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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43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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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호 공적 안내판
권재호(1898-1945)는 경상남도 밀양 사람으로, 1919년 3월 13일 밀양 장날에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밀양 장날의 만세운동은 윤세주, 윤치형 등이 고종 인산(因山)에 참례하였다가,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와 이 사실을 동화학교(同和學校) 교장 전홍표에게 전하면서 추진되었다. 전홍표는 밀양지역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을 쏟았으므로 많은 청년들이 그를 따랐다. 그리하여 권재호, 김병환, 이장수, 윤보은, 김소지 등은 전홍표의 지도에 따라 만세운동 계획을 진행시켜 나갔다. 이들은 3월 13일 밀양 읍내 장날을 거사 일로 정하고, 독립선언서를 밀양면사무소와 부북면(府北面)사무소 등지에서 등사판을 몰래 가져와 위북산(偉北山)에서 밤을 새워 수백 매를 인쇄하는 한편, 수백 개의 태극기도 제작하였다.거사 당일 오후 1시 30분경, 권재호 등은 윤세주의 독립선언서 낭독에 이어 미리 준비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배포하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장터에 운집한 군중들도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때 권재호는 시위대의 선봉에 서서 "독립만세(獨立萬歲)"라 쓴 큰 기를 들고 시위운동을 주도해 갔다. 그러다가 부산으로부터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해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4월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4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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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봉 의거지
최수봉(1894 - 1921)은 경남 밀양(密陽) 사람이다.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향리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27세가 되는 해 사립동화학교(私立東和學校)에 입학하여 전홍균(全鴻均) 밑에서 2년간 수학한 후 다시 1912년 동래(東萊) 범어사(梵魚寺)의 불교학교인 명정학교(明正學校)를 졸업하였다. 또한 1913년 평양 숭실학교(平壤崇實學校)에 입학하여 3년간 수학 중 학교가 폐교당하자 중퇴하고 말았다. 그 후 독립쟁취의 신념을 갖고 남만주 지방으로 망명한 그는 봉천(奉天)·안동(安東) 등지를 왕래하며 동지를 규합하기도 하였으며 한때 평안도 정주(定州)에서 광산노동 또는 우편 집배원 노릇도 하며 때를 기다렸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날 당시 의열단(義烈團)과 연락이 닿아 있던 고인덕(高仁德)이 폭약과 폭탄제조기를 갖고 모종의 거사를 준비중에 있었는데 이때 그는 동지 고인덕에게 즉각 자신의 독립투쟁의 결의를 전하고 고인덕으로부터 폭탄과 제조기를 전해받아 산속으로 들어가서 폭탄을 제조하여 송혜덕(宋惠德)에게 일단 보관을 요청하였다. 1920년 12월 27일 밀양경찰서 서장이 전 서원을 모아놓고 훈시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즉시 폭탄을 찾아 경찰서를 폭파하기로 결정한 그는 준비된 2개의 폭탄을 경찰서를 겨냥하여 던지고 밀양 서문(西門)으로 도피하였다.그러나 일경의 추격을 받다 자결하려다 미수에 그치고 붙잡히고 말았다. 1921년 4월 16일 사형을 선고받은 그는 동년 7월 8일 오후 3시 대구감옥 교수대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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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천 항일운동테마거리
경상남도 밀양에 위치한 해천 항일운동테마거리이다.해천 지역은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된 곳으로, 일제강점기 일본에 항거하고 독립을 소망한 독립운동가의 정신을 스토리텔링화하여 해천 항일운동테마거리를 조성하였다. 특히 밀양 출신 김원봉, 윤세주의 생가터를 중심으로 3.13 만세운동과 밀양인의 항일운동에 관한 기록을 벽화와 조형물 등으로 제작하여 그들의 정신을 되새기고 계승할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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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식 묘
