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검색
TOTAL. 561건
-
신태식 기념비
-
이강년 전승기념비, 경모각
이강년(1858 - 1908)은 대한제국기 용소동전투, 갈기동전투, 백담사전투 등에 참전한 의병장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낙인(樂寅), 호는 운강(雲崗). 경상북도 문경 출신.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礻+甫)의 18대손이다. 1880년 무과에 급제해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로서 선전관이 되었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閔氏)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1896년 1월 11일 가산을 털어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과 순검 이호윤(李浩允)·김인담(金仁覃)을 체포해 농암(籠巖) 장터에 운집한 군중 앞에서 효수하였다. 이어 제천으로 유인석(柳麟錫)을 찾아가 유인석의 문인이 되고, 유인석 의병부대의 유격장으로서 문경·평천·조령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이 해 4월에 장기렴(張基濂)이 거느린 관군과 제천에서 싸워 패해 유인석이 요동으로 가자, 이강년도 의병을 해산하고 유인석을 따라갔다. 그 곳에서 3년 동안 지내고 돌아와 단양 금채동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1907년 일본의 침략이 더욱 노골화하여 헤이그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로 선위하고 정미칠조약으로 한국군대가 해산당하자 영춘(永春)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때마침 원주진위대를 이끌고 봉기한 민긍호(閔肯鎬) 부대와 합세해 충주를 공격하였다. 1907년 7월 7일 제천에서 일본군과 교전한 것을 비롯해 9월 16일에는 싸릿재[杻峙], 9월 27일에는 죽령, 10월 5일에는 고리평(故里平), 10월 23일에는 백자동(柏子洞)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이 해 12월에 전국의 의병들이 서울을 공격하기 위해 각도 의병장을 따라 양주에 집결해 13도연합의병부대를 편성하자, 호서창의대장(湖西倡義大將)으로 이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이 연합의병부대의 서울진격작전이 미수에 그치자, 다음 해인 1908년 봄부터 휘하장병들을 독려하여 2월 17일의 용소동전투(龍沼洞戰鬪)를 비롯해 2월 26일의 갈기동전투(葛其洞戰鬪), 3월 12일의 백담사전투(百潭寺戰鬪), 4월의 안동서벽전투(安東西壁戰鬪)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1908년 6월 4일 청풍(淸風)·작성(鵲城)에서 벌어진 일본군과의 결전에서 발목에 총알을 맞고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수원의 일본수비대에 구류되었다가 같은 해 7월 8일에 서울의 일본군헌병사령부로 압송되었다. 이곳에서 다시 평리원으로 옮겨져 9월 22일에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시신은 유언에 따라 두 아들 이승재(李承宰)·이긍재(李兢宰)와 부하인 도선봉장 권용일에게 인계되어 과천의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묘 아래 장례하였다. 나중에 제천으로 옮기고 다시 상주군 화북면 장암(壯岩) 뒷산으로 이장하였다.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천보락 약사, 기적비, 기념비
천보락(1852 - 1908)은 경북 문경(聞慶) 사람이다. 1896년 유인석(柳麟錫)의병진의 선봉장(先鋒將)으로 수안보(水安堡)·조령(鳥嶺)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그 뒤 1906년 이강년(李康秊)이 거의(擧義)하자 그 휘하에 들어가 좌익장(左翼將)으로 단양(丹陽)·청풍(淸風)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1908년 강릉(江陵)·양양(襄陽) 등지에서 분전하다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천세헌 기념비
천세헌(1879 - 1945)은 일제강점기 대한인국민회 뉴욕지방총회장,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시카고지방지회 대표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경상북도 상주 출신이다. 1903년 하와이로 이주해 사탕수수밭의 노동자와 상인으로 생계를 꾸렸다. 1910년 본토인 뉴욕으로 이주해 해외지역 한인의 통일연합기관인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북미지방총회(北美地方總會) 뉴욕지회에 가입해 조국의 독립과 한인교포들의 민족교육 실시를 위해 노력하였다. 1914년에는 안창호(安昌浩)·송종익(宋鍾翊) 등이 조직한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고 활동하였다. 