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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철식 추모비
오철식(1882-1947)은 충청남도 논산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이명은 오재봉(吳再峯), 오명석(吳明石)등이 있다. 1931년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설립한 황석공교에 입교하였다. 황석공교는 김영식(金靈植) 등이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설립한 종교로서 1936년 말까지 이하익(李夏翼) 등 20여 명의 동지를 규합하였고 이후 황극교(黃極敎)로 개칭하였다. 이들은 황석공소서(黃石公素書)에 의거한 믿음, 사랑, 존경을 교의 기본으로 해서 교도들에게 독립 가능성을 인식시키고 민족사상을 주입시키기 위해 항간에 유포되고 있는 소위 '정감(鄭堪)의 예언'에 따라 천서 16자인 주문을 외우면 '삼재팔난'을 면하게 한다고 선전하면서 교도를 획득하였고, 점차 독립의식을 교양시키고 이면으로는 조선독립의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알려서 결사에 가입하게 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오철식은 1937년 음력 3월 은세룡(殷世龍) 등과 함께 교단 조직에 관해 협의하고 충남 논산군 천호산(天護山)에서 독립을 기원하는 천제[천류(天禷)]에 참가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징역 2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1941년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하다 체포돼 2년 2월의 형을 선고받고 공주와 전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사실이 입증되었다. 정부에서 독립운동 위업을 기리어 2010년 3월 1일 제91주년 3.1절을 맞아 건국포장(제2446호)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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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필규 절의비
손필규(1870-1938)는 논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이칭으로는 반암(盤菴)이 있다. 1904년 천도교인으로 진보회를 조직하는 데 참여하였고, 일제강점이 시작되면서는 천도교를 발판삼아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1912년 서울에서 49일 동안 국운 회복 기도를 드렸고, 1918년에는 손병희 산하에서 있으면서 독립운동 자금 조달에 힘썼다. 또한 천도교 은진 교구장과 논산군 교구장을 역임하며 관내 교인들을 통해 관할 지역의 독립운동을 고취시켰다. 1919년 김태오·이백순·이근옥 등과 논산읍내에서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계획하고, 3월 12일 오후 3시를 기해서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학생 백여 명과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강경에서 논산읍내로 향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는데, 당시 시위대 규모는 1천 명 정도로 늘어나 있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본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실탄을 발포하는 등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했다. 손필규는 진압 당시에는 체포되지 않았으나 밤중에 다시 태극기를 돌리며 시위운동을 계속하다 주동자 수색에 나섰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손필규는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후 천도교 4대 교주 박인호의 지령으로 1938년 실시된 소위 무인년 기도사건에 참여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다시 일경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석방된 후 곧 사망하였다. 충청남도 논산 지역에서 전개한 독립운동의 공적이 인정되어 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는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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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필규 묘
