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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학 기념비
최정학 선생은 경상남도 의령(宜寧) 사람이다. 1919년 3월 14일의 의령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3일 누이동생 구은득(具銀得)의 문병 차, 상경하였다가 그곳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구여순(具汝淳)과 그의 이종동생 이화경(李華卿)으로부터 그곳의 소식을 전해 듣고 이들 형제와 이곳의 청년 유지 정용식(鄭容軾)·이우식(李祐植)·김봉연(金琫淵) 등과 함께 의령읍 장날인 3월 14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들은 당시 용덕면(龍德面) 면장인 강제형(姜齊馨)에게 독립선언서의 등사를 부탁하여 그의 협조로 면사무소 등사판을 이용하여 수백매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인근지역 주민들에게 이 계획을 알려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3월 14일 오후 1시경, 그는 많은 시위군중과 함께 의령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의령공립보통학교 학생 3백여명이 가세하였고, 인근의 주민들이 계속 모여들어 시위군중은 점차 3천여명으로 늘어났다. 시위군중은 장터와 읍내를 시위행진하고 경찰서 앞에 이르러 독립만세를 외치고 자진 해산하였다. 이튿날 다시 의령향교(宜寧鄕校) 앞에 모인 1천 5백여명의 시위군중은 비가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경찰서와 군청을 시위행진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한편 이화경·이원경(李源卿)·최숙자(崔淑子)·강순이(姜順伊) 등의 주동 하에 여성들도 궐기하였다. 그러나 이때 마산(馬山) 주둔 일본군 포병대대에서 응원 출동한 8명의 일본군과 현지의 일본 경찰이 총검을 휘두르며 시위군중을 위협하여 해산시키고,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그도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7월 15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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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3.1독립운동기념비
3.1독립운동기념비로서 1919년 3월 1일 정오를 기해 파고다공원에서는 독립선언문이 세계만방에 공포되었다.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은 삼천리 방방곡곡에 메아리쳐 의병의 고장 이 땅 의령에도 진동했다. 의령의 독립만세운동은 기미년 3월 14일 의령장날 2천여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이 외치면서 시작되었다. 이날을 시발로 15일과 16일에도 군민과 의령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만세시위를 벌렸다. 일본군대의 무참한 총칼앞에도 많은 사람들이 끌려가 모진고문과 혹독한 옥고를 겪으면서도 끝까지 굴하지 않고 싸웠다. 이제 조국은 앞서간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독립정신으로 광복을 되찾은지 40년 우리는 후손에 물려줄 영광과 선진조국창조를 위하여 힘찬 전진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는 님들의 고귀한 나라사랑, 겨레사랑의 높은 얼을 오늘에 되살리고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뜻을 여문 돌에 새겨 1985.11.30. 이곳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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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제 집
안창제(1866~1931) 선생은 경남 의령(宜領) 사람이다. 안효제(安孝濟)의 서제(庶弟)이다. 1894년 갑오경장의 조서가 내려가자 갑오토역(甲午討逆) 상소를 올리고 금부옥(禁府獄)에 감금당했으며,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3도유생을 대표하는 유약소원(儒約所員)으로 연이어 3번이나 소(疎)를 올려, 오적을 참하기를 청하였으나 회답을 받지 못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한국이 강점되자 광복의 큰 뜻을 품고,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단을 조직하고 단장 박장호(朴長浩)와 협력하여 결사대를 파견하여 일경과 밀정을 다수 사살하였다. 1919년에는 중국측에서 조직한 전국유교연맹 동삼성(東三省)학회 분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31년 8월 13일 만보산(萬寶山) 사건으로 일가족이 장학량(張學良)의 패잔병에게 총살당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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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제 기념관
