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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장서비(송록서원)
1919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만국평화회의에서 제출된 독립청원서에 서명한 137인의 한국유림 중 봉화출신 9분의 공적을 기리기위해 건립하였다. 파리장서사건은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기 위해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작성한 사건이다.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유림측에서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서한을 작성하였다. 이 사건은 전에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던 호서지방의 유종(儒宗)인 전 승지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대부분 의병에 참여하였던 김덕진(金德鎭)·안병찬(安炳瓚)·김봉제(金鳳濟)·임한주(林翰周)·전양진(田穰鎭)·최중식(崔中軾) 등에 의해 이뤄졌다. 그들이 작성한 서한은 현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요지는 일본의 배신행위와 명성황후(明成皇后)와 고종의 시해, 그리고 한국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고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호서지방 유림들의 활동이 전개되고 있을 때, 영남유림에서도 곽종석(郭鍾錫)·김창숙(金昌淑) 등이 필두로 같은 목적의 일이 추진되고 있었다. 그 뒤 영남유림은 이런 사실을 알고 영남본(嶺南本)을 전용학(田溶學)에게 주며 홍성으로 가서 호서본(湖西本)과 비교, 검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교정본이 작성되기 전에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선정된 김창숙이 시급히 상해(上海)로 출발하게 되었다. 이에 서울유림들은 영남본이나 호서본의 내용이 서로 뜻이 같으나, 영남본이 호서본보다 포괄적이면서도 뜻이 명확하다는 여론에 따라 김창숙에게 영남본을 주어 출발시켰다. 그리고 장서 말미에 134명 유림대표가 서명하였으며, 대표파견 경비는 황일성(黃佾性)이 조달하였다. 그러나 장서는 김창숙이 파리로 가져가지 못하고, 당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대표로 선정되어 파리에 가 있던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되었으며, 또한 국내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런데 같은 해 4월 12일경상북도 성주의 만세시위운동에 관련되어 일본경찰에 붙잡혔던 송회근(宋晦根)에 의해 사건이 발각됨으로써 관계자들이 피체되어 옥고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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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기, 김정진 집
김홍기(1884 - 1954)는 경상북도 봉화(奉化) 사람이다. 1919년 3·1운동 때에 김창숙(金昌淑)·곽종석(郭鍾錫) 등을 중심으로 전국 유림대표 137명이 파리 강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발송하는 운동을 함에 각 지방 유림대표를 심방하여 서명 날인을 받는 활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25년 8월 김창숙이 중국으로부터 비밀리에 입국하여 내몽고(內蒙古)지방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할 자금으로 20만원의 군자금 모금을 목표로 활동할 때에 이에 찬동하여 김창숙의 지령서를 김뇌식(金賚植)에게 전달하고 군자금 모금활동을 함께 하기로 하고 2천원을 기탁받았으며, 김뇌식과 동행하여 강필(姜必)을 방문해서 또한 2천원을 기탁받아 함께 4천원을 그와·김뇌식·강 필 3인이 동행하여 동래에 은신해 있는 김창숙에게 전달하였으며, 김창숙의 군자금 모금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1926년 3월 이 군자금 모금운동이 일제에 발각되자 그도 역시 붙잡혀 수개월간 미결감에 수감되었다가 출감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정진(1925 - 2013)은 경북 봉화(奉化) 사람이다. 대구상업학교 재학중 1943년 4월에 동교생 이상호(李相虎) 등이 주도하여 조직한 항일학생결사 태극단(太極團)에 가입 활약하였다. 1942년 5월에 결성된 태극단은 조국독립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전국적 조직을 통한 무력항쟁을 목적으로 하였다. 따라서 동단원들은 우선 조직확대를 위해 동지포섭 활동에 힘을 쏟았다. 1943년 5월에는 그동안 가입한 단원 전원이 대구시 앞산이 비파산(琵琶山) 약수터에 모여 결단식을 갖고, 구체적 투쟁방안에 관하여 협의하고 조직을 정비하였다. 태극단의 조직은 크게 일반조직, 특수조직으로 나누었으며 최고의결기관으로서 간부회의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일반조직은 다시 육성부(育成府) 아래 3국(局), 10여부(部)를 두었으며, 특수조직은 건아대(健兒隊)라 칭하여 중학교 1, 2학년생과 국민학교 상급반 학생을 대원으로 가입시켜 장차 단원으로 육성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때 그는 비서장 및 관방국 경제부장으로 활동하였다. 태극단의 투쟁방략은 조직확대를 통하여 전국의 학교와 각 지역별로 조직을 완성한 후 여론을 환기시키며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것인데, 만약 국내에서의 투쟁이 여의치 못할 때에는 중국으로 집단 망명하여 그곳에서 항쟁을 계속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그리하여 단원들은 용두산(龍頭山)·비파산 등 비밀장소를 이용하여 학술연구토론회, 각종 체육회를 개최하여 동지간 유대의식과 민족적 교양의 함양 및 체력증강에 노력하였다. 또한 궁극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군사학 연구에도 정진하여 군사관계서적의 번역, 글라이더 및 폭발물 제조에 관한 연구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43년 5월 배반자의 밀고로 태극단의 조직과 활동이 일경에 발각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그는 학교에서 수업도중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4년 1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단기 2년, 장기 3년형을 선고받고 김천소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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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래미마을 독립운동기념비
