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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농고 항일기념비
안동농고항일기념비는 안동농림학교 학생항일운동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이다. 1933년 4월 개교한 안동농림학교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다른 학교와 마찬가지로 군사교육기관으로 변질되었다. 만주군 출신의 일본군이 학교에 배치되어 군사 교육과 근로를 강행해 나갔다. 특히 전황이 점점 불리해지자 학도병 지원을 강요하고 나섰다. 1943년 2월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은 대구80연대로 끌려가 신체검사를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동농림학교의 일부 학생들은 손명술(孫明述)의 집에 모여 임시정부에서 보내는 방송을 듣고 있었다. 방송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확신을 얻게 된 권영동·고제하·서정인 등은 일본의 군대로 끌려가 죽기보다는 차라리 민족을 위해 싸우다 죽자고 결의하였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다 비밀결사단체인 조선회복연구단을 조직하기로 하였다. 안동농림학교 8·9회생이던 권영동·황병기·이준택·이갑룡·김오섭·장인덕·김우현·이승태 등은 1943년 10월 조선회복연구단을 결성하였다. 이 비밀결사에는 안동농림학교 학생뿐만 아니라 안동 지역의 지도층 인사들이 참여하였는데 1944년 방학 무렵에는 단원이 51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조선회복연구단이 결성되기 이전에 안동농림학교 학생들과 관계된 또 하나의 조직이 있었다. 이 조직은 명성회(明星會, 또는 여명회)로, 1942년 2월경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던 이정선(李貞善)이 일본 도쿄로 유학 갔다가 1943년 4월 하순 귀국하여 당시 친분이 있던 안동농림학교 9회생 동기들을 규합하여 만든 비밀결사단체이다. 문예서클의 성격을 띤 명성회는 면학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적으로 하였으며, 『여명(黎明)』이라는 교양잡지를 발간하고, 역사서·사상서 등을 탐독하면서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명성회는 효과적인 투쟁을 전개하고자 1944년 10월 조선회복연구단과 연대를 모색하였다. 이 두 단체의 연합은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이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추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안동경찰서를 기습 공격하고 무기고에서 무기를 확보하여 항쟁을 벌인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안동농림학교 무기고에 있는 총으로 안동경찰서와 안동헌병대를 기습·점령하여 일본인을 제압하고, 나아가 철도와 통신망을 파괴한 뒤 의성(義城) 지역으로 진격하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1945년 2월 초 일본 경찰이 이 계획을 알아내고, 관련자를 검거하기 시작했다. 1945년 3월 10일 대대적인 검거로 인해 대부분의 회원들이 체포되었다. 안동농림학교 항일결사로 인해 체포된 64명은 일본 경찰의 혹독한 고문을 받아야만 했으며, 그 과정에서 손성한은 순국하였다. 안동 출신의 강일원·고제하·권영동·권오직·권중석·권태염·김건우·김복한·김상우·김호익·김홍구·서정인·손성한·유시승·이대녕·장병하·정현모는 옥고를 치르다 광복과 더불어 1945년 8월 16일 대구지방검찰청 안동지청에서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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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수 기적비
김남수(1899 - 1945)의 자는 중심, 아호는 우전, 학산이며, 일제강점기 안동지방에서 동아일보 안동지국 총무, 조선노동연맹회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안동에서 류인식(柳寅植)과 김동삼(金東三) 등이 세운 최초의 중등학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와 서울 중동학교에 다닌 적이 있다고 전해진다. 예안 3·1운동에 참여한 김남수는 1920년부터 사회운동에 뛰어 들었다. 1920년 가을에 유인식의 지도로 조선노동공제회안동지회가 조직되자, 여기에 참여하면서 김남수의 사회운동이 시작되었다. 안동청년회에 참가하고 동아일보 안동지국 총무로 활약하다가 상경해 동향 출신인 김재봉(金在鳳)·권오설(權五卨)·이준태(李準泰) 등과 무산자동맹에서 활동하며 서울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1923년 6월 경성공무공장 여공 파업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경성고무 여공(女工) 동맹파업의 전말(顚末)」이란 보도문서를 작성하고 78개 노동단체에 발송했다가 체포되어 벌금형을 받았다. 그리고 이 해에 조선노동연맹회 제2회 정기총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1923년 11월에 안동으로 내려와 양반지주 출신들인 이준태·권오설·안상길(安相吉) 등과 더불어 풍산소작인회(豊山小作人會)를 조직해 안동에 사회운동의 뿌리를 내렸다. 1924년 이후 안동지방 사회운동의 핵심으로 자리잡은 김남수는 1925년 1월에 청년운동단체들을 지도하고 여기에 사회주의 사상을 주입하기 위해 화성회(火星會)를 조직하는데 앞장섰고, 상무집행위원을 맡아 주도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도산서원에서 소작료 납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소작인들을 구타하자 소작투쟁 차원에서 도산서원철폐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한편 그 해 4월에는 화요회가 계획한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경남지방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8월 9∼10일 이틀 동안 친일·극우 인물들이 형평사예천지회 사무소를 파괴하고 사상자를 발생시켰는데, 이 때 조선일보 특파원으로서 상세하게 그 전말을 연일 보도해 형평사운동에 대한 전국적 지원을 이끌어 냈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안동청년연맹의 임시의장으로서 조직을 결성하고, 「국제청년데이의 유래」라는 제목으로 강연하기도 했다. 