안희제(1885~1943) 선생은 경상남도 의령(宜寧)군 부림(富林)면 입산(立山)리에서 태어났다. 한말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7년에 동래의 구포(龜浦)에 구명학교(龜明學校)와 의령군 의령면에 의신학교(宜新學校)를 설립하였다. 1908년에는 고향인 의령군 입산리(설뫼)에 창남학교( 南學校)를 설립하고 애국청소년들을 양성하였다. 1909년 10월에는 서상일(徐相日) 등 8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비밀 청년결사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창설하여 활동하였다. 대동청년당은 안창호 계열의 지하 청년단체로서 1945년까지 일제에 발각되지 않았으며 당원들은 일제강점말기까지 안희제의 조직에 다수가 참가하여 끝까지 애국 동지로서 활동하였다. 1914년에는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했다가 3 1운동 직후 이를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장하였다. 백산상회는 단순한 상업기관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연락기관이 되어 활동했으며,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는 기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1919년에 서울에서 3 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의령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시켜 각지에 배포하여 군민들의 봉기를 촉구하였다. 1919년 11월에는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조직하여 다수의 애국적 청년학생들을 외국에까지 유학시켰으며, 기미육영회의 장학생 중에서 다수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1927년에는 이시목(李時穆) 등 동지들과 함께 「자력사(自力社)」를 조직하여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에는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신앙하는 민족종교인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만주로 갔으며, 1933년에 발해의 옛 수도인 동경성(東京城) 부근에 발해농장(渤海農場)과 발해학교(渤海學校)를 설립하였다. 당시 한국 농민들은 일제의 식민지 약탈통치하의 국내에서 토지를 잃고 남부여대하여 만주로 건너가서 유랑하다가 중국인 지주들의 불리한 소작조건 밑에서 착취당하는 일이 매우 많았는데, 안희제는 동경성 부근에 천수백일 갈이(千數百日耕) 넓이의 농토를 구입하여 농장을 만들고 유랑하고 있는 한국농민 300여호를 유치하여 토지를 분배해 주고, 5개년 연부상환조건으로 자작농의 창설을 추진하였다. 또한 발해학교를 농장 일대에 설립하여 이주농민의 자제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42년 11월에 일제는 대종교가 독립운동조직이라고 보고 만주와 국내에 있는 대종교 지도자 윤세복(尹世復)이하 21명을 일거에 체포하였다. 이 사건이 대종교에서 임오교변(壬午敎變)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임오교변 때 일제의 고문으로 10명의 대종교 지도자가 순국했는데, 이를 순국십현(殉國十賢) 또는 임오십현(壬午十賢)이라고 하며, 안희제도 그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안희제는 일제에게 체포되어 대종교의 독립운동에 대한 장기조사를 받다가 잔혹한 고문으로 1943년 8월에 옥사(獄死)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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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제 집
안희제(1885~1943) 선생은 경상남도 의령(宜寧)군 부림(富林)면 입산(立山)리에서 태어났다. 한말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7년에 동래의 구포(龜浦)에 구명학교(龜明學校)와 의령군 의령면에 의신학교(宜新學校)를 설립하였다. 1908년에는 고향인 의령군 입산리(설뫼)에 창남학교( 南學校)를 설립하고 애국청소년들을 양성하였다. 1909년 10월에는 서상일(徐相日) 등 8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비밀 청년결사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창설하여 활동하였다. 대동청년당은 안창호 계열의 지하 청년단체로서 1945년까지 일제에 발각되지 않았으며 당원들은 일제강점말기까지 안희제의 조직에 다수가 참가하여 끝까지 애국 동지로서 활동하였다. 1914년에는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했다가 3 1운동 직후 이를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장하였다. 백산상회는 단순한 상업기관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연락기관이 되어 활동했으며,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는 기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1919년에 서울에서 3 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의령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시켜 각지에 배포하여 군민들의 봉기를 촉구하였다. 