바래미 항일 독립운동은 바래미가 생가인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879-1962) 선생이 1919년 바래미 만회고택 명월루와 해관구택에서 제1차유림단사건(일명 파리장서사건)이 된 ‘파리장서’를 작성하고 서명을 시작함으로써 비롯되었다. 1925년에는 만주와 몽고 접경지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모금 운동이 발각된 제2차유림단사건이 있었는데, 이 때도 바래미에서 황소 쉰 마리 값을 모금, 심산 선생에게 건넨 사실이 발각되어 온 마을이 쑥밭이 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더욱 심해진 왜경의 감시 속에서도 선조의 애국충정과 선비 정신을 이어받은 젊은 세대들이 1933년 비밀결사단체를 조직하여 항일 운동을 하다 발각된 독서회 사건으로 또 많은 사람들이 옥고를 치러야 했고, 이러한 바래미 항일 독립운동은 학생층에까지 3대(三代)로 이어져 대구, 일본, 만주 등지에서도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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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우 집
김창우(1854 - 1937)는 경북 봉화(奉化)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김창숙(金昌淑) 등이 유림대표가 되어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고 동(同)문서를 배포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세칭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이라고 불리는 이 거사에는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한 호서유림과 곽종석(郭鍾錫)을 중심으로 한 영남유림 137명이 참여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유림의 항일운동이었다. 파리장서의 요지는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광무황제(光武皇帝)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 유림은 김창숙(金昌淑)을 파리로 파견하고자 상해로 보냈으나, 직접 가지는 못하고 이 문서를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했으며,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런데 이 일은 경상북도 상주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1919년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붙잡히는 바람에 발각되었다. 이로써 김창우도 일경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들 유림이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었으므로 민족적 감정이 더욱 번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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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뇌식 집
김뇌식(1877 - 1935)은 경상북도 봉화(奉化) 사람이다. 1925년 8월 김창숙(金昌淑)이 중국으로부터 비밀리에 입국하여(동년 8월 17일 서울에 도착) 내몽고(內蒙古) 지방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할 자금으로 20만원 모금을 목표로 활동할 때 이에 찬동하여 2천원의 거액을 모금하여 전달하고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1926년 3월 이 군자금 모금운동을 위하여 다시 태극단(太極團)을 조직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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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영 집
김건영(1848 - 1924)은 경북 봉화(奉化)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김창숙(金昌淑) 등이 유림(儒林) 대표가 되어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유림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고 동(同)문서를 배포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세칭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이라고 불리는 이 거사에는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한 호서유림과 곽종석(郭鍾錫)을 중심으로 한 영남유림 137명이 참여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유림의 항일운동이었다. 파리장서의 요지는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광무황제(光武皇帝)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 유림은 김창숙(金昌淑)을 파리로 파견하고자 상해로 보냈으나, 직접 가지는 못하고 이 문서를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했으며,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런데 이 일은 경상북도 상주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1919년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피체되면서 발각되었다. 이로써 김건영도 일경에 피체되어 고초를 겪었다. 일제는 이들 유림이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었으므로 민족적 감정이 더욱 번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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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흠 묘
