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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영 기념비
이원영(1886-1958)은 해방 이후 대한예수교 장로회 교단대표를 역임한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11년 봉성측량학원을 거쳐 보문의숙(寶文義塾)을 졸업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안동군 예안 장날인 3월 16일 예안선명학교와 예안보통학교 학생들을 동원,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잡혀 1년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수감중 장로교 장로 이상동(李尙洞)을 만나 감화를 받아 기독교에 귀의하게 되었고, 출감 후 안동성경학원에 입학, 교역자의 길을 택하였다. 졸업 후 안동지방의 농촌교회 전도사로 활동하는 한편, 본격적인 신학수업을 위하여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30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뒤 곧 경안노회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고, 영주중앙교회에 취임하였다. 신사참배가 강요된 1938년 이후 이를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서너 차례에 걸쳐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 안동서부교회를 시무하면서 안동성경학원을 개원하여 청소년교역자 양성에 진력하였다. 1945년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대한예수교 장로회 교단의 대표직을 맡았다. 또, 1958년 안동서부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었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노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신사참배를 부인한 출옥성도였으나 신사참배에 응한 동역자를 비판한 바 없고, 특히 성경강해교수법이 유명하였다. 1980년 대통령표창,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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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섭 집
김응섭은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며, 본관은 풍산(豊山). 이명은 김응범(金應範)이고, 자는 경장(景章), 호는 동전(東田)이다. 김응섭은 1908년 재경 영남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교남교육회의 본회 임원으로 참가하여 교육구국운동에 앞장서서 활동하였다. 1911년 1월에서 1912년 6월까지 평양지방법원의 판사, 검사를 역임한 뒤 대구에서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1913년 대구에서 결성된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회에 가입해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였고, 1919년 파리에 보낼 독립청원서를 영어로 번역하였다. 이후 김응섭은 만주로 망명, 서로군정서에 참여하여 이주 한인들의 정착 생활을 위해 활동하였다. 3·1운동 직후에는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법무장관으로 활약했으며 노령 블라디보스토크를 시찰하였다. 1920년 3월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한족회(韓族會)의 조직을 쇄신하고 법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21년 이르크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2년 베르흐네우진스크 고려공산당연합대회에 출석해 임시집행부 위원이 되었다. 동년 6월 남만주군정서부총재로 활약하면서 김찬규를 국내의 경상북도 지역으로 파견해 군자금을 모집케 하였다. 그리고 이즈음 경상북도 출신의 김시현(金始顯), 신태식 등과 함께 의용단의 결성에도 참여하였다. 1923년 의열단에 가담하였다. 동년 6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의 방향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해, 창조파의 일원으로서 국민위원회 결성에 합류하였다. 1924년 11월 정의부가 발족되자 김응섭은 중앙심판원장을 맡아 활동하며 만주 지역 독립운동계의 대통합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이념 문제나 통합 방법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동년 12월 김응섭은 길림성(吉林省) 반석현(盤石縣)에서 안동 출신 이광민(李光民) 등과 함께 한족노동당을 결성하고 상무집행위원장 겸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927년 9월경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간부가 되었다. 1928년 2월 길림성 반석현에서 한족노동당을 개편해 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을 결성하고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다. 이 때 경상북도 출신의 김동삼·김원식·이영형·김상덕·이일심 등도 참여하였다. 동맹원은 경상도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약 3천 내지 4천에 달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김응섭은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남만주 지역에서 사회주의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1928년 5월 길림성에서 개최된 전민족유일당 조직촉성회의에 재만농민동맹 대표자로 참석해 촉성회파의 일원이 되었다. 남만주 지역에서의 재만농민동맹의 활동은 1930년대 중국공산당 만주성 반석현위원회의 구성을 가능케 했고, 나아가 뒷날 동북인민혁명군의 유력한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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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준희 묘
