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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독립만세 기념비(상주)
3·1운동이 일어난 지 20여일 뒤인 1919년 3월23일 경북 상주읍(현 상주시) 장터에서 당시 학생이던 한암회·강용석·성해식·성필환·조월연·석성기 등 6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소리를 듣고 장터에 모인 주민 500여명도 학생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벌였고, 만세운동을 주도한 학생 6명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1~2년씩 옥고를 치렀다. 상주읍의 만세운동은 농촌으로 번져 그해 3월29일 이안면 소암리 마을에서 채순만·채세현 선생이 만세를 불렀다. 이어 4월8일에는 화북면 장암리 속리산 문장대 일대에서 이성범·김재갑·홍종흠·이용희 선생, 9일에는 화북면 운흥리 마을 앞에서 김성희·정양수 선생 등이 동네 주민 100여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다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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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기중 추모비
채기중(1873 - 1921)은 일제강점기 대한광복회 경상도 책임자로 활약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극오(極五). 호는 소몽(素夢). 일명 기중(基仲). 경상북도 상주 출신. 1910년대 국내에서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인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대한광복회를 결성하여 활약하였다. 1913년에 류창순(庾昌淳)·류장렬(柳璋烈)·한훈(韓焄) 등과 함께 독립군단체로서 의병출신자의 집합체인 광복단을 결성하고, 군자금을 수합하기 위하여 강순필(姜順弼)과 함께 일본인이 경영하는 영월의 중석광산에 잠입, 활동하였다. 재만(在滿) 독립군과도 연락을 취하는 한편 대구에서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경영하던 애국지사 박상진(朴尙鎭)과도 연락하면서 1915년 초 대구에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을 협의하고 1915년 7월에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였다. 대한광복회는 박상진을 총사령으로 경상도·전라도·충청도·경기도·황해도 각지에 회원들이 결성되어 있었는데, 채기중은 경상도의 책임자였으며 전라도 조직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1917년 11월 광복회가 친일 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할 때 이 공작을 직접 지휘하여 결행하였다. 1918년 광복회가 일본경찰에게 발각되자 상해로 망명하기 위하여 전라남도 목포에 잠적하였다가 붙잡혀 사형되었다.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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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섬환 추모비
채섬환(1874 - 1944)은 경북 상주(尙州) 사람이다.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서자 채섬환은 국권회복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 1907년 이강년(李康秊)의진에 참여하여 대일항전에 나섰다. 1896년에 이미 거의한 바 있는 이강년 의병장은 일제의 국권침탈에 맞서 1907년 3월 충북 제천(堤川)에서 재봉기하여 경상, 강원, 충청도 일대를 넘나들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와 같이 후기 의병사에 두드러진 활동을 전개한 이강년의진에서 채섬환은 좌종사(坐從事)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강년 의병장이 같은 해 6월 청풍 작성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붙잡혀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자 채섬환은 이강년 의병장 유족들의 생계를 돌보며 서당을 열어 후진양성에 힘썼다고 한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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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준 집