손필규(1870-1938)는 논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이칭으로는 반암(盤菴)이 있다. 1904년 천도교인으로 진보회를 조직하는 데 참여하였고, 일제강점이 시작되면서는 천도교를 발판삼아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1912년 서울에서 49일 동안 국운 회복 기도를 드렸고, 1918년에는 손병희 산하에서 있으면서 독립운동 자금 조달에 힘썼다. 또한 천도교 은진 교구장과 논산군 교구장을 역임하며 관내 교인들을 통해 관할 지역의 독립운동을 고취시켰다. 1919년 김태오·이백순·이근옥 등과 논산읍내에서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계획하고, 3월 12일 오후 3시를 기해서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학생 백여 명과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강경에서 논산읍내로 향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는데, 당시 시위대 규모는 1천 명 정도로 늘어나 있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본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실탄을 발포하는 등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했다. 손필규는 진압 당시에는 체포되지 않았으나 밤중에 다시 태극기를 돌리며 시위운동을 계속하다 주동자 수색에 나섰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손필규는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후 천도교 4대 교주 박인호의 지령으로 1938년 실시된 소위 무인년 기도사건에 참여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다시 일경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석방된 후 곧 사망하였다. 충청남도 논산 지역에서 전개한 독립운동의 공적이 인정되어 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는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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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석 추모비
이근석(1898-1975)은 일제강점기 논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다. 이근석은 1919년 3월 20일 강경 장날을 이용한 2차 강경 3.1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고 송재기·이근오·이봉세 등과 함께 결의, 자신의 집에서 독립 만세 운동에 쓸 태극기 300여 개를 제작하였다. 1919년 3월 20일 오후 5시 경에 이근석 등은 심암리와 화정리 주민 70여 명을 규합하여 옥녀봉에 올랐다. 이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며 장에 온 군중을 합세시키면서 강경장 내 윗시장으로 진입하여 만서정(萬西町)으로 이동하면서 독립 만세 시위를 계속 벌였다. 이근석은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으며, 1919년 4월 2일 공주지방법원에서 1년 2월 형을 선고 받았다. 이에 항소하여 1919년 5월 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10월 형을 선고 받고, 또다시 상고하였으나 1919년 5월 2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징역 10월 형을 확정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근석은 출소 후 1923년 3월부터 현재의 충청남도 논산시 채운면 심암리 지역에 채운학원(彩雲學院)을 설립하여 주민들의 문맹퇴치와 청소년들의 독립정신을 고취하는데 힘썼다. 이에 일제는 1925년 이근석의 채운학원을 강제 폐교하였나, 이근석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1932년 3월 현재의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지역에 신풍학원(新豊學院)을 다시 설립하여 학생들의 항일 독립정신을 고취했다. 해방 후에도 공민학교(현, 기민중학교)를 설립하여 후학 교육에 헌신하였다. 이근석은 1975년 7월 3일 77세로 별세하였다. 198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았으며, 1990년에는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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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만세애국지사기념비(심암1리)
이 마을 출신인 애국지사 4인(송재기와 이봉세, 이근석, 이근오. 송재기를 제외한 모두가 전의 이씨 일가친척이다)과 강경 만세 시위를 기념하고자 세웠다. 1919년 3월 20일, 농사를 짓던 채운면 심암리 주민들이 강경 옥녀봉에서 500명이 만세를 불렀다. 상시장을 통과할 때 시위 군중은 1000명으로 늘어났다. 이 독립운동은 이근석이 3월 이후 수차례 3·1운동 소식을 듣고, 또한 매일신보를 보고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결심한 데서 시작되었다. 3월 16일 이근석의 집에서 이근석, 송재기, 이봉세, 이근호와 협의하고 그 곳에서 17~18일 이틀 동안 태극기 300개(~500개)를 만들었다. 이 시위에서 송재기, 이근석, 이봉세, 이근오 등은 공주 지방법원 재판에 회부되어 1년이상의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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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필 기념비
유진필(1885-미상)은 1919년 3.1독립운동이 전국에서 퍼져나가자 뜻을 모아 논산시장일에 궐기하기로 결의하고, 5일 오전 4시, 공회당에 모여 간단한 점검 후에 논산 우시장에서 여러 지역의 부락민과 합세하여 오전 9시부터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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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희 묘
