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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도석 흉상, 시비
명도석(1885~1954)은 경남 마산(馬山) 사람이다. 1919년 3월 12일 경남 마산의 만세시위를 추진하기 위해 최용규(崔龍奎) 등과 사전협의하여 3월 21일 마산 장날을 기하여 거사키로 작정하고 당일의 시위를 위한 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며 행진 시위하게 하였다. 1920년 가을 미국에서 항일활동을 펴던 박용만(朴容萬)의 밀사와 중국 봉천성(奉天省) 안동(安東)에서 만나던 중 일경에게 붙잡혀 6개월간 구류되었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1921년 7월 20일 마산 노동야학의 교사가 되어 청소년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주며 항일교육에 힘썼다. 또한 1927년 7월 20일 신간회(新幹會) 마산지회창립대회(馬山支會創立大會)에서 간사(幹事)로 선출되고 1929년 1월 28일 신간회 마산지회 정기총회에서 지회장(支會長)으로 선임되었으며, 1930년 3월 31일 제3회 정기총회에서 집행위원이 되어 신간회(新幹會) 해소시까지 활동하였다. 1940년 2월 일제는 소위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걸고 민족말살을 강행하기 위한 방편으로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하였으나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민족정신을 고수하였다. 1944년 8월 그는 여운형(呂運亨)의 주도로 전국에 걸쳐 결성된 건국동맹(建國同盟) 경상남도 조직책으로 위촉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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쌈지공원 애국지사 안내판
일제강점기, 마산 지역도 여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억압과 수탈이 심한 곳이었다. 특히 항구도시라는 지역 특성상 상권과 관련한 침탈이 많았는데, 동양 척식 주식회사(東洋拓植株式會社)를 기반으로 마산 출장소 설치, 토지 박탈, 대일 미곡수출, 소비성 물품의 수출입항화 등이 자행되었다. 일제는 경제 침탈과 아울러 각종 학교의 설립을 통해 식민지화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마산에는 합병 이전부터 공립 마산 심상 소학교·마산 소학교·사립 일어 학교 등이 세워졌으며, 합병 이후에는 1915년에 마산 실과 고등 여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런 학교에서의 교육은 처음부터 조선인을 위한 교육과는 무관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민족 교육을 실시할 민족 학교 설립이 절실히 요구되었고 마산 최초의 민족 사학으로 창신 학교가 설립되었다. 창신 학교는 국권 회복과 근대화 달성을 위한 실력 양성과 민족의식 고취를 교육 목표로 마산 지역의 민족 교육 담당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정규 학교 이외에 야학도 민족 의식과 자주 독립을 고취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마산의 노동야학은 지역 주민 옥기환·구성전 등이 자금을 출자하고 명도석·김명규·나인한·팽삼진 등이 교사로 참여하여 1907년 6월 10일 개교하였다. 노동 야학의 민족적 성격의 교육은 마산의 3·1 운동에서 앞장서 투쟁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한편, 1915년 1월 조직된 비밀 결사 단체인 조선 국권 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의 활동도 마산 3·1 운동의 또 하나의 배경으로 들 수 있다. 조선 국권 회복단은 박상진·윤상태·서상권·배중세·이시영 등 영남 지역의 자산가·혁신 유림·지식인들이 경북 달성에서 독립군 지원을 목적으로 조직한 항일 운동 단체였다. 마산에는 국권 회복단 지부가 설치되어 지부장 안확을 비롯하여 이형재·변상태·김용환 등이 활동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3·1 운동이 일어나자 마산의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현재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상남동에는 마산 항일 운동의 핵심 독립운동 인물들의 정신을 기리는 의미에서 활동 내용을 간략히 서술한 안내판이 세워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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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기념탑(이령분교)