권준(1859 - 11959)은 일제강점기 때, 동양척식회사 투탄 의거, 동경 니주바시 투탄 의거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원명은 권중환(權重煥), 가명은 장수화(張樹華), 호는 백인(百忍) 또는 양무(揚武). 경상북도상주 출신이다. 경성공업전습소를 졸업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하였다. 1920년 길림에서 의열단 창단에 참여하고, 1921년 북경에서 동지들과 의열단(義烈團)을 창단하고, 이후 의열단의 종로경찰서·총독부·동양척식회사에의 투탄사건과 동경 니쥬바시투탄의거[二重橋投彈義擧] 때 자금조달의 활동을 하다가 국내에서 잡혀 일시 옥고를 겪은 뒤 다시 상해로 망명하였다. 1924년 상해에서 열린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참관인으로 참석, 손문(孫文)의 추천장을 받아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에 들어가 군사학을 전공, 졸업 후에는 손문의 북벌전쟁에 참여하였다. 1932년난징[南京]에서 국민당의 원조를 받아 한국인 군사학교를 설립하여 간부를 양성하였다. 1937년 조선의용대 비서장으로서 항일무한방위전(抗日武漢防衛戰)에 참가하였다. 1942년 조선의용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휘하의 광복군에 합류할 때 임시정부에 들어가 1944년에 내무부차장이 되었다. 광복 직후 무한지구 교포선무단장과 광복군 제5지대장에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1946년 12월 귀국하였다. 1948년 정부수립 후 육군대령으로 특채되어 제106여단장·초대 수도경비사령관·103사단장·서부지구경비사령관 등을 지냈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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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대 집 표지석, 순국비
노병대(1858 - 1913)는 대한제국기 군대해산 후 모병하여 충청북도, 경상북도에서 활약한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다. 초명은 노병직(盧炳稷), 자는 상요(相堯), 호는 금원(錦園). 경상북도 상주 출신이다. 허전(許傳)에게 배웠으며, 1889년(고종 26)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되었다. 1895년 을미개혁 때 향교가 폐지된다는 소문을 듣고 극간으로 상소한 뒤, 다시 을미개혁을 주도하던 왜병을 물리치기 위하여 1898년 중국에 가서 지원군을 교섭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궁중의 일본세력을 축출하는 상소를 올려 고종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의병봉기의 밀칙(密勅)이 내리고, 비서원의 비서승(祕書丞) 벼슬까지 받았다. 밀칙을 받고 그날로 고향에 내려와 의병을 모았다. 1907년 8월 김운로(金雲老)·송창헌(宋昌憲)·임용헌(林容憲)과 함께 속리산에서 200명 정도의 의병을 일으켰다. 때마침 군대해산이 강행되매 해산병들이 의병투쟁에 합세함으로써 1,000명의 대부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때 맹주로는 김운로가 추대되었지만, 노병대는 충청북도·경상북도 일대에서 명성을 크게 떨치었다. 노병대의 의병은 전라도와 경상남도일대까지 원정하며 왜병과 싸우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08년 보은에서 붙잡혔다. 왜병은 노병대의 높은 기상에 눌려 나중에는 한쪽 눈까지 빼버리는 악형을 가하였고, 공주재판소에서 10년형을 선고하였다. 수년간의 옥고 끝에 1911년 이른바 은사령에 따라 풀려나왔으나 다시 의병을 모으며 항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던 중, 1913년 3월에 다시 붙잡혀 15년형을 받고 대구감옥에 투옥되었다. 여기에서 자결을 결심하고 28일간의 단식투쟁 끝에 순국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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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대 사당
노병대(1858 - 1913)는 대한제국기 군대해산 후 모병하여 충청북도, 경상북도에서 활약한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다. 초명은 노병직(盧炳稷), 자는 상요(相堯), 호는 금원(錦園). 경상북도 상주 출신이다. 허전(許傳)에게 배웠으며, 1889년(고종 26)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되었다. 1895년 을미개혁 때 향교가 폐지된다는 소문을 듣고 극간으로 상소한 뒤, 다시 을미개혁을 주도하던 왜병을 물리치기 위하여 1898년 중국에 가서 지원군을 교섭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궁중의 일본세력을 축출하는 상소를 올려 고종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의병봉기의 밀칙(密勅)이 내리고, 비서원의 비서승(祕書丞) 벼슬까지 받았다. 밀칙을 받고 그날로 고향에 내려와 의병을 모았다. 1907년 8월 김운로(金雲老)·송창헌(宋昌憲)·임용헌(林容憲)과 함께 속리산에서 200명 정도의 의병을 일으켰다. 때마침 군대해산이 강행되매 해산병들이 의병투쟁에 합세함으로써 1,000명의 대부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때 맹주로는 김운로가 추대되었지만, 노병대는 충청북도·경상북도 일대에서 명성을 크게 떨치었다. 노병대의 의병은 전라도와 경상남도일대까지 원정하며 왜병과 싸우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08년 보은에서 붙잡혔다. 왜병은 노병대의 높은 기상에 눌려 나중에는 한쪽 눈까지 빼버리는 악형을 가하였고, 공주재판소에서 10년형을 선고하였다. 수년간의 옥고 끝에 1911년 이른바 은사령에 따라 풀려나왔으나 다시 의병을 모으며 항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던 중, 1913년 3월에 다시 붙잡혀 15년형을 받고 대구감옥에 투옥되었다. 여기에서 자결을 결심하고 28일간의 단식투쟁 끝에 순국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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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대 구 묘
