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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경 집
권상경(1890 - 1958)은 김창숙(金昌淑)의 만몽(滿蒙) 황무지 개척과 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군자금 모집에 협조하였다. 김창숙은 만몽(滿蒙)의 황무지를 개척하고 그 수익으로 무관학교를 설립하는 동시에 만주에 있는 조선청년으로 하여금 무기를 훈련하여 마침내 독립을 이루겠다는 생각으로 조선에 들어와 영남 부호들에게 그 자금 20만원을 거두기로 하고 1925년 6월 하순 북경을 떠나 조선에 들어왔다. 그해 10월 김창숙은 경북 봉화군(奉化郡) 부호 권상경(權相經)에게 이상의 군자금을 청구했고, 그는 이러한 자금 모집에 응하여 총 천원의 자금을 제공하였다가 1926년 5월 9일 경북경찰부(慶北警察部)에 체포되었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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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정 망미대
망미(望美)라는 말은 중국의 소식(蘇軾 :소동파)의 적벽부(赤碧賦)중 묘묘혜여회(渺渺兮余懷) 망미인혜천일방(望美人兮天一方)에서 따온말로 그 뜻은 “아득하고 아득한 나의 회포여, 미인(임금)을 하늘 저 끝에 바라보도다”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망미대(望美臺)는 대(臺)를 쌓아 임금을 그리며 국운회복을 염원한 곳이다. 태고정 망루 망미대는 강필이 지은 곳이다.강필(1878 - 1942)은 경북 봉화(奉化) 사람이다. 그는 중국 북경(北京)에서 김창숙(金昌淑) 등이 세운 이상촌 건설에 찬동하여 2천 원의 군자금을 기부하였다. 1925년 김창국 등은 내몽고(內蒙古) 지방의 미간지와 황무지 20만 정보를 매입하여 이상촌(理想村)을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즉 만주 지역의 한인들을 집결시켜 개간사업을 일으키고, 그 수익금으로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여 군대를 양성하는 둔병식(屯兵式)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10년 동안의 실력양성을 통하여 독립을 달성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이 때 필요한 군자금은 국내에서 조달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봉화의 유지였던 그는 김창희(金昌禧)에게 군자금 2천 원을 전달하여 김창숙 등이 계획한 이상촌 건설을 지원하였다. 그런데 이 일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붙잡혀 고초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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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필 집
강필(1878 - 1942)은 경북 봉화(奉化) 사람이다. 그는 중국 북경(北京)에서 김창숙(金昌淑) 등이 세운 이상촌 건설에 찬동하여 2천 원의 군자금을 기부하였다. 1925년 김창국 등은 내몽고(內蒙古) 지방의 미간지와 황무지 20만 정보를 매입하여 이상촌(理想村)을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즉 만주 지역의 한인들을 집결시켜 개간사업을 일으키고, 그 수익금으로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여 군대를 양성하는 둔병식(屯兵式)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10년 동안의 실력양성을 통하여 독립을 달성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이 때 필요한 군자금은 국내에서 조달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봉화의 유지였던 그는 김창희(金昌禧)에게 군자금 2천 원을 전달하여 김창숙 등이 계획한 이상촌 건설을 지원하였다. 그런데 이 일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붙잡혀 고초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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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대 기념비
노병대(1858 - 1913)는 대한제국기 군대해산 후 모병하여 충청북도, 경상북도에서 활약한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다. 초명은 노병직(盧炳稷), 자는 상요(相堯), 호는 금원(錦園). 경상북도 상주 출신이다. 허전(許傳)에게 배웠으며, 1889년(고종 26)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되었다. 1895년 을미개혁 때 향교가 폐지된다는 소문을 듣고 극간으로 상소한 뒤, 다시 을미개혁을 주도하던 왜병을 물리치기 위하여 1898년 중국에 가서 지원군을 교섭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궁중의 일본세력을 축출하는 상소를 올려 고종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그리하여 의병봉기의 밀칙(密勅)이 내리고, 비서원의 비서승(祕書丞) 벼슬까지 받았다. 밀칙을 받고 그날로 고향에 내려와 의병을 모았다. 1907년 8월 김운로(金雲老)·송창헌(宋昌憲)·임용헌(林容憲)과 함께 속리산에서 200명 정도의 의병을 일으켰다. 때마침 군대해산이 강행되매 해산병들이 의병투쟁에 합세함으로써 1,000명의 대부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때 맹주로는 김운로가 추대되었지만, 노병대는 충청북도·경상북도 일대에서 명성을 크게 떨치었다. 노병대의 의병은 전라도와 경상남도일대까지 원정하며 왜병과 싸우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08년 보은에서 붙잡혔다. 왜병은 노병대의 높은 기상에 눌려 나중에는 한쪽 눈까지 빼버리는 악형을 가하였고, 공주재판소에서 10년형을 선고하였다. 수년간의 옥고 끝에 1911년 이른바 은사령에 따라 풀려나왔으나 다시 의병을 모으며 항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던 중, 1913년 3월에 다시 붙잡혀 15년형을 받고 대구감옥에 투옥되었다. 여기에서 자결을 결심하고 28일간의 단식투쟁 끝에 순국하였다.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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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해식 유적비
