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검색
TOTAL. 561건
-
이수악 집(존재 종택)
이 집은 이수악(1845 - 1927)선생의 종택이다. 이수악은 존재 이휘일의 8대손이며 종택은 정면 8칸, 측면 6칸의 ㅁ자형 살림집으로 조선후기 양반들의 가옥양식을 잘 보여 준다. 이수악의 자는 치숭, 호는 우헌이며, 개항기 영덕 출신의 의병이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나고 단발령(斷髮令)이 시행되자 전국 각지에서 유림들이 의병을 일으켰다. 이에 영해(寧海) 지역에서는 이수악 등의 유림들이 1896년 1월 22일 집강소(執綱所)를 조직하였고, 2월 11일 집강소를 바탕으로 영해의진을 결성하였다. 이수악은 집강소의 도집강(都執綱)을 맡았고, 영해의진에서는 창의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이수악의 영해의진은 지휘부와 병사조직이 완료된 1896년 3월 말경부터 전투를 시작하였다. 1896년 8월 사천평(沙川坪)에서 진을 치고 있을 때 관군의 급습을 받아 패퇴하였다. 그 후 이수악의 영해의진은 고종의 의병 해산령에 의해 해산하였다.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남만기 추모비
남만기(1892 - 1974)는 1892년 1월 23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창수면(蒼水面) 삼계동(三溪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영덕군의 만세시위는 3월 18일 영해면(寧海面) 성내동(城內洞) 장터에서 시작되었다. 영해면 북서쪽에 위치한 창수면의 삼계동과 오촌동(梧村洞) 주민 10여 명과 함께 영해장터의 만세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길을 나섰으나 시간상 영해장터 만세시위에 참가하기는 늦었다고 판단하고, 주민들과 창수경찰관주재소 앞에서 시위를 전개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이튿날인 3월 19일 오후 4시경에 200여 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창수경찰관주재소로 향하였다. 김재수(金在守)와 권덕명(權德明) 등은 커다란 태극기를 휘두르며 주재소 파괴를 명령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주재소의 사무실, 객사, 주임순사 숙사의 벽과 천정을 파괴하고 건물 내 집기와 서류들을 파손하였다. 시위대는 오후 7시경에 이르러 해산하였다. 일본 군경에 의해 만세시위 주도자 검거가 대대적으로 이뤄졌을 때 붙잡혔다. 1919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요, 공무집행방해, 상해, 건조물 손괴, 기물 손괴, 공문서 훼기,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박주억 집
박주억(1909 - 1934)은 1927년 6월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 산하 영양청년동맹의 석보지부(石保支部) 집행위원과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新幹會)의 영양지회(英陽支會) 집행위원을 지냈다.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거족적인 항일독립운동으로 발전하고 있던 1930년 2월 8일 그는이태을(李太乙)·박수봉(朴壽奉)·이돌몽(李乭蒙) 등의 동지와 함께 영양청년동맹의 석보지부회관에서 모임을 갖고 국내정세와 독립운동의 방안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일제의 총독정치는 한민족을 억압하여 자유를 구속하고 있다고 규정하였다. 또한 현재 광주학생운동의 양상을 볼 때 일제가 한국인 학생만을 구속하거나 퇴학처분하고 있으며 광주는 물론 전국에서 학생과 민중들이 함께 궐기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므로 석보면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을 펴야한다는데 뜻을 함께 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동년 2월 11일 석보면 원리동(院里洞)의 장날을 이용하여 거사하기로 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일제의 총독정치를 반대하는 격문 8백여매를 인쇄하여 거사 당일 장터에서 2백여명의 군중에게 배포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이일로 인하여 일경에 붙잡혀 1930년 4월 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이수악 집(갈암 종택)
