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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석 충의기적비
장기석(1860 - 1911)은 일제강점기 일본경찰을 구타하여 옥중에서 순절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옥산(玉山). 자는 진여(震汝). 경상북도 성주 출신. 일찍 부모를 여의고 몹시 가난하여 38세까지 공부를 하지 못하였다. 부인 박씨와 함께 열심히 살아 재산을 모은 뒤, 공부를 못하였음을 부끄럽게 여겨 3년간 두문불출하고 밤낮없이 학업에 전념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성주군수와 경찰서장으로부터 메이지[明治]의 천장절(天長節) 경축식에 참석할 것을 강요받자,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일본경찰을 목침으로 때려 중상을 입힌 뒤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곳에서 바로 단식을 시작하여 10여일 만에 의식을 잃었다. 일본경찰들이 강제로 음식을 먹이려 하자 그릇으로 서장을 때리며 먹기를 거부, 옥중에서 순절하였다. 1963년 대통령 표창, 1977년에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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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석 해동청풍비, 박씨부인 기열비
해동청풍비(海東淸風碑) 이 비는 1936년 애국지사 자하 장기석선생의 충절을 추모하는 뜻있는 선비들이 정성을 모아 건립한 것인데, 얼마후 일본관헌에 의해 네조각으로 파손되어 천변에 깊이 묻혀 있던 것을 광복 후에 다시 발굴해서 원형대로 복원해 놓은것이다. 선생은 한일합방의 부당함을 단신으로 규탄하다가 왜경에 끌려가서 갖은 협박과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가 옥중에서 단식 27일만에 순절하였다. 한편 선생의 부인 함양박씨는 일본정부가 이 비를 철거한다는 소식을 듣자 철거 전날밤에 소복을 한 채, 이제 나의 넋이 이 유지를 지키리라고 유언하고, 비 뒤에 있는 고목에 목을 걸어 자진하였다. 후일 이를 기려 부인의 기열비를 이 비 곁에 세웠다. 이 비를 해동청풍이라 이름한 것은 옛날 은나라 충신 백이숙재의 고사를 선생의 충절에 비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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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 대한독립만세 의거지 기림비
기미 대한독립만세의거지 기림비는 1919년 4월 2일 밤 11시에 여흥연(40세), 여춘연(21세), 여왕연(21세), 여문회(29세), 여호진(31세), 도무환(31세)등의 주도로, 벽진면 3백여 명과 월회당 앞 도로에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한 후 동리를 누비면서 만세시위를 하다 붙잡혀 옥고 한 애국심을 널리 전하고자 세워진 비이다. 월회당은 1984년 5월 21일에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1919년 파리 만국 평화 회의에 보낼 파리 장서(巴里長書)를 써서 송준필(宋浚弼)과 김창숙(金昌淑), 여상윤(呂相胤) 등이 서명한 곳으로, 독립운동의 장소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월회당은 우리나라 최초로 향약을 교육하고 시행한 장소로서, 또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 만세 운동의 본거지로서 보존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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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환 순국기념비
도무환(1888-1919)의 자는 주여, 자열, 호는 둔암, 졸수이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어려서부터 집에서 세전(世傳)하는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충효가 출중하였다. 1907년 1월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 보상 운동이 경상북도 성주 지역에서도 전개되자 적극 참여하여 의연금을 지원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무단 통치에 분개하여 동지들과 함께 시사를 논하는 한편, 국권 회복의 방책을 모색하였다. 1919년 4월 2일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해평동의 만세 시위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기정(李基定) 등의 성주 유림들이 주도하였던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돌아오고 있던 같은 동리의 여우룡(呂又龍)·여왕연(呂旺淵)으로부터 일본 경찰의 야만적인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분개한 도무환은 즉시 여홍연(呂弘淵)·여우룡·여왕연·여문회(呂文會)·여호진(呂鎬鎭) 등과 함께 성주읍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돌아오는 사람들을 규합하여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해평동에서 다시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다. 1919년 4월 2일 밤 11시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해평동 월회당(月會堂) 앞 도로에서 이들 6명의 주도하에 300여 명의 사람들이 함께 독립 만세를 고창한 후 밤늦도록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벽진주재소(碧珍駐在所) 경찰들이 만세 시위를 저지하려 하자, 도무환은 “조선인들이 이 같은 독립 만세를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 이를 저지하려는 너희들의 행동은 참으로 부당하다.”