본 3.1독립운동기념탑은 1919년 3월 9일 연개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조국 독립을 외친 애국지사들의 공적을 기념하는 사적이다. 본 탑이 세워진 곳은 이령분교로, 이곳은 칠북 3.9연개장터 독립만세운동의 발상지이다. 탑의 뒤쪽으로 만세운동에 관한 설명이 적힌 병풍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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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환, 송병선, 송병순 사당(성암사)
성암사는 한말의 우국지사 이주환과 그의 스승인 송병선, 송병순의 제사를 모시는 사당이다. 이주환(1854~1919)은 경상남도 거창(居昌) 사람이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일제에게의 세금(稅金)납부를 거부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군청에 호출되자 당시 거창군수 유상범(兪尙範)에게 「나라가 망하고 국왕이 업거늘 누구에게 세금을 바치느냐」고 꾸짖고, 「너같은 친일파는 나의 뜻을 꺾지 못한다」고 힐책하였다. 일제 헌병대가 그를 연행하여 강제로 무인(拇印)을 찍히자 귀가 후에 「자귀」로 자기의 엄지손가락을 절단해 버렸다. 1919년 1월 21일 광무황제가 서거한 소식을 듣고 흰 갓을 쓰고 선영에 참배한 다음 면사무소에 가서 호적 열람을 요구하여 찢어 버리고 거창읍 침류정(枕流亭)에서 사세시(辭世詩) 1편을 남기고 「자귀」로 목을쳐서 자결하였다고 한다. 송병선(1836~1905)은 충청남도 회덕(懷德)에서 태어났다. 학행으로 천거 받아 서연관(書延官)과 경연관(經延官)을 지내었다. 1882년에 공조참판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충청북도 옥천(沃川)에 내려가 정자를 짓고 유학을 가르치면서 세상일을 잊고 지냈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 소식을 들은 송병선은 나라가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고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5적의 처단과 을사조약의 파기를 건의하였으며, 을사조약 반대 투쟁을 계속하다가 경무사 윤철규(尹喆奎)에게 인치(引致)되어 강제로 향리에 호송되었다. 이에 국권을 빼앗김에 통분하여 세차례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드리는 유서를 남겨 놓고 자결 순국하였다. 유서에서는 을사5적의 처형과 을사조약의 파기 및 의(義)로서 궐기하여 국권을 찾을 것 등을 호소하였다. 고종은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06년 2월에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송병순(1839~1912)은 을사조약을 반대하여 순절한 송병선(宋秉璿)의 아우이다. 일제가 1905년 11월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고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이에 대한 반대투쟁을 전개하여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을사5적을 성토하는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지어 전국 유림에게 배포하고 국권회복에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1906년에는 충청북도 영동(永同)군 학산(鶴山)면에 강당(講堂)을 건립하여 수백 명에게 민족독립사상을 교육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하여 여러 번 자결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두문불출하며 망국의 슬픔을 시로써 달래었다. 1912년 일제 헌병이 소위 은사금(恩賜金)을 가져 왔으나 거절했으며, 같은 해 일제가 회유책으로 경학원(經學院) 강사로 천거하자 이를 거절한 다음 유서를 남기고 독약을 마시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충절을 기리어 이주환에게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 송병선에게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 송병순에게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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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 독립만세운동, 이태준 조형물
