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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암리 독립운동 기념비
상주 장암리에서 일어난 3·1독립운동 기념비. 3·1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파급되어 가는 가운데 1919년 4월에 들어와 화북면 장암리 이장 이성범은 김재갑, 홍종흠 등 면민들과 의논하여 만세운동 권고문과 태극기를 만들며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4월 4일부터 인근 마을 여러 곳에 만세운동의 계획을 알리고 4월 8일에 신일서숙에 모였다. 오후 2시쯤 속리산 문장대를 향하여 행진하며 태극기 2개를 세워놓고 각 마을에서 올라온 70여 명이 합세한 가운데 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성범, 김재갑, 이용희 등은 일경에 체포되어 1년 6개월 징역을 언도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85년 5월 1일 상수시에서는 장암리 3·1독립운동이 시작된 신일서숙 터에 기념비를 세워 장암리 주민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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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동 집
최규동(1882 - 1953)은 해방 이후 서울시교육회장, 서울대학교 이사장, 서울대학교 총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이다. 경상북도 성주 출신. 사숙(私塾)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광신상업학교(廣信商業學校)를 거쳐 정리사(精理舍)의 수학연구과를 졸업하였다. 평양의 기명학교(箕明學校)·대성학교(大成學校) 등에서 수학교사로 재직하였다. 그 뒤 서울의 휘문의숙(徽文義塾)에 교사로 있다가 1918년 중동학교(中東學校)를 인수하여 교장에 취임하였다. 일제강점기 초반 학생들에게 민족정신과 구국애족정신을 고취하기 위하여 1주일에 50여 시간을 가르치는 등 정성을 기울였다. 그러나 일제시대 기록물에서 조선 신궁(神宮: 神社)의 중일전쟁 기원제 발기인 및 임전보국단(臨戰報國團) 평의원을 지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1942년 6월 일제 관변지 『문교의 조선』에「죽음으로써 군은(君恩: 일본 천황의 은혜)에 보답하다」라는 글이 게재되는 등 일제에 협력하기도 하였다. 이글에 대해 2015년 서울교대 안천 명예교수가 "백농 선생 모르게 서무실 직원이 써서 주었다"고 진술하였다. 광복과 더불어 같은 해 9월 한국교육위원회가 조직되었을 때 7명의 위원 중 한 사람으로 일반교육의 책임자가 되었다. 이어 교육심의회가 조직되었을 때 제3분과 위원회에서 교육행정분야를 담당하였으며, 1947년 조선전기공업중학교를 인수하여 중동중학교와 함께 교장직을 겸임하였다. 그 뒤 서울시교육회장·서울대학교 이사장·조선교육연합회 회장 등을 지냈으며, 1949년 제3대 서울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1950년 6·25전쟁 때 납북, 평양에서 작고하였다.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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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동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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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환 사적비, 의열각
이경환(1902 - 1929)은 경상북도 성주(星州) 사람이다. 1928년 11월 25일 일본천황이 경도(京都)에 갔을 때 일제의 한국병탄의 부당성과 총독부 철폐를 요구하는 직소장(直訴狀)을 제출하려고 하다가 경도의 동본원사(東本願寺) 앞에서 일제 경찰에 붙잡혀 9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귀국하였다. 1929년 11월 25일 빼앗긴 나라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하여 목을 매어 자결하였으며, 부인도 뒤따라 자결하였다고 한다.정부에서는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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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숙 집
김창숙(1879-1962)의 자는 문좌, 호는 심산, 벽옹이며, 조선후기 『심산만초』, 『벽옹만초』, 『벽옹칠십삼년회상기』 등을 저술한 유학자,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리고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매국오적을 성토하였다. 1908년(순종 2) 대한협회 성주지부를 조직하여 계급타파를 부르짖었다. 1909년 일진회(一進會)가 한일합병론을 제창하자 동지들을 규합하여 중추원에 그들의 반역을 성토하는 글을 보냈으며, 단연회(斷煙會)의 기금으로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설립하여 신교육을 시도하였다.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음주로 세월을 보내다가 어머니의 교훈에 따라 유학에 정진하였다. 유학적 소양과 한학의 조예는 주로 이 시기에 기반이 닦여졌다. 3 · 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을 규합해서 130여 명의 연명으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의 진정서를 작성하여 중국 상해로 망명한 뒤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제출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제1차 유림단사건’이다.1924년 만주와 몽고 접경지대의 황무지를 빌려서 개간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을 추진하였다. 그 곳에 군정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조달문제로 국내에 잠입하여 모금운동을 전개하다가 탄로 나자, 거듭 출국하는 이른바 ‘제2차 유림단사건’을 일으켰다. 독립운동을 고양시키기 위해 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독립운동지인 『천고(天鼓)』를 발행했고, 이어 박은식(朴殷植) 등과 협력하여 『사민일보(四民日報)』도 발간하였다. 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해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45년 일제 말기의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었다가 광복 직전에 발각되어 구속되었으며, 왜관경찰서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이후 곧 상경하여 민주의원(民主議院)의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정당의 난립과 신탁통치의 찬반, 미소공동위원회 참가여부의 문제 등으로 일반 정치인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 않고 육영사업에 힘썼다. 1946년 봄 전국유림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자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 위원장으로 선출되고, 성균관장을 겸임하였다. 이어 유교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실시하고자 성균관대학기성회를 결성하였다. 이석구(李錫九)로부터 재단법인 학린회(學鄰會)의 토지재산을 기부 받고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를 병합하여 1946년 9월 25일 성균관대학의 설립을 인가받고 초대학장에 취임하였다.1953년 2월 6일 전국에 흩어져 있는 향교재단을 규합하여 성균관대학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받고, 초대총장에 취임하였으며, 1955년 재단 내 분규로 사임하였다. 1962년 세상을 떠나자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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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술 기념비