갈암종택은 이수악 의병장이 항일 투쟁의 거점으로 활용했던 집이다. 이수악(1845 - 1927)의 자는 치숭, 호는 우헌이며, 개항기 영덕 출신의 의병이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나고 단발령(斷髮令)이 시행되자 전국 각지에서 유림들이 의병을 일으켰다. 이에 영해(寧海) 지역에서는 이수악 등의 유림들이 1896년 1월 22일 집강소(執綱所)를 조직하였고, 2월 11일 집강소를 바탕으로 영해의진을 결성하였다. 이수악은 집강소의 도집강(都執綱)을 맡았고, 영해의진에서는 창의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이수악의 영해의진은 지휘부와 병사조직이 완료된 1896년 3월 말경부터 전투를 시작하였다. 1896년 8월 사천평(沙川坪)에서 진을 치고 있을 때 관군의 급습을 받아 패퇴하였다. 그 후 이수악의 영해의진은 고종의 의병 해산령에 의해 해산하였다.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함양박공 의훈·의열·의연 사적비
박건(1880 - 1943)의 본명은 박의연, 이명은 박해사이며,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09년 아우 박의열과 함께 영릉의진에 참여하였다. 1912년 아우 박의열과 함께 이상룡(李相龍)·김동삼(金東三) 등을 따라 1912년 서간도 통화현(通化縣)으로 망명하였다. 1913년 10월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였으며, 1914년에는 하서구(下西溝)에서 남흥학교(南興學校)를 설립하였다. 1919년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이상룡·김동삼 등과 한족회(韓族會)를 조직하였으며,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3년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적기단(赤旗團) 대표로 참석하였으나, 의견 대립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만주로 돌아온 박건은 지린성[吉林省] 황기둔(黃旗屯)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1927년 3월 신숙(申肅) 등이 독립촉성회를 결성하기 위하여 전만대표자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이때 박건은 북만(北滿) 대표로 선출되었다. 1933년 중국 하얼빈[哈爾濱]에서 남자현(南慈賢)·이규동(李奎東) 등과 함께 일본 대사 무등신의(武藤信義)를 제거하기로 계획하였으나, 남자현이 체포되어 실패하였다. 1980년 정부는 박건에게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박의열(1889 - 1930)의 호는 하산, 이명은 박세진, 박하산이며,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형 박의연과 함께 신돌석(申乭石)이 이끄는 영릉의진에 참여하였고 1912년에 형과 함께 서간도 퉁화현[通化縣]으로 망명하였다. 1914년 퉁화현 하서구(下西溝)에서 남흥학교(南興學校)를 설립, 1919년 한족회(韓族會) 퉁화 지방 천가장(千家長)을 역임하는 등 한국 교민의 생활 안정과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2년 8월 통합 독립군 세력인 대한통의부 제1회 중앙 의회에서 통화총관소(通化總管所) 통화검찰감(通化檢察監)에 임명되었다. 1923년 대한통의부 통화총감(通化總監) 이기완(李基宛)의 지휘로 소대장 및 참사(參事)를 맡아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여 무기와 탄약을 탈취하기 위한 모의를 하였다. 1924년 중국 지린성[吉林省] 아청현(阿城縣) 주위안창(聚源昶)에서 동원학교(東源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어 민족교육에 주력하였으며, 1925년 남만주의 통합 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 부교(副校) 및 지방조직책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 북만주 빈장현[濱江縣] 8구(八區)에서 빈장정민소[濱江精米所]와 주허현[珠河縣] 하동(河東) 오길밀하(烏吉密河)에서 400여 일경(日耕)의 농장을 경영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31년 1월 7일 주허현(朱虛縣)[지금의 상지현(尙志縣)] 오길밀하(烏吉密河)라는 곳에서 공산주의자 조명(趙明)에 의해 피살되었다. 정부는 박의열에게 1977년 건국포장,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박의훈(1895 - 1983)의 호는 호산, 이명은 박명진이며,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13년 백형 박건과 중형 박의열을 따라 만주 환런현[桓仁縣]으로 이주하였다. 1917년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하였다. 1922년 대한통의부 제4중대원으로 입대하여 섭외 임무를 담당하였다. 1930년 5월 독립군 결사대원 50여 명과 함께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을 습격하였고, 1931년에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였다. 1933년 이청천(李靑天)·오광선(吳光鮮) 등과 함께 산해관(山海關)으로 이동하여 은신하였다. 1934년에는 하얼빈 교외 승덕가(承德街)에서 중국인과 함께 동풍태정미소(東豊泰精米所)를 경영하였다. 1936년 7월에는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서 학생 모집을 위해 파견 온 황인식(黃仁植)·김기대(金基大) 두 청년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여비를 마련해 주었다. 1945년 광복 이후 귀국하였다. 정부는 박의훈에게 1977년 건국포장,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신돌석 유적지