1919년 11월에는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조직하여 다수의 애국적 청년학생들을 외국에까지 유학시켰으며, 기미육영회의 장학생 중에서 다수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1927년에는 이시목(李時穆) 등 동지들과 함께 「자력사(自力社)」를 조직하여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에는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신앙하는 민족종교인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만주로 갔으며, 1933년에 발해의 옛 수도인 동경성(東京城) 부근에 발해농장(渤海農場)과 발해학교(渤海學校)를 설립하였다. 당시 한국 농민들은 일제의 식민지 약탈통치하의 국내에서 토지를 잃고 남부여대하여 만주로 건너가서 유랑하다가 중국인 지주들의 불리한 소작조건 밑에서 착취당하는 일이 매우 많았는데, 안희제는 동경성 부근에 천수백일 갈이(千數百日耕) 넓이의 농토를 구입하여 농장을 만들고 유랑하고 있는 한국농민 300여호를 유치하여 토지를 분배해 주고, 5개년 연부상환조건으로 자작농의 창설을 추진하였다. 또한 발해학교를 농장 일대에 설립하여 이주농민의 자제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42년 11월에 일제는 대종교가 독립운동조직이라고 보고 만주와 국내에 있는 대종교 지도자 윤세복(尹世復)이하 21명을 일거에 체포하였다. 이 사건이 대종교에서 임오교변(壬午敎變)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임오교변 때 일제의 고문으로 10명의 대종교 지도자가 순국했는데, 이를 순국십현(殉國十賢) 또는 임오십현(壬午十賢)이라고 하며, 안희제도 그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안희제는 일제에게 체포되어 대종교의 독립운동에 대한 장기조사를 받다가 잔혹한 고문으로 1943년 8월에 옥사(獄死)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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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효제 집
안효제(1850~1916) 선생은 경남 의령(宜領) 사람이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을 지냈다. 1895년 8월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상경하여 당시 참판(參判)이었던 최익현(崔益鉉)과 만나 국권회복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한국이 강점되자 세상에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입산(入山)하였으나, 동년 11월 일제는 이른바 은사금을 주어 그를 회유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를 거절하고 대한의 신하로서 나라가 망하였는데도 죽지 못한 것이 죄스럽다고 하고 거부하여 창령(昌寧)경찰서에 구금되었다. 1912년 아우 안창제(安昌濟)의 뒤를 이어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운동을 하다가 병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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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제 묘
안희제(1885~1943) 선생은 경상남도 의령(宜寧)군 부림(富林)면 입산(立山)리에서 태어났다. 한말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7년에 동래의 구포(龜浦)에 구명학교(龜明學校)와 의령군 의령면에 의신학교(宜新學校)를 설립하였다. 1908년에는 고향인 의령군 입산리(설뫼)에 창남학교( 南學校)를 설립하고 애국청소년들을 양성하였다.1909년 10월에는 서상일(徐相日) 등 8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비밀 청년결사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창설하여 활동하였다. 대동청년당은 안창호 계열의 지하 청년단체로서 1945년까지 일제에 발각되지 않았으며 당원들은 일제강점말기까지 안희제의 조직에 다수가 참가하여 끝까지 애국 동지로서 활동하였다. 1914년에는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했다가 3 1운동 직후 이를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장하였다. 백산상회는 단순한 상업기관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연락기관이 되어 활동했으며,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는 기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1919년에 서울에서 3 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의령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시켜 각지에 배포하여 군민들의 봉기를 촉구하였다. 1919년 11월에는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조직하여 다수의 애국적 청년학생들을 외국에까지 유학시켰으며, 기미육영회의 장학생 중에서 다수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1927년에는 이시목(李時穆) 등 동지들과 함께 「자력사(自力社)」를 조직하여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에는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신앙하는 민족종교인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만주로 갔으며, 1933년에 발해의 옛 수도인 동경성(東京城) 부근에 발해농장(渤海農場)과 발해학교(渤海學校)를 설립하였다. 