였다. 그러나 급거 응원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의 무력행사로 시위군중은 해산하였다. 다음날 아침, 일본 헌병 20명과 경찰 10명이 주동자를 체포하기 위하여 그의 고향인 성천리(城川里) 지소부락(紙所部落)에 총을 난사하며 들이닥치자, 그는 미리 부녀자와 아이들을 동리 뒤의 삼봉산(三峰山)으로 대피시킨 뒤, 정상정·이종인·정의용과 함께 주동자임을 자처하며 체포되었다. 그는 결국 이해 5월 16일 부산(釜山)지방법원 진주(晋州)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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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낙영 유적비
정낙영(鄭洛榮)은 경남 하동(河東) 사람이다. 1919년 3월 20일 남해군(南海郡) 남해읍(南海邑) 장날에 이범호(李範鎬)·정재운(鄭在雲)·정희근(鄭禧根) 등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 독립선언서를 다량으로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드는 등 준비를 갖춘 후 거사일 장터에 모인 수백명의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등 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해 4월 28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월 형을 선고받았으나 검사가 공소하여, 5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6월형으로 가형되어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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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식 사적비
이홍식 선생은 경남 하동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월 29일 경남 하동군(河東郡) 진교면(辰橋面) 진교시장(辰橋市場)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계획·주도하였다. 그는 정재운(鄭在雲)·정재백(鄭在伯)·이원태(李源泰) 등 동지들과 함께 3월 29일 진교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 준비를 하였다. 3월 29일 정오경, 장터에 1,000여 명의 주민이 모이자, 그는 동지들과 숨겨 간 태극기를 주민들에게 재빨리 나누어 주고 장터 한복판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주민들이 일제히 독립만세를 부르자, 그는 군중 선두에 서서 장터를 누비고 진교경찰관주재소로 행진하여 그 앞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때 일본 경찰이 나와 총검으로 위협하고 주도자를 검거하여 주재소로 끌고 갔다. 이에 분노한 시위군중은 주재소를 포위하고 구금자 석방을 요구하였다. 일본 경찰이 응하지 않자 군중들은 주재소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러나 하동경찰서에서 지원 나온 일경들이 총검을 휘두르며 강제해산에 나서 군중들은 부득이 해산하고 말았다.3월 30일 오후 5시경, 1,000여 명의 군중이 다시 진교경찰관주재소로 몰려가 전날 검거된 동지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군중들의 의기는 충천하였으나, 급보를 받고 하동에서 출동한 일본군 보병이 현장에 도착하여 군중을 구타하는 등 강제 진압에 나서 해산하고 말았다. 이홍식은 이때 체포되어 1919년 5월 31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진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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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공학 사적비
문공학은 경남 하동(河東) 사람이다. 1919년 3월 21일 하동군 횡천면(橫川面) 여의리(如意里)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였고 같은 해 4월 3일 하동군 북천면(北川面) 직전리(稷田里)에서 주민 1,000여명의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이고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활동을 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해 5월 29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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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항일투사 기념탑
지리산항일투사기념탑은 하동군 악양면 정동리 651-1 취간림에 위치한다. 이 기념탑은 1905년부터 1915년까지 지리산 일대에서 일제와 맞서 싸운 항일 의병 및 독립투사를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건립은 지리산 항일독립투쟁 기념사업회가 주체가 되고 악양면 청년회가 주관하였다. 자금 후원은 국가보훈처와 경남도, 하동군, 지리산 인근 20여 개의 단체들과 국민 후원으로 이루어졌으며 2008년 건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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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기적비
하동군 양보면 운암리 173-5 양보공원 내 양보면 출신 항일독립운동 기적비가 건립되었다. 하동군 양보면 출신 독립 유공자들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졌으며, 이들의 공적을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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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권 공훈비
하우 김홍권 선생은, 1909년에 안희제 이원식 남형우 김사용 김기수 윤병호 서상일 김동삼 등과 함께 대동청년당이라는 비밀결사 조직 단체를 만들어 국내외에서 지하 공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4월 13일에는 상해 임시정부 재무위원으로 피임되었으며, 4월 23일, 24일에 개최된 임시의정원 제2차 회의에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차장제의 폐지와 위원제 사용의 결의, 각 부 위원의 선정, 임시 의정원 성립 반포 등이 결의되었다. 또한, 같은 해 5월 6일에는 제4차 임시의정원의 의결에 따라 윤현진 조동진 등과 함께 경상도 지방의 구급의연금모집 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제4차 의정원 회의에서는 구급의연금의 모집, 인두세의 징수, 내외에 공채모집 등의 안건이 결의되었던 것이다. 의연금의 모집 방법은 각 의원이 먼저 내고 다음에 국내에 모집위원을 파견하고, 그리고 상해에 오는 동포에게 받아서 임시정부의 자금 확보의 재원으로 삼아 항일 독립 활동을 전개하자는 것이었다. 정부에서는 이와 같은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