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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설 철관(안동독립운동기념관)
권오설(1897 - 1930)의 아호는 오서, 이명은 권일, 권부덕, 권형신이며, 일제강점기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지낸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말에 고향으로 돌아와 원흥학술강습소를 세워 청소년을 교육하였다. 1920년 일직면에 일직서숙(一直書塾)과 일직면금주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가곡농민조합을 조직하였고,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에도 입회하였다. 안동청년회 집행위원을 지내면서 1922년 풍산청년회 결성을 주도하였다. 풍산학술강습회를 열어 인재를 양성하면서, 1923년 풍산소작인회 결성을 주도하여 집행위원이 되었다. 풍산소작인회 대표 자격으로 서울로 올라와서 신흥청년동맹과 한양청년연맹의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비밀조직인 코민테른 고려총국 국내부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합법 사상단체인 무산자동맹회와 화요회, 혁청단(革淸團), 불꽃사〔火花社〕 등에 참여하였다.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 창립대회에 참가하여 상무집행위원에 선출되었고, 12월 남부지방을 순회하며 조직을 확대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인쇄 직공조합 조직 결성과 파업에 참여하였고, 전차 승무원 파업과 양화직공 파업 등에도 관여하였다. 1925년 1월 안동의 사상단체 화성회(火星會) 결성에도 관여하였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자매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 창립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 겸 조직부 책임자가 되었다. 같은 해 12월 신의주사건으로 조선공산당 조직이 와해되자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가 되어 조직을 재건하였다. 1926년 6월 10일 순종 국장일에 제2의 3‧1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중심으로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고, 천도교 구파와 함께 거사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거사 직전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1928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1930년 4월 17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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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학교기념비
협동학교는 1907년에 경상북도 안동에 설립되었던 학교이며, 설립자 유인식(柳寅植)은 1903년 고종이 영남 여러 서원에 학교를 세우라는 윤음(綸音:임금의 말씀)을 내리자 동지 김진수(金進洙) 등과 함께 근대학교를 설립하고자 하였으나 보수 유림의 완강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뒤 1907년에 여강서원(廬江書院)의 재산을 기금으로 김병후(金秉厚)·하중환(河中煥)·김동삼(金東三) 등과 상의하여 학교설립 기성회를 조직, 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교장에 김병식(金秉植), 학감에 유창식(柳昌植)이 취임하고 유인식은 자청하여 교무주임을 맡았으며, 교사는 주로 한성사범학교 출신의 신진 청년들을 초빙하여 가르치게 하였다. 그러나 신식교육에 대한 유림의 완고한 반대와 증오가 갈수록 심하여 유인식은 유림당회(儒林堂會)에서 사문난적(斯文亂賊:성리학에서 교리와 사상을 어지럽히는 사람을 일컬음)으로 지목되고 스승의 문하에서 파문을 당하였다. 당시 협동학교 외에 같은 식으로 설립된 서원학교 중에는 도산서원(陶山書院)의 보문의숙(寶文義塾)이 있었으나 곧 폐교되었다. 같은 무렵에 세워진 동화학교(東華學校) 등도 제대로 유지되지 못하였다. 1909년에는 일본군의 흉계로 학교에 수십 발의 포탄이 발포되어 교사 김기수(金基洙)와 학생 2명이 피살되는 참극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인식은 이에 굴하지 않고 교장에 취임하여 학교 발전에 더욱 매진하고 교사들의 열성과 청년학도들의 의지는 드높아져 교세가 더욱 강화되었다. 1912년 당시 2학년 학생들에게 가르친 교과목을 참고로 살펴보면, 수신·국어·역사·지지(地誌)·외지(外地)·한문·작문·미술·대수·물리·화학·생리·동물·식물·박물(博物)·창가·체조 등이었다. 국권 상실 후 계속된 일제의 강력한 행정적 탄압과 재정적 궁핍 등으로 더 이상 협동학교를 유지하지 못하자 유인식은 만주로 학교를 이전할 계획을 세우고 일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에 탄로나 유인식 등이 구속되면서 설립 10년 만인 1917년에 협동학교는 폐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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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광복지사 기념비
