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검색
TOTAL. 431건
-
여세병 추모비
여세병(1897~1971)은 1919년 3월 14일의 의령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서울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구여순(具汝淳)과 그의 이종동생 이화경(李華卿)에 의해 계획되었다. 그들은 청년 유지들인 정용식(鄭容軾)·최정학(崔正學)·이우식(李祐植)·김봉연(金琫淵) 등과 만나, 의령읍 장날인 3월 14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수백매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인근지역 주민들에게 이 계획을 알리고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 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 찬성한 그는, 3월 14일 의령장터에서 많은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의령공립보통학교 학생 3백여명과 인근의 주민들도 모여들어 시위군중은 점차 3천여명으로 늘어났다. 시위군중은 장터와 읍내를 시위행진하고 경찰서 앞에 이르러 독립만세를 외친 뒤 자진 해산하였다. 이튿날 그는 다시 의령향교 앞에 모인 1천 5백여명의 시위군중과 경찰서와 군청을 시위행진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한편, 이화경·이원경(李源卿)·최숙자(崔淑子)·강순이(姜順伊) 등의 주동 하에 여성들도 궐기하였다. 그러나 일본군과 현지의 일본 경찰이 총검을 휘두르며 시위군중을 위협하여 해산시키고,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그도 이때 체포되었으며, 이해 4월 28일 부산(釜山)지방법원 진주(晋州)지청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징역 1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이우식 시혜비
이우식(1891~1966)은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 사건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호는 남저(南樗)이며, 일본에 건너가 동경 쇼쿠영어학교와 도요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구여순(具汝淳)·최정학(崔正學) 등 동지들과 모의하고 의령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주동한 다음 상해로 망명하였다. 1920년 귀국하여 안희제(安熙濟)·김효석(金孝錫) 등과 함께 백산무역주식회사(白山貿易株式會社)를 설립, 경영하면서 비밀리에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였다. 1926년 서울에서 시대일보사(時代日報社), 1927년 중외일보사(中外日報社)를 설립, 사장으로 일하면서 민족의식고취에 노력하였다. 1929년 10월 조선어연구회의 조선어사전편찬회에 가입하여 재정을 지원하였다. 1935년부터는 이인(李仁)·김양수(金良洙)·장현식(張鉉植) 등과 조선어사전편찬의 촉진을 위한 비밀후원회를 조직하여 거액의 재정지원을 하였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잔혹한 고문을 받고, 1945년 1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의 선고를 받아 석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 2년 2개월의 옥고를 겪었다. 광복 후에는 조선어학회의 재정이사로 선임되었다.1963년에 한글공로상을 받았고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3.1운동 유적지 안내비
삼일운동유적지 안내비는 의령군 화정면 덕교리 돌담마을 입구 덕원정에 위치해있다. 이 자리는 1919년 3월 20일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만세운동을 부른 거점이다.화정면(당시 상정면) 이곳에서 1919년 3월 20일 밤 9시 조균구 주도하에 면사무소를 습격하는 등 만세를 부르다가 왜경으로 인해 조균구, 조두환, 김구현, 조균수, 김응현, 박용주, 심상렬 등이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으 받았다. 재판에서 동년 6월 21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각각 8개월의 실형을 받고 모두 대구형무소로 이송되어 옥고를 치렀다. 독립운동가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이 일대를 덕교소공원을 조성하고 팔각정을 세워 덕원정이라 이름 붙였고 삼일운동유적지 비석을 건립했다.
