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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56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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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 집
최준(1884 - 1970)은 독립유공자 최완의 형이다. 최준은 영남의 대지주로서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에 군자금을 제공했고, 대한광복회에서 재무를 맡아 항일투쟁을을 전개했으며, 백산 안희제 선생과 함께 백산상회 설립을 결의하고 대표에 취임하고 백범 김구 선생에게 거액의 군자금을 보냈으며, 경주고적보존회 설립, 동경통지 편찬 등 신라문화의 유산을 지키고 알리는 데 기여했다. 또한 최준은 해방 직후 나라를 이끌어 나갈 인재를 길러야 한다며 모든 재산을 기증하여 계림대학과 대구대학을 설립하였고 이는 오늘날 영남대학교가 되었다. 최준은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심한 옥고를 치렀다. 1990년 정부는 선생의 공적의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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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 묘
박상진(1884 - 1921)의 '휘'는 '상진'이고 '호'는 '고헌'이다. 박상진은 판사시험에 합격하였으나 부임을 거부하고 신의주에 여관을 설치하여 항일운동을 시작했고, 대구에 상덕태상회를 개설하여 만주 이민사업을 추진했다. 1913년 대한광복회를 결성하여 총사령에 추대되면서 상업조직을 8도 각지에 결성했으며 신흥무관학교를 지원했다. 1918년 일경에 체포되어 4년의 옥고 끝에 순국했다. 1063년 정부에서 박상진의사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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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 묘
최준(1884 - 1970)은 독립유공자 최완의 형이다. 최준은 영남의 대지주로서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에 군자금을 제공했고, 대한광복회에서 재무를 맡아 항일투쟁을을 전개했으며, 백산 안희제 선생과 함께 백산상회 설립을 결의하고 대표에 취임하고 백범 김구 선생에게 거액의 군자금을 보냈으며, 경주고적보존회 설립, 동경통지 편찬 등 신라문화의 유산을 지키고 알리는 데 기여했다. 또한 최준은 해방 직후 나라를 이끌어 나갈 인재를 길러야 한다며 모든 재산을 기증하여 계림대학과 대구대학을 설립하였고 이는 오늘날 영남대학교가 되었다. 최준은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심한 옥고를 치렀다. 1990년 정부는 선생의 공적의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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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3.1독립만세운동 발상지 표지석
표지석은 경상북도 경주시에서 일어난 '경주3.1운동'을 기리는 표지석이다. 위 사적은 경주 봉황상가 안에 위치해 있다. 경주3.1운동은 노동리교회 신자를 중심으로 계획되었으나 발각됐다. 하지만 군중들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며 종교인 및 수많은 읍민이 참가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2022년 경주시에서 이들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표지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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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규 묘
경상북도 경주시에 위치한 애국지사 일성 조경규 묘소이다. 조경규(1902 - 1988)의 이명은 조인좌이며, '마산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1926년 광복단에 입단하여 자금조달 임무를 맡다가 체포되어 징역 3년 6개월형을 받았다. 한국전쟁 이후 '대자원'을 설립해 전쟁고아를 돌봤다. 광복회 대구, 경북회 연합회장 등을 역임하며 광복과 경주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헌신하다가1988년 타계했다. 경주시 석장동 산 입구에 조경규 묘소 표지석이 위치해 있고 묘소는 산속에 있는 금장대 부근에위치해 있다. 경주 황성공원에 조경규 기적비가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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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득 항일기공비
애국지사 김만득공 항일기공비이다. 김만득(1916 - 1950)의 본명은 '철해'이고 '휘'는 은열 40대손이다. 김만득은 일본유학 생활 중 차별대우로 분개하여 소란을 일으켰다가 혹독한 옥고를 치렀다. 중국 강서성 구강 주둔 일본군 군속으로 근무 중 1943년 탈출하여 광복군에 입대했고, 강남분대 대원으로 활동했다. 1990년 정부에서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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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공적비
김종철(1888 - 1941)은 3.1독립운동 이후 의용단에 가입했고 경남 일대에서 활동하며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붙잡혔지만, 일본인 순사를 사살하고 만주로 탈출한 뒤 의열단에 입단하여 1928년까지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90년 정부에서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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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 묘
