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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현 기적비, 추모비
김규현(1903-1933)은 1919년 4월 경남 창원군(昌原郡) 진전면(鎭田面)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창원군 진전면에서는 1919년 3월 28일 오후 1시 경 권영대(權寧大) 등의 주도로 400여 명의 군중이 진전면 고현시장과 진동면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어 4월 3일 창원군 진전(鎭田)·진북(鎭北)·진동면(鎭東面)의 3개 면이 연합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를 삼진(三鎭) 의거라 한다. 진전면에 살고 있던 김규현도 이 삼진의거에 참가했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5월 16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김규현은 마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19년 10월 3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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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영 순직지
이교영(1878~1950)은 1919년 3월 28일 경남 창원군 진전면의 고현시장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서울의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고 돌아온 변상태(卞相泰)·김관제(金觀濟) 등을 통해 독립만세운동의 상황을 들은 권영조(權寧祚)·권영대(權寧大)·변상섭(卞相攝)·권태용(權泰容)·변상헌(卞相憲)·백승학(白承鶴) 등은 경남 창원의 시위일을 진전면 오서리의 고현시장(古縣市場) 장날인 3월 28일로 잡았다. 이들은 태극기를 제작하고 약 1,000매의 독립선언서를 제작하였다. 거사 당일권영대가 고현시장 단위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치자, 400여 명의 군중들이 동참하여 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시위대는 진동면의 경찰관주재소에 가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교영은 고현시장의 시위에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시위 후 체포된 이교영은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이교영은 추후, 곡안리 양민 학살 사건으로 인해 일가족 8명과 함께 몰살당했고,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봉곡리 577가 그 순국지이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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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진독립의거기념비
삼진의거는 1919년 4월, 당시 마산 진동과 진전, 진북면에서 주민 7천여 명이 일으킨 항일 시위이다. 삼진의거는 지역의 지식인 학생 농어민 등이 앞장서서 일으킨 조직적인 대규모 시위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삼진독립의거는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3월 28일 진동 고현 장터 1차 의거는 삼진 지방의 독립만세운동은 변상태(卞相泰)를 비롯해 권영조(權寧祚)·권영대(權寧大)·변상섭(卞相攝) 등의 주도로 1919년 3월 28일 진동면 고현리 장날에 전개됐다. 3월 28일 진동면 고현 장터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자 백승학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권영대(權寧大)의 독립 만세 선창으로 만세 운동을 전개했다. 고현장터 만세운동에 참여한 군중들은 500~600여 명으로, 함께 대한 독립을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며 진동면으로 향했다. 소식을 접한 일본 헌병대는 무력으로 시위 진압에 나섰다. 이날 시위에서는 11명이 검거되고 강제로 해산되고 말았다. 이에 굴하지 않고 2차 의거가 준비됐다. 변상태·권태용(權泰容)·권영대·변상헌(卞相憲) 등은 다시 동지들을 규합해 거사를 계획했다. 이들은 거사일을 4월 3일로 정하고 비밀리에 참가자 규합에 착수했다. 4·3삼진의거에서는 변상태의 계획에 따라 양촌리 냇가 둑에 세워진 대형 태극기 아래로 인근 주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변상섭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변상태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만세 함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변상섭(卞相燮)이 만세를 선창하자 군중들도 함께 만세를 부르며 시위에 돌입했다. 이들은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진동리로 행진했으며, 거리에 대기하던 군중이 계속 합류해 그 숫자가 5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시위 행렬은 진북면 사동리의 다리 앞에 이르러 급보를 받고 출동한 일제 헌병과 충돌했다. 진동 헌병 주재소는 마산 육군 중포병 대대에 병력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무장 헌병과 헌병 보조원 및 일본인 재향 군인 30여 명을 사동교 건너편에 배치하고, 시위대가 접근하자 총칼로 무자비한 진압을 단행했다. 그 결과 김수동(金守東)·변갑섭(卞甲燮)·변상복(卞相福)·김영환(金永煥)·고묘주(高昴住)·이기봉(李基鳳)·김호현(金浩鉉)·홍두익(洪斗益) 등 8명이 현장에서 순국했고, 22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검거돼 감옥에 투옥됐다. 이날의 시위는 1차 의거에 비해 훨씬 계획적이었지만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시위였던 만큼 희생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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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상태 기적비
