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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호섭 독립만세 고창유지비
이 유지비는 심호섭(1891~1935)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2년 8월 15일에 건립되었다. 심호섭 선생은 초대 수곡면장으로 재직 시 서울에서 3·1독립 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사재(私財)로 격문과 태극기를 만들면서 면 내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1919년 3월 22일 수곡면을 중심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이해 5월 20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으로 징역 10월 형을 언도받아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그 후 1926년경에는 일본의 동경(東京)·명고옥(名古屋) 등지를 무대로 친일 한국인단체인 상애회(相愛會)와 근로조합(勤勞組合)을 상대로 투쟁하여 민족의식과 항일애국정신을 고취하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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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치문 사적비
한치문(1851~1909)은 1908년 경남 합천(陜川)·산청(山淸) 일대에서 의병으로 활동했다. 1908년 전반기에 이차봉(李且奉)·이소봉(李小奉, 이차봉의 아우)·김화숙(金華淑)·김찬숙(金贊淑)·김우옥(金羽玉)·김응오(金應五)·장명언(張明彦) 등 삼가 출신 동료 10여 명과 함께 삼가·합천·단성(丹城)·산청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활동과 일제 관공서 습격 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또 이들은 산청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주재소를 방화하고 관급품(官給品) 일체를 노획하는 등의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삼가주재소 일경들에게 1908년 5월 12일 삼가군 감한면(甘閑面)에서 동료 5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일제 군경은 잔여 의병들을 체포하고자 5월 18일 삼가군 고현면(古縣面)으로 이들을 데리고 현지로 출동하였다. 이때 이들을 구하려는 의병들이 일제 군경을 공격하는 틈에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전원 피살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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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필동 공훈비
한필동(1888~1952)는 경남 합천군(陜川郡) 삼가면(三嘉面)에서 3월 1일 서울의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친구 윤규현(尹圭鉉)으로부터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제의받고, 이에 적극 찬성하여 각 면의 동지들은 규합하고 연락을 취하는 등 함께 거사 준비를 해나갔다. 한필동은 1919년 3월 3일 오후 1시경 삼가 시장으로 나가 ‘조선독립기(朝鮮獨立旗)’라고 쓴 깃발을 흔들며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군중을 격려하였다. 수많은 군중은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를 주도하였던 한필동은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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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발상지 기념비
이곳은 진주와 서부경남 3.1운동 발상지, 의논장소이자 순국지사 김재화 생장지이기도 하다. 김재화, 조응래, 심두섭, 박대업, 정용길 등은 고종황제의 인산(장례식)에 갔다가 서울의 3.1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감화를 받고 진주로 귀향했다. 이들이 품에 안고 온 것은 독립선언서와 격문, 이들은 김재화의 집인 집현면 하촌리(지금의 진주시 하촌동 하촌마을) 등에서 진주에서도 독립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그 시기와 구체적인 거사 방법을 논의했다. 서울에서 격문을 가져왔으나 ‘교유문’이라는 제목으로 새롭게 작성하고 구성해 수천장을 인쇄해 군중에게 살포했다. 교유문의 작성은 김재화가 맡았으며 독립선언서와 교유문의 인쇄는 천전리(천전동) 망경산에서 했다. 인쇄자는 심두섭, 박진환, 정준교 등 3명이었다. 김재화, 심두섭, 조응래, 이강우, 강상호, 강달영, 박진환, 정준교, 장덕익, 권채근, 한규상 등 애국청년들은 독립선언서와 격문 수천 장을 각 단체와 개인에게 배포했다. 마침내 3월 18일 장날을 기해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진주시내에 들어온 사람들은 옥봉동·평거동·천전리 등에서 시장으로 모여들었으며, 재판소 앞에서는 학생들이 선봉에 서서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이강우가 연단에 등장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오후 4시경 시위대가 도청 앞에 모였을 때 군중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 이날 이병홍, 강재순 등으로부터 촉발돼 봉기한 정촌면 5000여명의 군중도 합세하기 위해 진주읍을 향해 돌진했다. 진주 3·1운동의 주체 세력은 어느 특정 계층에 한정되지 않고 농민·학생 등 각계각층이 골고루 참여하였다는데 의의가 크다. 전국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노동독립대·걸인독립대·기생독립단 등의 시위도 있었다. 위와 같은 인물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본 비가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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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화 집 터
