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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규 묘
황상규(1891-1931)는 경남 밀양 사람이다. 일찍이 교육사업에 뜻을 두고 밀양에서 고명학원(高明學院)에 교사로 재직하면서 ≪동국사감(東國史鑑)≫이란 역사 교재를 저술하였다. 또한 전홍표가 경영하던 동화학원(東化學院)을 인수하여 청년학도 200여 명을 배출시켰다. 그러나 일경의 탄압에 의해 1918년 만주(滿洲) 길림(吉林)으로 망명하였다. 이곳에는 일찍부터 여준, 유동열, 김동삼, 김좌진 등의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이 있어서, 이들과 함께 3·1독립선언서에 앞서 독자적으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발표하고, 1919년 4월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에 가담하여 회계과장(會計課長) 일을 맡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리고 황상규는 1919년 11월 9일 김원봉 등과 함께 의열단을 조직하여 일제 기관의 파괴와 침략자 및 매국노의 암살 등을 꾀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김원봉, 이성우 등은 중국 상해(上海)에서 필요한 폭탄과 권총 등을 구입하였고, 1920년 5월 13일 황상규는 곽재기 등과 함께 서울에 잠입하여 거사 대상을 물색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경기도 경찰부에 탐지되어 결국 동년 6월 한인 형사 김태석(金泰錫)에게 모두 붙잡히고 말았다. 1921년, 7년 징역형을 선고받은 그는 만기 출옥 후에도 조국광복 투쟁에 매진하여, 신생활사(新生活社)를 창건하고 신간회(新幹會) 중앙간부,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간부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20년대 후반부터 1931년 9월 1일 고향에서 별세하기까지 향리에 노동야학원(勞動夜學院)과 여자야학원(女子夜學院)을 설립하여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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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화리독립만세운동 유적비
경상남도 밀양에 위치한 춘화리독립만세운동 유적비로서, 춘화리에서 일어난 3.1 만세 시위를 기념하기 위한 사적이다.춘화교회 3·1 만세 시위는 춘화리의 김 씨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이들은 일찍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여 춘화교회를 세우고 경신학교와 일신학교를 설립하였다. 때마침 경신학교 교장 김내봉은 일이 있어 평양에 갔다가 그곳에서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여 돌아왔다. 김응삼, 김내봉, 김성수, 김영환, 김응진 등은 독립만세운동을 의논하였고 그 중 김성수가 주동적인 역할을 맡았다. 이들은 부북면, 춘화면, 청운면, 덕곡리의 각 마을로 연락하여 농민 약 400~600명을 4월 6일 정오에 춘화교회에 모이게 하였다. 이들은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한 후 징과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면서 각 마을을 행진하였다. 이곳 농민들은 6일 밤 의거와 동시에 주변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들에 대하여 퇴거를 요구하였다. 다음날 밀양헌병분견소 헌병과 순사들이 출동하였으나 주모자는 모두 피신하였고, 총 53명이 검거되었다. 춘화리 주민들의 숭고한 정신을 후세의 귀감으로 삼고자 2006년 12월에 밀양문화원이 본 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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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관 기적비
이상관(1891-1936)은 경상남도 밀양의 독립운동가이다. 1925년 중국 남만주(南滿洲) 환인현(桓仁縣) 일대에서 정의부(正義府) 지방행정부(地方行政部) 환인남구총관(桓仁南區總管)으로 활동하였다. 1935년부터는 국민부(國民府) 산하의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중앙집행위원(中央執行委員) 및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재정 부장(財務 部長)으로 활동하였다. 1936년 1월에는 조선혁명군 제2회 군민대표회의(軍民代表會議)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1937년 1월, 일본군 동변도특별공작부(東邊道特別工作部)에 의해 체포되어 피살당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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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 사적비
손호(1897-1936)는 경상남도 밀양 사람으로, 1922년부터 영남 일대에서 민족자결운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4월에 신민부(新民府) 중앙집행위원장 김좌진으로부터 일제 고관과 친일 분자의 주살, 주요시설의 폭파, 군자금 모집 등의 밀명을 받고 이병묵, 신현규, 손봉현, 윤창선 등과 함께 대구지방에서 군자금 모집 등의 활약을 하다가 1928년 5월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는 결국 1929년 9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강도 등의 죄명으로 징역 10년 형을 받고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모진 고문과 옥고로 1936년 8월 23일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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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 묘
