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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병 공적비
윤태병(1889-1940)은 충남 논산(論山) 사람으로 1919년 조병채(趙炳彩)·김영진(金瑛鎭)·윤상기(尹相起)·백남식(白南式) 등의 동지와 함께 당시 중국 길림(吉林)에서 활동 중이던 독립군단체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도와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자는데 뜻을 같이하고, 이를 위해 국내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펼 것을 주목적으로 비밀결사 대한건국단(大韓建國團)을 조직하였다. 동단은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단원들이 함께 모여 다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취지와 표방 아래 서로 연락을 취하면서 국내 각지에서 활동하였다. 이때 이들은 북로군정서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 휘하의 천경수(千景洙)로부터 군자금 모집지령과 함께 임시정부경리국경고서(臨時政府經理局警告書)·임시정부총간부유고서(臨時政府總幹部諭告書)·특파원중·납금명령서(納金命令書) 등을 인수받아 군자금 모집에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그는 조병채·백남식·이상설(李商雪) 등과 함께 1920년 3월 전북 금산(錦山)의 자산가 송석기(宋錫驥)·윤상응(尹相應) 등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1920년 4월 이상설이 조국독립과 항일사상을 고취하는 동단의 취지서를 소지하고 서울의 자산가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려고 계획하던 중 붙잡히는 바람에 동단의 조직이 노출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일경에 붙잡혀 1920년 7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4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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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병 사적비
윤이병(1855-1922)은 충청남도 논산(論山) 사람이다. 1895년 영선사주사(營繕司主事)로 있을 때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여러 차례 복수토역소(復讐討逆疏)를 올렸다. 또한 고종의 밀령을 받아 명성황후 시해의 진상을 조사 보고하고 정부 내의 친일세력을 숙청하려다 실패했다. 1903년 5월에는 청국(淸國) 동순태(同順泰)의 상표(商票)와 일본제일은행권(日本第一銀行卷)의 국내유통을 반대하는 민중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11월 일본의 위협으로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었을 때는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오적의 처형을 주장하는 격문을 전국에 살포하였다. 1906년에는 향리에서 동아개진교육회(東亞開進敎育會)를 창립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에 힘썼다. 1907년 헤이그 밀사를 구실로 고종을 강제 양위시키고 일본의 차관통치를 시작하려고 하자 동우회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와 연합하여 격렬한 반대시위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을사오적 처단과 이완용(李完用) 집에 방화를 제의하여 이를 소각하는 등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일로 체포되어 3년간 전라남도 지도(智島)에 유배당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는 1913년 9월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활동 중 1914년 4월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19년 3·1운동 때에는 서울 적선동(積善洞)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다. 그리고 3월 상순에 한남주(韓南珠) 등과 13도 대표로 국민대회(國民大會)의 결의를 지지하고 한성정부안에 의거한 임시정부의 수립을 요구하며 선전하는 데 참여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0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19년 11월 사망하였다. 1968년 대한민국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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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병 묘
윤이병(1855-1922)은 충청남도 논산(論山) 사람이다. 1895년 영선사주사(營繕司主事)로 있을 때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여러 차례 복수토역소(復讐討逆疏)를 올렸다. 또한 고종의 밀령을 받아 명성황후 시해의 진상을 조사 보고하고 정부 내의 친일세력을 숙청하려다 실패했다. 1903년 5월에는 청국(淸國) 동순태(同順泰)의 상표(商票)와 일본제일은행권(日本第一銀行卷)의 국내유통을 반대하는 민중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11월 일본의 위협으로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었을 때는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오적의 처형을 주장하는 격문을 전국에 살포하였다. 1906년에는 향리에서 동아개진교육회(東亞開進敎育會)를 창립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에 힘썼다. 1907년 헤이그 밀사를 구실로 고종을 강제 양위시키고 일본의 차관통치를 시작하려고 하자 동우회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와 연합하여 격렬한 반대시위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을사오적 처단과 이완용(李完用) 집에 방화를 제의하여 이를 소각하는 등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일로 체포되어 3년간 전라남도 지도(智島)에 유배당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는 1913년 9월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활동 중 1914년 4월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19년 3·1운동 때에는 서울 적선동(積善洞)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다. 그리고 3월 상순에 한남주(韓南珠) 등과 13도 대표로 국민대회(國民大會)의 결의를 지지하고 한성정부안에 의거한 임시정부의 수립을 요구하며 선전하는 데 참여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0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19년 11월 사망하였다. 1968년 대한민국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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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현 기적비