안동광복지사 기념비는 1981년 광복절에 안동출신 독립운동가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이곳 안동댐 언저리에 세워졌다. 이 기념비를 세운 '독립지사안동기념사업회'는 1980년 6월 결성되고, 그 뒤 1년 동안 조사와 준비 작업을 거쳐 36주년 광복절에 맞추어 제막식을 가졌다.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이가원교수가 글을 짓고, 류시경,장기동이 글씨를 썼다. 지사들의 공적을 기리는 문장에 이어, 안동 출신 독립운동가 245명의 이름을 담았다. 대부분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분들이지만, 간혹 자료 부족으로 포상되지 못한 분도 들어있다. 의병,단식 순절, 재만 항일, 3.1 운동 등 모두 19개 분야로 분류하고 각각 그 활동 내용에 맞추어 인물들을 배열했다. 기념사업회장 이인홍은 3.1 운동에 참여한 독립유공자로서 기념비 건립을 지휘했고, 총무로서 실무를 맡았던 김을동은 건립을 마친 뒤, 1985년 '안동판독립사'를 펴내 기념사업을 마무리 지었다. 안동은 '한국독립운동의 성지'라 불린다. 독립운동 발상지이자,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와 자정순국자를 배출하고 분야별로 최고 지도자를 배출한 곳이 바로 안동이기 때문이다. 안동인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되살려진 데에는 이 기념사업회의 노력이 컸고, 20년 뒤 안동독립운동기념사업회와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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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락 집(백하구려)
김대락(1851 - 1905)의 자는 중언, 호는 비서, 별호는 백하이며, 조선 후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대락은 1845년 안동에서 세가 좋았던 천전(川前: 내앞) 마을에서 태어나 퇴계학맥을 계승한 정재 류치명의 문하에서 수학한 조부 김헌수, 숙부 김진기, 족숙 김흥락의 문하에서 성장하였다. 이들은 모두 안동의 대유학자였으며, 특히 김진기는 개항기 안동의 대표적인 위정척사 운동가였고, 서산 김흥락은 안동의 전기 의병을 지휘하였던 인물이다. 이렇게 김대락은 좋은 집안의 장자로서 집안의 대소사를 돌보며, 구학문으로 일가를 이루는 수구적 삶을 66년 동안 살아왔다. 그러나 그의 인생 여정 후반기는 변화의 시기였고, 지식인으로서 향당의 안정된 삶에만 안주할 수는 없었다. 변화의 바람은 가까이에서 불었다. 1907년 마을에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가 설립되었고, 상투를 자른 젊은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이들은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며 신학문의 필요성을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처음에는 이들을 강하게 비판하던 김대락은 1909년 초 노유(老儒)로서는 하기 힘든 일대 전환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는 협동학교의 신교육이야말로 ‘시조지의(時措之宜)’ ‘시중지도(時中之道)’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곧 실천으로 연결되어 자신의 집을 협동학교 교실로 제공하고, 협동학교의 확장에 노력하였다. 그의 이러한 변화는 안동의 향중은 물론 영남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김대락은 1910년 나라가 멸망하자 또 한 번 고된 길을 선택하였다. 일가를 이끌고 만주 망명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의 만주 망명은 자정적(自靖的) 성격이 강한 망명길이었다. 일본이 지배하는 조선, 즉 도(道)가 무너진 세상으로부터 멀리 떠나 자정의 삶을 지향하겠다는 의리론적(義理論的) 대응이었다. 김대락은 망명 후 다시 한 번 사상적 진화를 보여주었다. 1911년 윤6월 12일에 작성한 신흥학교 「권유문」에서는 사상적으로 한층 진일보한 김대락의 인식을 읽을 수 있다. 서양의 문명과 새로운 조류에 대해 ‘사회진화론’에 입각하여 강자인 서양이 동양을 지배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면서도 서양을 배우되 나라를 빼앗긴 특수한 상황에서 유가의 정신인 ‘사생취의(捨生取義)’의 도리 정신으로 국혼은 지켜야 한다는 유가(儒家)로서의 본질적 취지는 변함없이 고수하고 있었다. 이러한 성격은 1913년 「공리회 취지서」에도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김대락은 삼원포의 한인 단체였던 경학사가 무너지고, 갖가지 생활고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삼원포 사회에 새로운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공리회를 조직하였다. 그런데 김대락이 지향했던 자치단체는 ‘도와 덕’이 중심이 된 유교적 이상 사회이면서 ‘새로운 자유와 평등’의 시대관이 담긴 대동 사회였다. 이것이 바로 김대락이 꿈꾸었던 ‘만주 망명 한인 사회’의 모습이었다. 이처럼 김대락은 만주 망명 후 줄곧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고, 이주 한인들의 안정된 정착을 위해 노력하다가, 1914년 12월 10일 삼원포 남산에서 사망하였다. 1977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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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식 집