노동운동의 연장선에서 1925년 10월에 안동노우회(安東勞友會)를 결성했는데, 김남수가 창립총회의 사회를 맡았다. 또 1925년 11월에는 기자들의 모임인 안동기우단을, 다음해 12월에는 안동기자단을 결성하였다. 제3차 조선공산당에서 핵심간부로 활동하던 김남수는 1928년 9월경에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고, 폐병에다가 ‘정신이상설’이 신문에 보도되는 등 어려운 옥살이를 참아냈다. 또 1939년에는 ‘사문서위조행사’라는 이름 아래 다시 체포되어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다. 옥중 투쟁의 여독으로 광복을 맞기 직전에 사망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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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화 강학소(이산정)
김도화(1825 - 1912)의 자는 달민, 호는 척암이며, 조선후기 『척암문집(拓庵文集)』을 저술한 학자이자 의병장이다. 1893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다. 1895년 12월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안동군내 유림대표로 거의통문(擧義通文)을 발표하였다. 또한 안동에 입성한 김도화는 의병진의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그해 12월 3일에 안동의 의병 수백명이 모여 안동관찰부를 점령하고 무기를 빼앗자 관찰사 김석중(金奭中)은 도망하였다. 이로 인하여 안동의병의 기세를 크게 떨쳤다. 1896년 태봉전투에 참전하였으며, 그뒤 노환으로 은거하면서도 을사조약과 경술국치를 맞아 항의문과 규탄문을 통하여 일제에 항거하였다. 저서로는 『척암문집(拓庵文集)』이 있다. 1983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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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부 기적비
서상부(1840 - 1896)는 1896년 김상종(金象鍾)의 의성의진(義城義陣)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경북 북부지역의 을미의병은 1896년 양력 1월 20일 안동에서 시작되어 예안·청송·진보·영양·영덕·영해·영주·봉화·순흥·풍기·용궁·예천·의성 등 14개 군에서 일어났다. 의성의진은 1896년 3월 25일 김상종을 비롯한 유림들이 결성하였다. 3월 14일 향회를 열고 공사원(公事員) 이돈유(李敦裕)·신상헌(申相憲)·김익상(金翊相)·구증회(具曾會) 등의 유림들이 김상종을 의병장으로 천거하였다. 의병장 김상종이 주도하는 의성의진은 소모장에 김수욱(金壽旭)·중군장에 권대직(權大稷)·관향장에 김수협(金壽莢) 등으로 편성되었다. 의성의진은 대부분 의병장 김상종의 족친과 친구, 그리고 아우 김회종의 절친한 친구 권휘연(權徽淵)·서상부(徐相孚) 등으로 진용이 이루어졌다.의성의진은 1896년 3월 25일 창의한 뒤 4월 2일(음 2. 20) 구봉산전투(九峯山戰鬪) 이후 5월 10일(음 3. 29) 황산에 주둔하고 있던 중 대구와 군위 관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 황산전투(黃山戰鬪)에서 의성의진은 참패를 당하여 권휘연·서상부·김수담·김수협 등 27명이 전사하였다. 서상부는 의병장 김상종의 아우 김회종의 절친한 친구로 의성의진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황산전투에서 전사·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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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계홍 묘
권계홍(1871 - 1945)의 자는 계승, 호는 해암이며, 조선 말기 안동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이다. 권계홍은 예안·안동·진보·영양 등지를 무대로 활약한 박처사(본명 박인화) 의진(義陣)에서 활동하였다. 박처사는 안동시 임동면 대곡리 출신으로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병 300여 명을 거느리고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권계홍은 박처사 의진에 들어가 의병 30~40명을 거느리고 있으면서 자위단(自衛團)과 영양군 순사 주재소를 공격하는 등 과감한 활동을 펼쳤다. 박처사 의진은 1905년부터 1908년 여름까지 활동하면서 류시연·신돌석 의진과 연대를 맺고 있었다. 특히 류시연 의진과 연합하여 1907년 2월 예안분파소를 공격하기도 했다. 1908년에 들어와 임동·진보·영양 등지에서 활발한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박처사는 같은 해 5월 임동면 대곡리에서 밀정에게 살해되었다. 박처사가 순국한 뒤에도 권계홍은 의병 활동을 계속하였다. 1908년 7월 14일(음력) 영양 순사 주재소를 습격하였다가 체포되어, 1909년 1월 27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폭동 및 내란죄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다. 권계홍은 항소하였으나 3월 27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어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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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대표마을 무실마을 표지석