김원술(1893 - 1948)은 경북 성주(星州) 사람이며, 이명은 김창렬이다. 1919년 3월 초순이래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4월 2일 성주군 성주면(星州面) 성주장터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3,000명 이상의 많은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같은해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大邱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5년에는 김창숙(金昌淑)이 항일운동자금을 모금하기 위해서 귀국하였을 때 600원(圓)을 지원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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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서당 성명학교
청천서당은 동강 김우옹 선생을 제사지내던 집으로 조선 영조 5년(1729)년에 지어졌다. 처음에는 청천서원이라는 이름으로 회연서원과 함께 성주지역의 중심서원이었으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 되었다. 그 후 동강의 12대 후손인 김호림에 의해 청천서당으로 이름을 바꾸어 다시 지었다. 1910년에는 심산 김창숙 선생이 청천서당을 성명학교라고 하고 애국계몽운동을 위한 학교로 활용되기도 하였고, 김창숙 선생이 한때 머물던 장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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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흠 묘
백성흠(1888 - 1922)은 경북 성주(星州) 사람이다. 1919년 3월 초순이래 전국적으로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끊임없이 전개되자 성주군 성주면(星州面) 성주장터에서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4월 2일 장터에 모인 많은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게 붙잡혔다. 같은 해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大邱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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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흠 사적비
백성흠(1888 - 1922)은 경북 성주(星州) 사람이다. 1919년 3월 초순이래 전국적으로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끊임없이 전개되자 성주군 성주면(星州面) 성주장터에서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4월 2일 장터에 모인 많은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게 붙잡혔다. 같은 해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大邱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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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해용 추념비
안해용(1873 - 1951)은 경북 성주(星州) 사람이다. 1913년 만주 통화현(通化縣) 강산두도구(崗山頭道溝)로 망명하였다가 1917년 유하현(柳河縣) 제2구 다화쇠(多花釗)로 이주하였다. 1920년 12월(음) 광복군사령부 참리부장 조병준(趙秉準)을 만나 동사령부에 입대하였으며, 곧이어 경상남북도 특파원으로 임명받고 배일사상이 강렬한 장정의 모집에 노력하였다. 1921년 7월(음)에는 이덕생(李德生)·이수건(李壽健) 등 2명을 도만시켰으며 안동(安東)읍내 기독교교회당에서 장로 김 모(金某)를 설득, 일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또한 1922년 10월 6일(음)에는 상주읍에 있는 교회당에서 목사 김동필(金東弼)에게 독립군 모집권유를 하기도 하였다. 동년 12월 4일 본적지에서 체포되어 압송 도중에는 성주읍내 및 왜관도선장 등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이 외쳐 독립투사의 기개를 과시하였으며, 1923년 1월 2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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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희 기념비
이태희(1869 - 1919)는 경상북도 성주(星州) 사람이다. 1919년 4월 2일 성주읍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정(李基定)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날의 독만세운동은 이기정·성대식(成大湜)·송수근(宋壽根)·송우근(宋祐根)·장석영(張錫英)·송훈익(宋勳翼)·김희규(金熙奎)·송준필(宋浚弼)·이봉희(李鳳熙)·송회근(宋晦根)·송문근(宋文根)·송인집(宋寅輯)·송규선(宋圭善)·송천흠(宋千欽)을 중심으로 한 유림과 유진성(兪鎭成)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도들이 연합하여 전개하였다. 그는 이날 오후 1시경, 성주 장터에서 시위군중과 함께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일본 경찰이 출동하여 해산을 명령하였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날의 독립만세시위는 밤 11시경까지 계속되었는데, 시위군중이 성주경찰서를 습격한다는 소문에 긴장하여 경계를 강화하고 있던 일본 경찰이 시위군중에 대한 횡포가 심해지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투석으로 이에 맞섰다. 그러나 겁을 먹은 일본경찰의 야만적인 발포로 선두에 서서 만세운동을 벌이던 그는, 결국 현장에서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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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희 기념비
이봉희(1868 -1937)는 경북 안동(安東) 사람이다. 1905년 이상룡(李相龍)·박경종(朴慶鍾) 등과 함께 가야산(伽倻山)에 들어가 의병활동을 위한 기지건설을 도모하였으나 동지들의 순국으로 무위로 돌아갔다고 한다. 1908년 2월 이상룡과 함께 대한협회 안동지회(大韓協會 安東支會)를 결성하고 협동학교(協東學校) 설립에 참여하여 구국교육운동에 헌신하였다. 1911년 1월 중국 봉천성(奉天省) 유하현(柳河縣)에 정착하여 동지들과 독립운동을 위한 기지건설에 주력하였고 1914년 유하현에 소재한 구국교육기관인 신흥학교(新興學校)의 교장을 역임하는 등 수많은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양성하였다. 1915년 동삼성에서 조직된 광복단(光復團)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며, 농작지도 등을 통하여 간도(間島)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들의 생활기반을 안정시키는데 힘썼다고 한다. 1919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창설요원으로 활동하였고, 이듬해인 1920년에는 광복단의 서간도지역 외교원으로 임명되어 중국정부 등과 교섭하여 농토개척에 대한 허가를 얻어내었으며 화룡현(和龍縣)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펴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37년 흑룡강성(黑龍江省)에서 사망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