권준희(1849 - 1936)는 1849년 9월 14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풍서면(豊西面) 가곡리(佳谷里, 현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가일마을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계상(啓象), 호는 우암(友巖)이다. 조선 후기 학자 병곡(屛谷) 권구(權榘)의 현손이다. 생부는 권찬(權鑽)이고, 백부 권익(權翼)에게 출계하여 수곡(樹谷) 권보(權甫)의 종손이 되었다. 경학(經學)을 비롯하여 『심경』·『근사록』등을 탐독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에 밝아 학자로서 이름이 높았다. 손자 권오돈(權五敦)·권오운(權五雲)·권오헌(權五憲)도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13년 풍기에서 조직된 광복단과 1915년 대구에서 조직된 조선국권회복단의 일부가 결합하여 1915년 7월 결성한 항일 비밀결사 대한광복회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광복회 창립 목적은 국권을 회복하고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을 양성해 무력으로 일제와 전쟁을 치른다는 것이었다. 주요 활동은 군자금 모집이었다. 이에 류시만(柳時萬)·권준흥(權準興) 등과 함께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8년 1월 총사령 박상진(朴尙鎭)을 비롯해 채기중(蔡基中)·임세규(林世圭) 등 주요 인물이 일본 경찰에 체포될 때 함께 체포되었다. 당시 71세로 대한광복회 회원 중 가장 고령이었다. 공주감옥에 수감되어 고초를 겪다 1918년 5월 3일 증거 불충분으로 면소되어 풀려났다.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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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돈 묘
권오돈(1900 - 1928)의 자는 전현, 이칭은 권오상이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권오상은 1921년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재학 중이던 1924년 화요계 청년운동 단체인 신흥청년회(新興靑年會)에 가입하여 사회주의를 접하게 되었다. 이듬해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고, 고려공산청년회 및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또한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결성에 참여하여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4월 25일 조선학생과학연구회가 6·10만세 운동을 추진하자 권오상은 고려공산청년회와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며, 연희전문학교 학생들을 포섭하는 등 만세 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런데 거사 직전인 6월 7일 계획이 탄로나 권오설 등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다행히 권오상이 이끄는 학생 조직의 계획은 발각되지 않아 계획대로 만세 운동을 추진하였다. 1926년 6월 10일 순종 국장일(國葬日)에 권오상은 연희전문학교 학생들과 함께 격문을 살포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권오상은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1928년 2월 징역 1년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복역 중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1928년 5월 보석으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고문의 여독으로 동년 6월 3일 세상을 떠났다.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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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섭 집(영감댁)
본관은 풍산(豊山). 이명은 김응범(金應範)이고, 자는 경장(景章), 호는 동전(東田)이다. 1878년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서 태어났다. 의열단원 김지섭(金祉燮)의 일가이다. [활동사항] 김응섭은 1908년 재경 영남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교남교육회의 본회 임원으로 참가하여 교육구국운동에 앞장서서 활동하였다. 1911년 1월에서 1912년 6월까지 평양지방법원의 판사, 검사를 역임한 뒤 대구에서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1913년 대구에서 결성된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회에 가입해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였고, 1919년 파리에 보낼 독립청원서를 영어로 번역하였다. 이후 김응섭은 만주로 망명, 서로군정서에 참여하여 이주 한인들의 정착 생활을 위해 활동하였다. 3·1운동 직후에는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법무장관으로 활약했으며 노령 블라디보스토크를 시찰하였다. 1920년 3월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한족회(韓族會)의 조직을 쇄신하고 법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21년 이르크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2년 베르흐네우진스크 고려공산당연합대회에 출석해 임시집행부 위원이 되었다. 동년 6월 남만주군정서부총재로 활약하면서 김찬규를 국내의 경상북도 지역으로 파견해 군자금을 모집케 하였다. 그리고 이즈음 경상북도 출신의 김시현(金始顯), 신태식 등과 함께 의용단의 결성에도 참여하였다. 1923년 의열단에 가담하였다. 동년 6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의 방향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해, 창조파의 일원으로서 국민위원회 결성에 합류하였다. 