김만식(1866 - 1933)의 자는 형일, 호는 근암이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김만식은 쓰러져가는 나라를 일으키기 위하여 1909년 석주 이상룡(李相龍)을 도와 대한협회 안동지회 설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10년에는 나라가 무너지자 친족인 김동삼(金東三)과 이상룡 등 안동 출신 인사들이 신민회(新民會)와 더불어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추진할 때 선발대로서 만주 지역을 왕래하였다. 김만식은 1910년 12월 김대락(金大洛)을 따라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 기지 건설에 힘을 쏟았을 뿐만 아니라, 1919년 4월 서로군정서 조직에 참여하여 활약하기도 했다. 그는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를 출입하며 활동하던 중, 1928년 압록강 청성진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김만식은 이때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병을 얻어 고생하다가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33년 9월 세상을 떠났다.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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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집
김규식(1880 - 1945)은 1907년에 안동 진천에 설립된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김동삼(金東三)·이상룡(李相龍) 등 안동 지역 인사들이 신민회(新民會)와 더불어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 계획을 추진함에 따라, 1910년 12월 24일 백부(伯父) 김대락(金大洛)을 따라 서간도 삼원포로 망명하였다. 삼원포에 정착한 그는 경학사(耕學社)·부민단(扶民團) 등에 가담하여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노력하였다. 1919년 3월 김규식은 부민단을 한족회(韓族會)로 확대 개편할 때 학무부장으로 선임되어 만주 이주 한인들의 생활 안정에 기여하였다. 또 같은 해 4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가 조직되자 여기에도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그는 정의부(正義府)에 참여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한때 심양에서 동아여관(東亞旅館)이란 여인숙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의 연락 거점으로 활용하였다. 이후 오상현 안가촌으로 이주하여 중국 관내와 러시아 지역 동포와 연락하며 활동하다가, 1944년 8월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1996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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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식 집
김정식(1888 - 1941)의 자는 일중이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일제에 나라를 강점당하자 김정식의 큰아버지 김대락은 김동삼(金東三), 이상룡(李相龍) 등과 더불어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에 김정식도 김대락을 따라 망명하여 길림성 유하현 삼원포에서 김대락을 도우며 독립군 기지 건설에 노력하였다. 김정식은 1919년 서로군정서에 참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1920년에는 간도 참변으로 동포 사회가 폐허가 되자, 이를 재건하기 위해 다시 국내로 들어와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이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이후 김정식은 흑룡강성 하얼빈 아성현 취원창을 개척하여 지속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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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로 집
김성로(1885 - 1922)의 자는 맹옥, 호는 일산, 이명은 김종훈이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김성로는 1907년 류인식(柳寅植)·김동삼(金東三) 등이 설립한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입학, 졸업하였다.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문중 어른인 백하 김대락(金大洛)을 따라 중국 만주로 망명하였으며,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해 안동 애국지사들이 많이 모인 길림성 유하현에서 1916년 부민단 설립에 참여하였다. 김성로는 1919년 신흥무관학교를 제4회로 졸업하였다. 동년 3월 부민단이 한족회로 확대·발전될 때 적극적으로 참가하였고, 김동삼의 후임으로 서무사장으로 선임되기도 하였다. 또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서무를 맡아 만주 이주 한인들의 생활 안정에 노력하기도 하였다. 1920년 청산리·봉오동 전투 보복으로 일제가 경신참변을 일으켜 만주 한인 동포사회는 크나큰 피해를 입었다. 이를 회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김성로는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로 파견되었다. 국내로 들어온 김성로는 고향 마을 부근인 임하(臨河)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김동삼이 흥경현 왕청문에서 설립한 통의부 공작대가 모집된 군자금을 인수하고자 국내로 들어오다가 평안북도 정주에서 발각됨에 따라, 이와 관련된 김성로도 1921년 중국 봉천에서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김성로는 1921년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22년 4월 30일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1963년에 대통령표창을 받았으며,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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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삼 집