1917년에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뉴욕지방총회장으로 선임되어 회관의 임대료를 출연하는 등 회의 운영을 위해 노력하였다. 1919년 4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 독립운동 후원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선전을 목적으로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자유대회(韓人自由大會)를 개최하자, 이 대회에 참석해 임시정부의 승인과 지원, 외교사무소의 설치 등을 결의하였다. 1921년 8월 대한인국민회에서 그 해 11월 워싱턴에서 개최되는 5대열강회의에 맞춰 대한민족대표단을 조직하고, 국내 및 상해 임시정부과 연락해 ‘대한 인민의 건의서’를 작성·제출하고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기로 하였다. 이에 뉴욕에서 서재필 등과 함께 대한민족대표단 후원회를 조직하고 동포들로부터 특별의연금 220여 달러를 모금해 대표단의 외교선전 경비에 충당케 하였다. 1922년에는 대한민족대표단의 일원으로 중국 상해에 파견되어 동년 4월 임시정부의 개편을 위한 국민대표회의를 열 것을 촉구하는 청원서를 임시정부에 제출하였다. 그리고 안창호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고 각 단체들의 입장을 조정했으며, 임시정부를 새롭게 창조하려는 창조파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천세헌은 임시정부의 개선이 어려워지자 1923년 미국으로 돌아와 음식점을 경영하며 가난한 한인들을 도와 ‘한인들의 은사’라고 불리워졌다. 1933년에는 시카고에서 한민족을 업신여기는 일본인 마쯔에[松江]를 처단해 민족정신을 고취하려고 하였다. 1939년 10월 로스앤젤레스의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소장파들이 중국 한구(漢口)에서 조직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후원하기 위해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美洲後援會)를 조직하였다. 그러자 1940년 7월 강영승(康永昇)과 함께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시카고지방지회를 설립하고 서기·대표로 활동하면서 중국 관내에서 전개되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40년 다시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서재필의 지시를 받고 미국 군사정보부와 접촉해 미주 한인들의 대일참전 문제를 협의하였다. 이후에도 독립자금을 출연해 조국의 독립운동을 후원하다가 1945년 6월에 서거하였다.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최찬 추모비, 앙소정
최찬(1856 - 1928)은 경북 문경(聞慶) 사람이다. 1896년 1월 이강년(李康秊)이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그 휘하에 들어가 항전을 개시하였다고 한다. 그 뒤 1907년 7월에도 의병항전에 참가하여 이강년 의병장 휘하에서 좌종사(坐從事)가 되어 제천(堤川)·황강(黃江)·청풍(淸風) 등지를 전전하면서 활동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변인규 행적비
변인규(1879 - 1947)는 이강년(李康秊)이 1895년 12월 문경(聞慶) 가은(加恩)에서 의병을 일으켜 1908년 일본 군경에 체포되어 의진이 해산될 때까지 전후 13년간 의병활동을 벌였다. 후기의병 시기에는 이강년 휘하에서 종사(從事)로 활동하였다. 1896년 1월에 의병 군자금을 위하여 100여 마지기의 농지를 처분하였으며, 1908년 이강년이 순국한 때에는 조시(弔詩)를 지어 통곡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변인규 묘
변인규(1879 - 1947)는 이강년(李康秊)이 1895년 12월 문경(聞慶) 가은(加恩)에서 의병을 일으켜 1908년 일본 군경에 체포되어 의진이 해산될 때까지 전후 13년간 의병활동을 벌였다. 후기의병 시기에는 이강년 휘하에서 종사(從事)로 활동하였다. 1896년 1월에 의병 군자금을 위하여 100여 마지기의 농지를 처분하였으며, 1908년 이강년이 순국한 때에는 조시(弔詩)를 지어 통곡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청량의진 의병활동 본거지(청량정사)
청량정사는 청량산 연화봉과 금탑봉 사이에 자리잡은 정자이다. 조선 중종때 문신 송재 이우(1469~1517)선생이 건립하였다. 선생이 조카인 이해와 이황 및 사위인 조효연, 오언의 등을 가르치던 곳이다. 이후 퇴계 이황 선생이 이곳 청량정사에서 성리학을 연구하며 김성일, 유성룡, 정구 등 많은 후학을 양성하였다. 또한 도산십이곡도 이곳에서 저술하였다. 순조 32년(1832)에 와서 퇴계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유림에서 정자를 중수하였다. 이후 청량정사는 퇴계 선생의 뜻을 기리는 많은 후학들이 찾아와 학문을 수양하는 장소가 되었다. 또한 구한말에는 청량의진이 조직되어 의병투쟁의 근원지가 되기도 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일본군의 방화로 인해 1896년에 소실되었던 것을 1901년에 중창한 것이다.