1924년 11월 정의부가 발족되자 김응섭은 중앙심판원장을 맡아 활동하며 만주 지역 독립운동계의 대통합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이념 문제나 통합 방법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동년 12월 김응섭은 길림성(吉林省) 반석현(盤石縣)에서 안동 출신 이광민(李光民) 등과 함께 한족노동당을 결성하고 상무집행위원장 겸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927년 9월경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간부가 되었다. 1928년 2월 길림성 반석현에서 한족노동당을 개편해 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을 결성하고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다. 이 때 경상북도 출신의 김동삼·김원식·이영형·김상덕·이일심 등도 참여하였다. 동맹원은 경상도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약 3천 내지 4천에 달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김응섭은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남만주 지역에서 사회주의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1928년 5월 길림성에서 개최된 전민족유일당 조직촉성회의에 재만농민동맹 대표자로 참석해 촉성회파의 일원이 되었다. 남만주 지역에서의 재만농민동맹의 활동은 1930년대 중국공산당 만주성 반석현위원회의 구성을 가능케 했고, 나아가 뒷날 동북인민혁명군의 유력한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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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봉 집(학암고택)
김재봉(1891 - 1944)의 자는 주소, 호는 근전이며,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를 지낸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3. 1운동 후 서울에 올라가 『만선일보』 경성지사 기자로 있으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파견된 안상길과 만나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21년 3월, 징역 6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였다. 같은 해 10월 베르흐네우딘스크주1(Улан-Удэ, 울란우데) 고려공산당 통합 대회에 참여하였고, 대회가 결렬되자, 치바에서 열린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대회에 참여하여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1923년 2월 코민테른 지시로 블라디보스토크에 결성된 고려총국의 국내 파견원으로 서울에 귀국하였다. 3월 중립당, 북성회파 등과 연합하여 고려총국 국내부를 비밀리에 결성하고 책임비서에 선임되었다. 7월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 결성에 참여하였고, 청년 단체 및 노동 단체의 통합에 주력하였다. 1924년 『조선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서울파 등과 조선공산당 창립을 위한 ‘13인회’를 구성하였으나 협상이 결렬되어 실패하였다. 10월 ‘ 정재달(鄭在達)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곧 석방되었다. 공산주의 비밀결사 확대 중립당 그룹을 이끌면서 1924년 11월 합법 사상단체인 신사상연구회를 전국 조직인 화요회(火曜會)로 확대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1925년 4월 북풍파와 연합해 조선공산당을 결성하였다. 김재봉은 제1대 책임비서에 선임되어 조직 확대 및 여러 활동을 주도하였다. 1925년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이 일어나자 후계당의 책임비서로 강달영(姜達永)을, 권오설(權五卨)을 고려공산청년회(약칭은 공청) 책임비서로 임명하는 등 후속 조치를 취하였다. 그 직후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26년 6월 ‘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이 일어나자 7월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심리를 받았다. 1928년 2월 징역 6년 형을 선고받고 1931년 11월에 출옥하였다. 1944년 3월 수감 생활에 따른 건강 악화로 사망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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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봉 어록비
김재봉(1891 - 1944)의 자는 주소, 호는 근전이며,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를 지낸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3. 1운동 후 서울에 올라가 『만선일보』 경성지사 기자로 있으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파견된 안상길과 만나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21년 3월, 징역 6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였다. 같은 해 10월 베르흐네우딘스크주1(Улан-Удэ, 울란우데) 고려공산당 통합 대회에 참여하였고, 대회가 결렬되자, 치바에서 열린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대회에 참여하여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1923년 2월 코민테른 지시로 블라디보스토크에 결성된 고려총국의 국내 파견원으로 서울에 귀국하였다. 3월 중립당, 북성회파 등과 연합하여 고려총국 국내부를 비밀리에 결성하고 책임비서에 선임되었다. 7월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 결성에 참여하였고, 청년 단체 및 노동 단체의 통합에 주력하였다. 1924년 『조선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서울파 등과 조선공산당 창립을 위한 ‘13인회’를 구성하였으나 협상이 결렬되어 실패하였다. 10월 ‘ 정재달(鄭在達)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곧 석방되었다. 공산주의 비밀결사 확대 중립당 그룹을 이끌면서 1924년 11월 합법 사상단체인 신사상연구회를 전국 조직인 화요회(火曜會)로 확대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1925년 4월 북풍파와 연합해 조선공산당을 결성하였다. 