손호(1897-1936)는 경상남도 밀양 사람으로, 1922년부터 영남 일대에서 민족자결운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4월에 신민부(新民府) 중앙집행위원장 김좌진으로부터 일제 고관과 친일 분자의 주살, 주요시설의 폭파, 군자금 모집 등의 밀명을 받고 이병묵, 신현규, 손봉현, 윤창선 등과 함께 대구지방에서 군자금 모집 등의 활약을 하다가 1928년 5월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는 결국 1929년 9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강도 등의 죄명으로 징역 10년 형을 받고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모진 고문과 옥고로 1936년 8월 23일 옥사 순국하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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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득 공적 안내판
김학득(1927-2002)은 경남 밀양 사람으로, 마산공립중학교(馬山公立中學校)에 재학하던 중 비밀결사인 마중독립단(馬中獨立團)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김학득은 1942년 5월 마산공립중학교 2학년에 재학하던 중 한글 연구로 무기정학을 받았다. 그러나 뜻을 굽히지 않고 1944년 4월 마산공립중학교 2학년 박기병, 박후식, 감영재, 조이섭, 강정붕과 함께 해외의 독립운동 상황을 전하고 조선 역사와 한글을 배우며, 학우 중에서 동지를 포섭하여 해외로 탈출한 뒤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의하고, 그 실행을 위해 비밀결사 마중독립단을 조직하였다. 김학득은 이 단체를 중심으로 항일활동을 전개하던 중 체포되었다. 그는 이 일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1년 1개월의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과 함께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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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굉 공적 안내판
임굉(1922-1950)은 경남 밀양의 학생이었다. 1941년 당시 대구사범학교에 재학 중이던 임굉은 그해 1월 동교생인 장세파, 이태길, 최낙철 등과 함께, 당시 대구 동운동(東雲洞) 소재 이무영의 집에 모여 비밀결사 '연구회(硏究會)'를 조직하였다. 여기에서 임굉은 교육부를 맡아 활동하였다. 연구회는 조국 독립을 위한 실력배양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그래서 회원들은 당시 국제정세를 분석하여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다가올 독립에 대비하기 위해 실력을 양성해서 독립 후 각기 전문 분야의 최고 권위자가 될 것을 다짐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학술연구를 표방하면서 항일의식을 고양하였고, 비밀엄수, 매월 10일 연구 발표와 하급생 지도 및 동지 포섭 등의 방침을 정하였다. 1941년 2월부터 3월까지 이 연구회는 여섯 차례의 모임을 갖고 활동 및 결의사항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졸업 후에 각각 교사로 부임하게 되면 우수한 아동들에게 수재교육을 실시하여 독립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로 결의하였다. 또한 회원들은 현지에서의 활동 상황 및 성과를 매월 1회 사무원에게 보고하고, 사무원은 다시 각지에서 보고된 상황을 취합하여 전체 회원에게 배부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임굉은 1941년 3월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4월 함북 청진 천마공립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앙양시키며 연구회의 사업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1941년 7월 대구사범학교의 비공식 문예지 '반딧불'이 일본 경찰의 손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임굉도 붙잡혀 1943년 11월 30일 대전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 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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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두 묘
김성두(1885-1952)는 경상남도 밀양의 독립운동가이다. 1913년 9월에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가 조직되고 돈헌 임병찬이 중심이 되어 전국적인 규모의 국권 회복 운동이 전개되자, 1914년 5월에 이에 참가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에 고종은 은밀히 칙령을 내려 그를 독립의군부 육군정위와 경상남도 소모관으로 임명하여 그의 활약을 고무하였다. 그러나 그 조직 및 활동이 일제에 탐지되어 체포령이 내려지자 김성두는 1916년까지 강원도 통천(通川)에서 은신 생활을 하였다. 1917년 4월, 일제의 경찰망을 피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국내로 잠입하였으며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각지를 전전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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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규 집
