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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설, 권오직 집
권오설(1897 - 1930)의 아호는 오서, 이명은 권일, 권부덕, 권형신이며, 일제강점기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지낸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말에 고향으로 돌아와 원흥학술강습소를 세워 청소년을 교육하였다. 1920년 일직면에 일직서숙(一直書塾)과 일직면금주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가곡농민조합을 조직하였고,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에도 입회하였다. 안동청년회 집행위원을 지내면서 1922년 풍산청년회 결성을 주도하였다. 풍산학술강습회를 열어 인재를 양성하면서, 1923년 풍산소작인회 결성을 주도하여 집행위원이 되었다. 풍산소작인회 대표 자격으로 서울로 올라와서 신흥청년동맹과 한양청년연맹의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비밀조직인 코민테른 고려총국 국내부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합법 사상단체인 무산자동맹회와 화요회, 혁청단(革淸團), 불꽃사〔火花社〕 등에 참여하였다.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 창립대회에 참가하여 상무집행위원에 선출되었고, 12월 남부지방을 순회하며 조직을 확대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인쇄 직공조합 조직 결성과 파업에 참여하였고, 전차 승무원 파업과 양화직공 파업 등에도 관여하였다. 1925년 1월 안동의 사상단체 화성회(火星會) 결성에도 관여하였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자매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 창립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 겸 조직부 책임자가 되었다. 같은 해 12월 신의주사건으로 조선공산당 조직이 와해되자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가 되어 조직을 재건하였다. 1926년 6월 10일 순종 국장일에 제2의 3‧1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중심으로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고, 천도교 구파와 함께 거사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거사 직전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1928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1930년 4월 17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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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설 기적비
권오설(1897 - 1930)의 아호는 오서, 이명은 권일, 권부덕, 권형신이며, 일제강점기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지낸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말에 고향으로 돌아와 원흥학술강습소를 세워 청소년을 교육하였다. 1920년 일직면에 일직서숙(一直書塾)과 일직면금주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가곡농민조합을 조직하였고,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에도 입회하였다. 안동청년회 집행위원을 지내면서 1922년 풍산청년회 결성을 주도하였다. 풍산학술강습회를 열어 인재를 양성하면서, 1923년 풍산소작인회 결성을 주도하여 집행위원이 되었다. 풍산소작인회 대표 자격으로 서울로 올라와서 신흥청년동맹과 한양청년연맹의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비밀조직인 코민테른 고려총국 국내부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합법 사상단체인 무산자동맹회와 화요회, 혁청단(革淸團), 불꽃사〔火花社〕 등에 참여하였다.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 창립대회에 참가하여 상무집행위원에 선출되었고, 12월 남부지방을 순회하며 조직을 확대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인쇄 직공조합 조직 결성과 파업에 참여하였고, 전차 승무원 파업과 양화직공 파업 등에도 관여하였다. 1925년 1월 안동의 사상단체 화성회(火星會) 결성에도 관여하였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자매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 창립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 겸 조직부 책임자가 되었다. 같은 해 12월 신의주사건으로 조선공산당 조직이 와해되자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가 되어 조직을 재건하였다. 1926년 6월 10일 순종 국장일에 제2의 3‧1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중심으로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고, 천도교 구파와 함께 거사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거사 직전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1928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1930년 4월 17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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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섭 집, 순국지