신돌석(申乭石)[1878~1908]의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순경(舜卿), 초명은 신돌선(申乭先), 본명은 신태호(申泰浩), 이명은 태홍(泰洪)·태을(泰乙)·대호(大浩)이다. 돌석은 아명이며, ‘태백산 호랑이’라고도 불렸다. 아버지 신석주(申錫柱)[신석주(申淅柱)]와 어머니 분성김씨(盆城金氏) 사이의 2남 2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신돌석은 어릴 때부터 남달리 체격이 장대하고 기운이 셌다. 신돌석이 의병을 처음 가담한 것은 1896년 전기의병 때이다. 의병 가담에 앞서 1895년 8월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났고, 11월에는 단발령(斷髮令) 공포되어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다. 그런 가운데 영해 지역에서는 영해의진이 조직되었는데, 당시 18세의 신돌석도 가담하여 중군장(中軍將)으로 활동하였다고 하나, 기록은 자세하지 않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다시 의병이 일어났다. 이에 신돌석은 1906년 4월 6일(음력 3월 13일) 무렵 고향에서 영릉의진(寧陵義陣)을 조직하고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1908년 12월 12일 순국할 때까지 2년 8개월 동안, 영덕과 경상북도 울진을 넘나들었으며, 경상북도와 강원도 남부의 일월산(日月山)과 동해안 일대를 무대로 활동하였다. 울진과 강원도 삼척에 터를 잡은 일제의 전초기지, 이를 지원하는 일본인 및 우편취급소, 통감부 말단 기관을 척결하는 활동을 하였다. 1907년 8월 정미조약으로 군대가 강제 해산되면서 의병운동은 더욱 열기를 띠게 된다. 신돌석은 이 무렵 영양·진보·청송·경주 등지에서 주된 항쟁을 펼쳤다. 1908년에는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 작전에 참여하기 위하여 잠시 북상하였다가 돌아왔다. 돌아온 뒤 평해·영양·울진·봉화 등지에서 유격전으로 일본군 수비대와 싸웠다. 당시 일본군이 “출몰(出沒)이 자재용이(自在容易)하다.”라고 평가할 만큼, 신돌석은 뛰어난 지휘력으로 영릉의진을 이끌었다. 1908년 겨울이 다가오자 신돌석은 만주로 이동하여 독립전쟁을 펼칠 계획을 세우고 자금 모집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1908년 11월 19일 새벽 영덕군 지품면 눌곡(訥谷), 세칭 누르실에서 김상렬(金相烈) 형제에게 피살되었다. 정부에서는 1962년 대통령장에 추서하였다.
-
신돌석 집
신돌석(申乭石)[1878~1908]의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순경(舜卿), 초명은 신돌선(申乭先), 본명은 신태호(申泰浩), 이명은 태홍(泰洪)·태을(泰乙)·대호(大浩)이다. 돌석은 아명이며, ‘태백산 호랑이’라고도 불렸다. 아버지 신석주(申錫柱)[신석주(申淅柱)]와 어머니 분성김씨(盆城金氏) 사이의 2남 2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신돌석은 어릴 때부터 남달리 체격이 장대하고 기운이 셌다. 신돌석이 의병을 처음 가담한 것은 1896년 전기의병 때이다. 의병 가담에 앞서 1895년 8월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났고, 11월에는 단발령(斷髮令) 공포되어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다. 그런 가운데 영해 지역에서는 영해의진이 조직되었는데, 당시 18세의 신돌석도 가담하여 중군장(中軍將)으로 활동하였다고 하나, 기록은 자세하지 않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다시 의병이 일어났다. 이에 신돌석은 1906년 4월 6일(음력 3월 13일) 무렵 고향에서 영릉의진(寧陵義陣)을 조직하고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1908년 12월 12일 순국할 때까지 2년 8개월 동안, 영덕과 경상북도 울진을 넘나들었으며, 경상북도와 강원도 남부의 일월산(日月山)과 동해안 일대를 무대로 활동하였다. 울진과 강원도 삼척에 터를 잡은 일제의 전초기지, 이를 지원하는 일본인 및 우편취급소, 통감부 말단 기관을 척결하는 활동을 하였다. 1907년 8월 정미조약으로 군대가 강제 해산되면서 의병운동은 더욱 열기를 띠게 된다. 신돌석은 이 무렵 영양·진보·청송·경주 등지에서 주된 항쟁을 펼쳤다. 1908년에는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 작전에 참여하기 위하여 잠시 북상하였다가 돌아왔다. 돌아온 뒤 평해·영양·울진·봉화 등지에서 유격전으로 일본군 수비대와 싸웠다. 당시 일본군이 “출몰(出沒)이 자재용이(自在容易)하다.”라고 평가할 만큼, 신돌석은 뛰어난 지휘력으로 영릉의진을 이끌었다. 1908년 겨울이 다가오자 신돌석은 만주로 이동하여 독립전쟁을 펼칠 계획을 세우고 자금 모집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1908년 11월 19일 새벽 영덕군 지품면 눌곡(訥谷), 세칭 누르실에서 김상렬(金相烈) 형제에게 피살되었다. 정부에서는 1962년 대통령장에 추서하였다.