변상태(1889~1963)는 1916년 대한독립청년단에 가입하였으며 1919년 2월 서울에 있는 동지들로부터 상경하라는 연락을 받고 동지인 김관제(金觀濟)·이시영(李始榮)과 함께 상경하여 3월 1일 서울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그후 이들은 만세시위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킬 것을 계획하고 각자 책임지역을 선정하였는데 그는 경남 서부지역을 담당하였다. 그리하여 독립선언서를 휴대하고 귀향한 그는 이희석(李喜錫)·조태식(趙台植)·이경형(李景 ), 창원의 이수룡·권태용(權泰容)·권영조(權寧祚)·권영대(權寧大)·변상섭(卞相攝), 고성의 황태익(黃泰益) 등과 함께 힘을 모아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이들은 거사일을 3월 28일의 장날로 정하고 당일 곳곳의 동지들과 함께 일제히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이어서 독립선언서와 선전격문을 살포하면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시위대가 일경의 탄압으로 해산되자 그는 몸을 피해 권영대·권태용 등과 재기를 도모하고 거사를 준비하였다.그는 4월 3일 회집장소인 진전면 양촌리 천변에 큰 태극기를 세우고 진전면·진북면·진동면에서 모여든 수천 명이 넘는 군중앞에서 연설로 항일의식을 고취한 후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일경의 탄압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변상태는 붙잡혀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西大門)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1944년 8월 의열단(義烈團)의 구여순(具汝淳)·이주순(李周順)등과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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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진독립의거 발원지 표지석
삼진독립의거 발원지 표지석은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양촌리 양전교 앞에 위치해 있다. 삼진의거는 1919년 4월, 당시 마산 진동과 진전, 진북면에서 주민 7천여 명이 일으킨 항일 시위이다. 삼진의거는 지역의 지식인 학생 농어민 등이 앞장서서 일으킨 조직적인 대규모 시위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삼진독립의거는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3월 28일 진동 고현 장터 1차 의거는 삼진 지방의 독립만세운동은 변상태(卞相泰)를 비롯해 권영조(權寧祚)·권영대(權寧大)·변상섭(卞相攝) 등의 주도로 1919년 3월 28일 진동면 고현리 장날에 전개됐다. 3월 28일 진동면 고현 장터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자 백승학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권영대(權寧大)의 독립 만세 선창으로 만세 운동을 전개했다. 고현장터 만세운동에 참여한 군중들은 500~600여 명으로, 함께 대한 독립을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며 진동면으로 향했다. 소식을 접한 일본 헌병대는 무력으로 시위 진압에 나섰다. 이날 시위에서는 11명이 검거되고 강제로 해산되고 말았다. 이에 굴하지 않고 2차 의거가 준비됐다. 변상태·권태용(權泰容)·권영대·변상헌(卞相憲) 등은 다시 동지들을 규합해 거사를 계획했다. 이들은 거사일을 4월 3일로 정하고 비밀리에 참가자 규합에 착수했다. 4·3삼진의거에서는 변상태의 계획에 따라 양촌리 냇가 둑에 세워진 대형 태극기 아래로 인근 주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변상섭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변상태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만세 함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변상섭(卞相燮)이 만세를 선창하자 군중들도 함께 만세를 부르며 시위에 돌입했다. 이들은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진동리로 행진했으며, 거리에 대기하던 군중이 계속 합류해 그 숫자가 5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시위 행렬은 진북면 사동리의 다리 앞에 이르러 급보를 받고 출동한 일제 헌병과 충돌했다. 진동 헌병 주재소는 마산 육군 중포병 대대에 병력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무장 헌병과 헌병 보조원 및 일본인 재향 군인 30여 명을 사동교 건너편에 배치하고, 시위대가 접근하자 총칼로 무자비한 진압을 단행했다. 그 결과 김수동(金守東)·변갑섭(卞甲燮)·변상복(卞相福)·김영환(金永煥)·고묘주(高昴住)·이기봉(李基鳳)·김호현(金浩鉉)·홍두익(洪斗益) 등 8명이 현장에서 순국했고, 22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검거돼 감옥에 투옥됐다. 이날의 시위는 1차 의거에 비해 훨씬 계획적이었지만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시위였던 만큼 희생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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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용 기념비