이현섭(1844 - 1910)의 자는 서규, 호는 우헌이며, 일제강점기 경술국치의 비보를 듣고 자결한 열사이다. 1885년(고종 22) 성균생원으로 관직에 나아갔다가, 1895년 일제가 민비를 시해하는 만행을 자행하자 통분을 참지 못하여 관직을 사임, 안동군 예안면 양평리에 은거하였다. 1910년 국치의 소식을 듣고 음독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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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안동지회 독립운동 본거지
신간회 안동지회는 1927년 2월 15일 서울에서 좌우합작을 통한 신간회의 결성과 더불어 안동 지역에 설립된 신간회의 지회이다. 안동 지역 청년운동의 지도적 조직체였던 화성회(火星會)가 1927년 4월 해체를 선언하고, 신간회 안동지회 설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1927년 7월 9일 정현모·김중학·심규하·이술상·권태석·이세녕·권중열·문재빈 등 20명의 준비위원을 선정하고 신간회 안동지회 설립준비위원회가 열렸다. 같은 해 8월 26일 각 면에서 발기인을 모집하여 197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신간회 안동지회가 설립되었다. 회장에는 류인식(柳寅植), 부회장은 협동학교 출신으로 우파 독립운동의 대표자 정현모, 그리고 간사는 권태석을 비롯한 좌·우파 24명이 맡았다. 1928년 1월 임원이 개선되면서 정현모가 회장을, 권중열이 부회장을 맡았으며, 24명의 간사진, 20명의 대표위원, 7명의 후보가 각각 선정되었다. 이후 1930년 경북공산당사건이 일어났을 때 많은 임원들이 구속되면서 활동의 폭이 좁아졌고, 1931년 안동콤그룹이 조직되면서 해소되었다. 초기 활동은 조직 관리와 확대 방침을 모색하는 것이었으며, 1927년 9월에 열린 간사회에서는 ‘영남친목회(嶺南親睦會)에 관한 건’, ‘안동고보기성회(安東高普期成會) 사건에 관한 건’에 대해 논의하였다. 또한 1920년대 안동 사회단체 활동의 일환이었던 계몽운동을 계속 전개하였으며, 정치문화부에 일임하여 강연회를 통한 대중계몽운동을 펼쳤다. 1927년과 1929년 2차례의 대규모의 강연회를 열고, 순회강연회·학술강연회·농촌문제강연회 등 소규모의 강연회도 지속적으로 펼쳤다. 한편 풍산소작인회의 농민운동을 지원하면서 소작료 투쟁권, 세금공과금 지주부담, 비료대 이자의 지주부담 등을 결의하기도 하였다. 그 외 신간회 안동지회가 펼친 사업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향교철폐운동이었다. 일제의 민족 분열 정책으로 인해 향교가 친일적인 측면으로 방향을 바꾸자 정기총회에서 향교의 철폐·향교 재산처리권의 획득·유도진흥회의 철폐 등을 결의하고, 신간회 영주지회·봉화지회·영양지회와 함께 철폐운동을 전개하였다. 신간회 안동지회는 창립부터 해소에 이르기까지 안동 지역에서 가지는 위상은 그 어떤 단체보다 높았다. 비록 유림 출신 인물들이 앞장선 단체였지만, 안동의 좌·우파들이 모두 참여하는 좌우연합체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또한 신간회 안동지회가 700여 명의 회원을 가진 대규모의 단체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안동 지역 사회의 관심과 참여도가 매우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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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우 묘
유창우(1884 - 1921)는 1918년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919년 고종의 죽음으로 전국에서 3·1 만세운동이 펼쳐지자, 1920년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이곳에서 류창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 이향(李香)을 통해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과 만나 독립을 위한 공채(公債) 모집에 종사할 것을 서약하고 신택균(申宅均)·신현휴(申賢休) 등을 보증인으로 하여 공채모집위원으로 임명받았다. 류창우는 독립공채를 휴대하고, 국내로 들어오기 위하여 1920년 9월 26일 일본 장기에 상륙하던 중, 잠복해 있던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 일로 류창우는 1920년 12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은 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11월 2일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1977년 대통령표창을 받았고,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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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하 집