-
박주억 집 터
박주억(1909 - 1934)은 1927년 6월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 산하 영양청년동맹의 석보지부(石保支部) 집행위원과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新幹會)의 영양지회(英陽支會) 집행위원을 지냈다.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거족적인 항일독립운동으로 발전하고 있던 1930년 2월 8일 그는이태을(李太乙)·박수봉(朴壽奉)·이돌몽(李乭蒙) 등의 동지와 함께 영양청년동맹의 석보지부회관에서 모임을 갖고 국내정세와 독립운동의 방안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일제의 총독정치는 한민족을 억압하여 자유를 구속하고 있다고 규정하였다. 또한 현재 광주학생운동의 양상을 볼 때 일제가 한국인 학생만을 구속하거나 퇴학처분하고 있으며 광주는 물론 전국에서 학생과 민중들이 함께 궐기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므로 석보면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을 펴야한다는데 뜻을 함께 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동년 2월 11일 석보면 원리동(院里洞)의 장날을 이용하여 거사하기로 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일제의 총독정치를 반대하는 격문 8백여매를 인쇄하여 거사 당일 장터에서 2백여명의 군중에게 배포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이일로 인하여 일경에 붙잡혀 1930년 4월 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이돈호 집(유우당)
이돈호(1868 - 1942)는 1919년 3월, 유림의 대표로 파리장서에 서명한 인물이다. 선생의 조카인 이병각 지사 역시 조지훈, 오일도, 조세림등과 더불어 항일애국시인으로 활약하였다.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은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한 호서유림과 곽종석(郭鍾錫)을 중심으로 한 영남유림 137명이 참여한 항일운동이었다. 파리장서의 요지는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광무황제(光武皇帝)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상북도 상주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1919년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붙잡히는 바람에 발각되었다. 이로써 이돈호도 일경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일제는 이들 유림이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었으므로 민족적 감정이 더욱 번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영양청년연맹 석보지부
영양청년동맹 석보지부(永陽靑年同盟石堡支部)는 석보면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청년 모임의 이름이다. 당시 김수봉(金壽鳳), 박수봉(朴壽奉), 박주억(朴周億), 이돌몽(李乭蒙), 이성암(李成岩), 이태을(李太乙), 이현량(李鉉良)이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1930년 2월 8일 회관에 모여 독립운동을 모의하고 석보면에서도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1930년 2월 11일 석보면 원리동 장날에 격문을 뿌리고 만세운동을 펼칠 것을 결의하였다. 이들은 원리장날에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규탄하고, 광주학생운동으로 체포된 학생들을 석방하라는 내용의 격문을 800여 장 배포하고, 만세운동을 펼쳤다. ‘영양격문사건’으로 보도된 이 만세운동은 영양청년동맹과 석보지부의 근간을 흔들었다. 이 때 체포된 이들은 영양청년동맹 석보지부 회원이자 신간회 영양지회 회원이었고 노동야학을 주도하던 인물이었다.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회원들은 모두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30년 3월 25일 방청이 금지된 상황에서 1차 공판이 열렸다. 박수봉(朴壽奉)·박주억(朴周億)·이태을(李太乙)·이돌몽(李乭蒙)은 징역 2년, 김수봉(金壽鳳)·이성암(李成岩)은 징역 1년 6개월, 이현량(李鉉良)은 징역 8월을 받았다. 이후 석보지부의 활동을 지원하였던 영양청년동맹도 그 활동이 자유로울 수 없어서 영양지역 청년회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