-
이면주 묘
이면주(1827 - 1910)는 조선 후기에, 이조좌랑, 자여도찰방, 이조좌랑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이석우(李錫宇). 자는 윤래(允來), 호는 계은(桂隱)·하계(霞溪). 경상북도 봉화 출신. 태종대왕의 7남 온령군(溫寜君)의 후손으로 이치두(李致斗)의 아들이다. 김숙(金熽)의 문인이다. 1850년(철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순강원수봉관(順康院守奉官)에 제수되었다가 전적·지평·이조좌랑을 역임한 뒤 1860년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이 되었다. 1862년 간신배의 모함에 빠져 무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 특사로 풀려났다. 1864년 정언·장령, 이듬해 부수찬, 1866년 부교리·좌부승지·동부승지, 1879년 병조참의, 1891년 부승지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905년 일제가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자 그 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1910년에 국치를 당하자 음독자결하였다.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이면주 집
이면주(1827 - 1910)는 조선 후기에, 이조좌랑, 자여도찰방, 이조좌랑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이석우(李錫宇). 자는 윤래(允來), 호는 계은(桂隱)·하계(霞溪). 경상북도 봉화 출신. 태종대왕의 7남 온령군(溫寜君)의 후손으로 이치두(李致斗)의 아들이다. 김숙(金熽)의 문인이다. 1850년(철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순강원수봉관(順康院守奉官)에 제수되었다가 전적·지평·이조좌랑을 역임한 뒤 1860년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이 되었다. 1862년 간신배의 모함에 빠져 무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 특사로 풀려났다. 1864년 정언·장령, 이듬해 부수찬, 1866년 부교리·좌부승지·동부승지, 1879년 병조참의, 1891년 부승지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905년 일제가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자 그 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1910년에 국치를 당하자 음독자결하였다.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권세연 집
권세연(1836 - 1899)은 개항기 때, 민비시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경상북도 안동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성대(星臺). 경상북도 봉화 출신이다. 참봉을 지냈으며, 안동 병진의 정신적 지주 구실을 하였다. 1895년 민비시해사건과 단발령에 격분한 안동지역 의병들은 안동관찰부를 점령하고, 유지호(柳止浩)·김흥락(金興洛) 등 참모진은 권세연을 안동의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권세연은 격문을 발표하여, 각지의 의병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민심을 크게 격려, 고무시켰다. 이 격문에는 침략자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자에 대한 증오심이 설득력 있게 표현되어 있어, 의병규합에 큰 몫을 하였다. 또한, 이것이 계기가 되어 1896년에는 예안의 이만도(李晩燾), 영양의 조승기(趙承基), 문경의 이강년(李康秊)·유시연(柳時淵)·김도화(金道和)·김도현(金道鉉) 등 각지의 의병장들과도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그러나 1월 28일 안동으로부터 도망쳤던 관찰사 김석중(金奭中)이 많은 관군을 끌고 공격하여 의병들이 패배하였다. 권세연은 최후까지 싸워서 한 몸을 바치고자 하였으나, 참모들의 간곡한 권고에 못이겨 피신하였다.1983년에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유림단 독립청원서 작성지(추원재)
사동 추원재는 충재 권벌(冲齋 權橃)의 손자인 권래(權來)의 묘소를 관리하기 위하여 장자인 권상충(權尙忠)이 1621년에 처음 건립하고, 증손인 권두응(權斗應)이 증축하는 등 수차례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추원재는 상실(上室)과 동루(東樓) 및 관리사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2층 누각 건물로 심벽[기둥사이에 기둥이 드러나게 만든 벽]없이 판벽으로만 구성되어 있어 특징적이다. 또한 이 건물은 독립운동사에서 독특한 자취를 가지고 있는데, 1919년 기미 「파리장서」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성재 권상익(省齋 權相翊)이 일부 유림들과 다시 외교활동에 나설 계획을 세우고, 중국의 유력한 인물에게 독립청원서를 보내기 위하여 1920년에 「제2차 장서」를 작성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