-
조재학 기념비
조재학(1861~1943)은 최익현의병부대의 소모 오위장으로 활약한 의병이다. 1906년 김태원(金泰元) 등과 같이 태인(泰仁)·진안(鎭安) 등지에서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한때 최익현 의진의 소모 오위장(召募 五衛將)을 지냈으며, 그후 면암 의진은 순창에서 적에게 패하고 주장들이 모두 체포 유배되었다. 1913년에는 돈헌 임병찬(遯軒 林炳瓚)과 함께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를 조직하여 활약하였다. 1914년에 고종황제의 밀조를 받았으며 독립의군부의 조직이 적에게 탐지되어 울릉도로 유배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만세운동에 가담하였으며 영남유림이 중심이 된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유림대표로 서명하였다. 1921년에는 조선고사 연구회(朝鮮古史 硏究會)를 발기하여 동지를 규합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조재학 묘
조재학(1861 - 1943)은 최익현의병부대의 소모 오위장으로 활약한 의병이다.1906년 김태원(金泰元) 등과 같이 태인(泰仁)·진안(鎭安) 등지에서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한때 최익현 의진의 소모 오위장(召募 五衛將)을 지냈으며, 그후 면암 의진은 순창에서 적에게 패하고 주장들이 모두 체포 유배되었다.1913년에는 돈헌 임병찬(遯軒 林炳瓚)과 함께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를 조직하여 활약하였다.1914년에 고종황제의 밀조를 받았으며 독립의군부의 조직이 적에게 탐지되어 울릉도로 유배되었다.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만세운동에 가담하였으며 영남유림이 중심이 된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유림대표로 서명하였다.1921년에는 조선고사 연구회(朝鮮古史 硏究會)를 발기하여 동지를 규합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강상호 묘
강상호(1887~1957)의 이명은 강경호이다. 1919년 3월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에 고무된 그는 이강우(李康雨)·김재화(金在華)·권채근(權采根)·강달영(姜達永)·박진환(朴進煥)·박용근(朴龍根) 등의 동지와 경남 진주(晋州)에서도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로 결의하고 시일과 구체적인 거사방법을 논의하였다. 3월 10일경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작성하여 비밀리에 배포하였다. 일제는 각지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자 진주지방의 만세시위에 대비하여 경계를 더욱 삼엄히 하고 있던 중 이상한 기미를 눈치채고 각 학교에 휴교를 명하고 교사들로 하여금 학생들을 엄중 정탐하도록 하였다. 그는 3월 18일 진주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정준교(鄭準敎) 등과 공원에서 만세시위를 개시하였고 이로 인해 강상호는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출옥 후에도 진주 형평사(衡平社) 조직을 주도하고 1924년 4월 25일 개최된 형평사 발기총회에서 임시의장 및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신간회 진주지회에서는 간사와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사립 일신고등보통학교(一新高等普通學校)의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활발한 사회운동을 펼쳤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진주항일투사추모비
진주항일투사추모비는 진주, 진양 출신 항일투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충효예 실천운동본부 진주지회에서 2002년에 세운 비이다. 매년 신년, 3.1절, 광복절에 후손들과 사회단체, 청년 학생들이 애국선열에 대한 공훈을 기리며 우리고장 출신 항일독립투사들의 애국, 애족, 애향정신과 자주 독립의 의지를 되새기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건립되었다.
-
박호종 추모비
박호종(1905~1940)은 진주제일보통학교(晋州第一普通學校) 재학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1926년 경에는 일본 대판으로 건너가 직공으로 일하면서 노동운동에 투신하였다. 1930년 경, 귀국한 그는 고향에서 야학회를 설립하고 농민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7월 일제가 만주를 침공하며 안으로는 식민지 통치체제를 더욱 강화해 가는 상황에서, 그는 사회주의 사상에 입각한 농민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1932년 9월 진주지역에서는 송기호(宋畿鎬)·조삼수(趙三壽) 등이 주동이 되어 조선공산주의자 진주지방협의회가 결성되었고, 그 산하에 농민위원회 . 노동위원회 . 학생위원회 등이 비밀리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때 박호종은 농민위원회에 가입하였으며, 금산면(琴山面)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박호종은 비밀결사 조직을 위해 금산면에서 농민을 규합한 후, 진주읍내 남강(南江)에서 회합을 가졌다. 또 같은 해 11월 그가 사재를 털어 설립한 인쇄소에서 항일 격문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붙잡혀 7월 여의 옥고를 치른 끝에 1933년 7월 31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하장환 기념비