고 외치며 항의하였다. 군중들은 밤늦도록 시위를 한 뒤 흩어졌고, 시위를 주도했던 여홍연·여우룡·여왕연·여문회·여호진과 함께 검거되었다.도무환은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조금도 굴하지 않고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1919년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태형 90도(度)를 선고받았다. 그 외 여홍연 징역 1년, 여우룡과 여왕연 각기 징역 8월, 여호진과 여문회 각기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5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 항소하였으나 기각되었고, 8월 6일 고등법원에서도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도무환은 태(笞) 90도의 처벌을 받고 출옥하였으나 가혹한 태형의 후유증으로 출옥한 이튿날인 1919년 6월 5일 사망하였다. 1983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 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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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호문 집, 사당
석호문(1923-1981)의 자는 우익, 호는 호차이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42년 성주농업실수학교(星州農業實修學校)[지금의 성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에 강제 징집되어 중국 전선으로 보내졌다. 1944년 6월 중국 하남성(河南省)의 일본군 부대를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한 후, 광복군 제2 지대 제3 구대 제1 분대에 배치되었다. 1945년 5월 광복군과 미군의 연합 군사 훈련에 참가하여, 3개월 동안 통신 파괴와 교란, 정보 수집, 유격대 조직 등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전술 훈련을 받았다. 교육 훈련이 끝나면 국내로 파견되어 일본군 군사 시설의 파괴와 함께 지하군을 조직하여 정보 활동을 벌이다가, 미군 상륙 부대와 협력하여 본토 수복 작전을 수행할 계획이었다. 1945년 8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광복군이 한미 공동 작전 대원 및 제2 지대 대원 약 100명으로 만든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 황해도반에 편성되었다. 노성환(盧星煥), 황삼룡(黃三龍), 이동환(李東煥), 홍기화(洪基華), 신덕영(申悳泳), 이우성(李宇成), 허봉석(許鳳錫), 송수일(宋秀一)과 함께 편성되어 국내 진입을 준비하다가,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12월 광복군 상사로 예편하고, 1946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요인들이 주축이 된 한국독립당에 가담하여 초급 행정 특보 위원, 대표 행정 자치 위원을 지냈다. 1981년 10월 15일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으며,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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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호문 공적비
석호문(1923-1981)의 자는 우익, 호는 호차이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42년 성주농업실수학교(星州農業實修學校)[지금의 성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에 강제 징집되어 중국 전선으로 보내졌다. 1944년 6월 중국 하남성(河南省)의 일본군 부대를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한 후, 광복군 제2 지대 제3 구대 제1 분대에 배치되었다. 1945년 5월 광복군과 미군의 연합 군사 훈련에 참가하여, 3개월 동안 통신 파괴와 교란, 정보 수집, 유격대 조직 등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전술 훈련을 받았다. 교육 훈련이 끝나면 국내로 파견되어 일본군 군사 시설의 파괴와 함께 지하군을 조직하여 정보 활동을 벌이다가, 미군 상륙 부대와 협력하여 본토 수복 작전을 수행할 계획이었다. 1945년 8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광복군이 한미 공동 작전 대원 및 제2 지대 대원 약 100명으로 만든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 황해도반에 편성되었다. 