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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일 순국기념비
권기일(1886-1920)의 본명은 권혁린이며, 일제강점기 때, 서로군정서 외무담당과 어사부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2년 만주 봉천성(奉天省)으로 망명하여 이시영(李始榮)·김좌진(金佐鎭) 등 항일지도자들과 접촉하였다. 1919년 3월 부민단(扶民團)·자신계(自新契)·교육회(敎育會)를 통합, 한족회(韓族會)가 조직되자 구정(區正)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19년 11월 한족회가 독립군의 양성과 항일독립전쟁의 수행을 위하여 군정부(軍政府)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확대, 개편되자 이에 적극 참여하여 외무담당·어사부장(御史部長) 등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5월에는 서로군정서 군사훈련학교의 비밀서류를 상해로 옮기기도 하였으나, 같은 해 7월 일본군의 급습을 받아 항전하다 순국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각각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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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농림학교 터 표지석
안동농림학교 학생항일운동은 일제강점기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이 일으킨 항일 운동이다. 1933년 4월 개교한 안동농림학교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다른 학교와 마찬가지로 군사교육기관으로 변질되었다. 만주군 출신의 일본군이 학교에 배치되어 군사 교육과 근로를 강행해 나갔다. 특히 전황이 점점 불리해지자 학도병 지원을 강요하고 나섰다. 1943년 2월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은 대구80연대로 끌려가 신체검사를 받았고, 이러한 상황에서 안동농림학교의 일부 학생들은 손명술(孫明述)의 집에 모여 임시정부에서 보내는 방송을 듣고 있었다. 방송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이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확신을 얻게 된 권영동·고제하·서정인 등은 일본의 군대로 끌려가 죽기보다는 차라리 민족을 위해 싸우다 죽자고 결의하였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다 비밀결사단체인 조선회복연구단을 조직하기로 하였다. 안동농림학교 8·9회생이던 권영동·황병기·이준택·이갑룡·김오섭·장인덕·김우현·이승태 등은 1943년 10월 조선회복연구단을 결성하였다. 이 비밀결사에는 안동농림학교 학생뿐만 아니라 안동 지역의 지도층 인사들이 참여하였는데 1944년 방학 무렵에는 단원이 51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조선회복연구단이 결성되기 이전에 안동농림학교 학생들과 관계된 또 하나의 조직이 있었다. 이 조직은 명성회(明星會, 또는 여명회)로, 1942년 2월경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던 이정선(李貞善)이 일본 도쿄로 유학 갔다가 1943년 4월 하순 귀국하여 당시 친분이 있던 안동농림학교 9회생 동기들을 규합하여 만든 비밀결사단체이다. 문예서클의 성격을 띤 명성회는 면학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적으로 하였으며, 『여명(黎明)』이라는 교양잡지를 발간하고, 역사서·사상서 등을 탐독하면서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명성회는 효과적인 투쟁을 전개하고자 1944년 10월 조선회복연구단과 연대를 모색하였다. 이 두 단체의 연합은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이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추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안동경찰서를 기습 공격하고 무기고에서 무기를 확보하여 항쟁을 벌인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안동농림학교 무기고에 있는 총으로 안동경찰서와 안동헌병대를 기습·점령하여 일본인을 제압하고, 나아가 철도와 통신망을 파괴한 뒤 의성(義城) 지역으로 진격하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1945년 2월 초 일본 경찰이 이 계획을 알아내고, 관련자를 검거하기 시작했다. 1945년 3월 10일 대대적인 검거로 인해 대부분의 회원들이 체포되었다. 안동농림학교 항일결사로 인해 체포된 64명은 일본 경찰의 혹독한 고문을 받아야만 했으며, 그 과정에서 손성한은 순국하였다. 안동 출신의 강일원·고제하·권영동·권오직·권중석·권태염·김건우·김복한·김상우·김호익·김홍구·서정인·손성한·유시승·이대녕·장병하·정현모는 옥고를 치르다 광복과 더불어 1945년 8월 16일 대구지방검찰청 안동지청에서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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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독립운동 대표사적지(예안 3.1운동지)