노병대(1858 - 1913)는 대한제국기 군대해산 후 모병하여 충청북도, 경상북도에서 활약한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다. 초명은 노병직(盧炳稷), 자는 상요(相堯), 호는 금원(錦園). 경상북도 상주 출신이다. 허전(許傳)에게 배웠으며, 1889년(고종 26)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되었다. 1895년 을미개혁 때 향교가 폐지된다는 소문을 듣고 극간으로 상소한 뒤, 다시 을미개혁을 주도하던 왜병을 물리치기 위하여 1898년 중국에 가서 지원군을 교섭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궁중의 일본세력을 축출하는 상소를 올려 고종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의병봉기의 밀칙(密勅)이 내리고, 비서원의 비서승(祕書丞) 벼슬까지 받았다. 밀칙을 받고 그날로 고향에 내려와 의병을 모았다. 1907년 8월 김운로(金雲老)·송창헌(宋昌憲)·임용헌(林容憲)과 함께 속리산에서 200명 정도의 의병을 일으켰다. 때마침 군대해산이 강행되매 해산병들이 의병투쟁에 합세함으로써 1,000명의 대부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때 맹주로는 김운로가 추대되었지만, 노병대는 충청북도·경상북도 일대에서 명성을 크게 떨치었다. 노병대의 의병은 전라도와 경상남도일대까지 원정하며 왜병과 싸우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08년 보은에서 붙잡혔다. 왜병은 노병대의 높은 기상에 눌려 나중에는 한쪽 눈까지 빼버리는 악형을 가하였고, 공주재판소에서 10년형을 선고하였다. 수년간의 옥고 끝에 1911년 이른바 은사령에 따라 풀려나왔으나 다시 의병을 모으며 항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던 중, 1913년 3월에 다시 붙잡혀 15년형을 받고 대구감옥에 투옥되었다. 여기에서 자결을 결심하고 28일간의 단식투쟁 끝에 순국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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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회 사적비
이용회(1892 - 1959)는 경북 상주(尙州) 사람이다. 1919년 당시 상주군 화북면 입석리(化北面 立石里)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장암리(壯岩里)에서 구장(區長) 이성범(李聖範)을 중심으로 김재갑(金在甲)·홍종흠(洪鍾欽)과 함께 4명이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전국 각지의 의거에 호응하여 이곳에서도 거사를 단행할 것을 협의한 후 4월 14일 리(里)내 각처에 독립만세운동 권고문을 보내고 태극기를 만드는 등 준비를 서둘러 갔다. 그는 4월 8일 속리산 문장대(俗離山 文藏臺)로 올라가서 백여 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높이 꽂고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상주의 일헌병에게 붙잡혔다. 그리하여 이해 5월 15일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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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범 기념비
이성범(1881 - 1957)은 경상북도 상주(尙州) 사람이다. 1919년 4월 8일 화북면 문장산(化北面文藏山)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당시 화북면 장암동(壯岩洞) 구장(區長)으로서 마을 사람 김재갑(金在甲)·홍종흠(洪鍾欽)·이용회(李容晦)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4월 4일 인근지역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는 권고문을 보내는 한편,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는 청년들을 모아 놓고 조국의 독립에 있어서 청년의 역할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등, 특히 청년의 규합에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4월 8일 오후 2시 1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문장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급보를 받은 상주의 일본군 헌병대장 이하 수많은 헌병들이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투석으로 대항하다가 결국 체포되었으며, 대구(大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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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의사단