권태용(1885~1939)는 1919년 4월 3일의 진전면·진북면·진동면의 연합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그는 변상태(卞相泰)·권영대(權寧大)와 함께 3월 28일의 진동면 고현리(古縣里)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한 후 피신하여 이곳 청년 유지인 변상섭(卞相攝)·황태익(黃泰益)·김수동(金守東)·김영종(金永鍾)·구수서(具守書)·변상술(卞相述)·변우범(卞又範) 등과 연락을 취하며, 4월 3일 인근의 3개면민들을 동원하여 진전면 양촌리의 냇가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4월 1일 변상태·황태익 등은 변우범의 집에 모여 회의를 한 후, 동리 서당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여 미리 동리 사람들에게 배부해 주고, 인근 지역을 순회하며 주민의 궐기를 촉구하였다. 그는 4월 2일 오전, 진전면 율치리 김순삼(金順三)의 집을 방문하여 마침 이곳에 있던 김영종에게 동리 사람들을 동원하여 줄 것을 부탁하였다. 4월 3일 오전 9시, 수천명의 시위군중이 양촌리 냇가에 모이자, 변상섭의 독립선언서 낭독에 이어 변상태가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양촌리 계곡은 온통 태극기의 물결속에 독립만세 소리로 진동하였다. 이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주재소가 있는 진동면으로 시위행진을 시작하였다. 이때 그들대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한 뒤, 진전면으로부터 시위행진하여 오는 시위대열을 기다리던 진동면민들도 이에 가세하여 시위군중은 5천여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2시, 시위대열이 진북면 사동리 다리 앞에 이르렀을 때, 급보를 받고 출동한 일본 헌병과 시위군중과 충돌하였다. 다수의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을 때, 마산에서 응원 출동한 일본군이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8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22명이 부상하였으며, 시위대열은 해산하였다. 그 후 그는 이 운동의 주동자로서 1920년 10월 30일 경성(京城)복심법원의 궐석재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형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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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조 기념비
권영조(1883~1955)는 1910년부터 창원에서 애국유지로서 사립경행학교(景行學校)를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기여하여 왔다. 1919년 3월에 3·1독립운동이 발발하자 권영대(權寧大)·변상섭(卞相燮) 등과 거사를 의논하고, 거사일을 고현(古縣) 장날로 약정하여 태극기를 만들고 선전격문을 쓰고 독립선언서를 작성하는 등 거사준비를 갖추어 가는 한편 각 면·동으로 다니면서 동지와 대중규합에 노력하였다. 3월 28일의 장날 오후 1시경이 되자 예측대로 많은 장꾼이 모여들었고 권영대의 선창과 지휘 아래 장터 곳곳에 대기중인 동지들이 일제히 태극기를 휘두르면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이어서 독립선언서와 선전격문을 살포하였다. 그는 500여명의 주민과 함께 시위를 주동하다가 이해 3월 28일 오후 5시경 진동헌병주재소(鎭東憲兵駐在所)에 붙잡혔다. 그는 이해 5월 29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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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대 기적비
권영대(1885~1946)는 1919년 3월 변상태(卞相泰)·권태용(權泰容)·변상섭(卞相攝) 등 10명의 동지와 서울 의거의 전말과 앞으로 해야 할 민족적 사명을 위해 몸바칠 것을 맹약하고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곧이어 거사를 의논하고 거사일을 고현 장날인 3월 28일로 약정하였다. 이를 위해 태극기를 만들고 선전격문을 목판에 새겨 찍어 내었고 독립선언서 1000매도 작성하였다. 3월 28일의 장날 오후 1시경이 되어 많은 장꾼이 모여들자 그는 장터 복판에 만들어 놓은 임시단(臨時壇)에 올라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때 장터 곳곳에 대기하고 있던 동지들이 일제히 태극기를 휘두르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자 장보러 나온 주민 600여 명이 이에 호응하여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때 주동 동지들이 많이 검거되었으나 변상태·권상용 등과 함께 재기를 기도하여 일단 은신하였다가 4월 3일에 진전면(鎭田面)·진북면(鎭北面)·진동면(鎭東面) 등의 연합 대의거를 일으켰다. 