이동흠(1881 - 1967)은 경북 안동(安東) 사람이다. 한말 우국지사 이만도(李晩燾)의 손자이다. 그는 1918년 4월 2일 경북 봉화군(奉化郡)의 부호 이정필(李廷弼)에게 군자금으로 천원을 헌납하라는 광복회(光復會) 명의의 통고문을 발송하였으나, 이와 관련하여 면장(面長) 이명호(李明鎬)와 함께 일경에 붙잡혀 1918년 11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5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후 그는 1925년 김창숙(金昌淑)을 중심으로 한 경북유림단(慶北儒林團)에 참가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였다. 경북유림단은 중국 내몽고(內蒙古) 지방의 미간지 및 황무지 20만정보를 매입하여 남북만주의 동포들로 하여금 개간토록 한 후 학교를 세우고 독립군을 양성할 것을 계획하고 이에 필요한 자금으로 20만원의 군자금을 모금코자 하였다. 이동흠은 정수기(鄭守基)를 통하여 유림단의 이러한 독립운동 계획을 듣고 이에 뜻을 같이하여 군자금 모금에 힘을 쏟았다. 그는 1926년 1월 경북 달성(達城)·영양(英陽) 등지에서 최해윤(崔海潤)·이현병(李鉉秉)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펴던 중 1926년 5월 10일 일경에 붙잡혔다. 1927년 2월 1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면소(免訴)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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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규 묘
이만규(1845 - 1921)는 일제강점기 만국평화회의에 유림단대표로 독립청원서를 발송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진성(眞城). 초명은 이만효(李晩孝). 자는 순칙(順則), 호는 유천(柳川). 경상북도 안동 출신. 대사성 이휘준의 아들로 이휘택(李彙澤)에게 입양되었으며, 애국지사 이만도(李晩燾)의 아우이다. 1879년(고종 16) 생원이 되고, 1883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직장·전적·지평을 역임하였다. 1894년 부교리 겸 동학교수(副校理兼東學敎授)가 되었으나 이듬해 을미사변으로 민비(閔妃)가 시해되자 사직하였다. 1896년 예안군수가 되었으나,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사직하고 향리에 은퇴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우리나라가 병탄되자 입산하여 단식하고, 이듬해 일제가 주는 이른바 은사금을 거절하였다. 1919년 고종의 인산에 참석하고, 김창숙(金昌淑)·곽종석(郭鍾錫) 등과 협의하여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유림단대표로 독립청원서를 발송한 뒤 검거되어 성산(星山)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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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도 묘
이만도(1842 - 1910)의 자는 관필, 호는 향산이며, 조선 후기 사간원정언, 교리, 중학교수 등을 역임한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866년(고종 3) 정시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전적에 임명되었다가 병조좌랑에 제수되었다. 이어 사간원정언에 임명되고, 홍문관부수찬으로서 남학교수(南學敎授)를 겸하였다. 또한 대신(문신)으로서 선전관을 겸하기도 하였다. 이 후 부교리·장령·지평·우통례(右通禮)·병조정랑·충청장시도사(忠淸掌試都事)·교리·응교·사간·집의·중학교수(中學敎授) 등을 역임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명성이 높았다. 또한 시강(侍講) 및 빈대(賓對) 때에 이만도가 상주하는 말을 고종이 모두 기꺼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1876년 일본대사 구로다[黑田淸隆]가 와서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때 최익현(崔益鉉)이 반대 상소를 올리자,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한목소리로 공격을 하였다. 그 때 집의로서 탄핵문의 문구가 사리에 맞지 않다고 없앴다가 대사헌의 미움을 받아 집의직을 삭탈당하였다. 그 뒤 다시 복직되고, 사성·응교·장악정(掌樂正) 등을 역임하였다. 그 해 가을 양산군수에 제수되어 굶주리는 백성을 보살피고 탐관오리를 소탕하는 데 공을 세웠다. 1878년 다시 집의에 임명되어 홍문관·사헌부·사간원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882년 통정대부에 올라 곧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였다. 세상이 어수선해지자 벼슬길을 단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백동(柏洞)에 작은 서재를 지어 놓고 경서를 연구하며 날을 보내다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예안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의 매국죄를 통렬하게 공박하는 소를 올렸다. 1907년 순종이 즉위한 뒤 가선대부에, 1910년 자헌대부에 승자되었다. 그 해 8월 일제에 의해 한국이 병탄되자 유서를 지어 남긴 뒤 단식 24일 만에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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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업, 김락 묘