노성환(盧星煥), 황삼룡(黃三龍), 이동환(李東煥), 홍기화(洪基華), 신덕영(申悳泳), 이우성(李宇成), 허봉석(許鳳錫), 송수일(宋秀一)과 함께 편성되어 국내 진입을 준비하다가,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12월 광복군 상사로 예편하고, 1946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요인들이 주축이 된 한국독립당에 가담하여 초급 행정 특보 위원, 대표 행정 자치 위원을 지냈다. 1981년 10월 15일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으며,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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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섭 묘
홍기섭(1873-1919)의 자는 학삼, 호는 우송이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을사늑약 때 오적(五賊)을 성토하며 공론 환기를 위해 노력했고, 1910년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자 각처의 동지를 규합하고 국권 회복을 위한 구국책을 논의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송규선(宋圭善), 송우선(宋祐善), 송회근(宋晦根), 김창렬(金昌烈) 등과 함께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선전문과 태극기를 만들어 각 동리로 배부하는 거사 준비를 하였다. 경상북도 성주 지역의 3.1 운동은 1919년 3월 28일 장날에 선남면 선원동[현 선원리]의 이현기(李玄琪) 등이 먼저 시작했으나, 가장 큰 만세 시위는 유림과 기독교 세력이 연합하여 추진한 4월 2일의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였다. 홍기섭은 1919년 4월 2일 오후 1시경 성주읍 장터에서 이기정(李基定), 이기현, 송인집(宋寅輯), 송회근 등과 함께 시위를 주도하며 3,0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대대적인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일제 경찰이 출동하여 해산 명령을 내렸지만 굴하지 않고 계속 시위행진을 하였다. 주도 인물들은 즉각 경찰서로 연행되었고, 분노한 3,000여 명의 시위대가 경찰서로 몰려가 만세를 부르고 석방을 요구하며 투석전을 벌였다. 일경의 발포로 홍기섭과 이태희(李兌凞)가 현장에서 순국하고, 이봉희(李鳳熙) 등 7명이 부상을 입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 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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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섭 순국기념비
홍기섭(1873-1919)의 자는 학삼, 호는 우송이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을사늑약 때 오적(五賊)을 성토하며 공론 환기를 위해 노력했고, 1910년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자 각처의 동지를 규합하고 국권 회복을 위한 구국책을 논의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송규선(宋圭善), 송우선(宋祐善), 송회근(宋晦根), 김창렬(金昌烈) 등과 함께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선전문과 태극기를 만들어 각 동리로 배부하는 거사 준비를 하였다. 경상북도 성주 지역의 3.1 운동은 1919년 3월 28일 장날에 선남면 선원동[현 선원리]의 이현기(李玄琪) 등이 먼저 시작했으나, 가장 큰 만세 시위는 유림과 기독교 세력이 연합하여 추진한 4월 2일의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였다. 홍기섭은 1919년 4월 2일 오후 1시경 성주읍 장터에서 이기정(李基定), 이기현, 송인집(宋寅輯), 송회근 등과 함께 시위를 주도하며 3,0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대대적인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일제 경찰이 출동하여 해산 명령을 내렸지만 굴하지 않고 계속 시위행진을 하였다. 주도 인물들은 즉각 경찰서로 연행되었고, 분노한 3,000여 명의 시위대가 경찰서로 몰려가 만세를 부르고 석방을 요구하며 투석전을 벌였다. 일경의 발포로 홍기섭과 이태희(李兌凞)가 현장에서 순국하고, 이봉희(李鳳熙) 등 7명이 부상을 입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 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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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희 묘