본 조형물은 3.20 군북 독립만세운동과 함안 출신 이태준의 공적을 기념하는 사적이다. 3.20 군북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0일 군북 장날을 기해 사회지도층을 비롯한 장꾼과 주민 등 5000명이 넘는 군중이 가세해 일제에 항거한 만세의거로 거센 항거에 놀란 일제가 대포·포대 병력까지 동원해 진압에 급급했던 함안의 자랑스런 만세의거다. 3·1만세운동 기간 중 사망·부상자가 50여 명에 이르러 전국에서 다섯번째로 큰 희생을 치렀고, 일본군경과 민간인 사상자 수가 전국에서 최고일 정도로 다른 지역의 만세운동을 압도했던 대규모 만세운동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태준(1883~1921)은 경남 함안(咸安) 출신으로, 의사(醫師)로 몽고(蒙古)수도 고륜(庫倫)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던 중, 1918년 9월 김규식(金奎植)이 파리강화회의 참석에 필요한 여비를 마련키 위해 몽고로 오자 그에게 독립운동자금 2천 달러를 제공하여 활동을 도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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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수 순국사적비
문태수(1880~1913) 의병장은 경남 안의(安義) 출신으로, 이명은 문태서이다. 원래 기골이 장대하고 재주가 탁월하여 일찍부터 글을 배워 문리를 통달하였으며, 금강산에 들어가 병서(兵書)를 익히기도 하였다. 1905년 상경하여 면암 최익현(崔益鉉)을 예방하였으며, 격문을 내어 의병을 모집할 방책을 상의하고 호남지방으로 내려가서 지리산에 들어가 거의(擧義)하였다. 무주(茂朱)에서 의병 수십 명을 이끌고 덕유산으로 가던 중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였다. 그 후 1906년 9월 중순경에 장수양악(長水陽岳)에서 박춘실(朴春實)을 만나 그를 선봉장으로 삼고 의병진을 합세하여 계속 전투를 전개하면서 팔공산(八公山)으로 들어갔다. 9월 하순에 장수읍을 함락시키고 일본군과 오래 교전하여 적군 30여 명을 사살하였지만 아군도 7명의 전사자를 냈다. 이 접전에서 일본군의 무기 40여 정을 노획하고 적군을 추격하여 무주 구천동에 이르러 김성범(金誠範)을 중군장으로 삼았다. 1907년 1월에 무주 부남면 고창곡(高昌谷)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적군 40여 명을 사살, 총기 50여 정을 빼앗은 뒤 덕유산 원통사(圓通寺)로 들어가니, 강원도 원주 사람 이병열(李秉烈) 등 7명이 와서 무기를 제조하는 등 협조하였다. 그 해 12월에 양주에서 각도의 의병진이 모일 때 호남군 100여 명을 이끌고 합세하니 호남창의대장에 추대되어 서울로의 진격작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듬해 1908년에는 무주 덕유산을 근거지로 영남·호남 및 호서일대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2월 28일 60명의 의병을 이끌고 무주 주재소를 급습하여 적 5명을 사살하고 적군에게 체포되었으나 극적으로 탈출하였다. 또한 4월에는 부하 150명을 통솔하고 장수읍(長水邑)을 공격하고 일본군 다수를 살상하였으며, 총기 등을 획득하고 주재소, 군아(郡衙) 등을 불질렀다. 이어 1909년 1월에는 지례군(知禮郡) 소재 대덕산(大德山)에서 안의군 방면으로 의병진을 이동시키고, 4월 24일에는 4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용담군(龍潭郡) 이동면 장전리(長田里)를 공격하였다. 무주군민들은 이러한 문태수의 항일전공을 기리기 위해 1909년 4월에 공덕비를 세웠으나 일본경찰에 의해 철거되고 말았다. 그 해 5월 8일에는 남원군 문성(文城) 동북지역에서 100여 명의 부하들과 더불어 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8월 중순경에도 의병 수십 명을 인솔하고 전라도에서 충북의 영동(永同)·청산(靑山)·옥천(沃川) 등의 지역으로 진군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어 10월 30일에 경부선 이원역(伊院驛)을 습격, 방화하고 일본군 3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11월에는 무주군을 근거로 영동·옥천·청산·금산(錦山) 등에서 항일전을 벌여 적군을 다수 사살하고 총기를 노획하였다. 또한 1909년 12월에도 무주를 중심으로 주변 제지방에서 격렬한 전투를 계속 전개하였다. 