유병하(1898 - 1987)는 일제강점기 의열단군자금사건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1922년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김시현(金始顯)·김지섭(金祉燮)·권정필(權正弼)·황옥(黃鈺)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의 지시에 따라 김시현·유석현(劉錫鉉)·황옥·장건상(張建相) 등이 조선총독부·조선은행·동양척식주식회사·경성전기회사 등 일제의 주요기관을 폭파하기 위하여 1923년 다량의 폭탄과 총기를 만주로부터 국내에 반입하였다. 이 때 부족한 거사자금은 국내에서 조달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유시태(柳時泰)와 함께 서울 내자동의 이인희(李麟熙)에게 군자금 5,000원을 요구하였으나, 그와 같이 막대한 자금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며 이를 거절하자, 먼저 50원을 받고 잔액은 후일 받기로 하였다. 그 뒤 같은 달 21·24일에 유시태가 남영득(南寧得)과 함께 이인희의 집에 찾아가 군자금 잔액을 독촉하다 일본경찰에 의하여 이른바 ‘의열단군자금사건’에 연루된 12명의 동지들과 함께 붙잡혀 그 해 8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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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대표마을 하회마을 표지석
독립운동 대표마을 하회마을 표지석은 하회마을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기리고자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세운 표지석이다. 풍산류씨 600년의 역사가 깃든 하회마을은 10여 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유서 깊은 호국충절의 고장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벼슬길에 나아가기 보다는 학문을 닦고 덕행을 기르는 처사의 삶을 실천하였다. 그러나 나라의 위기 앞에서는 분연히 일어나, 1895년 을미의병을 시작으로 줄기차게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그 가운데 류도발은 1910년 나라가 무너지자 단식 순국하였고, 아들 류신영도 1919년 3월 그 뒤를 따랐다. 아버지와 아들이 연이어 목숨으로 저항한 장엄한 역사를 남긴 것이다. 3월 27일에는 마을소년 20여명이 만송정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 일로 류점등이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20년대 들어 류창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며, 류병하는 의열단 의거로 고초를 겪었다. 그 뒤에도 마을 사람들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류택하는 서울에서 학생운동을 펼쳤고, 류시승은 안동농림학교 학생항일운동을 이끌었다. 나라밖에서는 류소우와 그의 아들 류시보, 조카 류시훈이 한국광복군으로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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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도발 묘
유도발(1832 - 1910)의 자는 승수, 호는 회은이며, 일제강점기 경술국치에 통분하여 단식으로 순국한 독립운동가이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과정에서 숨은 일화도 많이 남겼다. 중년에 여러 번 이사를 하였는데, 마침내 군위군 비안의 덕암리에 이사하자 스스로 회은이라 하고 농사를 지었다. 그러던 중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안동의 옛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다가 9월에 전폐(殿牌)를 헐어버렸다는 소식을 듣고는 조상의 묘를 배별하고 여러 친척들을 비롯하여 자손·친지들에게 작별을 알린 뒤, 집에 돌아와 마당에 자리를 마련하고 북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한 다음 음식을 전혀 먹지 않고 자결하였다. 단식을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자지(自誌)·자명(自銘) 등 여러 편의 시를 지었다. 1951년 안동유지들이 사회장을 지내고 화산(花山)에 이장하였으며, 진안의 이산묘(餌山廟)에 모셨다. 1962년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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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안동지회 창립지(보광학교)
신간회 안동지회가 창립된 보광학교(普光學校)가 있던 곳이다. 1927년 2월 좌.우를 아우른 신간회(新幹會)가 탄생하였다. 신간회는 전국에 150여 개 지회를 가진 민족운동단체로 발전하였다. 신간회 안동지회는 1927년 2월 15일 서울에서 좌우합작을 통한 신간회의 결성과 더불어 안동 지역에 설립된 신간회의 지회이다. 안동 지역 청년운동의 지도적 조직체였던 화성회(火星會)가 1927년 4월 해체를 선언하고, 신간회 안동지회 설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1927년 7월 9일 정현모·김중학·심규하·이술상·권태석·이세녕·권중열·문재빈 등 20명의 준비위원을 선정하고 신간회 안동지회 설립준비위원회가 열렸다. 같은 해 8월 26일 각 면에서 발기인을 모집하여 197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신간회 안동지회가 설립되었다. 회장에는 류인식(柳寅植), 부회장은 협동학교 출신으로 우파 독립운동의 대표자 정현모, 그리고 간사는 권태석을 비롯한 좌·우파 24명이 맡았다. 1928년 1월 임원이 개선되면서 정현모가 회장을, 권중열이 부회장을 맡았으며, 24명의 간사진, 20명의 대표위원, 7명의 후보가 각각 선정되었다. 이후 1930년 경북공산당사건이 일어났을 때 많은 임원들이 구속되면서 활동의 폭이 좁아졌고, 1931년 안동콤그룹이 조직되면서 해소되었다. 