김재봉은 제1대 책임비서에 선임되어 조직 확대 및 여러 활동을 주도하였다. 1925년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이 일어나자 후계당의 책임비서로 강달영(姜達永)을, 권오설(權五卨)을 고려공산청년회(약칭은 공청) 책임비서로 임명하는 등 후속 조치를 취하였다. 그 직후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26년 6월 ‘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이 일어나자 7월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심리를 받았다. 1928년 2월 징역 6년 형을 선고받고 1931년 11월에 출옥하였다. 1944년 3월 수감 생활에 따른 건강 악화로 사망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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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수 집
김만수(1892 - 1924)의 자는 회일이며, 일제강점기 서로군정서에 가담하여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을 침탈당하자, 동향인이며 친척인 김재봉(金在鳳)·김응섭(金應燮)·김지섭(金祉燮) 등과 항일투쟁을 결의하고 활동하다가 1913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8년 이상룡(李相龍)이 세운 길남장(吉南莊)에서 영농생활을 하면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1919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담, 뒤에 군정서의 헌병이 되었다. 1924년 4월 동지 최병호(崔炳鎬)·유기동(柳基東) 등과 한인동포를 탄압하던 일본 총영사와 형사부장 등을 제거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던 중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포위공격을 받았다. 15시간 동안의 결사적인 항전 끝에 일본 총영사 및 일본경찰 10여 명을 사살하고 현장에서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당시 중국 각 신문들은 이 사실을 크게 보도하여, 김만수의 공적을 안중근(安重根)의 의거와 같이 높이 평가하였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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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광복운동기념공원기
오미광복운동기념공원기는 암울했던 일제로부터 오늘의 풍요를 안겨준 광복인사들의 잊혀져간 행적을 후손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공원이다. 오미광복운동기념공원 안에는 선열의 충혼을 담은 오미광복운동기념탑과 연계정이라 편액한 육각 정자를 건립하고 경내에 절의에 찬 문정공 장암 김선생 신도비를 건립되어 있다. 훌륭한 선열들의 영광된 모습을 만세에 기리고 계승하여 후손들에게 산 교육의 장을 삼아 미래를 도모하도록 했다. 오미광복운동기념공원은 일제강점기의 암울했던 현실에서 오늘의 풍요를 가져다 준 광복인사들의 애국행적을 기리고후세에 알리기 위하여 2008년 10월 11일 조성하였다. 2003년 마을 동산인 북경재 공원화 발의를 시작으로 풍산 김씨 오미동 문중회의에서 공원화를 결의하고 추진위원회를 결성, 후손들의 성금과 안동시 보훈청의 지원을 받아 오미광복운동기념탑과 풍산 김씨 선조들의 행적을 기린 신도비, 6각 정자 ‘연계정(蓮桂亭)’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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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소작인회 활동지 표지석
풍인소작인회는 1923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조직된 소작인단체이다. 1923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조직된 소작인단체이며, 1923년 11월권오설(權五卨)·이용만(李用萬)·이회승(李會昇) 등이 소작인의 권익옹호를 목적으로 조직하였다. 조직으로는 총회에서 선출된 25인의 위원으로 구성된 집행위원회가 있고, 이들이 호선하여 9인으로 이루어진 상무집행위원회가 있었다. 상무집행위원들은 서무부·재무부·조사부 등 3개부로 나뉘어 회의 업무를 처리하였다. 회에는 소작인만이 아니라 지식인·자작농, 그리고 중소지주까지도 참여하였다. 소작인회는 회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소작쟁의를 벌여 소작료 감하와 소작권 안정을 주장하였다. 1924년 봄 총회를 열고 춘계작물 소작료를 2할로 감해줄 것을 지주에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지주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농무회(農務會)를 조직했으며, 소작인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는 커녕 같은 해 6월 소작인의 소작권마저 박탈하였다. 그리고 1926년에도 지주들이 소작인회 회원들의 소작지를 박탈해 소작회원이 아닌 농민에게로 소작권을 이전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같은 지주들의 횡포에 맞서 소작인의 권리보호를 위해 싸우는 과정에서 소작인회 간부 및 소작인들이 구속되어 복역하거나 벌금형을 받기도 하였다. 소작인회는 소작쟁의만이 아니라 봉건적 신분질서철폐운동을 동시에 벌이기도 하였다. 안동의 도산서원에서 소작료를 늦게 납부했다고 소작인을 매를 때린 사건이 계기가 되어 마침내 안동의 모든 사회단체와 연계해 서원철폐운동으로까지 진전되었다. 당시까지도 향촌사회에 관념적으로 남아 있던 봉건적 신분질서를 혁파하겠다는 의지가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1926년 조선공산당 안동군조직의 세포조직이 소작인회 내부에서 성립되면서 소작인회는 사회주의운동 변화에 영향을 받기 시작했으며, 1930년 초 간부들이 조선공산당 지방조직 관계로 붙잡히면서 소작인회는 지하조직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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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설 묘