이듬해인 1910년 대군을 휘하에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여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위시하여 일본군을 도륙코자 계획을 세웠으나 적이 미리 정보를 입수하여 각도, 각 항구 등에 헌병, 수비대, 기마병 등 만여 명을 배치하여 방어에 진력하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재차 덕유산으로 들어가 훗일을 계획하다가 경술합방의 비통한 소식을 듣고 울분을 이기지 못하였다. 1911년 8월 17일에 덕유산 아래 매부의 집으로 잠시 내려가 매부의 지인(知人) 조기래(曺基來)와 함께 담화하던 중 일본군에 노출되어 포위·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진주로 압송되었다가 대구감옥으로 이송, 다시 서울로 옮겨졌으며, 시종 기개를 굽히지 않다가 1913년 2월 4일 옥중에서 자결하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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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수 유적지
문태수(1880~1913) 의병장은 경남 안의(安義) 출신으로, 이명은 문태서이다. 원래 기골이 장대하고 재주가 탁월하여 일찍부터 글을 배워 문리를 통달하였으며, 금강산에 들어가 병서(兵書)를 익히기도 하였다. 1905년 상경하여 면암 최익현(崔益鉉)을 예방하였으며, 격문을 내어 의병을 모집할 방책을 상의하고 호남지방으로 내려가서 지리산에 들어가 거의(擧義)하였다. 무주(茂朱)에서 의병 수십 명을 이끌고 덕유산으로 가던 중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였다. 그 후 1906년 9월 중순경에 장수양악(長水陽岳)에서 박춘실(朴春實)을 만나 그를 선봉장으로 삼고 의병진을 합세하여 계속 전투를 전개하면서 팔공산(八公山)으로 들어갔다. 9월 하순에 장수읍을 함락시키고 일본군과 오래 교전하여 적군 30여 명을 사살하였지만 아군도 7명의 전사자를 냈다. 이 접전에서 일본군의 무기 40여 정을 노획하고 적군을 추격하여 무주 구천동에 이르러 김성범(金誠範)을 중군장으로 삼았다. 1907년 1월에 무주 부남면 고창곡(高昌谷)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적군 40여 명을 사살, 총기 50여 정을 빼앗은 뒤 덕유산 원통사(圓通寺)로 들어가니, 강원도 원주 사람 이병열(李秉烈) 등 7명이 와서 무기를 제조하는 등 협조하였다. 그 해 12월에 양주에서 각도의 의병진이 모일 때 호남군 100여 명을 이끌고 합세하니 호남창의대장에 추대되어 서울로의 진격작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듬해 1908년에는 무주 덕유산을 근거지로 영남·호남 및 호서일대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2월 28일 60명의 의병을 이끌고 무주 주재소를 급습하여 적 5명을 사살하고 적군에게 체포되었으나 극적으로 탈출하였다. 또한 4월에는 부하 150명을 통솔하고 장수읍(長水邑)을 공격하고 일본군 다수를 살상하였으며, 총기 등을 획득하고 주재소, 군아(郡衙) 등을 불질렀다. 이어 1909년 1월에는 지례군(知禮郡) 소재 대덕산(大德山)에서 안의군 방면으로 의병진을 이동시키고, 4월 24일에는 4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용담군(龍潭郡) 이동면 장전리(長田里)를 공격하였다. 무주군민들은 이러한 문태수의 항일전공을 기리기 위해 1909년 4월에 공덕비를 세웠으나 일본경찰에 의해 철거되고 말았다. 그 해 5월 8일에는 남원군 문성(文城) 동북지역에서 100여 명의 부하들과 더불어 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8월 중순경에도 의병 수십 명을 인솔하고 전라도에서 충북의 영동(永同)·청산(靑山)·옥천(沃川) 등의 지역으로 진군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어 10월 30일에 경부선 이원역(伊院驛)을 습격, 방화하고 일본군 3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11월에는 무주군을 근거로 영동·옥천·청산·금산(錦山) 등에서 항일전을 벌여 적군을 다수 사살하고 총기를 노획하였다. 또한 1909년 12월에도 무주를 중심으로 주변 제지방에서 격렬한 전투를 계속 전개하였다. 