성해식(1899 - 1939)은 경상북도 상주(尙州) 사람이다. 1919년 3월 23일의 상주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날 오후 5시 30분경, 한암회(韓岩回)가 시장 복판에서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다가 마침 시장에서 경계근무 중이던 일본 헌병에 의해 체포되자 시장 안에 있던 군중은 크게 동요하였다. 이때 그는 시장 입구의 계단에 올라가 5백여명의 군중을 향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역설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어떤 돌파구를 기다리던 시위군중은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긴급 출동한 일본 군경이 총검으로 시위군중을 강제 해산시켰다. 그는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4월 28일 대구(大邱)지방법원 상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경성(京城)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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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해식 묘
성해식(1899 - 1939)은 경상북도 상주(尙州) 사람이다. 1919년 3월 23일의 상주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날 오후 5시 30분경, 한암회(韓岩回)가 시장 복판에서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다가 마침 시장에서 경계근무 중이던 일본 헌병에 의해 체포되자 시장 안에 있던 군중은 크게 동요하였다. 이때 그는 시장 입구의 계단에 올라가 5백여명의 군중을 향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역설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어떤 돌파구를 기다리던 시위군중은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긴급 출동한 일본 군경이 총검으로 시위군중을 강제 해산시켰다. 그는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4월 28일 대구(大邱)지방법원 상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경성(京城)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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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동학농민혁명 기념비
동학교주 최시형의 기포령 이후 북접의 상주농민군이 봉기를 준비하여 1894년 5월 무렵부터 상주지역 동학농민군이 활발히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영사관에서는 5월 10일 경상도 선산, 상주, 유곡 등이 ‘동학농민군의 소굴’인 것으로 파악했다. 상주지역 동학농민군이 상주관아를 점령한 시기는 1894년 9월 22일경이다. 그러나 9월 28일 낙동병참소의 일본군의 공격으로 100여 명의 농민군 희생자를 내고 상주에서 후퇴하였고, 1894년 10월 이후부터 상주의 동학농민군은 상주 소모영으로 끌려와 처형되었다. 처형된 인원은 총 42명으로 파악된다. 1996년 상주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중심이 되고, 상주시, 상주시의회, 상주농민회, 상주산업대학교 등 각급 민간단체와 시민들이 힘을 모아 상주산업대학 맞은 편에 <동학농민혁명 100주년기념상>을 건립하였고, 2008년 도로공사 중 기념상이 훼손되어 현 위치에 <상주동학농민혁명기념비>를 재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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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시 국채보상운동기념비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1월 대구에서 김광제, 서상돈 등에 의하여 일제가 조선의 경제를 침탈하기 위하여 벌인 1,300만원의 국채를 갚기 위한 국권수호운동으로 국채를 국민들의 모금으로 갚기 위하여 발의된 국권회복운동으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상주지역의 국채보상운동은 상주시 외서면 이천리에서 시작되었으며 이해 3월 3일 김재익, 박정분을 발기인으로 국채보상상주의무소취지서를 발표하였다. 함창지역의 취지서는 황성신문 3월 24일자에 의하면 채규일, 김규환, 정동락, 박주환 등이 발기인이고 회장은 신관희, 부회장은 권용학, 총무는 김면수이며, 상주지역이 일찍 국채보상운동에 참여 하게 된 것은 지역출신인 강신규가 대동광문회 국채보상운동의 발기인으로 참여 하였기 때문이다. 상주지역에서는 다양한 계층에서 의연금 모금에 참여하였다. 사대부들은 향교를 통하여 200원을 출연하였고, 문중의 경우는 외서면 오씨문중, 최씨문중, 이씨문중이 참여를 하였었다. 개인으로는 장교익, 김문화는 각 40원을, 채규일 30원, 강석희, 강신규부자, 박정분, 서상요, 손국인, 김성득, 이장금 등이 20원, 김규환, 김도식, 강윤희 등이 10원을 의연하자 모금운동은 전지역으로 확산되었고, 특히 1원의 기부 참여자가 많았다. 국채보상운동은 국가가 위기에 처하였을 때 전개한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국권수호 운동이었고 발전한 대한민국의 원동력이었다. 이러한 선조들의 훌륭한 정신을 오늘날 나눔과 책임의 시대정신과도 연결된다. 그리하여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애국심을 고향하고자 이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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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의거 기념탑