이승희(1847-1916)의 자는 계도, 호는 강재, 대계, 한계이며, 대한제국기 위정척사운동에 앞장선 유학자이자 항일운동가이다. 20세 전후부터 평생을 위정척사운동에 앞장서 흥선대원군에게 시국대책문을 올려 당시의 정국을 바로 잡으려고 하였다. 무분별한 개국(開國)에 대해서는 척사소를 올려 성리학적 전통사회의 질서를 옹호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곽종석(郭鍾錫) 등 문인과 함께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각국 공사관에 전달하였다. 그 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을사오적을 참수하고 조약을 파기하라는 상소를 올려 대구감옥소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1907년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자 일제의 침략을 폭로하는 서한을 보내고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노령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유인석(柳麟錫)·이상설(李相卨)·김학만(金學滿)·장지연(張志淵) 등을 만나 국외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이상설 등과 함께 소만국경에 있는 길림성(吉林省) 봉밀산(蜂密山) 밑 황무지를 사들여 한인(韓人)을 집단 이주시켜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하여, 청소년을 교육하고 민중계도와 독립정신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1914년 요동으로 가서 한인공교회(韓人孔敎會)를 창립하고, 북경 등의 유교성적지(儒敎聖跡地)를 순례하면서 유교의 진흥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한편, 동삼성(東三省)총독 등 중국고관들과 접촉하여 독립운동에 대한 원조를 청하였다. 그리고 위안스카이[袁世凱]와 손문(孫文)에게 서한을 보내어 한중 양국의 친선결속을 호소하였다. 유고로는 『한계유고』가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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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숙 사적비
김창숙(1879-1962)의 자는 문좌, 호는 심산, 벽옹이며, 조선후기 『심산만초』, 『벽옹만초』, 『벽옹칠십삼년회상기』 등을 저술한 유학자,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리고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매국오적을 성토하였다. 1908년(순종 2) 대한협회 성주지부를 조직하여 계급타파를 부르짖었다. 1909년 일진회(一進會)가 한일합병론을 제창하자 동지들을 규합하여 중추원에 그들의 반역을 성토하는 글을 보냈으며, 단연회(斷煙會)의 기금으로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설립하여 신교육을 시도하였다.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음주로 세월을 보내다가 어머니의 교훈에 따라 유학에 정진하였다. 유학적 소양과 한학의 조예는 주로 이 시기에 기반이 닦여졌다. 3 · 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을 규합해서 130여 명의 연명으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의 진정서를 작성하여 중국 상해로 망명한 뒤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제출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제1차 유림단사건’이다.1924년 만주와 몽고 접경지대의 황무지를 빌려서 개간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을 추진하였다. 그 곳에 군정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조달문제로 국내에 잠입하여 모금운동을 전개하다가 탄로 나자, 거듭 출국하는 이른바 ‘제2차 유림단사건’을 일으켰다. 독립운동을 고양시키기 위해 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독립운동지인 『천고(天鼓)』를 발행했고, 이어 박은식(朴殷植) 등과 협력하여 『사민일보(四民日報)』도 발간하였다. 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해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45년 일제 말기의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었다가 광복 직전에 발각되어 구속되었으며, 왜관경찰서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이후 곧 상경하여 민주의원(民主議院)의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정당의 난립과 신탁통치의 찬반, 미소공동위원회 참가여부의 문제 등으로 일반 정치인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 않고 육영사업에 힘썼다. 1946년 봄 전국유림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자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 위원장으로 선출되고, 성균관장을 겸임하였다. 이어 유교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실시하고자 성균관대학기성회를 결성하였다. 이석구(李錫九)로부터 재단법인 학린회(學鄰會)의 토지재산을 기부 받고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를 병합하여 1946년 9월 25일 성균관대학의 설립을 인가받고 초대학장에 취임하였다.1953년 2월 6일 전국에 흩어져 있는 향교재단을 규합하여 성균관대학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받고, 초대총장에 취임하였으며, 1955년 재단 내 분규로 사임하였다. 1962년 세상을 떠나자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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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군 국채보상운동기념비