장인식(1879-1954)은 경상남도 밀양 사람으로, 밀양군(密陽郡) 단장면(丹場面) 태룡리(台龍里)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3일, 밀양 표충사(表忠寺) 승려 2명이 단장면 고례리(古禮里) 주막에 주민을불러 모아 내일 태룡리 장날에 시장에서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하였으니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를 들은 다음 날 4일, 장인식은 선두에서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들고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를 외치며 시장을 시위 행진하였다. 시위 후 체포된 장인식은 1920년 3월 18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개월 형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1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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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직 서당(자암서당)
경상남도 밀양에 위치한 노상직의 자암서당이다. 자암서당은 노상직이 1919년 3월, 파리장서에 유림 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기 전에 만주에서의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노상직은 자암서당에서 일생을 마칠 때까지 약 18년간 수많은 서적을 저술하였는데, 대표적인 저서로는 허미수년보(許眉수年譜), 동국씨족고(東國氏族攷), 고경중마방(古鏡重磨方), 성리절요(性理節要), 동국유현편년(東國儒賢編年), 영지요선(嶺地要選), 역년제강(歷年提綱), 가락국사실고(駕洛國事實攷), 상례편람(常禮便覽), 여사수지(女士須知) 등이 있다.또한 직접 저술한 서적 외에도 성제집(性濟集), 하려집(下廬集)의 간행을 주관하였고 성호집(星湖集)의 간행에도 관여하였으며 이자수어(李子粹語) 등 수십 권의 문헌교정(文獻校正)을 함으로써 근세 출판문화 창달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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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조 집
이강조(1890-1954)는 경남 밀양 사람으로 1919년 4월 4일 밀양군(密陽郡) 단장면(丹場面)에 있는 표충사(表忠寺) 승려들이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이곳에서의 만세운동은 3월 20일 통도사 승려 50여 명이 표충사로 건너와 이곳의 승려들과 비밀회합을 가지면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단장 장날인 4월 4일을 거사 일로 정하고, 각 지역의 주민들을 규합하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도 마련하였다. 거사 당일 정오 무렵 주동 인물들의 '대한독립만세' 3창에 이어 군중은 일제히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강조도 군중들과 함께 단장주재소(丹場駐在所)로 나아가서 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급파된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다. 이 사건으로 이강조는 1919년 11월 20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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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규 공적 안내판
김홍규(1889-1951)는 대종교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신민부(新民府, 북만주 지역에서 결성된 항일독립운동 단체)와 연락하며 군자금을 모집 및 제공하는 활동을 하였다. 또한 1910년대에 윤창선, 손봉현, 손호, 윤치백 등과 함께 대종교에 입교하여 활동하는 한편, 별도로 해원교(解怨敎)라는 종교단체를 조직하였다.1927년 음력 9월, 대구에서 윤홍선, 손양윤, 신현규, 이병묵 등과 회합을 갖고, 지방의 부호 자제들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로 모의하였다. 특히 김좌진의 신민부에 군자금을 제공하기 위해 밀양군 단장면 사연리의 부호 김태진(金泰鎭)에게서 2차례에 걸쳐 3,000원을 모금하였다. 이때, 해원교의 교주를 만나볼 수 있다는 핑계로 김태진의 아들 김병연을 서울로 데리고 나온 뒤, 윤창선이 김병연의 명의로 3,000원의 약속어음(군자금 공채)을 만들고, 손봉현이 그의 도장을 위조하는 등의 작업을 하고, 이후 김홍규가 김태진에게 군자금의 지급을 요청하였다. 1928년 8월, 김홍규를 포함한 손봉현, 윤창선, 손양윤, 이병묵, 손호, 신현규 등 총 7명이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이때 김홍규는 1929년 7월 1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유가증권 사문서위조, 사기, 제령 7호 위반, 강도, 상해죄 등으로 징역 2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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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룡장터 만세운동 기념비