초기 활동은 조직 관리와 확대 방침을 모색하는 것이었으며, 1927년 9월에 열린 간사회에서는 ‘영남친목회(嶺南親睦會)에 관한 건’, ‘안동고보기성회(安東高普期成會) 사건에 관한 건’에 대해 논의하였다. 또한 1920년대 안동 사회단체 활동의 일환이었던 계몽운동을 계속 전개하였으며, 정치문화부에 일임하여 강연회를 통한 대중계몽운동을 펼쳤다. 1927년과 1929년 2차례의 대규모의 강연회를 열고, 순회강연회·학술강연회·농촌문제강연회 등 소규모의 강연회도 지속적으로 펼쳤다. 한편 풍산소작인회의 농민운동을 지원하면서 소작료 투쟁권, 세금공과금 지주부담, 비료대 이자의 지주부담 등을 결의하기도 하였다. 그 외 신간회 안동지회가 펼친 사업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향교철폐운동이었다. 일제의 민족 분열 정책으로 인해 향교가 친일적인 측면으로 방향을 바꾸자 정기총회에서 향교의 철폐·향교 재산처리권의 획득·유도진흥회의 철폐 등을 결의하고, 신간회 영주지회·봉화지회·영양지회와 함께 철폐운동을 전개하였다. 신간회 안동지회는 창립부터 해소에 이르기까지 안동 지역에서 가지는 위상은 그 어떤 단체보다 높았다. 비록 유림 출신 인물들이 앞장선 단체였지만, 안동의 좌·우파들이 모두 참여하는 좌우연합체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또한 신간회 안동지회가 700여 명의 회원을 가진 대규모의 단체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안동 지역 사회의 관심과 참여도가 매우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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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3.1운동 모의장소(안동교회 터)
안동교회는 1919년 안동 3.1운동을 준비한 곳이다. 교인들은 만세시위 날짜를 13일로 잡았으나, 주도자가 붙잡히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교인들은 다시 3월 18일로 날짜를 잡고 태극기와 격분을 만들었다. 낮 12시가 되자 수십 명 교인들이 안동시장으로 몰려가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여기에 유림도 참가하여 2,500명이 넘었으며, 다음날 새벽까지 투쟁을 이어갔다. 안동교회 교인 8명이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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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춘백 기념비
조춘백(1893 - 1922)은 1919년 3월 13일 경상북도 안동군 안동면 장날에 독립만세를 외치려는 계획이 추진되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었다. 3월 18일 안동 시장 일대에서는 수 차례의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오후 4~5시경 기독교도와 천도교도 등 수천 명의 군중들이 만세를 외쳤다. 3월 20일 안동경찰서 유치장(留置場)과 구내에서 2차례에 걸쳐 독립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3월 23일에는 저녁에 읍내 부근 각처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일본 군경은 자위단(自衛團)까지 동원하며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10여 명이 사망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이천동(泥川洞)의 조춘백은 3월 23일 오후 10시 목성동(木城東) 서문(西門) 다리에서 경찰에 체포되었다. 안동경찰서(安東警察署)로 끌려갔다가 안동 검사분국(檢事分局)으로 송치되었다. 3월 18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 검사분국에서 소위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정부는 201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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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주형 순국기념비
최주형(1876 - 1908)은 신돌석(申乭石) 의진에 참여하여 영솔장(領率將)으로 경북 울진·청송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러일전쟁 직후 일제는 1905년 11월 '을사조약'의 강제체결로 한국에 대한 식민지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렇게 되자 우리 민족은 거족적으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따라 즉각적인 무력투쟁인 의병전쟁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 같은 시기에 최주형은 1906년 신돌석 의진에 참여하여 영솔장(領率將)으로 활약하였다. 신돌석 의병부대는 1906년 3월 13일(음) 영덕(盈德) 복평리(福坪里) 축산(丑山)에서 약 300여 명의 병력으로 거의하였다. 이후 영해읍을 거쳐 평해읍, 울진읍을 행군하며 병력을 점차 증가시켜 3,000여 명의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최주형은 신돌석 의병부대의 영솔장으로 1906년 울진 장호관 전투에서 적을 무찌르고 일본 함선 9척을 격침시키는 등 전과를 올렸다. 1907년에는 울진 매화리와 청송 등지의 전투에서 일본군을 섬멸하는 등 강력한 항일무장 투쟁을 전개하다가 1908년 6월 26일 평해(平海) 병곡면(柄谷面) 아곡전투(牙谷戰鬪)에서 왜병과 교전하던 중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