성주군 국채보상운동기념비는 1907년 대구에서 발의된 국채보상운동에 성주 유림의 대표였던 한계 이승희, 심산 김창숙 등이 주축이 되어 대부분의 문중과 마을이 동참한 업적을 기리고, 선조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세워진 비이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 국채를 국민들의 모금으로 갚기 위하여 전개된 국권회복운동이다. 1907년 2월 중순대구의 광문사(廣文社) 사장 김광제(金光濟)와 부사장 서상돈(徐相敦)은 단연(斷煙)을 통하여 국채를 갚아 나가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제창하였다. 당시의 광문사는 지식인과 민족 자산가로 구성되어, 주로 실학자들의 저술을 편찬하고 신학문을 도입하여 민족의 자강 의식을 고취하고 있던 출판사였다. 또, 서상돈은 일찍이 독립협회 회원과 만민공동회 간부로서 자주독립 운동에 참여해 온 인사였다. 김광제ㆍ서상돈은 1907년 2월 21일자 『대한매일신보』에 “국채 1천 3백만 원은 바로 우리 대한제국의 존망에 직결되는 것으로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인데, 국고로는 해결할 도리가 없으므로 2천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국고를 갚아 국가의 위기를 구하자”고 발기 취지를 밝혔다. 취지문을 발표한 뒤 대동광문회(大同廣文會 : 대구 광문사)는 민회소(民會所), 즉 단연회(斷煙會)를 설립하여 직접 모금 운동에 나섰다. 대동광문회의 국채보상운동 발기가 『대한매일신보』ㆍ『제국신문』ㆍ『만세보』ㆍ『황성신문』 등에 보도되자 각계각층의 광범한 호응이 일어났다. 서울에서는 2월 22일김성희(金成喜) 등이 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를 설립하고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기성회는 회칙까지 제정하여 본격적인 운동의 채비를 갖추었다. 또, 수전소(收錢所)는 서점ㆍ약국ㆍ대한매일신보사ㆍ잡지사 등으로 지정하였다.그 뒤 전국에서 ‘국채보상’의 이름을 붙인 20여 개에 달하는 국채보상운동단체가 창립되었다. 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1907년 4월부터 12월까지였다. 특히, 6월∼8월에는 가장 많은 의연금이 모아졌다. 그러나 운동은 일제의 탄압과 운동주체역량의 부족으로 인하여 1908년에 들어서면서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운동을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꾸준히 추진해 간 중심체는 양기탁(梁起鐸)과 베델(Bethell, E.T.裵說)이 이끄는 대한매일신보사였다. 따라서, 이 운동은 사실 국권회복운동의 하나로서 전개되고 있는 셈이었고, 이에 일제는 갖은 방법을 다하여 방해, 탄압하려 들었다. 일제는 1907년 이후 베델을 국외로 추방하는 공작을 펴, 1908년 5월 3주(週)의 금고와 벌금형을 선고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7월통감부 당국은 “대한매일신보가 보관한 국채보상금을 베델ㆍ양기탁 두 사람이 마음대로 하여 3만원을 소비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양기탁을 구속해 버렸다. 이른바 일제는 ‘국채보상금소비사건(國債報償金消費事件)’을 조작한 것이다. 통감부의 공작에 따라 전 국채보상지원금 총합 소장이었던 윤웅렬(尹雄烈)은 “보상금 중 삼만 원을 영국인 베델이 사취하였으므로 그 반환을 요청한다.”는 반환청구서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일제는 이를 근거로 운동의 지도자들에 대한 불신감을 민중들에게 심어 주고자 하였다. 양기탁은 공판 결과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통감부의 공작으로 운동의 주체는 분열되어, 운동 자체가 암초에 부딪쳐 끝내는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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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공적충훈비
성주공적공훈비는 조국의 광복과 국가발전의 초석이 된 선열들의 애국정신과 자유국가 수호를 위하여 헌신하신 우리 고장 독립유공자와 참전유공자의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을 후세에 길이 계승 발전시키고,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나라사랑 정신을 깨우치는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2004년 1월 건립한 비이다. 이 조형물은 높이 8m의 주조형물과 머릿돌, 명각비, 설명비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성주출신 독립유공자 65명과 6·25전쟁 참전유공자 1,984명, 월남참전유공자 262명 등 총 2,311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