본 비는 1919년 4월 4일 단장면 표충사 스님 및 표충학원 학생들이 주도하고 수천 명의 민중이 만세 시위를 전개한 것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것이다. 1919년 2월 말경 범어사의 승려 대표 7명은 한용운의 지시로 상경하여 서울에서의 만세운동에 참가한 뒤 귀향하여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3월 20일, 통도사 승려 50명이 밀양군 단장면 표충사로 와서 그곳 승려들과 비밀회합을 갖고 만세 시위를 협의하였다. 이들은 거사 일을 4월 4일 태룡리 장날로 정하였다.드디어 4월 4일 태극기를 가지고 온 장석준 등을 비롯한 표충학원 학생들은 재빨리 이를 승려들과 모여드는 장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정오 경에 5,000여 명의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오후 12시 30분 이장옥, 이찰수, 오학성, 손영식, 김기봉(김성흡), 구연운, 오응석 등 표충사 승려들이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높이 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하자 군중들은 일제히 여기에 호응하여 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시위대는 그곳 헌병주재소로 몰려갔다. 주재소는 군중들의 투석으로 유리창, 지붕, 벽 등이 파괴되었다. 이에 밀양 헌병분견대로부터 일본군 헌병이 급파되어 이들의 발포로 오후 1시 30분 군중들은 해산하였다.무자비한 일본군 헌병의 탄압은 군중들의 의분을 높여 다음 날 오후 2시까지 철통같은 일본 군경의 경계 속에서도 군중들은 수차례에 걸쳐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그러나 일본군 응원부대의 도착으로 시위는 더 이상 계속되지 못했다. 결국 이날의 만세 시위로 364명이 검거되고 그 가운데 71명이 재판을 받은 끝에 이장옥은 징역 5년, 오학성, 손영식은 징역 3년, 이찰수, 김성흡은 징역 2년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위와 같이 표충사 및 표충학원 학생들을 비롯해 만세운동에 참여한 이들의 숭고한 정신을 널리 알리고 기억하고자 2005년에 본 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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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차정 묘
박차정(1910-1944)는 부산광역시의 독립운동가이다. 1924년 5월 조선소년동맹(朝鮮少年同盟) 동래지부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한편, 동래(東萊) 일신(日新)여학교에 재학 중 조선청년동맹(朝鮮靑年同盟) 동래지부 집행위원장인 숙부 박일형의 권유로 조선청년동맹 및 근우회(槿友會) 동래지부 회원, 동래노동조합 조합원, 신간회 동래지회 회원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였다.1929년 3월 일신학교를 졸업한 뒤, 동년 7월 서울 수운회관(水雲會館)에서 개최된 근우회 제2회 전국대회에 동래지부 대의원 자격으로 참석하여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동년 9월에는 조사연구부장, 상무위원, 선전 및 출판 부장 등의 직책을 맡아 여성들의 민족운동 활성화에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또한 동년 12월에는 근우회 중앙간부들과 함께 서울 시내의 각 여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광주학생운동 동조 시위를 주도하여 전국적으로 반일 학생운동으로 확산시키다가 일경에 붙잡혔다.그 후 1930년 1월 부산방직(釜山紡織) 파업 사건을 주도하다가 동래에서 붙잡힌 박차정은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으나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출옥 후 1930년 2월에 중국 북경으로 망명한 박차정은 1931년 의열단장(義烈團長) 김원봉을 만나 결혼하고 의열단 단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2년 의열단이 한중 연합항일투쟁의 일환으로, 장개석의 도움을 받아 남경(난징)에 위치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中國中央陸軍軍官學校) 교외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를 설립하자 제1기 여자부 교관으로 선정되어 사관생도 양성을 담당하였다. 1935년 6월에는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부녀부(婦女部)를 담당하고, 1936년 7월에는 이청천의 처 이성실과 함께 민족혁명당원 가족들을 규합할 목적으로 남경조선부인회(南京朝鮮婦人會)를 조직하여 일선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그 후 1937년 11월 의열단의 한중민족연합전선(韓中民族聯合戰線)의 일환으로 파견된 박차정은 대일본 라디오방송을 통해 선전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1938년 4∼5월경에는 기관지 『조선민족전선(朝鮮民族戰線)』에 「경고, 일본의 혁명대중」, 「조선부녀와 부녀운동」이라는 글을 투고하여 총체적인 무장 궐기를 촉구하였다.그 후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창설되자,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婦女服務團)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선임되어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하다가 1939년 2월 강서성 곤륜산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하던 중 부상을 입었다. 그 후 부상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1944년 5월 27일 중경에서 서거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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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관 기적비 안내판