상주 출신 독립운동가의 항일운동 기념탑이다. 1919년 3월 23일 상주군 상주장터에서 상주공립보통학교 졸업생 강용석과 성필환, 서울 중동학교 학생 한암회(일명 한감석[韓邯錫]), 상주공립보통학교 학생 조월연, 경성 국어보급학관 학생 석성기 등과 지역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3월 중순부터 계획을 세우고 1919년 3월 23일 오후 5시 30분경 상주장터에서 500여 명의 군중들과 3·1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87년 10월 18일, 상주 항일독립의거기념탑 건립추진위원회에서는 상주 출신 독립운동가 40명의 항일투쟁의 정신을 기리고자 이 탑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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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국채보상운동 발상기념비
상주시 외서면 이천리는 상주의 국채보상운동 발상지이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1월 29일 대구에서 서상돈, 김광제와 상주 출신 강신규 선생 등 16명의 애국지사들이 발의하여 같은 해 2월 21일 대구의 북후정에서 대구군민대회를 시작으로 전국에 확산된 국권회복운동이다. 이 운동은 일제가 조선의 경제권을 침탈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준 나라 빚 1,300만원을 2천만 동포가 3개월간 담배를 끊고 저축한 돈으로 경제적 주권을 회복하자는 애국운동으로서, 고종황제로부터 서민제중과 해외동포에 이르기까지 의연금 모금의 물결이 온 나라에 넘쳤다. 상주의 국채보상운동은 대구군민대회 직후 '외서면 유천동 국채보상 성명 성책"이 착성되여 이 마을 주민 41명과 이호서당이 16원 44전의 의연금을 출연한데 이어, 3월 3일에는 대구의 국채보상금 수급소로부터 상주 외서 이하리(오늘의 이천리) 국채보상소로 공한이 내려졌으니 이 마을이 상주 국채보상운동의 중심이었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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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동학교당
상주 동학교당은 동학 교리를 바탕으로 교당을 운영하고 포교 활동을 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동학의 남쪽 책임자인 김주희가 대한제국 광무 8년(1904) 동학계 경천교를 창립한 이후 1915년 상주에 정착하였다. 1916년에 교당을 완공해 1943년까지 포교와 동학 세력의 확장에 힘쓴 동학교 본부이다. 공사비는 교인들의 성금으로 채웠고, 목재는 대부분 살림집을 헐어 재사용했다. 교당은 높은 산이 사방으로 에워싼 분지 안쪽 2개의 하천이 만나 이안천으로 흘러가는 ‘亞’자형 지형 중앙에 남동향으로 세워졌다. 중심 건물인 원채, 동재, 서재, 남재 4동이 가운데 안마당을 둘러싸고 ‘ㅁ’자 모양을 이룬 초가집이다. 원채는 예배실과 헌성실을 비롯해 부엌과 방을 겹으로 배열했다. 동재는 중앙에 마루 좌우로 교주 김주희가 거처하던 온돌방과 손님을 접대하던 응접실, 가사를 판자에 새겼던 판각실로 구성되어 있다. 서재는 남녀 교도들이 머무는 건물로 부엌, 남녀 교우실이 있다. 남재는 중앙의 대문 오른쪽에 곡식 창고와 소를 기르던 마구가 있고, 왼쪽에는 부교주와 다른 지역에서 온 남교도들이 머무는 방이 있다. 원채를 제외한 동・서・남재의 방 앞과 뒤, 옆에는 툇마루가 있는데, 이는 각 건물의 앞면을 서로 다르게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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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기중 집
채기중(1873 - 1921)은 일제강점기 대한광복회 경상도 책임자로 활약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극오(極五). 호는 소몽(素夢). 일명 기중(基仲). 경상북도 상주 출신. 1910년대 국내에서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인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대한광복회를 결성하여 활약하였다. 1913년에 류창순(庾昌淳)·류장렬(柳璋烈)·한훈(韓焄) 등과 함께 독립군단체로서 의병출신자의 집합체인 광복단을 결성하고, 군자금을 수합하기 위하여 강순필(姜順弼)과 함께 일본인이 경영하는 영월의 중석광산에 잠입, 활동하였다. 재만(在滿) 독립군과도 연락을 취하는 한편 대구에서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경영하던 애국지사 박상진(朴尙鎭)과도 연락하면서 1915년 초 대구에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을 협의하고 1915년 7월에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였다. 대한광복회는 박상진을 총사령으로 경상도·전라도·충청도·경기도·황해도 각지에 회원들이 결성되어 있었는데, 채기중은 경상도의 책임자였으며 전라도 조직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1917년 11월 광복회가 친일 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할 때 이 공작을 직접 지휘하여 결행하였다. 1918년 광복회가 일본경찰에게 발각되자 상해로 망명하기 위하여 전라남도 목포에 잠적하였다가 붙잡혀 사형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