구한말 국권회복과 일제하 독립을 위해 활동한 상주시 화북면 출신 이강년, 이용엽, 이원제, 이성범, 이용회, 이원녕, 김재갑, 홍종흠 등 8인의 공적을 기리고 위패를 모시기 위해 지어진 사당이다. 이강년(李康秊, 1858년~1908년)은 경북 문경에서 태어난 한말의 의병장이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문경 동학군의 지휘관으로 일본군, 탐관오리와 싸웠으며,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의병을 일으켜 제천에서 유인석의 의병과 합류하여 유격장이 되었다. 1907년 고종이 양위당하자 영춘에서 의병을 일으켜 원주의 민긍호와 합세, 충주를 공격했다. 이해 12월 13도 창의군에 가담했고, 그 후 가평·인제·강릉·양양·용소동·갈기동·백담사 등지에서 연승을 거두는 성과를 올렸으나 청풍 금수산 전투에서 피체되어 1908년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하였다.이성범은 상주에서 출생하여 1919년 4월 8일의 상주 화북면 문장산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운산 이용엽은 이강년 창의군의 좌종사로 활약하면서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왜병을 말티재로 유인하고는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순국하였고 가은 이원재는 이강년 창의군의 좌종사로 활약하면서 군수물자의 조달에 헌신하였으며, 화은 이성범, 송사 이용회, 김재갑, 홍종흠은 3.1운동 당시 우리나라의 독립만세를 선도하다가 왜경에 체포되어 1년6월씩 옥고를 겪었고, 간산 이원녕은 아우 한영과 함께 공주와 문경 지방에서 창의군의 군자금 조달 등에 헌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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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유적비
상주 화북면에서 1919년 4월 8일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한 의사 전성희, 의사 정양수, 의사 손기찬, 의병장 김용준, 의병장 홍우선 유적비 5명의 선열을 추모하고 애국 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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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년 묘
이강년(1858 - 1908)은 대한제국기 용소동전투, 갈기동전투, 백담사전투 등에 참전한 의병장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낙인(樂寅), 호는 운강(雲崗). 경상북도 문경 출신.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礻+甫)의 18대손이다. 1880년 무과에 급제해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로서 선전관이 되었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閔氏)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1896년 1월 11일 가산을 털어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과 순검 이호윤(李浩允)·김인담(金仁覃)을 체포해 농암(籠巖) 장터에 운집한 군중 앞에서 효수하였다. 이어 제천으로 유인석(柳麟錫)을 찾아가 유인석의 문인이 되고, 유인석 의병부대의 유격장으로서 문경·평천·조령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이 해 4월에 장기렴(張基濂)이 거느린 관군과 제천에서 싸워 패해 유인석이 요동으로 가자, 이강년도 의병을 해산하고 유인석을 따라갔다. 그 곳에서 3년 동안 지내고 돌아와 단양 금채동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1907년 일본의 침략이 더욱 노골화하여 헤이그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로 선위하고 정미칠조약으로 한국군대가 해산당하자 영춘(永春)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때마침 원주진위대를 이끌고 봉기한 민긍호(閔肯鎬) 부대와 합세해 충주를 공격하였다. 1907년 7월 7일 제천에서 일본군과 교전한 것을 비롯해 9월 16일에는 싸릿재[杻峙], 9월 27일에는 죽령, 10월 5일에는 고리평(故里平), 10월 23일에는 백자동(柏子洞)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이 해 12월에 전국의 의병들이 서울을 공격하기 위해 각도 의병장을 따라 양주에 집결해 13도연합의병부대를 편성하자, 호서창의대장(湖西倡義大將)으로 이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이 연합의병부대의 서울진격작전이 미수에 그치자, 다음 해인 1908년 봄부터 휘하장병들을 독려하여 2월 17일의 용소동전투(龍沼洞戰鬪)를 비롯해 2월 26일의 갈기동전투(葛其洞戰鬪), 3월 12일의 백담사전투(百潭寺戰鬪), 4월의 안동서벽전투(安東西壁戰鬪)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1908년 6월 4일 청풍(淸風)·작성(鵲城)에서 벌어진 일본군과의 결전에서 발목에 총알을 맞고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수원의 일본수비대에 구류되었다가 같은 해 7월 8일에 서울의 일본군헌병사령부로 압송되었다. 이곳에서 다시 평리원으로 옮겨져 9월 22일에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시신은 유언에 따라 두 아들 이승재(李承宰)·이긍재(李兢宰)와 부하인 도선봉장 권용일에게 인계되어 과천의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묘 아래 장례하였다. 나중에 제천으로 옮기고 다시 상주군 화북면 장암(壯岩) 뒷산으로 이장하였다.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