이듬해인 1910년 대군을 휘하에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여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위시하여 일본군을 도륙코자 계획을 세웠으나 적이 미리 정보를 입수하여 각도, 각 항구 등에 헌병, 수비대, 기마병 등 만여 명을 배치하여 방어에 진력하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재차 덕유산으로 들어가 훗일을 계획하다가 경술합방의 비통한 소식을 듣고 울분을 이기지 못하였다. 1911년 8월 17일에 덕유산 아래 매부의 집으로 잠시 내려가 매부의 지인(知人) 조기래(曺基來)와 함께 담화하던 중 일본군에 노출되어 포위·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진주로 압송되었다가 대구감옥으로 이송, 다시 서울로 옮겨졌으며, 시종 기개를 굽히지 않다가 1913년 2월 4일 옥중에서 자결하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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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수 태지비
문태수(1880~1913) 의병장은 경남 안의(安義) 출신으로, 이명은 문태서이다. 원래 기골이 장대하고 재주가 탁월하여 일찍부터 글을 배워 문리를 통달하였으며, 금강산에 들어가 병서(兵書)를 익히기도 하였다. 1905년 상경하여 면암 최익현(崔益鉉)을 예방하였으며, 격문을 내어 의병을 모집할 방책을 상의하고 호남지방으로 내려가서 지리산에 들어가 거의(擧義)하였다. 무주(茂朱)에서 의병 수십 명을 이끌고 덕유산으로 가던 중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였다. 그 후 1906년 9월 중순경에 장수양악(長水陽岳)에서 박춘실(朴春實)을 만나 그를 선봉장으로 삼고 의병진을 합세하여 계속 전투를 전개하면서 팔공산(八公山)으로 들어갔다. 9월 하순에 장수읍을 함락시키고 일본군과 오래 교전하여 적군 30여 명을 사살하였지만 아군도 7명의 전사자를 냈다. 이 접전에서 일본군의 무기 40여 정을 노획하고 적군을 추격하여 무주 구천동에 이르러 김성범(金誠範)을 중군장으로 삼았다. 1907년 1월에 무주 부남면 고창곡(高昌谷)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적군 40여 명을 사살, 총기 50여 정을 빼앗은 뒤 덕유산 원통사(圓通寺)로 들어가니, 강원도 원주 사람 이병열(李秉烈) 등 7명이 와서 무기를 제조하는 등 협조하였다. 그 해 12월에 양주에서 각도의 의병진이 모일 때 호남군 100여 명을 이끌고 합세하니 호남창의대장에 추대되어 서울로의 진격작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듬해 1908년에는 무주 덕유산을 근거지로 영남·호남 및 호서일대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2월 28일 60명의 의병을 이끌고 무주 주재소를 급습하여 적 5명을 사살하고 적군에게 체포되었으나 극적으로 탈출하였다. 또한 4월에는 부하 150명을 통솔하고 장수읍(長水邑)을 공격하고 일본군 다수를 살상하였으며, 총기 등을 획득하고 주재소, 군아(郡衙) 등을 불질렀다. 이어 1909년 1월에는 지례군(知禮郡) 소재 대덕산(大德山)에서 안의군 방면으로 의병진을 이동시키고, 4월 24일에는 4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용담군(龍潭郡) 이동면 장전리(長田里)를 공격하였다. 무주군민들은 이러한 문태수의 항일전공을 기리기 위해 1909년 4월에 공덕비를 세웠으나 일본경찰에 의해 철거되고 말았다. 그 해 5월 8일에는 남원군 문성(文城) 동북지역에서 100여 명의 부하들과 더불어 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8월 중순경에도 의병 수십 명을 인솔하고 전라도에서 충북의 영동(永同)·청산(靑山)·옥천(沃川) 등의 지역으로 진군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어 10월 30일에 경부선 이원역(伊院驛)을 습격, 방화하고 일본군 3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11월에는 무주군을 근거로 영동·옥천·청산·금산(錦山) 등에서 항일전을 벌여 적군을 다수 사살하고 총기를 노획하였다. 또한 1909년 12월에도 무주를 중심으로 주변 제지방에서 격렬한 전투를 계속 전개하였다. 이듬해인 1910년 대군을 휘하에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여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위시하여 일본군을 도륙코자 계획을 세웠으나 적이 미리 정보를 입수하여 각도, 각 항구 등에 헌병, 수비대, 기마병 등 만여 명을 배치하여 방어에 진력하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재차 덕유산으로 들어가 훗일을 계획하다가 경술합방의 비통한 소식을 듣고 울분을 이기지 못하였다. 1911년 8월 17일에 덕유산 아래 매부의 집으로 잠시 내려가 매부의 지인(知人) 조기래(曺基來)와 함께 담화하던 중 일본군에 노출되어 포위·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진주로 압송되었다가 대구감옥으로 이송, 다시 서울로 옮겨졌으며, 시종 기개를 굽히지 않다가 1913년 2월 4일 옥중에서 자결하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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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영준 묘