남성희(1868-1941)는 대호지 4.4 독립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의령남씨 충장공파 성암종회의 묘역 모셔져있다. 취송 남상은 선생이 차남이며 독립군으로 활동한 남상학은 장남이다. 대호지 4.4운동은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주민들이 1919년 4월 4일 천의장터에서 일으킨 독립만세운동이다. 대호지면 유생인 남주원·남상돈·남상락·남계창 등이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를 입수하여 귀향한 후, 대호지면 이인정 면장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여 4월 4일에 5일장이 열리던 천의장터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들은 천의 주재소의 일본 순사를 공격하고 건물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펼쳐 120명에 달하는 독립유공자가 서훈되었다. 대호지면의 대표적인 집성촌인 의령 남씨 충장공파의 후손들이 세운 도호 의숙 유생들이 주도한 독립운동이었으며 대호지면사무소 이인정 면장과 면사무소 직원을 규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구체화하고, 천도교 세력과 유대 관계를 유지하였다. 대호지면은 당시 궁벽하고 외진 곳이었지만 주민들은 일제의 억압에 맞서 치밀하면서도 격렬한 항쟁을 벌였다. 대호지·천의장터 4·4 독립만세운동은 독립을 지향하는 당진 지역 주민의 항일 의식이 치열했음을 보여 주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대호지 4.4독립운동 선열유족회를 비롯한 각계의 노력으로 4.4운동이 새롭게 발굴되기 시작한 결과로서 성암 남성희 선생이 1919년 4월 24일 서산경찰서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 90도를 받은 사실이 인정되었다. 1995년 독립유공자 대통령표창을 받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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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상은 묘
남상은(1894-1974) 1919년 4월 4일 충남 당진군 대호지면과 정미면 천의장터 만세시위 주도하였다. 어린 시절 도호의숙(桃湖義塾)에서 한학(漢學)을 수학하였다. 1919년 4월 4일 대호지면의 독립만세시위에 부친(父親)인 남성희(南星熙)와 함께 참여하였다. 친형인 남상학(南相學)은 김좌진(金佐鎭)의 휘하에서 사관양성소(士官養成所) 설립에 참여하고, 1920년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 참전하였다가 생사 불명되었다. 1919년 3월 남주원(南柱元)·이두하(李斗夏)·남계창(南啓昌)·남상직(南相直)·남상락(南相洛) 등 지역 유생들과 함께 서울에서 열리는 고종 장례식에 참여하였는데, 여기서 만세운동을 접할 수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시위 소식을 전하였고, 이후 각지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열기가 서산 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키는데 자극제가 되었다. 1919년 3월 26일 대호지면사무소에서 면서기 김동운(金東云)·강태훈(姜泰壎)·민재봉(閔載鳳)과 면사무소 직원 송재만(宋在萬) 등이 회합을 갖고 독립 만세를 일으키기로 뜻을 모았다. 이들은 다음 날인 3월 27일 다시 모여 김동운이 “(장날인) 4월 4일 오전 8시경까지 도로 수선을 위해 면민 각호 1명씩 집합하라는 공문을 작성해 구장들에게 배포하고 정미면 천의시장으로 가서 독립만세를 외치자”라고 실행 방안을 제안하였다. 4월 3일에는 송재만이 9개 마을의 구장에게 도로 수선을 위해 집합하라는 내용의 면장 명의로 된 공문을 전달하며 주민들에게 고지하도록 부탁하였다. 4월 4일 아침 면사무소 앞에 집결한 6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 대열을 갖추고, 대열의 선두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7km 떨어진 천의장터를 향해 행진하였다. 시위대열이 천의장터에 도착하자 시장에 나온 사람들이 만세시위를 목격하고 속속 동참하여 시위대의 규모는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과 함께 장터의 곳곳을 행진하며 천의주재소(天宜駐在所)의 순사들을 무력화시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만세시위가 마무리될 무렵 천의장터로 급파된 당진경찰서 순사들의 발포로 4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분노하여 천의주재소로 달려갔다. 행동총책 송재만과 함께 행동선봉대원 및 주민들을 지휘하여 주재소 습격을 주도하였다. 일제 경찰을 구타하고 주재소를 완전히 파괴한 후, 해산하였다. 이날의 시위 이후 홍성헌병수비대에 붙잡혀 서산경찰서에 구금되었다. 1919년 10월 24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여 같은 해 12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8월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이후에도 부자가 모두 만세시위에 참여하였고, 독립군으로 활동한 남상학이 친형이었기 때문에 일제 경찰로부터 계속 사찰을 받았다. 해방 후인 1971년 대호지면의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생존자들의 증언을 모아 대호지 기미독립운동약사를 편찬하는 데 기초 자료를 제공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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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호지 4.4독립만세운동거리 표지석