그는 고현 장날의 의거에서 재기를 기도하고 종적을 감춘 동지들을 비롯하여 비밀리에 새로운 동지와 민주을 규합하여 태극기를 만들어 농민에게 배부하는 등 미리부터 거사 준비를 해왔으므로 거사 당일 회집장소인 진전면 양촌리 냇가에는 오전 9시도 되기 전에 이미 수천명이 모여들었다. 이곳에는 큰 태극기가 세워졌고 변상섭의 선창과 함께 독립만세의 함성은 메아리쳐갔고 우선 고현 장날의 의거에서 검거된 주동 동지들이 잡혀있는 진동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이렇게 약 5,000명과 함께 2차에 걸쳐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운동을 벌이다가 붙잡혔다. 그는 재판관할권 문제로 오랜 구금기간을 거친 끝에 1921년 2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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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삼진의거 발상지 성구사
성구사는 1919년 4월 3일 진동·진전 일대에서 항일운동이 일어났을 때(4.3 삼진의거) 성구사 일원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만드는 등 거사를 모의한 곳이다. 삼진의거는 두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3월 28일 진동 고현 장터 1차 의거는 삼진 지방의 독립만세운동은 변상태(卞相泰)를 비롯해 권영조(權寧祚)·권영대(權寧大)·변상섭(卞相攝) 등의 주도로 1919년 3월 28일 진동면 고현리 장날에 전개됐다. 3월 28일 진동면 고현 장터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자 백승학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권영대(權寧大)의 독립 만세 선창으로 만세 운동을 전개했다. 고현장터 만세운동에 참여한 군중들은 500~600여 명으로, 함께 대한 독립을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며 진동면으로 향했다. 소식을 접한 일본 헌병대는 무력으로 시위 진압에 나섰다. 이날 시위에서는 11명이 검거되고 강제로 해산되고 말았다. 이에 굴하지 않고 2차 의거가 준비됐다. 변상태·권태용(權泰容)·권영대·변상헌(卞相憲) 등은 다시 동지들을 규합해 거사를 계획했다. 이들은 거사일을 4월 3일로 정하고 비밀리에 참가자 규합에 착수했다.4·3삼진의거에서는 변상태의 계획에 따라 양촌리 냇가 둑에 세워진 대형 태극기 아래로 인근 주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변상섭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변상태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만세 함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변상섭(卞相燮)이 만세를 선창하자 군중들도 함께 만세를 부르며 시위에 돌입했다. 이들은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진동리로 행진했으며, 거리에 대기하던 군중이 계속 합류해 그 숫자가 5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시위 행렬은 진북면 사동리의 다리 앞에 이르러 급보를 받고 출동한 일제 헌병과 충돌했다. 진동 헌병 주재소는 마산 육군 중포병 대대에 병력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무장 헌병과 헌병 보조원 및 일본인 재향 군인 30여 명을 사동교 건너편에 배치하고, 시위대가 접근하자 총칼로 무자비한 진압을 단행했다. 그 결과 김수동(金守東)·변갑섭(卞甲燮)·변상복(卞相福)·김영환(金永煥)·고묘주(高昴住)·이기봉(李基鳳)·김호현(金浩鉉)·홍두익(洪斗益) 등 8명이 현장에서 순국했고, 22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검거돼 감옥에 투옥됐다. 이날의 시위는 1차 의거에 비해 훨씬 계획적이었지만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시위였던 만큼 희생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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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사당(마산합포구 잔전면)
삼진의거는 두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3월 28일 진동 고현 장터 1차 의거는 삼진 지방의 독립만세운동은 변상태(卞相泰)를 비롯해 권영조(權寧祚)·권영대(權寧大)·변상섭(卞相攝) 등의 주도로 1919년 3월 28일 진동면 고현리 장날에 전개됐다. 3월 28일 진동면 고현 장터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자 백승학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권영대(權寧大)의 독립 만세 선창으로 만세 운동을 전개했다. 고현장터 만세운동에 참여한 군중들은 500~600여 명으로, 함께 대한 독립을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며 진동면으로 향했다. 소식을 접한 일본 헌병대는 무력으로 시위 진압에 나섰다. 이날 시위에서는 11명이 검거되고 강제로 해산되고 말았다. 이에 굴하지 않고 2차 의거가 준비됐다. 변상태·권태용(權泰容)·권영대·변상헌(卞相憲) 등은 다시 동지들을 규합해 거사를 계획했다. 이들은 거사일을 4월 3일로 정하고 비밀리에 참가자 규합에 착수했다.4·3삼진의거에서는 변상태의 계획에 따라 양촌리 냇가 둑에 세워진 대형 태극기 아래로 인근 주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변상섭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변상태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만세 함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변상섭(卞相燮)이 만세를 선창하자 군중들도 함께 만세를 부르며 시위에 돌입했다. 