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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효제 행적비
안효제(1850~1916)는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을 지냈다. 1895년 8월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상경하여 당시 참판(參判)이었던 최익현(崔益鉉)과 만나 국권회복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한국이 강점되자 세상에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입산(入山)하였다. 동년 11월 일제는 이른바 은사금을 주어 그를 회유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를 거절하고 대한의 신하로서 나라가 망하였는데도 죽지 못한 것이 죄스럽다고 하고 거부하여 창령경찰서에 구금되었다. 1912년 아우 안창제(安昌濟)의 뒤를 이어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운동을 하다가 병사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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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제 사적비
안창제(1866~1931)는 일제강점기 만보산사건과 관련된 독립운동가로 안효제의 동생이다. 1894년 갑오경장의 조서가 내려가자 갑오토역(甲午討逆) 상소를 올리고 금부옥(禁府獄)에 감금당했으며,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3도유생을 대표하는 유약소원(儒約所員)으로 연이어 3번이나 소(疎)를 올려, 오적을 참하기를 청하였으나 회답을 받지 못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한국이 강점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단을 조직하고 단장 박장호(朴長浩)와 협력하여 결사대를 파견하여 일경과 밀정을 다수 사살하였다. 1919년에는 중국측에서 조직한 전국유교연맹 동삼성(東三省)학회 분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31년 8월 13일 만보산(萬寶山) 사건으로 일가족이 장학량(張學良)의 패잔병에게 총살당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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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제 추모비
안희제(1885~1943)은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7년에 동래의 구포에 구명학교와 의령군 의령면에 의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908년에는 고향인 의령군 입산리(설뫼)에 창남학교를 설립하고 애국청소년들을 양성하였다. 1909년 10월에는 서상일(徐相日) 등 8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비밀 청년결사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창설하여 활동하였다. 대동청년당은 안창호 계열의 지하 청년단체로서 1945년까지 일제에 발각되지 않았다. 1914년에는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했다가 3 1운동 직후 이를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장하였다. 백산상회는 단순한 상업기관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연락기관이 되어 활동했으며,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는 기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1927년에는 이시목(李時穆) 등 동지들과 함께 「자력사(自力社)」를 조직하여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였다. 1942년 11월에 일제는 대종교가 독립운동조직이라고 보고 만주와 국내에 있는 대종교 지도자 윤세복(尹世復)이하 21명을 체포하였다. 이 사건이 대종교에서 임오교변(壬午敎變)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임오교변 때 일제의 고문으로 10명의 대종교 지도자가 순국했는데, 안희제도 그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안희제는 일제에게 체포되어 대종교의 독립운동에 대한 장기조사를 받다가 잔혹한 고문으로 1943년 8월에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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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만준 묘
허만준(1925~1984)은 일본 대판 중학교에 재학중이던 1941년 9월에 학우 전영수(田永秀)·남상순(南相淳) 등과 함께 일본인의 한인학생 및 재일동포에 대한 민족차별에 분개하고 항일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충성회(忠誠會)를 조직하였고, 1942년 12월까지 30여차례의 모임을 가지며 항일활동을 펴 나갔다. 동회의 운동방략으로는 고향에 야간사숙을 열고 수시로 귀국하여 민중계몽에 힘쓰는 한편 국제정세를 주시하고 일·소가 개전하면 즉시 귀국하여 국내의 청소년층을 지도하여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들은 독립운동이 실패하였던 것은 실력이 결핍되었기 때문이라 분석하고 실력양성에 힘을 쏟았으며, 안중근(安重根)과 같은 선각자의 충정을 생각하며 항일정신을 길러갔다. 그러던 중 1942년 12월에 충성회의 활동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1943년 1월에 붙잡혔다. 붙잡힌 후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4년 2월, 대판지방재판소에서 기소유예처분을 받았다.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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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식 묘