당시 한국 농민들은 일제의 식민지 약탈통치하의 국내에서 토지를 잃고 남부여대하여 만주로 건너가서 유랑하다가 중국인 지주들의 불리한 소작조건 밑에서 착취당하는 일이 매우 많았는데, 안희제는 동경성 부근에 천수백일 갈이(千數百日耕) 넓이의 농토를 구입하여 농장을 만들고 유랑하고 있는 한국농민 300여호를 유치하여 토지를 분배해 주고, 5개년 연부상환조건으로 자작농의 창설을 추진하였다. 또한 발해학교를 농장 일대에 설립하여 이주농민의 자제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1942년 11월에 일제는 대종교가 독립운동조직이라고 보고 만주와 국내에 있는 대종교 지도자 윤세복(尹世復)이하 21명을 일거에 체포하였다. 이 사건이 대종교에서 임오교변(壬午敎變)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임오교변 때 일제의 고문으로 10명의 대종교 지도자가 순국했는데, 이를 순국십현(殉國十賢) 또는 임오십현(壬午十賢)이라고 하며, 안희제도 그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안희제는 일제에게 체포되어 대종교의 독립운동에 대한 장기조사를 받다가 잔혹한 고문으로 1943년 8월에 옥사(獄死)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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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종 호국신전(세덕사)
박호종(1905~1940) 선생은 경남 진양(晋陽) 사람이다. 진주제일보통학교(晋州第一普通學校) 재학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1926년 경에는 일본 대판으로 건너가 직공으로 일하면서 노동운동에 투신하였다. 1930년 경, 귀국한 그는 고향에서 야학회를 설립하고 농민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7월 일제가 만주를 침공하며 안으로는 식민지통치체제를 더욱 강화해 가는 상황에서, 그는 사회주의 사상에 입각한 농민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1932년 9월 진주지역에서는 송기호(宋畿鎬)·조삼수(趙三壽) 등이 주동이 되어 조선공산주의자 진주지방협의회가 결성되었고, 그 산하에 농민위원회 . 노동위원회 . 학생위원회 등이 비밀리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때 박호종은 농민위원회에 가입하였으며, 금산면(琴山面)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박호종은 비밀결사 조직을 위해 금산면에서 농민을 규합한 후, 진주읍내 남강(南江)에서 회합을 가졌다. 또 같은 해 11월 그가 사재를 털어 설립한 인쇄소에서 항일 격문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붙잡혀 7월 여의 옥고를 치른 끝에 1933년 7월 31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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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 묘
최광(1882~1918)은 경남 의령(宜寧) 사람이다. 1907년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경제학전문과(經濟學專門科)를 졸업한 뒤 탁지부(度支部)에 들어가 국망(國亡) 직전인 1910년 3월까지 주사(主事)로 근무하였다. 1908년 3월에는 영남지방의 교육진흥과 인재양성을 목표로 서울에서 박정동(朴晶東)·이하영(李夏榮) 등이 발기하여 조직된 교남학회(嶠南學會)에 참여, 박정동·이각종(李覺鍾) 등과 함께 평의원(評議員) 29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그 뒤, 1910년 러시아로 망명해 동년 8월 일제의 한국 병탄(倂呑)의 부당성을 규탄하고 이의 무효를 선언한 성명회(聲明會) 선언서(宣言書)가 발표될 때 서명하여 항일의지를 천명하였다. 1911년에는 이갑(李甲)을 보좌하여 미주에 본부를 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의 시베리아지방총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특히 국민회의 원동(遠東) 경영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성페테스부르크 지역의 경영 실무를 서초(徐超)와 함께 담임하는 한편, 미중서 발행하던 <신한민보>(新韓民報)를 원동(遠東) 일대에 배포하는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1913년 3월 26일 개최된 국민회 시베리아지아총회 제1회 대의회(代議會)에서 대표원(代表員)으로 선출되었다. 이때 이강(李剛)·김탁(金鐸)과 함께 기초위원(起草委員)으로 선정되어 총회의 자치규정(自治規程)을 기초하여 총회의 승인을 받아 통과시키는 등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4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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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규 추모비