독립운동 대표마을 예안 표지석은 3.1운동의 역사를 기리고자 2021년 세운 표지석이다. 도산면 서부리는 1919년 3.1운동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곳이다. 1919년 당시 예안면의 소재지였던 이곳에서는 안동지역 최초로 대규모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유림, 기독교인, 농민 등이 참여하였고, 식민통치 기관인 면사무소 직원들도 만세시위를 준비하고 참여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3월 17일 오후 주민 20~30명이 선성산(宣城山)에 올라가 일제가 세워둔 '어대전기념비(御大典紀念碑)'를 쓰러뜨리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이를 신호탄으로 면민들은 일제히 시장으로 나오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참여자는 1,500여 명으로 늘어났으며, 일제 경찰은 수비대까지 동원하여 탄압에 나섰다. 여기에 굴하지 않고 예안주재소로 향하자, 선명학교.예안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사기를 돋우었다. 40명이 체포되면서 흩어졌지만, 일부는 이튿날 안동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어 다음 장날인 3월 22일, 다시 2차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오후 7시부터 약 2,000명의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동부리와 서부리, 선성산 위에서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날 경찰의 발포로 군중 13명이 부상을 입고, 3명이 체포되었다. 두 차레에 걸친 만세시위로 50명이 재판을 받고 고초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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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대표마을 온혜마을 표지석
1896년 1월 23일 결성된 예안의진(선성의진)은 9월까지 4차례에 걸쳐 결성과 해산을 거듭하며, 줄기차게 항전을 이어갔다. 이만도가 이끌던 1차 의진이 해산되자, 은혜마을 이중린은 이를 추슬러 2차 의진을 결성하고, 대장에 취임하였다. 그가 이끌던 의병부대는 호좌,풍기,순흥,영주,봉화,예천의진과 함께 일본군 병참부대가 주둔한 상주 태봉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무너지고 말았다. 이중린에 이어 이인화는 삼백당에 의병소를 세우고, 다시 항전 준비에 나섰다. 그러나 9월 초 적의 기습 공격으로 삼백당은 소실되고 말았다. 4차 의진은 노송정 종가의 이찬화가 맡아, 항전을 이어갔다. 9월 중순 예안의병은 막을 내렸지만, 이후 예안지역에서 쉼 없이 이어졌던 독립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온혜마을 사람들도 그 뜻을 이어나갔다. 1919년 3월 이령호.이병린.이인호.이희림이 예안 3.1운동을 이끌다가 고초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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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화 집(온계종택)
이인화(1858-1929)의 호는 원여이며, 개항기 예안대장을 역임한 의병장이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이후 선성(宣城)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다. 1896년 1월 안동에서 거의한 김도현(金道鉉)과 안동의병대장 김도화(金道和) 휘하에서 안동부 입성에 성공하였다. 3월에는 함창의 태봉(胎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수비대와의 전투에서 선봉장으로 군사 300여명을 거느리고 격전을 벌였다. 적과의 교전이 치열하고 적의 증원부대가 도착하여 의병부대가 패퇴하자, 김도현과 끝까지 항전하다가 일단 헤어져 새로이 의병을 일으켜 예안대장(禮安大將)이 되었다. 10월에 고종이 해산을 선유(宣諭)함에 따라 군사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예안에서 선명학교(宣明學校)를 설립하여 인재양성에 온힘을 기울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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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린 사적비
이중린(1838-1917)의 자는 진백, 호는 운포, 황신이며, 조선 말기 안동 출신의 의병이다. 1895년(고종 32)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이 일어나자 전국 각지의 거병 움직임과 더불어 안동 지역 여러 곳에서도 의병 봉기를 위한 통문이 돌았는데, 그중 예안통문이 첫 번째의 것이다. 이중린은 1896년 1월 예안통문에 의해 결성된 선성의진에서 부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이때 대장은 향산 이만도(李晩燾)가, 선봉장은 이인화(李仁和)가 맡았다. 1896년 2월 중반 무렵 1차 선성의진이 해산되자, 이중린은 자신의 토지를 팔아 군자금을 마련한 뒤 청량산을 근거지로 하여 의병을 모아 부하들을 엄격한 규율로 이끌어 2차 선성의진을 정비하였다. 또한 영양 지역의 김도현을 중군으로 초빙하여 전투력을 강화하고 인근 지역과 연합 의진을 형성, 함창의 태봉에서 관군을 맞아 전투를 벌였지만 패하고 말았다. 이중린은 다시 청량산으로 들어가 전열을 갖추었으나 이후 2차 선성의진의 주도권은 이인화에게로 넘어갔다.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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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홍 추모비
이유홍(1898-1968)의 자는 의경(毅卿), 호는 백오(百五)이며, 일제강점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이유홍은 1919년 3월 17일 오후 3시 30분경 군중들과 함께 예안면사무소 뒤편 선성산에 올라가 일본이 세운 어대전기념비(御大典紀念碑)를 쓰러뜨리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1차 예안면 시위를 펼쳤다. 일본 경찰들이 시위 주동자들을 체포하자, 저녁 7시경 시위 군중의 선두에 서서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하여 격렬하게 일본 경찰에 맞섰다. 이 같은 활동으로 체포된 이유홍은 1919년 5월 3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원에서 태형 90대를 선고 받고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1983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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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영 집