김동삼(1878 - 1937)의 본명은 긍식(肯植), 자는 한경(漢卿)이었는데, 만주로 망명해서는 이름을 동삼(東三), 자는 성지(省之), 호는 일송(一松)으로 고쳤다. 김동삼은 서간도 독립군 기지 개척의 선구자였으며, 만주 독립군의 통합에 노력했던 독립운동가이다. 한국 근대 질곡의 긴 역사 속에서 독립을 향한 김동삼의 본격적인 행보는 1907년부터 시작되었다. 김동삼은 1907년 3월 류인식(柳寅植)·김후병(金厚秉)·하중환(河中煥) 등과 함께 안동에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하고 교감으로 활동하였다. 협동학교에 재직하면서 그는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와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해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1911년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에 도착한 김동삼은 신흥강습소를 설립하고 경학사 사장 이상룡(李相龍)을 도와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힘을 쏟았다. 1913년 3월부터 이름을 중국 동삼성(東三省)의 호칭을 따서 ‘동삼(東三)’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1914년에는 신흥학교 1~4회 졸업생들과 그 분교, 노동야학 졸업생 385명을 인솔하여 통화현 팔리초 깊은 산 속에 백서농장(白西農庄)을 건립하고, 그 장주(庄主)가 되었다. 이는 김동삼이 만주 독립군의 거장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시점이다. 1919년 국내 3·1운동의 영향으로 길림에서도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는데, 이때 김동삼은 민족 대표 39인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3·1운동의 영향으로 서간도 한인 사회도 이에 호응하여 같은 해 4월 경학사의 후신이었던 부민단을 전 서간도 지역으로 확대하여 한족회를 설립하고, ‘군정부’라는 독립군 조직을 편성하였다. 이때 김동삼은 한족회의 서무사장(庶務司長)을 맡았다가, 11월 ‘군정부’가 서로군정서로 개편되면서 참모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1922년 6월 경신참변으로 붕괴되어 버린 동포 사회와 독립군을 통합하기 위해 남만통일회를 주도하여, 통군부(統軍府)를 탄생시켰다. 8월 30일 전만한족통일회가 결성되고, 통군부가 통의부(統義府)로 확대 개편되자, 교육부장이었던 김동삼은 통의부 총장을 맡게 되었다.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위해 1923년 1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열리자 김동삼은 서로군정서와 남만주의 한인 대표로 참석하여 의장으로 선출되어,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당시 국민대표회의가 임시정부의 개조론·창조론으로 대립할 때 그는 개조론에 가세하였으나, 그 회의는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지속적으로 독립운동 단체 통합에 힘쓰던 김동삼은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북만주로 가서 활동을 모색하던 중 하얼빈에서 일제 밀정의 밀고로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그는 평양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37년 4월 1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시신은 평소에 그를 존경하던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이 거두어 장례를 지냈는데, 유언대로 화장하여 한강에 유해를 뿌렸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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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식 집
김병식(1856 - 1936)의 자는 제경, 호는 만원이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김병식은 1907년 내앞마을에 설립된 협동학교에서 교장으로 활동하였다. 협동학교는 안동의 혁신 유림인 김대락(金大洛)·이상룡(李相龍)·류인식(柳寅植)·김동삼(金東三) 등이 참여하여 인재를 양성한 안동 지역 최초의 근대식 중등 교육기관이었다. 이후 김병식은 1919년 3월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에 일제의 조선 국권 침탈 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 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호소하기 위해서 김창숙(金昌淑)이 주도한 ‘파리장서의거’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파리장서의거는 1919년 3·1운동 직후 일부 유림 세력이 파리강화회의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요구하는 긴 문장의 청원 서신을 보낸 사건이었다. 그러나 1919년 4월 서명 사실이 알려져 김병식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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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섭 기념비