최병규(1881~1931)는 경상남도 의령(宜寧) 사람이다. 1919년 3월 14일의 의령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3일 누이동생 구은득(具銀得)의 문병 차 상경하였다가 그곳에서 전개되고 있는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귀향한 구여순(具汝淳)과 그의 이종동생 이화경(李華卿)에 의해 계획되었다. 그들은 귀향 즉시 이곳의 청년 유지들인 정용식(鄭容軾)·최정학(崔正學)·이우식(李祐植)·김봉연(金琫淵) 등과 만나, 의령읍 장날인 3월 14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당시 용덕면(龍德面) 면서기인 그는 면장 강제형(姜齊馨)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등사해 줄 것을 부탁 받고 동료서기 전용선(田溶璿)과 함께 면사무소의 등사판을 이용하여 수백매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다. 3월 14일 오후 1시, 그는 많은 시위군중과 함께 의령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의령공립보통학교 학생 3백여명이 가세하였고, 인근의 주민들이 계속 모여들어 시위군중은 점차 3천여명으로 늘어났다. 그러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장터와 읍내를 시위행진하고 경찰서 앞에 이르러 독립만세를 외치고 자진 해산하였다. 그는 이튿날 다시 의령향교(宜寧鄕校) 앞에 모인 1천 5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비가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경찰서와 군청을 시위행진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이화경·이원경(李源卿)·최숙자(崔淑子)·강순이(姜順伊) 등의 주동 하에 여성들도 궐기하였다. 그러나 이때 마산(馬山) 주둔 일본군 포병대대에서 응원 출동한 8명의 일본군과 현지의 일본 경찰이 총검을 휘두르며 시위군중을 위협하여 해산시키고,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그도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8월 19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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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억근 공훈비
이억근(1893~1944)은 1919년 3월 14일 의령군 의령읍(宜寧邑)에서 구여순(具汝純)·최정학(崔正學)·정호권(鄭浩權)·최병규(崔秉圭)·이태수(李泰秀) 등을 중심으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는 장터에 모인 300여명의 시위군중을 규합하여 군중들 앞에서 구여순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의 취지를 연설하고 군중과 함께 태극길르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일경의 무력탄압을 무릅쓰고, 읍내를 행진, 시위를 전개하다가 붙잡혔다. 같은 해 4월 26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7월 14일 대구복심법원과 10월 4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당하여 옥고를 치렀다. 이억근 공훈비 안내판은 의령군 용덕면 정동리 운곡정사 앞에 위치해있다. 이 공훈비는 선생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2017년 4월 19일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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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제 순국기념비
안희제(1885~1943)은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7년에 동래의 구포에 구명학교와 의령군 의령면에 의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908년에는 고향인 의령군 입산리(설뫼)에 창남학교를 설립하고 애국청소년들을 양성하였다. 1909년 10월에는 서상일(徐相日) 등 8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비밀 청년결사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창설하여 활동하였다. 대동청년당은 안창호 계열의 지하 청년단체로서 1945년까지 일제에 발각되지 않았다. 1914년에는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했다가 3 1운동 직후 이를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장하였다. 백산상회는 단순한 상업기관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연락기관이 되어 활동했으며,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는 기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1927년에는 이시목(李時穆) 등 동지들과 함께 「자력사(自力社)」를 조직하여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였다. 1942년 11월에 일제는 대종교가 독립운동조직이라고 보고 만주와 국내에 있는 대종교 지도자 윤세복(尹世復)이하 21명을 체포하였다. 이 사건이 대종교에서 임오교변(壬午敎變)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임오교변 때 일제의 고문으로 10명의 대종교 지도자가 순국했는데, 안희제도 그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안희제는 일제에게 체포되어 대종교의 독립운동에 대한 장기조사를 받다가 잔혹한 고문으로 1943년 8월에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