권오설(1897 - 1930)의 아호는 오서, 이명은 권일, 권부덕, 권형신이며, 일제강점기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지낸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말에 고향으로 돌아와 원흥학술강습소를 세워 청소년을 교육하였다. 1920년 일직면에 일직서숙(一直書塾)과 일직면금주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가곡농민조합을 조직하였고,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에도 입회하였다. 안동청년회 집행위원을 지내면서 1922년 풍산청년회 결성을 주도하였다. 풍산학술강습회를 열어 인재를 양성하면서, 1923년 풍산소작인회 결성을 주도하여 집행위원이 되었다. 풍산소작인회 대표 자격으로 서울로 올라와서 신흥청년동맹과 한양청년연맹의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비밀조직인 코민테른 고려총국 국내부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합법 사상단체인 무산자동맹회와 화요회, 혁청단(革淸團), 불꽃사〔火花社〕 등에 참여하였다.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 창립대회에 참가하여 상무집행위원에 선출되었고, 12월 남부지방을 순회하며 조직을 확대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인쇄 직공조합 조직 결성과 파업에 참여하였고, 전차 승무원 파업과 양화직공 파업 등에도 관여하였다. 1925년 1월 안동의 사상단체 화성회(火星會) 결성에도 관여하였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자매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 창립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 겸 조직부 책임자가 되었다. 같은 해 12월 신의주사건으로 조선공산당 조직이 와해되자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가 되어 조직을 재건하였다. 1926년 6월 10일 순종 국장일에 제2의 3‧1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중심으로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고, 천도교 구파와 함께 거사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거사 직전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1928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1930년 4월 17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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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준희, 권오상 집
권준희(1849 - 1936)는 1849년 9월 14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풍서면(豊西面) 가곡리(佳谷里, 현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가일마을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계상(啓象), 호는 우암(友巖)이다. 조선 후기 학자 병곡(屛谷) 권구(權榘)의 현손이다. 생부는 권찬(權鑽)이고, 백부 권익(權翼)에게 출계하여 수곡(樹谷) 권보(權甫)의 종손이 되었다. 경학(經學)을 비롯하여 『심경』·『근사록』등을 탐독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에 밝아 학자로서 이름이 높았다. 손자 권오돈(權五敦)·권오운(權五雲)·권오헌(權五憲)도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13년 풍기에서 조직된 광복단과 1915년 대구에서 조직된 조선국권회복단의 일부가 결합하여 1915년 7월 결성한 항일 비밀결사 대한광복회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광복회 창립 목적은 국권을 회복하고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을 양성해 무력으로 일제와 전쟁을 치른다는 것이었다. 주요 활동은 군자금 모집이었다. 이에 류시만(柳時萬)·권준흥(權準興) 등과 함께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8년 1월 총사령 박상진(朴尙鎭)을 비롯해 채기중(蔡基中)·임세규(林世圭) 등 주요 인물이 일본 경찰에 체포될 때 함께 체포되었다. 당시 71세로 대한광복회 회원 중 가장 고령이었다. 공주감옥에 수감되어 고초를 겪다 1918년 5월 3일 증거 불충분으로 면소되어 풀려났다.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권오돈(1900 - 1928)의 자는 전현, 이칭은 권오상이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권오상은 1921년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재학 중이던 1924년 화요계 청년운동 단체인 신흥청년회(新興靑年會)에 가입하여 사회주의를 접하게 되었다. 이듬해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고, 고려공산청년회 및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또한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결성에 참여하여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4월 25일 조선학생과학연구회가 6·10만세 운동을 추진하자 권오상은 고려공산청년회와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며, 연희전문학교 학생들을 포섭하는 등 만세 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런데 거사 직전인 6월 7일 계획이 탄로나 권오설 등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다행히 권오상이 이끄는 학생 조직의 계획은 발각되지 않아 계획대로 만세 운동을 추진하였다. 1926년 6월 10일 순종 국장일(國葬日)에 권오상은 연희전문학교 학생들과 함께 격문을 살포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권오상은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1928년 2월 징역 1년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복역 중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1928년 5월 보석으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고문의 여독으로 동년 6월 3일 세상을 떠났다.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