최완(미상 - 미상)은 독립유공자 최준의 동생이다. 최완의 '휘'는 '완'이고, '자'는 '내수'이며. '초명'은 '영지'이다. 최완은 80여명의 애국지사와 함께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여 재무부위원으로 선출되어 조사원과 의정원의원 등을 역임하던 중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가 지병이 악화되어 운명했다. 1990년 정부에서 선생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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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정
용담정(龍潭亭)은 동학교조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가 무극대도(无極大道)를 깨닫고 동학을 창도한 곳으로 경주 구미산(해발 594m) 동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 용담정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가정리 최제우 유허지)에서 태어난 최제우는 10세 되던 해에 모친, 16세 되던 해에 부친을 여읜 후 무예를 익히거나 상업에 종사하였으며, 혼탁한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전국을 다니며 구도하다가 1854년에 부인 박씨의 고향이기도 했던 울산 유곡동(여시바윗골)으로 가서 초막을 짓고 도에 정진하였다. 여기서 금강산 유점사에 왔다는 이승(異僧)으로부터 이른바 을묘천서(乙卯天書)를 받는 기연을 얻기도 했으나, 득도하지 못한 채 1859년 10월 경주로 돌아와 이곳에서 기거하며 득도하기 위해 정진하였다. 이곳의 부지는 최제우의 조부 최종하(崔宗夏)가 그의 아들 최옥(崔鋈)의 학업을 위해 매입하였으며, 1815년에 최옥이 이곳에 용담서사(龍潭書舍)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울산에서 경주로 돌아온 최제우는 이곳을 용담정(龍潭亭)이라 하고 득도를 위해 정진하였다. 그러던 중 1860년 4월 5일 온몸이 떨리고 신선의 말씀이 들리는 신비체험을 하면서 득도에 성공하여 동학이 창도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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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 묘
최제우(1824 - 1864)는 조선 후기 시천주(侍天主)의 교리를 중심으로 한 동학을 창도한 종교창시자이다. 1861년 포교를 시작하였다. 곧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동학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었다. 동학이 세력을 얻게 되자 기존 유림층에서는 비난의 소리가 높아져 서학, 즉 천주교를 신봉한다는 지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톈진조약 후 영불연합군이 물러가서 조선침공의 위험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민심이 가라앉게 되자, 조정에서는 서학을 다시 탄압하게 되었으므로 1861년 11월 호남으로 피신을 가게 되었다. 1862년 3월 경주로 되돌아갈 때까지의 남원의 은적암(隱寂庵) 피신생활 중 동학사상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였다. 경주에 돌아와 포교에 전념하여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는데, 1862년 9월 사술(邪術)로 백성들을 현혹시킨다는 이유로 경주진영(慶州鎭營)에 체포되었으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석방을 청원하여 무죄방면되었다. 이 사건은 사람들에게 동학의 정당성을 관이 입증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신도가 더욱 증가하였으며, 포교방법의 신중성을 가져와 마음을 닦는 데 힘쓰지 않고 오직 이적만 추구하는 것을 신도들에게 경계하도록 하였다. 신도가 늘게 되자 그 해 12월 각지에 접(接)을 두고 접주(接主)가 관내의 신도를 다스리는 접주제를 만들어 경상도 · 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기도에까지 교세가 확대되어 1863년에는 교인 3,000여 명, 접소 13개 소를 확보하였다. 이 해 7월 제자 최시형(崔時亨)을 북접주인으로 정하고 해월(海月)이라는 도호를 내린 뒤 8월 14일 도통을 전수하여 제2대 교주로 삼았다. 관헌의 지목을 받고 있음을 알고 미리 후계자를 정한 것이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미 동학의 교세확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의 체포계책을 세우고 있었는데, 11월 20일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雲龜)에 의하여 제자 20여 명과 함께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철종이 죽자 1864년 1월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심문받다가 3월 10일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41세의 나이로 참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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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규 기적비
조경규(1902 - 1988)의 이명은 조인좌이며, '마산3.1운동'을 계기로독립운동에 참여했고, 1926년 광복단에 입단하여 자금조달 임무를 맡다가 체포되어 징역 3년 6개월형을 받았다. 한국전쟁 이후 '대자원'을 설립해 전쟁고아를 돌봤다. 광복회 대구, 경북회 연합회장 등을 역임하며 광복과 경주지역사회발전을 위해 헌신하다가1988년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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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회 활동지(효현교)
효현교는 광복회 활동의 기폭제 배경이 된 다리이다. 광복회는 1913년 고헌 박상진 의사에 의해 결성되었다. 광복회 총사령에는 박상진, 부사령에 이진룡이 선임되었지만 이진룡의 체포로 김좌진이 뒤를 이었다. 광복회는 국권회복과 공화제 실현을 목적으로 일본인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해만주에서 독립전사를 양성하고 무기를 구입하는 활동을 했고 이후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 등 전국으로 조직을 확대했다. 1915년 우재룡과 권영만이 효현교에서 일제가 징수한 세금을 운반하는 우편마차에서 거액의 세금을 탈취했고 이는 광복회원들에게 기폭제가 되었다.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에는 박상진의사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