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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현 거처(송포정사)
김구현(1889 - 1969)은 1920년 음력 5월 안동 서후면 교리 권영묵(權寧默)의 집에서 흠치교에 가입하였다. 그는 흠치교 활동을 통해 국권 회복에 앞장섰는데, 교도를 모집하고 자금을 거두어들이는 등 교세의 확장을 도모하다 체포되었다. 체포된 김구현은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김구현은 흠치교(증산교)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는데, 흠치교는 뒷날 보천교(普天敎)로 불리는 종교단체이다. 보천교는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을 따르던 차경석(車京石, 본명 車輪洪)이 창시한 흠치교 계열의 새로운 종교이다. 차경석은 강일순이 죽고 난 후 선도교(仙道敎)를 창시하였는데, 1921년 선도교를 보화교(普化敎)로 고쳤다가 이듬해 1922년에 다시 보천교로 개칭하였다. 이들은 조선 독립을 표방하고 독립자금 모집 활동을 펼쳤으며, 외국산 물품 배격과 자급자족 운동을 전개하며 물산장려 운동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2006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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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모(김익모)의 묘
김양모(1850- 1935)의 자는 여함, 호는 응봉이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며, 이명은 김익모이다. 김양모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등으로 인해 전국에서 의병항쟁이 펼쳐지자 안동의진(安東義陳)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김양모는 1919년 3월 일제의 조선 국권 침탈 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 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호소하기 위해 김창숙(金昌淑)이 주도한 파리장서 의거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가 체포되었다. 파리장서 의거는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한국 유림 대표 137인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의에 일본의 침략상과 한국의 피해 실정을 밝힌 독립청원서를 보낸 사건이다. 흔히 파리장서 사건·파리장서 운동·제1차 유림단 의거라고 부르기도 한다. 안동 출신으로는 김병식(金秉植)·류연박(柳淵博)·류필영(柳必永)·이만규(李晩煃) 등이 관여하였다. 1996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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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식 집
김원식(1889 - 1940)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동북면군사연락위원, 길림전만선반제동맹대회 집행 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만주 봉천(奉天)으로 망명,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입하였다. 1920년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 서로군정서 독판(督辦) 이상룡(李相龍)의 지시로 비밀리에 입국하여 전국 유지들과 연락, 군자금을 마련하였다. 1922년 서로군정서를 비롯하여 대한독립단·벽창의용대(碧昌義勇隊)·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평북독판부(平北督辦府)·보합단(普合團)·광한단(光韓團) 등 각 군단 대표들이 모여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로 통합하는데 협력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령에 따라 동북면군사연락위원으로 임명되어 북경에 상주하면서 60여 명의 학생들을 난징[南京] 등지로 유학시켰다. 1924년 이후 정의부(正義府)에 투신, 중앙집행위원으로 활약하는 한편 1927년에는 민족 단결과 농민들의 생활 개선을 목적으로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의 설립에 앞장섰다. 1928년 삼부통합운동(三府統合運動) 당시 정의부 대표로 활약하였으나, 뜻이 좌절되자 혁신의회(革新議會)를 조직,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29년 상해로 가서 당시 국내에서 전개되고 있던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는 군중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이어 곧 상해한인청년동맹을 결성하였다. 1930년 길림전만선반제동맹대회(吉林全滿鮮反帝同盟大會)의 집행 위원에 피선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 뒤 동북면군사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일군에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뒤 다시 만주로 가서 1934년 2월경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대표로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 대표 윤기섭(尹琦燮) 등과 난징에서 회합하여 3월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결성, 활동하였다.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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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락 집
김회락(1844 - 1896)의 자는 현우, 경승이며, 조선 말기 안동 출신의 의병이다. 김회락은 일찍이 서산사숙(西山私塾)에서 수학하였고,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등으로 전국에서 의병 항쟁이 펼쳐지자 안동의진(安東義陳)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특히 일직면 귀미리 출신인 김도화(金道和)가 의병장으로 추대된 뒤 안동의진의 포장(砲將)을 맡아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북후면 옹천 전투에서 패한 뒤 서후면 금계리 의성김씨 학봉 종택에서 척후장 김진의(金鎭懿)와 함께 일본군과 관군에게 체포되어, 1896년 7월 22일 새벽 안동부로 끌려가 순국하였다. 김회락은 순국하면서 아내에게 “보수(報讎: 원수를 갚음)를 가르쳐라” 하고 고함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 총에 맞아 피가 흐르자 “이 피가 어떤 피인데 이렇게 흘릴 수가 있나” 하면서 도포 자락으로 감쌌다고 한다.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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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락, 김용환 집