하장환(1874~1928)은 1926년 1월 김창숙(金昌淑)과 함께 군자금모집 활동을 하였다. 북경(北京) 등지에서 활동하던 김창숙이 귀국했던 목적은, 내몽고(內蒙古) 지방의 미간지와 황무지 20만 정보를 매입하여 이상촌(理想村)을 건설할 계획아래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즉 만주 지역의 한인들을 집결시켜 개간사업을 일으키고, 그 수익금으로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여 군대를 양성하는 둔병식(屯兵式)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10년 동안의 실력양성을 통하여 독립을 달성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이때 필요한 군자금은 국내에서 조달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하장환은 곽종석의 문집(文集) 출판을 위해 서울에 머물러 있던 중 김창숙을 만나 그와 같은 임무를 맡았다. 그리하여 경남 일대의 유림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군자금 모집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군자금 모집활동 중 하장환은 동지들과 함께 붙잡혀 9개월 여의 옥고를 치렀다. 이 기념비는 일암 하장환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02년 11월에 건립되었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하남식 기적비
하남식(1888~미상)은 1908년 음력 1월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임태준의진(林泰俊義陣)에 들어가 같은 해 음력 3월 서울 동대문 밖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고, 이후 연기우 의진(延基羽義陣)에 참여하여 경기도 마전(麻田)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08년 음력 1월 25일 김성인(金成仁)의 권유로 광주 방화교(訪花橋)에서 임태준의진에 들어가 같은 해 음력 3월 불암동(佛岩洞)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이어 1908년 음력 3월 20일경 마전(麻田)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1908년 9월 15일 경성공소원(京城控訴院)에서 이른바 내란죄(內亂罪)로 유형(流刑) 10년을 받았다. 1910년 대사령(大赦令)에 의하여 풀려났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하익봉 독립운동현창비
하익봉(1926~1945)은 1943년경 경남 진주군 진주공립중학교 재학 중 박노근(朴魯瑾), 김상훈(金相勳), 강필진(姜必鎭) 등과 광명회(光明會)를 조직하였다. 광명회는 독서써클로 우리 역사를 공부, 토론하고 일제에 저항할 수 있는 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한 단체였다. 이들은 평소 절친한 친구 사이로, 특히 박노근의 아버지와 하익봉의 삼촌이 독립군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졸업 후에는 모두 독립군에 가담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던 중 하익봉은 1944년 9월 진주공립중학교 학생들과 함께 진해비행장 건설공사 현장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다. 이들은 천막으로 지은 막사에서 공동숙식을 하며 온갖 중노동에 시달렸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하익봉은 학생들에게 우리말 사용을 생활화할 것과 독립군의 활약상을 전파하는 등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활동하다가 9월 23일 동지들과 함께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었다. 하익봉은 진해헌병대 영내에서 약 40일 동안 구금된 체 학교 내외에 퍼져 있는 항일운동과 조선독립을 위한 써클활동의 사실유무 등의 자백을 강요받으며 갖은 고문을 당하였다. 1944년 11월 7명의 동지들과 함께 군용트럭편으로 부산지검에 송치되어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부산형무소에 투옥되었으나 고문의 후휴증으로 1945년 4월 28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매호서당(이수안 사당)
매호서당(梅湖書堂)은 이수안의 학식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한 곳이다. 1977년에 옛날 문하에서 수학한 여러 제자들이 이수안 선생의 유풍을 기리기 위해 마호(麻湖)의 옛 유지에 매호서당(梅湖書堂)을 건립하고 매년 중춘(仲春)에 차례를 거행하며 그의 학덕을 추모하고 있다고 한다. 이수안(1859 - 1929)는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서 서명하였다.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이라고 불리우는 이 거사는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한 호서유림과 곽종석(郭鍾錫)을 중심으로 한 영남유림 137명이 참여하였다. 파리장서의 요지는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광무황제(光武皇帝)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김창숙(金昌淑)을 파리로 파견하고자 하였으나 직접 가지 못하고 이 문서를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했으며,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런데 이 일은 경상북도 상주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1919년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붙잡히는 바람에 발각되었다. 이로써 이수안도 일경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일제는 이들 유림이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었으므로 민족적 감정이 더욱 번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