김재화(1892~1920)는 1919년 3월 18일의 진주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이강우(李康雨)·권채근(權采根)·강달영(姜達永)·박진환(朴進煥)·박용근(朴龍根)·강상호(姜相鎬) 등과 만나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3월 10일경,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제작하여 비밀리에 배부하였다. 이 사실을 눈치챈 일본군경은 삼엄한 경계를 하며 각 학교에 임시 휴교령을 내리고 타지방에 사는 학생들에게는 여비까지 주어 강제 귀향시키는 한편, 일본인 교사들로 하여금 학생들을 정탐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그는 다른 동지들과 함께 조직을 확대시켜 나가면서 광림학교(光林學校)의 악대원으로 활동하다가 졸업한 천명옥(千命玉)·박성오(朴星午)·김영조(金永祚)·이영규(李永圭) 등에게 시위행진 때의 주악을 부탁하였다. 3월 18일 오후 1시경, 이영규가 비봉산(飛鳳山)에 올라가 불어대는 나팔소리를 신호로 3개 지역에 분산되어 있던 시위대열은 악대를 선두로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하였다. 사태의 절박함을 느낀 일제는 소방대까지 출동시켜 물감과 오물을 뿌리며 곤봉으로 시위군중을 난타하였다. 오후 4시경, 경상도청 앞에 모인 시위군중은 3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저녁 무렵에 일제는 옷에 물감이 묻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검거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때 3백여 명이 체포되었는데, 결국 그도 함께 체포되었으며, 이해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병으로 형집행정지되어 1920년 3월 29일 출감하였으나 1920년 4월 15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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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봉 기념비
김희봉(1874~1928)은 3·1운동 때, 세칭 '파리장서사건'에 가담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김희봉은 창녕군 고암면 계팔의 유학자로서 경상도 유림(儒林)들로부터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의 서명을 받아 내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런데 1919년 3월 18일(음력)경 일본 헌병에 발각되면서, 그는 고암면 원촌 출신의 유학자인 조긍섭(曹兢燮)과 함께 대구 헌병사령부에 연행 구금되어 고초를 겪었다. 그 후 그는 3·1운동 1주기를 즈음하여 거족적인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계획하고, 1920년 2월 창녕 장날에 「통곡아팔역 동포 오주열강(慟哭我八域 同胞 五州列强)」이란 선언문을 작성, 낭독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붙잡혀 다시 고초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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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봉 집
김희봉(1874~1928)은 3·1운동 때, 세칭 '파리장서사건'에 가담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김희봉은 창녕군 고암면 계팔의 유학자로서 경상도 유림(儒林)들로부터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의 서명을 받아 내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런데 1919년 3월 18일(음력)경 일본 헌병에 발각되면서, 그는 고암면 원촌 출신의 유학자인 조긍섭(曹兢燮)과 함께 대구 헌병사령부에 연행 구금되어 고초를 겪었다. 그 후 그는 3·1운동 1주기를 즈음하여 거족적인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계획하고, 1920년 2월 창녕 장날에 「통곡아팔역 동포 오주열강(慟哭我八域 同胞 五州列强)」이란 선언문을 작성, 낭독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붙잡혀 다시 고초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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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혁 묘
강신혁(1879~1966)은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김창숙(金昌淑)·곽종석(郭鍾錫)·장석영(張錫英) 등이 작성한 파리장서에 유림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이라고 불리는 이 거사는 곽종석을 비롯한 영남유림과 김복한(金福漢)을 비롯한 호서유림 137명이 서명한 독립청원서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던 강화회의에 제출한 것이었다.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김창숙이 독립청원서를 가지고 중국 상해(上海)로 파견되었다. 마침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대표 김규식(金奎植)이 프랑스 파리에 파견되어 있는 사실을 확인한 김창숙은 김규식에게 독립청원서를 발송하고 강화회의에 제출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이 독립청원서는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런데 이 일은 경북 성주(星州)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1919년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 붙잡히는 바람에 발각되어 고초를 겪었다. 당시 창녕에서 덕곡서당(德谷書堂)을 창건하여 한학을 가르치던 강신혁 역시 유림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청원서에 서명하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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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호국공원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동리에 위치한 남산호국공원이다. 공원이 위치한 창녕 영산은 영남지역 최초의 3.1운동 발상지로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곳이다. 24인으로 구성된 결사대는 남산에서 개춘회라는 모임을 열어 군중을 규합하려고 하였으나 정보를 입수한 일경의 감시로 인해 하산하다가 제지하는 일경과 충돌하였다. 이에 많은 군중들이 가세하였고 시위대는 4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주민들은 태극기를 앞세워, 북과 징을 울리고 행진가를 부르며 영산읍으로 돌입하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남산호국공원 내에는 여러 3.1운동 관련 사적이 건립되었다.3.1독립선언서탑은 3.1절 83주년을 맞이하여 8만여 군민의 뜻을 모아 건립되었고, 영산 3.1 봉화대는 일제의 조국 침략에 항거하여 일어난 영산지역 애국지사 24명의 결사대가 1919년 3월 13일 이곳 남산봉에서 횃불을 들고 독립만세를 외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1967년 건립되었다. 영산 3.1독립운동 기념비 또한 24인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만세운동을 벌인 구중회, 김추은, 장진수 등을 기리는 사적이고, 결사대 서약서에는 24인의 결사대가 맹세한 서약서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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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시 집