옥영준(1892-1957)은 1906년 부친을 따라 만주로 건너갔으며, 1919년 전덕원(全德元)이 대한독립단원 수십명을 거느리고 국내에 들어와 활동할 때 함께하였다. 평북 용천군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후에는 다시 만주로 건너가 활동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 (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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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종찬 추념비
주종찬(1893-1933)은 1919년 4월 3일 거제군(巨濟郡) 이운면(二運面, 지금의 장승포) 옥포리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대한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적기(赤旗) 7개를 옥포리 시장에 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많은 군중이 이에 호응하여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일경의 탄압으로 군중은 해산되고 그는 검거되었으며,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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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3.1운동 기념탑
거제3.1운동기념탑은 거제지역의 뜻있는 인사 30여명이 주축이 되어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3.1운동이 거제지역에서도 봉기되었음을 기념하고 향토를 지킨 위대한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2001년 6월 건립한 탑이다. 거제의 애국지사들은 3.1운동과 국장에 참여하고 귀향하여 수천장의 태극기를 만들어 4월 3일 아주장날에 대한독립만세의 깃발을 들고 앞장서니 주민들도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으며, 4월 6일까지 아주, 옥포 등지에서 연 2천 5백 여명이 시위에 참여하였다. 1914년 거제군은 통영군에 통폐합되어 일본인 군수 관하에 어장과 어업권을 빼앗기고 설움과 압박을 당하였으니 선조들의 애국독립운동은 계속 되어졌다. 거제인으로 기미독립운동을 주도한 윤택근, 이주근, 이인수, 이주목, 주종찬, 권오진 등은 일제에 굴하지 않고 체포되어 징역을 살았으며 이공수, 이주무, 윤사인 등도 3.1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민족의 자주독립을 지키려는 충절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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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포교회- 거제옥포지역 3.1만세운동 발원지
거제옥포지역 3.1만세운동 발원지 옥포교회기념판은 경남 거제에 있으며, 옥포교회가 거제옥포지역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의 발원지라는 것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판이다. 1919년 주종찬집사는 옥포교회 교인인 옥찬영의 집에서 시위를 계획하였고, 당시 주금주(1896년 옥포교회 설립자)씨의 정신적 지도아래 서당 학동들을 동원하여 당시 규모로 대대적인 시위를 감행하였고 주종찬 이하 시위의 배후인들은 대다수가 옥포교회 교인들로 구성되었다. 주종찬(1893-1933)은 1919년 4월 3일 거제군(巨濟郡) 이운면(二運面, 지금의 장승포) 옥포리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대한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적기(赤旗) 7개를 옥포리 시장에 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많은 군중이 이에 호응하여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일경의 탄압으로 군중은 해산되고 그는 검거되었으며,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