대호지 4.4만세운동은 대호지면에서 남주원, 이인정, 송재만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만세운동이다. 1919년 4월 4일 9시 대호지면 광장에 600여 명이 모여 30자 높이의 대나무에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면장 이인정의 연설에 이어 남주원의 독립선언문 낭독, 한운석이 작사한 애국자 제창이 있은 다음 행동 총책 송재만의 선서 후 만세시위 행진을 시작하여 천의시장으로 이어졌다. 어느새 1,000여 명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정미면에서는 가두시위를 계속하며 당진경찰서 소속 왜경들과 대치하였고, 4명이 부상하자 군중이 왜경주재소를 파괴하고 많은 일경들을 생포하여 구타하였다. 이에 사상자가 5명이 발생하였고, 200명 이상이 구속되어 학살되거나 옥고를 치렀다. 이에 대호지 4.4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애국선열들의 위패가 모셔진 창의사에 대호지 4.4독립만세운동거리 표지석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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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정 공적소개비
이인정(1859-1934)은 충청남도 서산 사람으로, 대호지면장으로 있으면서 대호지 4.4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당시 이인정은 면사무소에 근무하던 송재만(宋在萬) 등이 이 독립만세시위를 하기 위하여 자신 몰래 면장 직인을 사용하여 도로보수 부역이란 명목으로 1919년 4월 4일 면민들을 광장에 모이게 한 것을 알고 있었으나 제지하지 않았다. 도리어 이날 모인 면민 앞으로 나아가 "오늘 모이게 된 것은 독립만세시위를 위한 것"이라며 시위에 참여할 것을 종용하고, 앞장서서 300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천의시장으로 행진하였다. 정오경에 이인정은 시위군중을 지휘하여 경찰주재소를 습격하고 기물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으며, 1920년 2월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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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리마을비
조금리는 대호지4.4독립만세운동의 발상지이다. 대호지4.4만세운동은 대호지면에서 남주원, 이인정, 송재만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만세운동이다. 1919년 4월 4일 9시 대호지면 광장에 600여 명이 모여 30자 높이의 대나무에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면장 이인정의 연설에 이어 남주원의 독립선언문 낭독, 한운석이 작사한 애국자 제창이 있은 다음 행동 총책 송재만의 선서 후 만세시위 행진을 시작하여 천의시장으로 이어졌다. 어느새 1,000여 명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정미면에서는 가두시위를 계속하며 당진경찰서 소속 왜경들과 대치하였고, 4명이 부상하자 군중이 왜경주재소를 파괴하고 많은 일경들을 생포하여 구타하였다. 이에 사상자가 5명이 발생하였고, 200명 이상이 구속되어 학살되거나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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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사(대호지4.4만세운동)
창의사는 대호지 4.4만세운동에 참여한 애국지사들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대호지 4.4만세운동은 대호지면에서 남주원, 이인정, 송재만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만세운동이다. 1919년 4월 4일 9시 대호지면 광장에 600여 명이 모여 30자(약 9미터) 높이의 대나무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면장 이인정의 연설에 이어 남주원의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한운석이 작사한 애국가를 제창한 뒤, 총책 송재만의 선서후 만세시위 행진을 시작하여 천의시장으로 이어졌다. 10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정미면에서 가두시위를 계속하며 당진경찰서 소속 왜경들과 대치하여 4명이 부상하자, 군중이 투석전으로 대응하며 천의 왜경주재소가 파괴되고 많은 왜경들이 생포되어 구타당했다. 그러나 4월 5일에 출동한 왜경과 다시 충돌하여 사상자 5명이 발생하고, 200명 이상이 구속되었다. 이 운동으로 현장 학살된 인물이 송봉운 등 3명, 옥중에서 고문치사 당한 인물이 이달준, 김도일 등 3명, 수형인이 5년에서 8월까지 37명, 태형 90도 이상이 90여 명에 이르는 치열한 만세운동으로 인근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