독립운동 대표마을 무실마을 표지석은 무실마을의 독립운동 역사를 기리고자 2019년 3.1운동 100주년에 세운 표지석이다. 안동의 무실마을은 나라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불굴의 의리정신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모습은 독립운동사에도 그대로 드러나, 18명의 독립유공자가 나왔다. 무실마을의 항일투쟁은 1895년 의병항쟁으로 시작되었다. 기봉 류복기의 10대손 류치호는 의병의 큰 버팀목이 되었고, 류완, 류연박은 직접 의병을 이끌었다. 줄기차게 항전을 이어가던 류시연은 1914년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12년부터 무실마을 사람들은 정재종가에서 협동학교를 운영하며 민족인재 양성에 힘썼다. 그 영향으로 학생들은 임동면 독립만세운동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로 인해 협동학교도 끝내 문을 닫아야했다. 만세시위를 이끌던 류교희는 6여 년의 옥고를 치렀으며, 류동혁과 류연성은 끝내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류동범과 류세진, 그리고 류연복은 만주에서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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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대표마을 금소마을 표지석
독립운동 대표마을 금소마을 표지석은 금소마을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기리고자 2019년 3.1운동 100주년에 세운 표지석이다. 금소마을은 1919년 3월 21일 임하면 3.1운동을 주도한 곳이다. 이를 계획한 사람은 임득연.임범섭.임찬일 등이다. 이들이 광무황제 국장에 참례했다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돌아와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날짜를 3월 21일로 정하였다. 약속한 3월 21일 저녁이 되자, 100여 명이 금소마을 앞에 모였다. 이들은 마을에서 독립만세를 부른 뒤, 면소재지인 신덕리로 향하였다. 밤 9시가 되자 참여자는 300여 명으로 늘어났으며, 일제 경찰의 탄압에 맞서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부수는 등 만세 열기도 한층 격렬해졌다. 결국 경찰의 발포로 금소마을의 신필원.임지열.임호일 등은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체포자 가운데 10명이 실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금소마을은 독립유공자가 모두 15명이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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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대표마을 오대마을 표지석
독립운동 대표마을 오대마을 표지석은 오대마을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기리고자 2019년 3.1운동 100주년에 세운 표지석이다. 오대마을은 1919년 3월 21일 길안면 만세운동을 주도한 곳이다. 이날 오후 3시 무렵 김정연.김정익.손역학 등은 350여 명의 참여자를 이끌고, 길안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오후 6시 무렵이 되자 참여자들은 주재소로 향하였다. 열기가 한층 뜨거워져 주재소를 부수자, 경찰이 공포를 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흩어졌다. 이날의 만세운동으로 오대마을은 큰 고초를 겪었다. 3월 22일 김술병.정성흠이 붙잡혀 갔으며, 24일에는 손두원이, 26일에는 김필락이 일제 경찰의 총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두 사람을 실제 주도자로 여겨 살해한 것이다. 그 뒤 피신했던 주도자들도 체포되어 모두 10명이 옥고를 치렀다. 오대마을은 독립유공자가 모두 11명이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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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두원 집
손두원(1883 - 1919)은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안동 3.1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한 7개 도시에서 일제히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경상북도 안동군 임하면(臨河面) 오대동(梧垈洞)에 사는 손영학(孫永學), 김정익(金正翼), 김정연(金正演), 장두희(張斗凞) 등은 길안면(吉安面) 천지(泉旨)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3월 21일 아침에 그들은 태극기를 숨겨서 천지시장에 도착하였으며, 시장에서 구입한 당목(唐木)주1에 ‘대한독립만세’를 적은 큰 기(旗)를 만들었다. 오후 5시경에 손영학을 비롯한 시위 주도자들은 시장 중앙에 태극기와 큰 기를 세우고 독립만세를 선창하면서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손두원(孫斗源)은 장터에 나왔다가 만세시위에 합류하였다. 35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길안면사무소로 행진하였다. 일본 군경이 시위대를 저지하자, 시위대는 면사무소를 향해서 돌을 던져 면사무소의 유리창과 출입문을 파손하였다. 오후 9시경 시위대는 주재소로 몰려가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 군경이 무력을 행사하자, 시위대는 투석전을 전개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주재소 유리창과 문이 파손되었다. 일본 군경의 발포로 자정 무렵에 이르러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다음날인 3월 22일 오후에도 손두원은 시위대 300여 명과 함께 주재소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대는 일본 군경을 향해서 투석전을 전개하였으며, 오후 8시경 일본 군경의 발포로 해산하였다. 3월 24일 일본 군경이 시위에 참여하였다는 명목으로 손두원을 체포하려고 하자, 나막신주2으로 일본 경찰의 얼굴을 치면서 저항하였다. 그러자 일본 경찰이 실탄 3발을 발사하여 총상을 입고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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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락 구 묘