이원영(1886-1958)은 해방 이후 대한예수교 장로회 교단대표를 역임한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11년 봉성측량학원을 거쳐 보문의숙(寶文義塾)을 졸업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안동군 예안 장날인 3월 16일 예안선명학교와 예안보통학교 학생들을 동원,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잡혀 1년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수감중 장로교 장로 이상동(李尙洞)을 만나 감화를 받아 기독교에 귀의하게 되었고, 출감 후 안동성경학원에 입학, 교역자의 길을 택하였다. 졸업 후 안동지방의 농촌교회 전도사로 활동하는 한편, 본격적인 신학수업을 위하여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30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뒤 곧 경안노회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고, 영주중앙교회에 취임하였다. 신사참배가 강요된 1938년 이후 이를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서너 차례에 걸쳐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 안동서부교회를 시무하면서 안동성경학원을 개원하여 청소년교역자 양성에 진력하였다. 1945년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대한예수교 장로회 교단의 대표직을 맡았다. 또, 1958년 안동서부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었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노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신사참배를 부인한 출옥성도였으나 신사참배에 응한 동역자를 비판한 바 없고, 특히 성경강해교수법이 유명하였다. 1980년 대통령표창,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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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영 구 묘
이원영(1886-1958)은 해방 이후 대한예수교 장로회 교단대표를 역임한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11년 봉성측량학원을 거쳐 보문의숙(寶文義塾)을 졸업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안동군 예안 장날인 3월 16일 예안선명학교와 예안보통학교 학생들을 동원,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잡혀 1년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수감중 장로교 장로 이상동(李尙洞)을 만나 감화를 받아 기독교에 귀의하게 되었고, 출감 후 안동성경학원에 입학, 교역자의 길을 택하였다. 졸업 후 안동지방의 농촌교회 전도사로 활동하는 한편, 본격적인 신학수업을 위하여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30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뒤 곧 경안노회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고, 영주중앙교회에 취임하였다. 신사참배가 강요된 1938년 이후 이를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서너 차례에 걸쳐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 안동서부교회를 시무하면서 안동성경학원을 개원하여 청소년교역자 양성에 진력하였다. 1945년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대한예수교 장로회 교단의 대표직을 맡았다. 또, 1958년 안동서부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었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노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신사참배를 부인한 출옥성도였으나 신사참배에 응한 동역자를 비판한 바 없고, 특히 성경강해교수법이 유명하였다. 1980년 대통령표창,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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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재고택
목재고택은 조선 후기의 문신(文臣) 목재(穆齎) 이만유(李晩由: 1822~1904)가 살던 집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후손으로 형조참판(刑曹參判) 사은(仕隱) 이구운(李龜雲)(1681~1761)의 증손자(曾孫子)인 이만유(李晩由)는 철종(哲宗) 9년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로 벼슬을 시작하여 승지(承旨) 대사간(大司諫) 등을 역임(歷任)하여 종이품(從二品) 가선(嘉善)에 이르렀다. 외직(外職)으로 영해도호부사(寧海都護府使)시 선정(善政)으로 택호(宅號)를 영해댁(寧海宅) 또는 영감댁(令監宅)이라 했다. 건물 구조는 'ㄱ'자형의 안채와 'ㄴ'자형의 사랑채가 어울려 'ㅁ'자형을 구성하고 있다. 전면에 중문을 내지 않고 사랑채와 안채가 만나는 좌우 측면에 문칸을 설치하였는데 우측 문이 주된 문이다. 사랑채 마당과 안마당이 독립적이고 효과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슬대문을 겸한 행랑채가 있었으나 수몰(水沒)로 인해 유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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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록 유허지비