이우식(1891~1966)은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 사건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호는 남저(南樗)이며, 일본에 건너가 동경 쇼쿠영어학교와 도요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구여순(具汝淳)·최정학(崔正學) 등 동지들과 모의하고 의령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주동한 다음 상해로 망명하였다. 1920년 귀국하여 안희제(安熙濟)·김효석(金孝錫) 등과 함께 백산무역주식회사(白山貿易株式會社)를 설립, 경영하면서 비밀리에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였다. 1926년 서울에서 시대일보사(時代日報社), 1927년 중외일보사(中外日報社)를 설립, 사장으로 일하면서 민족의식고취에 노력하였다. 1929년 10월 조선어연구회의 조선어사전편찬회에 가입하여 재정을 지원하였다. 1935년부터는 이인(李仁)·김양수(金良洙)·장현식(張鉉植) 등과 조선어사전편찬의 촉진을 위한 비밀후원회를 조직하여 거액의 재정지원을 하였다. 1942년 1월 이극로(李克魯)·이윤재(李允宰) 등과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조선양사원(朝鮮養士院)을 조직하려다 실패하였다.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잔혹한 고문을 받고, 1945년 1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의 선고를 받아 석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 2년 2개월의 옥고를 겪었다. 광복 후에는 조선어학회의 재정이사로 선임되었다.1963년에 한글공로상을 받았고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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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 3.1독립운동기념비
의령 3.1독립운동기념비는 의령군 의령읍 중동리 의병박물관옆에 위치해있다. 3.1독립운동기념비는 의령군민의 독립운동유적지 보전사업의 하나로 확정되어, 나라사랑 겨레 사랑의 높은 얼을 오늘에 되살리고 후손에게 전하고자 건립된 비이다. 1919년 3월 1일 파고다에서 독립선언문이 공포되고 독립만세의 함성이 의령에도 전해지자 기미년 3월 14일 의령 장날 2천여 군민이 대한독립만세 운동을 벌였고 15일과, 16일에도 의령군민과 의령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만세 시위를 벌였다. 구여순은 서울에서 사촌의 양말 속에 독립선언서를 감춰 돌아왔고, 동지를 규합해 3월 14일 의령읍 장날에 만세운동을 펼쳤다. 독립선언서는 용덕면사무소 서기들의 도움을 받아 등사했다. 3월 15일에는 주동 인물들이 검거되자 다시 수백의 군중들이 경찰서로 몰려가 석방을 요구하는 등 의기가 꺾이지 않았다.의령읍 만세운동에 참가한 이들은 15일 부림면 신반, 16일에는 지정면 봉곡장터, 17일에는 칠곡면으로 만세운동을 이어갔다. 만세운동은 인근으로 계속 퍼져나갔다. 18일 창녕군 남지리와 진주읍, 합천군 삼가리에서도 만세운동의 불길은 계속됐다. 현재 화정면인 상정면 덕교리에서도 20일에 만세운동이 펼쳐지는 등 의령 전역으로 만세운동이 번졌다. 의령에서 벌어진 3·1독립만세운동에는 지역유지와 학생, 민중, 면서기와 자본가 등 다양한 이들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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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병우 추모비
남병우(1859 - 1926)은 일제가 식민지배체제의 물질적 기반을 마련하고 한국인의 토지를 수탈하기 위하여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에 항거하여 투쟁하다가 옥고를 치렀다. 경남 의령군의 경우 정곡면 중교동의 동쪽 일대의 토지는 주민들이 개간을 끝내고 지세(地稅)를 납부하며 경작해오던 민유지(民有地)였다. 그러나 일제는 농촌관행을 무시한 채 이 지역을 인근의 토지와 함께 국유지로 편입하여 조선농업주식회사에 불하하였고 1914년 8월에는 임시토지조사국원(臨時土地調査局員)을 파견하여 해당지역의 측량을 강행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된 전중진(田中鎭), 남병우, 남상순(南相舜), 이진우(李震雨) 등의 지역 유지들은 토지측량이 실시되면 모두 국유지로 편입되어 조선농업주식회사의 관아로 이관되고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할 것이 명백하므로 토지측량을 극력 저지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리하여 700여 명의 주민을 집결하여 해당 '토지측량은 동민의 권리를 무시한 압제의 작업이니 단연코 방해해야 한다'고 취지를 설명하여 동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이들은 8월 26, 27일의 이틀에 걸쳐 경찰관의 입석하에 진행된 임시토지조사국원의 토지측량을 방해하였고, 이를 안내하던 박기양(朴璂陽)을 구타 응징하는 등 격렬하게 항쟁하였다. 남병우는 이 일로 인하여 일경에 체포되어 1915년 2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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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상순 추모비
남상순(1878~1949)는 일제가 식민지배체제의 물질적 기반을 마련하고 한국인의 토지를 수탈하기 위하여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에 항거하여 투쟁하다가 옥고를 치렀다. 경남 의령군의 경우 정곡면(正谷面) 중교동(中橋洞)의 동쪽 일대의 토지는 주민들이 개간을 끝내고 지세(地稅)를 납부하며 경작해오던 민유지(民有地)였다. 그러나 일제는 관행을 무시한 채 이 지역을 인근의 토지와 함께 국유지로 편입하여 조선농업주식회사에 불하하였고 1914년 8월에는 임시토지조사국원(臨時土地調査局員)을 파견하여 해당지역의 측량을 강행하였다. 당시 정곡면장으로 재직 중이던 남상순은 이러한 사실을 알게되자 전중진(田中鎭)·남병우(南炳祐)·이진우(李震雨) 등의 지역 유지들과 함께 토지측량이 실시되면 모두 국유지로 편입되어 조선농업주식회사의 관할로 이관되고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할 것이 명백하므로 토지측량을 극력 저지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리하여 700여 명의 주민을 집결하여 해당 토지측량은 동민의 권리를 무시한 압제의 작업이니 단연코 방해해야 한다고 취지를 설명한 후 8월 26, 27일의 이틀에 걸쳐 경찰관의 입석하에 진행된 임시토지조사국원의 토지측량을 방해하였다. 박기양(朴璂陽)은 구타 응징당하기도 하였다. 남상순은 이 일로 인하여 일경에 체포되어 1914년 10월 12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소요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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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식 묘