이중업(1863 - 1921)은 일제강점기 『기암유고(起巖遺稿)』, 『대학정의(大學精義)』 등을 저술한 유학자.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광초(廣初), 소자는 계상(桂祥), 호는 기암(起巖). 이황(李滉)의 12세손으로 아버지는 자헌대부(資憲大夫) 승지(承旨) 이만도(李晩燾)인데, 경술국치 후에 단식(斷食)으로 순국하였다.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 권승하(權承夏)의 딸인 숙부인(淑夫人)이다. 처음에는 숙부에게서 가학을 닦았으며, 후에는 김흥락(金興洛)에게서 수학하였다. 1919년 그는 고종황제 장례에 참석하여 3·1만세운동을 보고는 크게 느낀 바가 있어 고향에 내려와 유림들을 규합하여 파리만국회담에 참가할 일을 도모하고, 곽종석(郭鍾錫)과 함께 「파리장서(巴里長書)」를 작성하여 서명운동을 일으켰다. 이 후 집을 떠나 전국을 돌아다니며 당시의 시대 상황과 세계의 정세를 탐문하고 유림들의 애국 충정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애국 지사를 방문하여 광복운동을 의논하였다. 결국 병이 나서 1920년에는 고양(高陽)의 산사(山寺)에 기거를 했는데 자식들이 귀가하기를 간절히 청했으나 ‘애국지사들이 해외에서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광복을 위해 고생하는데 집에 편히 있을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퇴계집』과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을 탐구하였고, 우리 나라와 중국의 역대 역사 및 왕조의 치란(治亂)과 선유 제현들의 학문 및 그 특징과 차이점 등에 대해서도 정통하였으며, 우리나라 세가(世家)들의 보계(譜系)에도 밝았다고 한다. 저술로는 『기암유고(起巖遺稿)』 28권 14책, 『대학정의(大學精義)』·『양전합선(兩全合選)』 등이 있다.198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김락(1863 - 1929)은 일제강점기 예안군에서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김락(金洛)은 예안군(경상북도 안동) 3·1만세시위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친정과 시가가 모두 항일독립운동가 집안으로, 친인척 중에 추서된 독립운동가가 무려 25명이나 된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김락이 참여한 예안 3·1만세시위는 고종인산에 참가했던 이동봉(李東鳳)·이용호(李用鎬)·김동택(李東澤)·신응한(申應漢) 등이 서울의 시위를 직접보고 돌아와 그 소식을 전하면서 계획이 추진되었다. 3월 17일 오후 3시 경 30여 명의 군중이 면사무소 뒤편 선성산(宣城山)에 올라가 일본이 세운 '어대전기념비(御大典紀念碑)'를 쓰러뜨리는 것을 시작으로, 시장 주변에 모여 있던 3개의 시위대 100여 명이 일제히 시장을 향하여 진격해 갔다. 시위대는 미리 정보를 탐지하고 수비대까지 동원한 일본 경찰의 진압에도 굴하지 않고 이동봉의 인솔 하에 예안주재소로 몰려갔다. 그러나 주동자를 비롯한 15명이 체포되었으며, 시위 군중들이 해산 당하였다. 오후 6시경, 다시 격분한 시위군중들이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주재소로 몰려왔다. 경찰의 해산 명령에도 불구하고 1500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은 돌멩이와 기왓장을 던지면서 주재소로 밀고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다시 25명이 체포되었다. 3월 22일 다시 2차 시위가 일어나 오후 7시에 약 2000명의 민중들이 태극기를 들고 동부동과 서부동, 선성산 위에서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일본 경찰의 발포로 13명이 부상을 입고 3명이 체포되었는데, 김락도 그 중 한 명이었다. 2001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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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벽 항일의거기념비
1908년 5월 15일 일본군은 서벽리에 주둔하고 있던 의병 약 500여 명이 5월 19일 봉화를 습격하고, 20일에는 영주를 습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에 영천수비대는 풍기분견소와 주재소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서벽전투는 1908년 5월 17일 새벽 4시에 시작되었다. 영천수비대는 봉화 오록에서 주실령을 넘어 두내리를 경유해 서벽리로 들어가려 하였고, 민긍호 부대와 이강년 부대는 서벽리 동쪽의 골짜기 입구에서 영천수비대를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4시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군 3명은 행방불명이 되고, 나머지는 주실령을 넘어 내성으로 퇴각하였다. 서벽전투가 있었던 격전지 자리인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 350(서벽초등학교 교정 입구)에 1984년 12월 항일의거기념비를 세워 서벽전투의 승전과 항전의병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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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립 묘
김명립(1893 - 1978)은 대한제국기 이강년의 의병부대에서 활동한 의병. 독립운동가이다. 일명 김유근(金有根). 경상북도 봉화 출신. 김성원(金聖元)의 아들이다. 1907년부터 의병장 이강년(李康䄵)의 부대에서 활동하던 아버지를 귀가시키고 뒤를 이어 의병진에 가담하였다. 경상북도일대에서 여러 차례 전투에 참가하였다. 1909년에는 출신지인 봉화군 재산면을 근거로 군자금 조달을 위하여 활동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혔다. 1910년 6월 안해룡(安海龍) 등 동지 3명과 함께 화승총·몽둥이로 무장하고 재산면에 사는 정봉규(鄭鳳奎)로부터 현금과 삼베를, 시장에서 여인숙을 하는 신성수(申聖壽)로부터 현금 등을 각각 군자금으로 모집하였다. 그 뒤 사실이 발각되어 일본헌병에게 잡혔다가 6년 후인 1916년 3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던 중 1924년 징역 8년형으로 감형됨과 동시에 석방되었다.1986년에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