김흥락(1827 - 1899)의 본관은 의성, 자는 계맹, 호는 서산이며, 조선 말기 안동 출신의 의병장이다. 1895년 12월 30일 내려진 단발령 소식이 안동에 전해지자 김흥락은 의병을 일으키려는 논의를 이끌어 냈다. 논의 과정에서 김흥락은 1차 의병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지병과 대묘(大廟: 학봉 김성일의 사당)를 모시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사양하고, 봉화 닭실[酉谷] 출신의 참봉 권세연(權世淵)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권세연이 이끄는 1차 의진이 결성되자 안동부성에 머물며 여러 문중의 협력을 이끌어 내는 데 주력하였다. 한편, 안동의진은 1896년 1월 하순 안동부성 탈환에 성공하고, 3월 7일 지휘부를 포(砲)를 중심으로 하는 전투적인 편제로 편성하였다. 일주일 뒤 권세연이 의병장에서 스스로 물러나자, 김흥락은 후임으로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를 선출하고 하회의 류도성(柳道性)과 함께 지휘장(指揮將)을 맡아 안동의진의 활동을 뒷받침하였다. 의병이 해산된 뒤 검제 서산재(西山齋)에서 병약한 몸으로 학문에 몰두하다가 1899년 세상을 떠났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김용환(1887 - 1946)의 본관은 의성, 자는 여현이며, 김흥락의 손자이고,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김용환은 할아버지 김흥락의 영향을 받아 쓰러져 가는 나라를 세우고자 1908년 이강년(李康秊) 의진에 참가하여 김현동(金賢東)과 함께 적정(敵情) 탐지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1911년에는 김상태(金尙台) 의진에 참가하는 등 적극적으로 의병 항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1911년 경상북도 순흥 상단곡 전투에서 김현동이 부상을 당하자, 그를 업고 예천군 유천면 중평리로 돌아왔다. 또 만주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해 거액의 군자금을 제공하였다가 일본 경찰에게 세 번이나 체포되어 고초를 치렀다. 1919~1920년경 김용환은 김원식(金元植)과 함께 만주 망명길에 올랐으나, 신의주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다시 안동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1921년에는 의용단에 가입하여 경상북도 지단(支團)의 서기로 활약하였다. 의용단은 김찬규(金燦奎) 등이 만주 길림의 군정서(軍政署)와 연결되어 군자금을 지원하기 위하여 결성된 독립군 지원 단체였다. 주로 경상도 지역을 무대로 활동한 의용단은 경상북도 안동을 비롯하여 영천(永川)·군위(軍威)·영일(迎日)과 경상남도 창녕(昌寧) 등지의 부호를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친일 부호들의 외면으로 인하여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1922년 12월 28일 김용환은 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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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대표마을 금계마을 표지석
독립운동 대표마을 금계마을 표지석은 금계마을의 역사를 기리고자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세운 표지석이다. 안동의 금계마을은 나라가 위협에 처할 때마다 불굴의 의리정신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모습은 독립운동사에도 그대로 드러나, 17명의 독립유공자가 나왔다. 금계마을의 항일투쟁은 1895년 의병항쟁으로 시작되었다. 학봉11대 종손 김흥락은 안동 을미의병의 첫 장을 여는데 중심 역할을 하였으며, 김희락, 김윤모, 김호락, 김진의, 김준모는 직접 의병을 이끌었다. 중.후기 의병시기(1904~1909)에는 13대 종손 김용환과 김현동.김규헌 등이 이강년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저항을 이어갔다. 3.1운동 후 김익모는 파리장서에 서명했으며, 의용단 김용환.김병동 등과 김세동이 자금 모집에 힘쓰다가 고초를 겪었다. 김동식.김화식 형제는 2차 유림단 의거에 앞장 섰고, 김연환과 김원식은 만주로 망명하여 무장 항일투쟁을 펼쳤다. 이 밖에도 김흥락 아래서 학문을 닦았던 후학 가운데 60여명이 독립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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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락 강학소(소계서당)
김흥락(1827 - 1899)의 본관은 의성, 자는 계맹, 호는 서산이며, 조선 말기 안동 출신의 의병장이다. 1895년 12월 30일 내려진 단발령 소식이 안동에 전해지자 김흥락은 의병을 일으키려는 논의를 이끌어 냈다. 논의 과정에서 김흥락은 1차 의병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지병과 대묘(大廟: 학봉 김성일의 사당)를 모시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사양하고, 봉화 닭실[酉谷] 출신의 참봉 권세연(權世淵)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권세연이 이끄는 1차 의진이 결성되자 안동부성에 머물며 여러 문중의 협력을 이끌어 내는 데 주력하였다. 한편, 안동의진은 1896년 1월 하순 안동부성 탈환에 성공하고, 3월 7일 지휘부를 포(砲)를 중심으로 하는 전투적인 편제로 편성하였다. 일주일 뒤 권세연이 의병장에서 스스로 물러나자, 김흥락은 후임으로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를 선출하고 하회의 류도성(柳道性)과 함께 지휘장(指揮將)을 맡아 안동의진의 활동을 뒷받침하였다. 의병이 해산된 뒤 검제 서산재(西山齋)에서 병약한 몸으로 학문에 몰두하다가 1899년 세상을 떠났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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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환 묘
