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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43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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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기 항일구국활동 기념비 92
신용기(1901-1948), 이명은 신철(辛鐵)이다. 1922년 노령 이르쿠츠크에서 조선독립과 신사회 건설을 위하여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였고, 이듬해 12월 블라디보스톡에서 서울로 들어와 1924년 신흥청년동맹 집행위원, 1926년 북풍회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같은 해 8월 경남 마산의 사각동맹 회원들에게 신사상을 전파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1928년 체포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38년에는 의사면허를 얻었고, 해방 후에는 잡지사를 경영했으며, 1945년 조선인민당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정치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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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환수 기념비
서환수(1888-1940)는 1930년 8월 28일, 유쾌동(柳快東)과 함께 대구 남성정(南城町) 중외일보 대구지국 앞에서 29일이 경술국치일인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독립사상을 고취하기로 하고,유쾌동이 격문작성을, 서환수는 게시하는 일을 맡기로 하였다. 서환수는 29일 새벽 3시경부터 5시경까지 봉산정(鳳山町) 암정서적점(岩井書籍店)·백종기(白鍾基) 집·덕산정 야원질옥(野原質屋)·남성정 대구양기소(大邱洋譏所)·대화정(大和町) 곡물시장·원정(元町) 삼원재목점(杉原材木店)·달성공원 등 8곳의 전봇대에 격문 1매씩을 각각 부착하였다. 이로 인해 서환수는 붙잡혀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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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종 묘
이석종(1871-1919)은 거창읍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20일 가조면 장기리(加祚面場基里)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주동하였던 김병직(金秉直)·어명준(魚命俊) 등이 일본 헌병에게 구타당하여 반죽음 상태로 거창 일본군헌병대로 압송된 사실이 전해지면서부터 계획되었는데, 이에 3월 21일 오문현(吳文鉉)·신병희(愼炳禧)·어명우(魚命佑)·어명철(魚命喆)·이병홍(李秉洪)·김 호(金濩) 등 6인을 추진위원으로 선출하여, 이날 가북면(加北面)·가조면 일대에 이 계획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이 사전에 누설되어, 22일 아침 거창 주둔 일본군 헌병대가 주동인물을 체포하여 취조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이석종은 가조면·가북면민 3천여명과 함께 이날 오후 2시 30분경, 몽둥이를 가지고 장기리 만도정(晩嶋亭) 앞에서 대형 독립기를 세운 후, 주동인물의 석방을 요구하며 독립만세를 외치며 거창읍으로 시위행진하였다. 일본군 헌병대가 공포를 발사하며 해산을 명했지만, 시위군중은 함성을 지르며 돌진하였다. 이때 이석종은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 (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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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종석 다전기적비
곽종석(1846-1919)은 영남유림(嶺南儒林)으로서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이 되고, 1903년에는 비서원승(秘書院丞)에 특진되었으며, 이어 참찬(參贊)으로 시독관(侍讀官)을 겸하였다. 1905년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오적신(五賊臣)을 참수할 것과 열국공관(列國公館)에 호소할 것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3.1만세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에 유독 유학자들만이 빠지게 된 것에 통분하여 한국 유림들이 조국의 독립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 진정한 의사를 직접 파리강화회의에 전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파리장서에 137명의 유림대표로서 이에 서명하고, 김창숙(金昌淑)으로 하여금 상해(上海)로 보내게 하였고, 이후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되었다. 그러나 사실이 탄로나게 되어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고,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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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종석 유적비
곽종석(1846-1919)은 영남유림(嶺南儒林)으로서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이 되고, 1903년에는 비서원승(秘書院丞)에 특진되었으며, 이어 참찬(參贊)으로 시독관(侍讀官)을 겸하였다. 1905년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오적신(五賊臣)을 참수할 것과 열국공관(列國公館)에 호소할 것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3.1만세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에 유독 유학자들만이 빠지게 된 것에 통분하여 한국 유림들이 조국의 독립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 진정한 의사를 직접 파리강화회의에 전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파리장서에 137명의 유림대표로서 이에 서명하고, 김창숙(金昌淑)으로 하여금 상해(上海)로 보내게 하였고, 이후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되었다. 그러나 사실이 탄로나게 되어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고,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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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옥 묘
전사옥(1915-1952)은 1931년 시험을 거부하는 백지동맹(白紙同盟)을 주도했다가 근신 처분을 받았고, 이후 사회사상연구단(社會思想硏究團)에 몸담았다. 1933년 11월, 장준(張駿) 등과 사회과학 연구를 목적으로 독서회를 조직했으며, 전사옥은 연락부를 맡았다. 이로 인해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았으며, 1943년 여운형(呂運亨)이 조직한 조선민족해방연맹(朝鮮民族解放聯盟)과 1944년 이를 확대 조직한 조선건국동맹(朝鮮建國同盟)에서 청년부문을 맡았다.정부는 201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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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명철 유적비