김명규(1893-1977)는 경남 밀양의 학생이었다. 1912년 밀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9년 4월 17일 동래고보(東萊高普)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여 동래고보 전 학생이 모여 시위행진을 하던 중 붙잡혀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 집행유예 3년 형을 받았다. 1920년 12월 28일에는 서울에서 동지 황상규의 밀명을 받고 길림무관학교(吉林武官學校) 설립기금의 조달을 위하여 신의주(新義州)에서 파견된 동지 김노봉과 함께 창녕(昌寧)의 부호 하경석의 집에 잠입하여 군자금 3천 원을 요구하여 150원을 모금한 뒤 서울의 동지 황상규에게 전달하던 도중 붙잡혀 부산지방법원에서 7년 형을 선고받고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7년에는 창녕(昌寧) 유림지서(儒林支署) 갑비(甲斐) 부장 살해사건에 연루되어 10여 년간 도피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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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윤 의열투쟁기념비
김상윤(1897-1927)은 경남 밀양의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11월 9일 김원봉 등 동지들과 함께 만주 길림성(吉林省)에서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였다. 그는 1920년 2월 상해에서 폭탄을 구입하여 국내로 반입한 후 밀양경찰서 투탄 운동을 전개하였다가 일경에 탐지되어 도피하였으며 다시 상해로 망명하여 활동하던 중 1922년 3월 이종암 등과 다나카(田中) 대장 처단을 실행하였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1927년 10월 19일 상해에서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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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봉 추모기적비
최수봉(1894-1921)은 경상남도 밀양 사람이다.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향리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27세가 되는 해 사립동화학교(私立東和學校)에 입학하여 전홍균 밑에서 2년간 수학한 후 다시 1912년 동래(東萊) 범어사(梵魚寺)의 불교 학교인 명정학교(明正學校)를 졸업하였다. 또한 1913년 평양 숭실학교(平壤崇實學校)에 입학하여 3년간 수학 중 학교가 폐교당하자, 중퇴하고 말았다. 그 후 독립쟁취의 신념을 갖고 남만주 지방으로 망명한 그는 봉천(奉天), 안동(安東) 등지를 왕래하며 동지를 규합하기도 하였으며 한때 평안도 정주(定州)에서 광산노동 또는 우편집배원 노릇도 하며 때를 기다렸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날 당시 의열단(義烈團)과 연락이 닿아 있던 고인덕이 폭약과 폭탄 제조기를 갖고 모종의 거사를 준비중에 있었는데 이때 그는 동지 고인덕에게 즉각 자신의 독립투쟁의 결의를 전하고 고인덕으로부터 폭탄과 제조기를 전해 받아 산속으로 들어가서 폭탄을 제조하여 송혜덕에게 일단 보관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1920년 12월 27일, 밀양경찰서의 와타나베 스에지로(渡邊末次郞) 서장이 전 서원을 모아놓고 훈시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즉시 폭탄을 찾아 경찰서를 폭파하기로 결정한 그는 준비된 2개의 폭탄을 경찰서를 겨냥하여 던지고 밀양 서문(西門)으로 도피하였다. 그러나 일경의 추격을 받게 되어 자결하려다 미수에 그치고 붙잡히고 말았다. 1921년 4월 16일 사형을 선고받은 그는 동년 7월 8일 오후 3시, 대구감옥 교수대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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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복 공적 안내판
김영복(1920-1993)은 경상남도 밀양 사람의 학생이었다.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이던 1941년 1월에 동교생 임굉, 이태길, 최낙철 등과 함께 당시 대구 동운동(東雲洞) 소재 이무영의 집에 모여 항일학생결사 '연구회(硏究會)'를 조직하였다. 연구회는 조국 독립을 위한 실력 배양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적한 단체로서, 회원들은 당시 국제정세를 분석하여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다가온 독립에 대비하기 위해 실력을 양성해서 독립 후 각기 전문 분야의 최고 권위자가 될 것을 다짐했다. 따라서 이들은 학술연구를 표방하면서 항일의식을 고양했으며, 비밀엄수, 매월 10일 연구발표와 하급생 지도 및 동지 포섭 등의 방침을 정하였다. 또한 각 부서를 정했는데 이때 그는 이과부 책임 겸 사무원의 일을 맡았다. 동회는 1941년 2월부터 동년 3월까지 여섯 차례의 모임을 갖고 활동 및 결의사항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회원들이 졸업을 하게 됨에 따라 이들은 장기적인 사업 계획을 구상하였다. 즉, 졸업 후에 각기 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하게 되면 우수한 아동들에게 수재교육을 실시하여 독립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현지의 활동 상황 및 성과를 매월 1회 사무원에게 보고하도록 하고 이렇게 보고된 상황은 취합하여 다시 전 회원에게 배부하기로 하였는데 이때 우송 방법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공문을 가장하기로 했다. 그는 1941년 3월에 동교 졸업 후 충남 예산군 소재 신암공립국민학교에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앙양시키며 연구회의 사업을 수행하였다. 그런데 1941년 7월,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반딧불〉이 일경의 손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도 일경에 붙잡혔으며 그 후 미결수로 2년여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11월에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