이육사(1904 - 1944)의 본명은 이원록, 이원삼, 자는 태경, 아호는 육사이며, 일제강점기 「청포도」, 「절정」, 「광야」 등을 저술한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925년에 형 이원기(李源琪), 아우 이원유(李源裕)와 함께 대구에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1927년에는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밖에도 1929년 광주학생운동, 1930년 대구 격문사건(檄文事件) 등에 연루되어 모두 17차에 걸쳐서 옥고를 치렀다. 중국을 자주 내왕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가을 잠시 서울에 왔을 때 일본 관헌에게 붙잡혀, 베이징으로 송치되어 1944년 1월 베이징 감옥에서 작고하였다. 문단 활동은 조선일보사 대구지사에 근무하면서 1930년 1월 3일자 『조선일보』에 시작품 「말」과 『별건곤(別乾坤)』에 평문 「대구사회단체개관(大邱社會團體槪觀)」 등을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뒤 1935년 『신조선(新朝鮮)』에 「춘수삼제(春愁三題)」 · 「황혼(黃昏)」 등을 발표하면서 그의 시작 활동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 뒤 『신조선』 · 『비판(批判)』 · 『풍림(風林)』 · 『조광(朝光)』 · 『문장(文章)』 · 『인문평론(人文評論)』 · 『청색지(靑色紙)』 · 『자오선(子午線)』 등에 30여 편의 시와 그밖에 소설 · 수필 · 문학평론 · 일반평문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생존시에는 작품집이 발간되지 않았고, 1946년 아우 이원조(李源朝)에 의하여 서울출판사에서 『육사시집(陸史詩集)』 초판본이 간행되었다. 대표작으로는 「황혼」 · 「청포도(靑葡萄)」(문장, 1939.8.) · 「절정(絶頂)」(문장, 1940.1.) · 「광야(曠野)」(자유신문, 1945.12.17.) · 「꽃」(자유신문, 1945.12.17.) 등을 꼽을 수 있다. 그의 시작세계는 크게 「절정」에서 보인 저항적 주제와 「청포도」 등에 나타난 실향 의식(失鄕意識)과 비애, 그리고 「광야」나 「꽃」에서 보인 초인 의지(超人意志)와 조국 광복에 대한 염원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의 생애는 부단한 옥고와 빈궁으로 엮어진 행정(行程)으로, 오직 조국의 독립과 광복만을 염원하고 지절(志節)로써 일관된 구국투쟁은 민족사에 큰 공적으로 남을 것이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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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문학관
이육사문학관은 이육사의 민족정신과 문학정신을 길이 전하고 널리 알리는 공간이다. 일제 강점기에 17번이나 옥살이를 하며 민족의 슬픔과 조국 광복의 염원을 노래한 항일 민족시인 이육사 선생의 흩어져 있는 자료와 기록을 한곳에 모았다. 육사의 혼, 독립정신과 업적을 학문적으로 정리해 이육사 탄신 100주년이 되는 2004년 그의 출생지인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900번지에 설립, 개관하였다. 2017년 1월에 전시관, 생활관, 복원한 이육사 생가로 증축하여 재개관 하였다. 이육사(1904 - 1944)의 본명은 이원록, 이원삼, 자는 태경, 아호는 육사이며, 일제강점기 「청포도」, 「절정」, 「광야」 등을 저술한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925년에 형 이원기(李源琪), 아우 이원유(李源裕)와 함께 대구에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1927년에는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밖에도 1929년 광주학생운동, 1930년 대구 격문사건(檄文事件) 등에 연루되어 모두 17차에 걸쳐서 옥고를 치렀다. 중국을 자주 내왕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가을 잠시 서울에 왔을 때 일본 관헌에게 붙잡혀, 베이징으로 송치되어 1944년 1월 베이징 감옥에서 작고하였다. 문단 활동은 조선일보사 대구지사에 근무하면서 1930년 1월 3일자 『조선일보』에 시작품 「말」과 『별건곤(別乾坤)』에 평문 「대구사회단체개관(大邱社會團體槪觀)」 등을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뒤 1935년 『신조선(新朝鮮)』에 「춘수삼제(春愁三題)」 · 「황혼(黃昏)」 등을 발표하면서 그의 시작 활동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 뒤 『신조선』 · 『비판(批判)』 · 『풍림(風林)』 · 『조광(朝光)』 · 『문장(文章)』 · 『인문평론(人文評論)』 · 『청색지(靑色紙)』 · 『자오선(子午線)』 등에 30여 편의 시와 그밖에 소설 · 수필 · 문학평론 · 일반평문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생존시에는 작품집이 발간되지 않았고, 1946년 아우 이원조(李源朝)에 의하여 서울출판사에서 『육사시집(陸史詩集)』 초판본이 간행되었다. 대표작으로는 「황혼」 · 「청포도(靑葡萄)」(문장, 1939.8.) · 「절정(絶頂)」(문장, 1940.1.) · 「광야(曠野)」(자유신문, 1945.12.17.) · 「꽃」(자유신문, 1945.12.17.) 등을 꼽을 수 있다. 그의 시작세계는 크게 「절정」에서 보인 저항적 주제와 「청포도」 등에 나타난 실향 의식(失鄕意識)과 비애, 그리고 「광야」나 「꽃」에서 보인 초인 의지(超人意志)와 조국 광복에 대한 염원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의 생애는 부단한 옥고와 빈궁으로 엮어진 행정(行程)으로, 오직 조국의 독립과 광복만을 염원하고 지절(志節)로써 일관된 구국투쟁은 민족사에 큰 공적으로 남을 것이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