병암고택(유공자의 집)
김택진(1874 - 1961)은 일찍이 유학을 공부하였고, 명망 있는 여러 유학자와 교유하였다. 1910년 국권 피탈로 통분하던 중 김창숙(金昌淑)[1879~1962]을 중심으로 유림단의 독립청원운동이 전개되자 참여하였다. 유림단의 유림대표들은 1919년 3월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독립청원서」를 작성해서 보냈는데, 영주 지역에서는 김택진을 비롯해 김동진(金東鎭)[1867~1952]·정태진(丁泰鎭)[1876~1960] 등이 함께 서명하였다. 이 의거를 독립청원운동 또는 파리장서사건이라고 하는데, 김복한(金福漢)[1860~1924]을 중심으로 한 호서 유림과 곽종석(郭鍾錫)[1846~1919]을 중심으로 한 영남 유림 137명이 참여한 명실상부 유림단의 독립운동이었다.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의 내용은 일제가 저지른 만행, 명성황후 시해와 고종 광무황제의 독살 및 한국 국권의 찬탈 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 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세계만방에 주장하는 것이었다. 「독립청원서」는 유림대표 김창숙이 상하이를 거쳐 파리로 가져가려 했으나, 사정이 어려워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1881~1950]에게 우송되었으며, 각국 공사관과 국내의 각 향교에도 발송되었다. 그러나 이 일은 1919년 4월 2일 성주 지역의 3.1운동 전개 과정에서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곽종석을 비롯한 독립청원운동 관련자들이 대부분 체포되었다. 김택진도 이때 체포되어 유치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7년 신간회가 결성되자, 1927년 12월 신간회 영주지회의 제1회 대회에서 부회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김택진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
남자현 집(추모각)
남자현(1872 - 1933)은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군사기관과 농어촌을 순회하며 독립정신을 고취시킨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만주로 망명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활약하는 한편,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각 단체와 군사기관, 농어촌을 순회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동만주 12곳에 교회와 예배당을 세워 전도하였으며, 10여 곳에 여자교육회를 설립해 여성을 계몽하는 데도 힘썼다. 또한, 남만주 각지를 순회하면서 동포간의 단합과 군자금 모집을 위하여 활약하였다. 1924년 채찬(蔡燦)·이청산(李靑山) 등과 총독 사이토[齋藤實]를 암살할 것을 계획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마침 그때 길림(吉林)주민회장 이규동(李圭東), 의성단장(義成團長) 편강렬(片康烈)·양기탁(梁起鐸)·손일민(孫一民) 등이 주동이 되어 재만독립운동단체의 통일을 발기하자 이에 적극 참가하여 크게 공헌하였다. 1928년 길림에서 김동삼(金東三)·안창호(安昌浩) 등 47명이 중국 경찰에 검거되자 지성으로 간호하며 석방운동에 온 힘을 기울였다. 1931년 김동삼이 하얼빈[哈爾濱]에서 붙잡히자 그를 탈출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1932년 국제연맹 리튼조사단이 하얼빈에 오자, 흰 수건에 ‘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써서 조사단에 보내 우리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1933년 이규동 등과 주만일본대사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를 죽이기로 하고, 동지와의 연락 및 무기운반 등의 임무를 띠고 걸인노파 차림으로 하얼빈 교외 정양가(正陽街)를 지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6개월 동안 갖은 혹형을 받다가 단식투쟁을 전개하고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는 말을 남기고 하얼빈에서 세상을 떠났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