김지섭(1884 - 1928)의 자는 위경, 호는 추강이며, 의열단원으로서 일본 왕궁에 폭탄을 투척한 독립운동가이다. 1907년 보통학교 부교원 검정시험에 합격하여 상주보통학교에 부임하였다가 1년 만에 사직하였다. 1908년에 상경하여 광화신숙 일어전문과에 입학하여 일본어를 익혔다. 재판소 번역관 시험에 합격하여 1913년까지 번역관보, 통역생 겸 서기 등의 관직 생활을 하였다. 3 · 1운동 이후 중국 관내, 만주, 옌하이저우〔沿海州〕를 오가며 앞날을 모색하던 중 1921년 가을경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2년에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1923년 간토대지진〔關東大地震〕이 일어나면서 일본인들에 의해 우리나라 동포들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의열단 지도부는 이를 응징한다는 차원에서 도쿄〔東京〕의 제국의회에 폭탄을 던지고 주요 관리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김지섭은 이를 실행할 의열단 기밀부 특파원에 자원하였다. 1923년 12월 20일 소형 폭탄 3개와 나카무라 히코타로〔中村彦太郞〕라는 가명의 일본인 명함 30매를 가지고 석탄 운반선을 이용하여 상하이를 출발하였다. 12월 31일 후쿠오카〔福岡〕에 도착하자 몰래 상륙하여 도쿄로 향하였다. 1924년 1월 5일 도쿄에 도착하여 무기한 연기된 제국의회를 대신해 왕궁을 폭파할 준비에 나서 낮 동안 왕궁 근처를 답사하였다. 그날 저녁 오후 7시 20분경 양복 주머니에 3개의 폭탄을 감추고 왕궁 근처에 도착해 불심검문을 받게 되자 폭탄 하나를 경찰에게 던졌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폭탄 2개를 꺼내 들고 왕궁 정문 앞 다리로 뛰어가 안전핀을 뽑지 못한 채 폭탄을 던졌다. 폭탄 3개는 모두 터지지 않았고 그 자리에서 붙잡혔다. 1월 6일 히비야경찰서〔日比谷警察署〕를 거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고 예심에 회부되면서 이치가야형무소〔市谷刑務所〕에 수감되었다. 4월 24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예심이 종결되었다. 폭발물 취체 벌칙 위범, 강도 미수와 선박 침입죄로 정식 재판에 회부되었다. 11월 6일 도쿄지방재판소는 무기징역을 선고하였다. 도쿄공소원에 공소를 제기하여 1925년 3월부터 2심 재판이 시작되었다. 변호인들이 재판장의 불공정한 재판에 항의해 기피신청을 하자 “나는 조선 사람이니 일본 사람인 재판장이 어떠한 사람이 되든지 똑같을 것이니 기피신청(忌避申請)을 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나는 아무 죄가 없으니 무죄를 선언하든지 제1심의 검사 청구대로 사형에 처하든지 하여 달라.”라고 하며 법정투쟁을 벌였다. 1925년 8월 12일 공소심에서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변호사가 상고하자 이를 취하하는 서면을 제출하였다. 이후 도쿄 외곽의 지바형무소〔千葉刑務所〕로 이감되었다. 옥고를 치르던 중 1928년 2월 20일 뇌내출혈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追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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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록 집(육우당)
이육사(1904 - 1944)의 본명은 이원록, 이원삼, 자는 태경, 아호는 육사이며, 일제강점기 「청포도」, 「절정」, 「광야」 등을 저술한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25년에 형 이원기(李源琪), 아우 이원유(李源裕)와 함께 대구에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1927년에는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밖에도 1929년 광주학생운동, 1930년 대구 격문사건(檄文事件) 등에 연루되어 모두 17차에 걸쳐서 옥고를 치렀다. 중국을 자주 내왕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가을 잠시 서울에 왔을 때 일본 관헌에게 붙잡혀, 베이징으로 송치되어 1944년 1월 베이징 감옥에서 작고하였다. 문단 활동은 조선일보사 대구지사에 근무하면서 1930년 1월 3일자 『조선일보』에 시작품 「말」과 『별건곤(別乾坤)』에 평문 「대구사회단체개관(大邱社會團體槪觀)」 등을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뒤 1935년 『신조선(新朝鮮)』에 「춘수삼제(春愁三題)」 · 「황혼(黃昏)」 등을 발표하면서 그의 시작 활동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신조선』 · 『비판(批判)』 · 『풍림(風林)』 · 『조광(朝光)』 · 『문장(文章)』 · 『인문평론(人文評論)』 · 『청색지(靑色紙)』 · 『자오선(子午線)』 등에 30여 편의 시와 그밖에 소설 · 수필 · 문학평론 · 일반평문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생존시에는 작품집이 발간되지 않았고, 1946년 아우 이원조(李源朝)에 의하여 서울출판사에서 『육사시집(陸史詩集)』 초판본이 간행되었다. 대표작으로는 「황혼」 · 「청포도(靑葡萄)」(문장, 1939.8.) · 「절정(絶頂)」(문장, 1940.1.) · 「광야(曠野)」(자유신문, 1945.12.17.) · 「꽃」(자유신문, 1945.12.17.) 등을 꼽을 수 있다. 그의 시작세계는 크게 「절정」에서 보인 저항적 주제와 「청포도」 등에 나타난 실향 의식(失鄕意識)과 비애, 그리고 「광야」나 「꽃」에서 보인 초인 의지(超人意志)와 조국 광복에 대한 염원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의 생애는 부단한 옥고와 빈궁으로 엮어진 행정(行程)으로, 오직 조국의 독립과 광복만을 염원하고 지절(志節)로써 일관된 구국투쟁은 민족사에 큰 공적으로 남을 것이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