어명철(1865-1923)은 애국지사 김병직(金秉直)·어명준(魚命俊)이 검거되자 분노를 느끼고 거창읍 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으며, 22일 거창읍 장날을 기하여 거사하기로 결정하였다. 어명철은 오문현(吳文鉉)·신병희(愼炳禧)·어명우(魚命佑)·이병홍(李秉洪)·김호(金濩) 등과 함께 대표가 되어 주민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는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밖으로 정보가 누설되어 일제헌병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있던 중 1919년 3월 22일 거창읍 가조·가북면의 3,000여 만세시위대에게 구출되어 군중과 합세하여 거창읍으로 행진하고,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주도하다가 일헌병에 붙잡혀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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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성 유적비
정재성(1863-1941)의 자는 취오리고 호는 구재와 동리(東里)이며, 일명은 정환규, 정환성이다. 정재성은 곽종석 문하에 있었으며, 곽종석의 수제자였다. 1900년 경상부교관 후보로 추천되었으나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을 연구하다가, 1904년 정릉참봉, 영희전참봉, 경기전참봉 등을 지냈으나 정국이 어지러움을 알고 그만 두었다. 이후 국채보상운동에 의연금을 모집하여 서울의 의무소로 보내고, 국민회와 일본인 통감에게 서찰을 보내 일제의 강압을 성토하는 등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저서로 '의부아림죽지사 68장'등이 수록된 문집 14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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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독립만세 기념탑
기미독립만세 기념탑은 경남 거창에 있으며, 거창 가조면에서 일어난 3.1운동을 기리고 그 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1981년에 건립된 탑이다. 거창 3.1독립만세운동은 김병직(金秉直: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어명준(魚命俊: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등의 주도로 1919년 3월 20일 시위를 전개하였으며, 일본헌병분견소를 파괴하고 일본군과 난투를 벌이다 체포되었다. 김관묵(金寬默: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정대필(鄭大弼: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등 애국지사들은 22일 주민 3,000여명과함께 장기리 만학정앞에서 대형 태극기를 앞세운 후 독립만세를 외치며 거창읍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용산 일본군 헌병대의 무차별 발포로 4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으며 주동인사 10여명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기미독립만세 기념탑은 근처에 장기 버스정류장이 있으며, 약 200m 떨어져있어 도보로 3분 정도 소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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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공원 만세정
경남 거창에 위치한 만세정은 삼일공원 안에 있으며, 3.1 대한독립만세의 우국정신을 기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만세정이 위치한 삼일공원은 가조장터 3.1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공원이다. 경상남도 거창 지역의 3.1 운동은 지역 유림이 주도하여 시작되었는데 그 시작점이 바로 가조장터(가조면)였다. 1919년 3월 19일 김호(金浩), 오문현(吳文鉉), 어명우(魚命佑), 이병홍(李秉洪), 김호(金濩), 신병희(愼炳禧), 김익동(金翼東), 김관묵(金寬黙) 등 지방 유지 50여 명이 가조면 석강리 정자나무에 집합하여 비밀회의를 가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김병직(金秉直)[가북면 용산리]과 어명준(魚命俊)[가조면 동례리]은 1919년 3월 20일 가조 장날에 거사를 하기로 계획하고 비밀리에 동지들을 규합하기 시작하였고, 장꾼들 500여 명이 만학정 앞에 모인 가운데 시장 중앙에서는 태극기를 든 채 만세 선창이 시작되었다. 22일에 일본 헌병이 주동 인물들을 끌고 가서 취조했으며, 주민 3,000여 명이 만세 시위를 하자 해산 명령을 내려졌다. 시위 행렬이 거세지자, 지역민과 대치하였고, 대치 과정에서 일본 헌병이 총격을 가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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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조장터 3.1만세운동 시발지 표지석
가조장터 3.1만세운동 시발지 표지석은 1919년 3월 22일 오후 2시경 가조.가북 주민 3천여 명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처음 시작한 곳으로 선열들의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고자 세운 표지석이다. 가조시장(加祚場市)는 조선시대부터 4일과 9일마다 5일장이 열리던 곳이었다. 가조장터(가조면) 3.1만세운동의 전개과정은 다음과 같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 공원 육각정에서 시작된 3·1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경상남도 지방은 지역 유림이 주도하고 지역민이 참여했는데, 거창은 가조 장터 만세운동이 시작점이 되었다. 1919년 3월 19일 김호(金浩), 오문현(吳文鉉), 어명우(魚命佑), 이병홍(李秉洪), 김호(金濩), 신병희(愼炳禧), 김익동(金翼東), 김관묵(金寬黙) 등 지방 유지 50여 명이 가조면 석강리 정자나무에 집합하여 비밀회의를 가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김병직(金秉直)[가북면 용산리]과 어명준(魚命俊)[가조면 동례리]은 1919년 3월 20일 가조 장날에 거사를 하기로 계획하고 비밀리에 동지들을 규합하기 시작하였고, 장꾼들 500여 명이 만학정 앞에 모인 가운데 시장 중앙에서는 태극기를 든 채 만세 선창이 시작되었다. 22일에 일본 헌병이 주동 인물들을 끌고 가서 취조했으며, 주민 3,000여 명이 만세 시위를 하자 해산 명령을 내려졌다. 시위 행렬이 거세지자, 지역민과 대치하였고, 대치 과정에서 일본 헌병이 총격을 가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가조장터 3.1만세운동 시발지 표지석은 장기 마을회관 앞에 있으며, 근처에 장기 버스정류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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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종석 신도비
곽종석(1846-1919)은 영남유림(嶺南儒林)으로서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이 되고, 1903년에는 비서원승(秘書院丞)에 특진되었으며, 이어 참찬(參贊)으로 시독관(侍讀官)을 겸하였다. 1905년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오적신(五賊臣)을 참수할 것과 열국공관(列國公館)에 호소할 것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3.1만세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에 유독 유학자들만이 빠지게 된 것에 통분하여 한국 유림들이 조국의 독립을 간절히 원하고 있는 진정한 의사를 직접 파리강화회의에 전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파리장서에 137명의 유림대표로서 이에 서명하고, 김창숙(金昌淑)으로 하여금 상해(上海)로 보내게 하였고, 이후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되었다. 그러나 사실이 탄로나게 되어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고,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곽종석선생 신도비는 면우 곽종석 선생을 추모하고자 유림 제자들이 1921년에 설립한 다천서당에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