김명시(1907~1949)는 일제강점기 상해한인청년동맹 부인부 책임, 중국공산당 한인지부 선전부 책임,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대 지휘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27년 6월 공산대학을 중퇴하고 상하이로 와서 중국공산청년단 상해한인지부에 가입하고 조직부 겸 선전부의 책임과 지부 책임직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 해 9월에는 상해한인청년동맹에 가입하여 부인부(婦人部) 책임에 취임하였다. 1928년 6월에 타이완, 필리핀, 베트남, 인도 등 각국 식민지 민족과 중국인 운동가 300여명과 협의하여 동방피압박민족반제자동맹주비회를 조직하고 위원으로서 활동하였다. 1929년 10월경에는 홍남표와 함께 만주로 가서 한국인 당원들을 중국공산당에 가입시켰다. 재만조선인반일본제국주의대동맹을 조직, 집행위원이 되었으며『반일전선』을 제작하였다. 1930년 5월 30일 자정에 300여명의 한인 무장대가 하얼빈 시내의 기차역과 경찰서, 일본영사관을 공격해 큰 타격을 주었다. 김명시는 홍남표와 함께 상하이로 돌아와 중국공산당 한인지부로 전속되어 선전부 책임을 맡아 활동하였다.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제국주의 타도와 한국 독립을 목적으로 상해한인반제동맹을 조직하였다. 1932년 3월에 인천에 거처를 마련하고 각종 전단과 함께 등사하여 비밀리에 배포하였고 인천지역 공장의 여성노동자들을 교육하였다. 그러나 몇 달 후 조선공산당 재건 조직운동이 발각되어 1932년 5월 신의주에서 체포,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1933년 12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년을 언도받고 1939년 신의주형무소에서 만기 출옥하였다. 1939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편한 이후 텐진과 베이징 등 일본 점령 지구에 파견되어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때 김명시는 ‘여장군’ ‘백마 탄 여장군’으로 불렸다. 1945년 12월 22일에 개최된 조선부녀총동맹 결성대회에 참가하여 국내외 여성운동의 실상을 알리고 조선부녀총동맹의 선전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7년 6월 전라도에서 발생한 우익테러사건과 관련해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조사단원의 일원으로 활약했으며 민주여성동맹 대표로 미군정청을 방문하여 미군정 사령관 하지(John Reed Hodge) 중장에게 반탁시위항의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2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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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 순교기념동판
주기철(1897~1944)는 기독교 장로교에 입교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이승훈(李昇薰)이 설립한 오산학교(五山學校)를 1916년에 졸업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창원군 웅천면(熊川面)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36년에 길선주(吉善宙)목사의 후임으로 평양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의 목사로 부임하였다. 이때는 일제가 교회와 기독교 신도들에게 궁성요배(宮城遙拜)와 신사참배(神社參拜)를 본격적으로 강요하고 있던 때이었다. 그는 기독교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계명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살아있는 일본왕이나 그 시조를 우상화하는 것은 그릇된 일이므로 〈황실요배 및 신사참배 거부안〉을 제출하여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해서 종교적 항일을 하였다. 1938년 2월에 일제의 탄압에 굴복하여 장로교 평안북도 노회(老會)가 신사참배를 결정하자 이에 반대하여 투쟁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 3개월간 구금되었다. 1938년 9월에 일제의 강요와 탄압에 굴복하여 전국 장로회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자 그는 이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일사각오(一死覺悟)」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고 신사참배 거부를 교도들에게 호소하다가 다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하고 장기 구속되었다. 가석방된 그는 조금도 굽히지 않고 다시 교도들에게 신사참배 거부를 설교하였다. 1940년 7월에 일제는 그를 소위 불경죄 및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실형을 선고하였으며 그는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4월 21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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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신학교 표지석(마산합포구 상남동)
창신학교 표지석은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상남동 제일문창교회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마산 최초의 민족 사랍학교였던 창신학교가 있었던 자리이다. 학교는 멸실되고 터만 남았다. 1908년 9월 호주 선교사인 손안로 목사(초대 교장)와 남하 이승규 장로의 선구적인 활동으로 사립창신학교를 개교하였고, 1909년 8월 남.여공학 사립 초등과 창신학교가 설립인가를 받아 1911년 3월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1939년 3월 초등과 제28회를 마지막으로 같은 해 7월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일제의 탄압에 의하여 폐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