김필락(1873 - 1919)의 자는 성옥, 호는 오은이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일찍이 김대락(金大洛)·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활동하다가 1910년 이들이 만주로 망명하자, 나라를 떠나면 영원히 잃게 된다고 주장하며 고향에 남았다. 1919년 고종의 죽음으로 3·1운동이 일어나자 손영학(孫永學)·김정연(金正演) 등과 함께 길안면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21일 오후 3시 무렵 시위 군중은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면서 천지장터를 돌다가 면장과 면서기의 참여를 촉구하고자 면사무소로 향하였다. 오후 6시 무렵 350여 명의 시위 군중은 면사무소에 돌을 던져 유리창과 출입문을 부수었고, 300m 떨어진 주재소로 몰려가 격렬하게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때 김필락은 현장에서 체포되지 않았다. 3월 24일 함께 시위에 참가했던 손두원(孫斗源)이 체포된 시위자들의 자백을 받고 오대리로 출동한 일제 경찰에게 총살당하였고, 김필락은 3월 25일 저녁 다시 찾아온 경찰에 붙잡혀 총살당함으로써 그 자리에서 순국하였다. 1977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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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학 묘
손영학(1895 - 1944)은 일제강점기 안동에서 김정익 등과 3.1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21일 김정익(金正翼)·김정연(金正演)과 함께 안동군 길안면 천지(泉旨) 장날을 이용하여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고 미리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과 태극기를 만들어두었으나 그 계획이 누설되어 천지에 있는 일본경찰주재소의 삼엄한 주시를 받았다. 3월 21일 오후 3시경 계획을 강행하여 300여 명의 독립만세 시위군중을 모아, 그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행진하다가 면장과 면서기 등을 시위대열에 합류시키기 위하여 면사무소로 행진하였다. 그러나 미리 대기중이던 일본경찰이 유연성(柳淵成)을 붙잡아가자, 시위군중을 지휘하여 투석으로 면사무소를 파괴하였다. 오후 7시경에는 방향을 경찰관주재소로 돌려 일본경찰과 충돌하였다. 이때 손영학은 김정익과 함께 주재소를 파괴하기로 협의하고 선두에 서서 투석으로 대항하였으나 일본경찰의 총격으로 손영학은 주동자로 붙잡혀 5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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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두원 묘
손두원(1883 - 1919)은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안동 3.1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한 7개 도시에서 일제히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경상북도 안동군 임하면(臨河面) 오대동(梧垈洞)에 사는 손영학(孫永學), 김정익(金正翼), 김정연(金正演), 장두희(張斗凞) 등은 길안면(吉安面) 천지(泉旨)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3월 21일 아침에 그들은 태극기를 숨겨서 천지시장에 도착하였으며, 시장에서 구입한 당목(唐木)주1에 ‘대한독립만세’를 적은 큰 기(旗)를 만들었다. 오후 5시경에 손영학을 비롯한 시위 주도자들은 시장 중앙에 태극기와 큰 기를 세우고 독립만세를 선창하면서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손두원(孫斗源)은 장터에 나왔다가 만세시위에 합류하였다. 35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길안면사무소로 행진하였다. 일본 군경이 시위대를 저지하자, 시위대는 면사무소를 향해서 돌을 던져 면사무소의 유리창과 출입문을 파손하였다. 오후 9시경 시위대는 주재소로 몰려가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 군경이 무력을 행사하자, 시위대는 투석전을 전개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주재소 유리창과 문이 파손되었다. 일본 군경의 발포로 자정 무렵에 이르러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다음날인 3월 22일 오후에도 손두원은 시위대 300여 명과 함께 주재소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대는 일본 군경을 향해서 투석전을 전개하였으며, 오후 8시경 일본 군경의 발포로 해산하였다. 3월 24일 일본 군경이 시위에 참여하였다는 명목으로 손두원을 체포하려고 하자, 나막신주2으로 일본 경찰의 얼굴을 치면서 저항하였다. 그러자 일본 경찰이 실탄 3발을 발사하여 총상을 입고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