이태식(1875~1952)은 면우 곽종석(郭鍾錫)의 문인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파리장서에 한국 유림 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19년 경남 거창의 유생 곽종석(郭鍾錫), 경북 성주의 장석영(張錫英), 충남 홍성의 김복한(金福漢) 등이 주축이 되어 파리장서를 작성, 김창숙(金昌淑)이 이를 소지하고 상하이로 갔다. 이때 그는 2,674자의 장문에 곽종석·김복한·김창숙 등과 함께 137명 중의 한 사람으로서 서명하였다. 그 뒤 그는 만주 일대에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하려던 제2차 유림단사건에도 가담하였다. 2차유림단 사건은 김창숙(金昌淑)이 1925년 3월부터 7월까지 3개월간 동지 송영호(宋永祜)·김화식(金華植)·이봉로(李鳳魯) 등과 만주·내몽고(內夢古) 일대에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무장독립운동세력 양성을 위해 군자금 모금 실행방안을 강구하려던 것이었다. 1926년 1월 상순 김창숙은 김화식(金華植)과 송영호(宋永祜)를 각지로 파견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나 모금 총액이 12,400원에 불과해 예정액에 크게 미달하였다. 이에 김창숙은 제2차 계획을 세워 4월 11일 상해에 도착, 의열단의 유우근(柳友瑾) 등과 상의하여 의열단원을 동원하여 군자금을 모금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동안 영남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한 사실을 탐지한 일경이 관련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해 약 600여 명에 달하는 많은 유림을 체포·구금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바로 2차 유림단 사건이다. 이태식은 제2차 유림단사건에도 관계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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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식 사당 (임천정)
이태식(1875~1952)은 면우 곽종석(郭鍾錫)의 문인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파리장서에 한국 유림 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19년 경남 거창의 유생 곽종석(郭鍾錫), 경북 성주의 장석영(張錫英), 충남 홍성의 김복한(金福漢) 등이 주축이 되어 파리장서를 작성, 김창숙(金昌淑)이 이를 소지하고 상하이로 갔다. 이때 그는 2,674자의 장문에 곽종석·김복한·김창숙 등과 함께 137명 중의 한 사람으로서 서명하였다. 그 뒤 그는 만주 일대에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하려던 제2차 유림단사건에도 가담하였다. 2차유림단 사건은 김창숙(金昌淑)이 1925년 3월부터 7월까지 3개월간 동지 송영호(宋永祜)·김화식(金華植)·이봉로(李鳳魯) 등과 만주·내몽고(內夢古) 일대에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무장독립운동세력 양성을 위해 군자금 모금 실행방안을 강구하려던 것이었다. 1926년 1월 상순 김창숙은 김화식(金華植)과 송영호(宋永祜)를 각지로 파견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나 모금 총액이 12,400원에 불과해 예정액에 크게 미달하였다. 이에 김창숙은 제2차 계획을 세워 4월 11일 상해에 도착, 의열단의 유우근(柳友瑾) 등과 상의하여 의열단원을 동원하여 군자금을 모금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동안 영남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한 사실을 탐지한 일경이 관련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해 약 600여 명에 달하는 많은 유림을 체포·구금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바로 2차 유림단 사건이다. 이태식은 제2차 유림단사건에도 관계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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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용 기의비
김사용(1896~1960)은 의령군 지정면 봉곡리에 살았으며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지정면 두곡리(杜谷里) 장터 의거는 의령읍의 만세시위운동 영향으로 곧 뒤따라 일어나게 되었는데 정호권(鄭澔權)의 주동 아래 3월 16일 두곡리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여 비밀리에 대중을 규합하는 한편 밤을 세워가면서 태극기를 만들었다. 3월 16일 미리 제작된 태극기를 군중에게 배포하고 선두에게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여 박기목(朴技穆)의 선창으로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계속 시위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리하여 이해 5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죄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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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찬엽 추모비
여찬엽(1889~1954)은 1919년 3월 14일의 의령읍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서울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구여순(具汝淳)과 그의 이종동생 이화경(李華卿)에 의해 계획되었다. 그들은 귀향 즉시 이곳의 청년 정용식(鄭容軾)·최정학(崔正學)·이우식(李祐植)·김봉연(金琫淵) 등과 만나, 의령읍 장날인 3월 14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들은 당시 용덕면(龍德面) 면장이던 강제형(姜齊馨)에게 독립선언서의 등사를 부탁하여 수백매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인근지역 주민들에게 이 계획을 알리고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 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 찬성한 그는, 3월 14일 오후 1시경, 의령장터에서 많은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의령공립보통학교 학생 3백여명과 인근의 주민들도 모여들어 시위군중은 점차 3천여명으로 늘어났다. 시위군중은 장터와 읍내를 시위행진하고 경찰서 앞에 이르러 독립만세를 외친 뒤 자진 해산하였다. 이튿날 그는 다시 의령향교 앞에 모인 1천 5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이화경·이원경(李源卿)·최숙자(崔淑子)·강순이(姜順伊) 등의 주동 하에 여성들도 궐기하였다. 그러나 일본군과 일본 경찰이 총검을 휘두르며 시위군중을 위협하여 해산시키고,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그도 이때 체포되었으며, 이해 4월 28일 부산(釜山)지방법원 진주(晋州)지청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