이들은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진동리로 행진했으며, 거리에 대기하던 군중이 계속 합류해 그 숫자가 5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시위 행렬은 진북면 사동리의 다리 앞에 이르러 급보를 받고 출동한 일제 헌병과 충돌했다. 진동 헌병 주재소는 마산 육군 중포병 대대에 병력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무장 헌병과 헌병 보조원 및 일본인 재향 군인 30여 명을 사동교 건너편에 배치하고, 시위대가 접근하자 총칼로 무자비한 진압을 단행했다. 그 결과 김수동(金守東)·변갑섭(卞甲燮)·변상복(卞相福)·김영환(金永煥)·고앙주(高昻柱)·이기봉(李基鳳)·김호현(金浩鉉)·홍두익(洪斗益) 등 8명이 현장에서 순국했고, 22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검거돼 감옥에 투옥됐다. 이날의 시위는 1차 의거에 비해 훨씬 계획적이었지만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시위였던 만큼 희생이 컸다.이와 같은 1919년의 희생과 애국정신을 널리 전하고 순국하신 독립운동가들을 기리기 위해 2008년 12월 5일 본 사당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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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재 묘
이교재(1887-1933)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경상남도, 경상북도 일대에서 「독립선언서」을 배부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진주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가담,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로 임명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9월 임시정부 밀명을 받고 국내 잠입하여 경북 통영군 통영면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대구지방법원에서 5년의 징역형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후 상해로 망명하다가 신의주에서 붙잡혀 서울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동안 복역한 뒤 다시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약하였다. 그 후 김구(金九)의 위임장을 가지고 국내로 은밀히 들어와 군자금을 모집하거나 정보의 수집 및 전달, 밀정의 파악 등으로 맹활약중 일본경찰에 다시 붙잡혔다. 6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아 부산형무소에서 복역중 1933년 2월 옥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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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승 묘
조계승(1880~1943)은 1919년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광무황제의 장례에 참배 차 상경하였다가,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이찬영(李讚榮)·조병흠(趙丙欽)·박건병(朴建秉)·강기수(姜琪秀)·한관렬(韓灌烈) 등에 의하여 계획되었다. 그들은 안지호(安知鎬)와 연락을 취하여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는 한편 이 계획을 각지에 알렸다. 이때 그도 이 계획에 적극 찬성하여 3월 19일 정오, 읍내 봉성동(鳳城洞)에서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오후 2시, 3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은 경찰주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때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출동한 마산(馬山) 경찰서장 북촌(北村)과 현지 경찰들이 무력을 행사하려 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주재소로 들어가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또한 그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주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어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폐쇄해 놓은 군청 문을 부수고 청사 안으로 들어가서 군수 민인호(閔麟鎬)를 붙잡아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하였다. 그리고 시위군중은 등기소·우편소·일본인 소학교를 차례로 시위행진하여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때 조한국(趙漢國)·강상중(姜相中)이 마산의 일본군 수비대와 연락되는 전화선을 끊어 놓았는데, 전화가 불통되자 비상사태가 돌발한 것으로 짐작하고 출동한 마산 중포병대대 병력이 현지 경찰과 합세하여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도 이때 체포되어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