이상관(1891-1936)은 경상남도 밀양의 독립운동가이다. 1925년 중국 남만주(南滿洲) 환인현(桓仁縣) 일대에서 정의부(正義府) 지방행정부(地方行政部) 환인남구총관(桓仁南區總管)으로 활동하였다. 1935년부터는 국민부(國民府) 산하의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중앙집행위원(中央執行委員) 및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재정 부장(財務 部長)으로 활동하였다. 1936년 1월에는 조선혁명군 제2회 군민대표회의(軍民代表會議)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1937년 1월, 일본군 동변도특별공작부(東邊道特別工作部)에 의해 체포되어 피살당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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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수 묘
이장수(1897-1960)는 경상남도 밀양 사람으로, 1919년 3월 13일 경남 밀양군 밀양 장날에 윤소룡(尹小龍) 등과 함께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밀양 장날의 만세운동은 윤세주, 윤치형 등이 광무황제(光武皇帝, 고종) 인산(因山)에 참례하였다가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와 이 사실을 동화학교(同和學校) 교장 전홍표에게 전하면서 추진되었다. 전홍표는 밀양지역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을 쏟았으므로, 많은 청년들이 그를 따랐다. 그리하여 이장수 등은 전홍표의 지도에 따라 만세운동 계획을 진행시켜 갔다. 이들은 3월 13일 밀양 읍내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독립선언서를 밀양면사무소와 부북면사무소 등지에서 등사판을 몰래 가져와 위북산(偉北山)에서 밤을 새워 수백 매를 인쇄하는 한편 수백 개의 태극기도 제작하였다. 거사 당일 오후 1시 30분에 이장수 등 중심인물들은 윤세주의 독립선언서 낭독에 이어 미리 준비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포하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때 장터에는 수천의 군중이 운집하여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이날 이장수는 시위대의 선봉에 서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다가 부산으로부터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해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4월 14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항일의지를 굽히지 않고 독립운동의 방도를 모색하던 중 1920년 10월 고인덕, 최수봉 등과 함께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한 뒤 1920년 12월 최수봉이 추진하던 밀양경찰서 폭파 의거를 지원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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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규 추모비
황상규(1891-1931)는 경남 밀양 사람이다. 일찍이 교육사업에 뜻을 두고 밀양에서 고명학원(高明學院)에 교사로 재직하면서 ≪동국사감(東國史鑑)≫이란 역사 교재를 저술하였다. 또한 전홍표가 경영하던 동화학원(東化學院)을 인수하여 청년학도 200여 명을 배출시켰다. 그러나 일경의 탄압에 의해 1918년 만주(滿洲) 길림(吉林)으로 망명하였다. 이곳에는 일찍부터 여준, 유동열, 김동삼, 김좌진 등의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이 있어서, 이들과 함께 3·1독립선언서에 앞서 독자적으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발표하고, 1919년 4월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에 가담하여 회계과장(會計課長) 일을 맡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리고 황상규는 1919년 11월 9일 김원봉 등과 함께 의열단을 조직하여 일제 기관의 파괴와 침략자 및 매국노의 암살 등을 꾀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김원봉, 이성우 등은 중국 상해(上海)에서 필요한 폭탄과 권총 등을 구입하였고, 1920년 5월 13일 황상규는 곽재기 등과 함께 서울에 잠입하여 거사 대상을 물색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경기도 경찰부에 탐지되어 결국 동년 6월 한인 형사 김태석(金泰錫)에게 모두 붙잡히고 말았다. 1921년, 7년 징역형을 선고받은 그는 만기 출옥 후에도 조국광복 투쟁에 매진하여, 신생활사(新生活社)를 창건하고 신간회(新幹會) 중앙간부,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간부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20년대 후반부터 1931년 9월 1일 고향에서 별세하기까지 향리에 노동야학원(勞動夜學院)과 여자야학원(女子夜學院)을 설립하여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