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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식 묘
이영식(1897 ~ 1981), 결코 죽일 수 없는 사람, 호는 성산(惺山)이다. 이영식은 경상북도 성주 출신으로 1919년, 계성학교 5학년 재학 당시, 이만집 등과 함께 대구와 서울에서 3·1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그로 인해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 옥고를 치렀다. 이후에도 서울, 수원, 조치원, 청주, 공주, 대전, 상주, 김천, 대구, 경주로 옮겨가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에 다시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년 6개월 복역하였다. 출옥 후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고베(神戶)신학교를 졸업, 이후 고국으로 돌아와 대구애락원 나환자교회에 부임하여 약 7년간 나병환자(한센병)와 생활하였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함경북도, 만주국 간도성 등등에서 목사로 시무하였으며 일본 요코하마의 조선인 교회에서도 활동하였으나 광복 직전에 귀국하였다. 광복 후 장애인 복지와 특수교육 지도자양성에 힘썼으며 1946년 대구맹아학원(大邱盲啞學院)을 설립을 시작으로 심신장애인의 교육과 복지에 평생 헌신하였다. 6.25 전쟁 시 피난을 갔다가 인민위원회에 연행되어 성주 가천지서에서 총살형을 당할 위기에 처했으나 장애인을 위해 헌신해 온 그의 사연이 밝혀지면서 죽음을 면했다. 이영식이 '결코 죽일 수 없는 사람'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 사건이다. 평생 특수교육과 사회복지 분야의 발전을 위해 힘썼으며 현 대구대학교 전신인 한국사회사업대학, 대구보명학교, 대구 보건학교 등을 설립하였다. 정부에서는 각각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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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률 기념비
허병률(1885 - 1943)은 일제강점기 광복회원으로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1917년 박상진(朴尙鎭)·채기중(蔡基中)이 조직한 광복회(光復會)에 가입,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1919년 9월 경 양한위(梁漢緯)·권태일(權泰鎰)로부터 상해판 『독립신문』 및 경고문 등을 전달받아 부호와 관공리에게 발송, 최대한의 지원을 호소하여 모금한 8,000원의 군자금을 1920년 상해(上海)로 가서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그 해 8월에 박용선(朴容善)·조한명(趙漢明)·이동찬(李東燦) 등과 군자금 모집을 모의하고 권총과 탄약을 휴대, 서울 서린동에 사는 엄홍섭(嚴弘燮)을 설득하여 2만원을 군자금으로 교부받아 곧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송금하는 등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였다. 일본경찰에 붙잡혀 1921년 6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1963년 대통령표창,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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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상 기적비
허동상(1908 - 1951)은 경북 경산(慶山) 사람이다. 1930년 1월 경산군 하양서당(河陽書堂)의 훈장(訓長)이던 그는 전년도 11월 광주(光州)에서 발생한 학생항일시위운동의 전국적인 확산에 자극받아, 대구(大邱)에서도 학생들이 항일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촉구하는 격문을 작성하여, 동월 14일과 15일 새벽에 대구고등보통학교, 대구여자고등보통학교, 대구상업하교 등 시내 각급학교의 담장에 붙이기도 하고 발송하기도 하였다. 이 일로 인해 동월 18일 대구경찰서에 붙잡힌 그는 1930년 2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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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규 집
김봉규(1892 - 1968)는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경상북도 경주 출생. 1919년 3·1운동 때 향리에서 참여하였다. 1920년 송두환(宋斗煥)·최윤동(崔胤東)·이수영(李遂榮)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령에 따라 대구일대를 중심으로, 일반국민으로부터 직장인·부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그 대상자를 삼아 군자금 조달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김봉규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자금조달원을 미행하던 일본경찰 카이[甲斐]가 위협하고 체포하려 할 때, 김봉규가 사살하였으나 곧 체포되었다. 1924년 11월 하순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으며, 만기로 출옥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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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규 공적비
김봉규(1892 - 1968)는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경상북도 경주 출생. 1919년 3·1운동 때 향리에서 참여하였다. 1920년 송두환(宋斗煥)·최윤동(崔胤東)·이수영(李遂榮)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령에 따라 대구일대를 중심으로, 일반국민으로부터 직장인·부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그 대상자를 삼아 군자금 조달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김봉규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자금조달원을 미행하던 일본경찰 카이[甲斐]가 위협하고 체포하려 할 때, 김봉규가 사살하였으나 곧 체포되었다. 1924년 11월 하순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으며, 만기로 출옥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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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규 묘