김용환(1887 - 1946)의 본관은 의성, 자는 여현이며, 김흥락의 손자이고,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김용환은 할아버지 김흥락의 영향을 받아 쓰러져 가는 나라를 세우고자 1908년 이강년(李康秊) 의진에 참가하여 김현동(金賢東)과 함께 적정(敵情) 탐지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1911년에는 김상태(金尙台) 의진에 참가하는 등 적극적으로 의병 항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1911년 경상북도 순흥 상단곡 전투에서 김현동이 부상을 당하자, 그를 업고 예천군 유천면 중평리로 돌아왔다. 또 만주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해 거액의 군자금을 제공하였다가 일본 경찰에게 세 번이나 체포되어 고초를 치렀다. 1919~1920년경 김용환은 김원식(金元植)과 함께 만주 망명길에 올랐으나, 신의주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다시 안동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1921년에는 의용단에 가입하여 경상북도 지단(支團)의 서기로 활약하였다. 의용단은 김찬규(金燦奎) 등이 만주 길림의 군정서(軍政署)와 연결되어 군자금을 지원하기 위하여 결성된 독립군 지원 단체였다. 주로 경상도 지역을 무대로 활동한 의용단은 경상북도 안동을 비롯하여 영천(永川)·군위(軍威)·영일(迎日)과 경상남도 창녕(昌寧) 등지의 부호를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친일 부호들의 외면으로 인하여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1922년 12월 28일 김용환은 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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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락 묘
김흥락(1827 - 1899)의 본관은 의성, 자는 계맹, 호는 서산이며, 조선 말기 안동 출신의 의병장이다. 1895년 12월 30일 내려진 단발령 소식이 안동에 전해지자 김흥락은 의병을 일으키려는 논의를 이끌어 냈다. 논의 과정에서 김흥락은 1차 의병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지병과 대묘(大廟: 학봉 김성일의 사당)를 모시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사양하고, 봉화 닭실[酉谷] 출신의 참봉 권세연(權世淵)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권세연이 이끄는 1차 의진이 결성되자 안동부성에 머물며 여러 문중의 협력을 이끌어 내는 데 주력하였다. 한편, 안동의진은 1896년 1월 하순 안동부성 탈환에 성공하고, 3월 7일 지휘부를 포(砲)를 중심으로 하는 전투적인 편제로 편성하였다. 일주일 뒤 권세연이 의병장에서 스스로 물러나자, 김흥락은 후임으로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를 선출하고 하회의 류도성(柳道性)과 함께 지휘장(指揮將)을 맡아 안동의진의 활동을 뒷받침하였다. 의병이 해산된 뒤 검제 서산재(西山齋)에서 병약한 몸으로 학문에 몰두하다가 1899년 세상을 떠났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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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철 묘
전성철(1894 - 1950)의 자는 덕수, 이명은 전성영이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전성철은 1919년 3월 23일 3차 안동면 시위에 참가하였다. 3차 안동면 시위는 안동군민들이 대거 참가하여 군 전체가 벌인 만세 시위로 일본 경찰의 공격과 탄압이 극심하였다. 그리고 또다시 김후성(金後性)·권영헌(權寧憲) 등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인 30여 명과 함께 3월 24일 풍산장날을 이용하여 풍산시장 부근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출동한 일본 수비대에 체포된 전성철은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형을 선고 받고 항소하였으나, 5월 12일 대구복심법원과 6월 14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2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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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락 묘
김회락(1844 - 1896)의 자는 현우, 경승이며, 조선 말기 안동 출신의 의병이다. 김회락은 일찍이 서산사숙(西山私塾)에서 수학하였고,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등으로 전국에서 의병 항쟁이 펼쳐지자 안동의진(安東義陳)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특히 일직면 귀미리 출신인 김도화(金道和)가 의병장으로 추대된 뒤 안동의진의 포장(砲將)을 맡아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북후면 옹천 전투에서 패한 뒤 서후면 금계리 의성김씨 학봉 종택에서 척후장 김진의(金鎭懿)와 함께 일본군과 관군에게 체포되어, 1896년 7월 22일 새벽 안동부로 끌려가 순국하였다. 김회락은 순국하면서 아내에게 “보수(報讎: 원수를 갚음)를 가르쳐라” 하고 고함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 총에 맞아 피가 흐르자 “이 피가 어떤 피인데 이렇게 흘릴 수가 있나” 하면서 도포 자락으로 감쌌다고 한다.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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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암회 집
이암회(1896 - 1919)는 1919년 3월 18일 2차 안동면 시위에 참가한 데 이어 3월 23일 발생한 3차 안동면 시위에도 참여하였다. 3차 안동면 시위는 안동면민뿐만 아니라 안동 관내의 여러 주민들이 함께 참여하여 규모가 군 전체에까지 이르렀다. 3,000여 명의 시위 군중은 경찰서와 안동지원을 파괴하고 “구금된 사람을 구출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경찰서와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원으로 대거 몰려갔다. 일본 수비대 앞에서도 기세를 잃지 않고 격렬히 맞서다가 30여 명의 사망자와 5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암회는 안동면 출신의 김옥진, 서후면 출신의 권두경, 와룡면 출신의 김필수 등과 함께 일본 수비대가 쏜 총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982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