김봉규(1892 - 1968)는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경상북도 경주 출생. 1919년 3·1운동 때 향리에서 참여하였다. 1920년 송두환(宋斗煥)·최윤동(崔胤東)·이수영(李遂榮)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령에 따라 대구일대를 중심으로, 일반국민으로부터 직장인·부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그 대상자를 삼아 군자금 조달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김봉규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자금조달원을 미행하던 일본경찰 카이[甲斐]가 위협하고 체포하려 할 때, 김봉규가 사살하였으나 곧 체포되었다. 1924년 11월 하순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으며, 만기로 출옥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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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내영 집
정내영(1900 - 1961)은 1920년 송두환·김종철·최해규·정동석·김봉규 등과 경북 유림단 의거에 참여했고 의령경찰을 사살하고 도피하던 중, 1924년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에도 중국과 국내를 비밀리에 다니면서 계속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1990년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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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내영 공적비
정내영(1900 - 1961)은 1920년 송두환·김종철·최해규·정동석·김봉규 등과 경북 유림단 의거에 참여했고 의령경찰을 사살하고 도피하던 중, 1924년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에도 중국과 국내를 비밀리에 다니면서 계속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1990년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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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내영 구 묘
정내영(1900 - 1961)은 1920년 송두환·김종철·최해규·정동석·김봉규 등과 경북 유림단 의거에 참여했고 의령경찰을 사살하고 도피하던 중, 1924년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에도 중국과 국내를 비밀리에 다니면서 계속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1990년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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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기 기념비
정수기(1896 - 1936)는 경북 일대에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3.1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구국운동을 전개하다 1927년 수감되어 2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고, 고문으로 인해 발병하여 가석방되었으나 41세의 나이로 곧 사망하였다. 1990년 정부에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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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지 묘
경상북도 경주에 위치한 김대지의 묘이다.김대지(1891-1942)는 경남 밀양의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국권이 침탈되자 조국 광복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비밀결사 일합사(一合社)를 조직하였으며, 황상규, 고인덕, 김원봉 등과 동화학원(東和學院)에서 2세 교육을 실시하였다고 한다. 1917년부터는 만주의 길림(吉林), 봉천(奉天) 지방을 왕래하면서 국권회복운동을 계획하다가 체포되어 1918년 5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만주로 망명하여 동삼성(東三省)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계획하였으며, 이어서 김동삼, 이시영, 조소앙, 이회영 등과 함께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0일, 초대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의정 활동에 참여하였으며, 동년 11월에는 밀양군 조사원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 후 임시정부 교통 차장, 내무위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1921년 11월에는 북경(北京)에서 임시정부와 별개로 조직된 조선공화정부(朝鮮共和政府)에 참여하여 이상용을 대통령으로 추대하고 그는 내무총장에 임명되어 소위 삼남파(三南派)에 의한 정부를 경영하기로 하였다. 1920년에는 김원봉의 의열단(義烈團) 조직을 지원했으며, 곽재기의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및 일제 요인 사살 계획에도 참여하였다. 이후 1925년까지 의열단장 김원봉의 자문에 응하여 무장 항일 투쟁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1928년에는 다시 만주로 들어가 길림성(吉林省) 영고탑(寧古塔)에서 의료업에 종사하면서 지하활동을 계속하다가 빈강성(濱江省) 파언현(巴彦縣)에서 순국하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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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 집
최완은 독립유공자 최준의 동생이다. 최완의 '휘'는 '완'이고, '자'는 '내수'이며. '초명'은 '영지'이다. 최완은 80여명의 애국지사와 함께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여 재무부위원으로 선출되어 조사원과 의정원의원 등을 역임하던 중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가 지병이 악화되어 운명했다. 1990년 정부에서 선생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