김종현(1895-1933)은 1910년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북향사배하고 3일간 단식을 했다. 1915년 “조국광복은 오로지 배워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향리에서 자제교육에 힘을 쏟았으며, 1918년에는 손병희의 문하생이 되었다. 1919년 2월 24일, 손병희의 지시에 따라 논산, 강경지방의 의거 책임자로 임명받고 독립선언문을 가지고 귀향하여 3월 3일 논산과 강경에서 각각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하였다. 이로 인해 체포되었고, 3개월의 옥고를 치루고 출옥하였으나 여독으로 고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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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상오 기적비
염상오(1885-1919)는 충청남도 논산(論山) 사람으로 1919년 3월 12일 오후 3시반 경, 논산군 논산 읍내에서 시위군중 1,000여명과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일본 경찰의 발포로 1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7, 8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이때 염상오도 체포되었으며, 일본 경찰의 혹독한 고문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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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순 추모비
이학순(1843-1910) 추모비는 전주이씨 익안대군의 6대손 인의공파를 모신 효사재에 위치하였다. 후손에 따르면 이학순 선생은 충남 공주 대장리(현, 공주시 계룡면 하대리)에서 태어나셨는데, 송상도의 '기려수필'을 근거로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가 작성되다 보니 출생지가 완산 출신으로 잘 못 알려진 것이라고 한다. 이학순은 성품이 청렴하고 활달하였으며, 실천에 힘썼던 선비였다. 이학순은 태조 이성계의 3남 익안대군 방의의 17대손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대한제국을 병합하려고 1910년 8월 22일에 이완용으로 하여금 데라우치와 조약을 체결하도록 하고, 민족적 저항을 염려하여 공포하지 않다가 1주일이 지난 후인 1910년 8월 29일에야 공포하도록 하였다. 일제는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한 이후 모든 정책을 동원하여 한민족의 민족적 저항을 제압하려는 술책을 강행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노인은사금(老人恩賜金)을 지급하여 회유하려는 시도였다. 일제가 은사금을 보내어 받도록 온갖 협박을 함에도 이학순은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은사금 수령을 끝까지 거절하였다. 이에 일제는 무단 식민통지의 상징인 헌병대를 투입하여 이학순을 투옥하고 고문까지 가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말미암은 고초 때문에 병보석으로 석방되어 잠시 자유로운 몸이 된 이학순은 1910년 12월 7일 나라 잃은 망국의 한을 가슴에 품고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은 끊어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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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곡서원(이학순 배향)
이학순(1843-1910) 추모비는 전주이씨 익안대군의 6대손 인의공파를 모신 효사재에 위치하였다. 후손에 따르면 이학순 선생은 충남 공주 대장리(현, 공주시 계룡면 하대리)에서 태어나셨는데, 송상도의 '기려수필'을 근거로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가 작성되다 보니 출생지가 완산 출신으로 잘 못 알려진 것이라고 한다. 이학순은 성품이 청렴하고 활달하였으며, 실천에 힘썼던 선비였다. 이학순은 태조 이성계의 3남 익안대군 방의의 17대손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대한제국을 병합하려고 1910년 8월 22일에 이완용으로 하여금 데라우치와 조약을 체결하도록 하고, 민족적 저항을 염려하여 공포하지 않다가 1주일이 지난 후인 1910년 8월 29일에야 공포하도록 하였다. 일제는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한 이후 모든 정책을 동원하여 한민족의 민족적 저항을 제압하려는 술책을 강행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노인은사금(老人恩賜金)을 지급하여 회유하려는 시도였다. 일제가 은사금을 보내어 받도록 온갖 협박을 함에도 이학순은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은사금 수령을 끝까지 거절하였다. 이에 일제는 무단 식민통지의 상징인 헌병대를 투입하여 이학순을 투옥하고 고문까지 가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말미암은 고초 때문에 병보석으로 석방되어 잠시 자유로운 몸이 된 이학순은 1910년 12월 7일 나라 잃은 망국의 한을 가슴에 품고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은 끊어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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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 집
서재필(1864~1951)은 1864년 1월 7일 외가인 보성(寶城)에서 성주이씨(星州李氏)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7살 때 상경, 양외숙인 김성근(根)의 집에서 공부하였으며 1882년 급제(及第)하여 교서관(校書館) 부정자(副正字) 벼슬에 올랐다. 1883년 일본 동경의 육군 호산(戸山)학교에 유학하고 1884년 귀국 후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등과 갑신개혁(甲申改革)을 주도하여 병조참판(兵曹參判) 겸 정령관(正領官)이 되었다. 그러나 개혁의 실패로 부모, 형, 아내는 자살하고 동생은 참형(慘刑)되었으며 어린 아들은 굶어죽는 참변(慘變)을 겪었다. 선생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여 지금의 워싱턴 대학에서 의학(學)을 공부, 1892년 한국인 최초의 의사(醫師)가 되었다. 1895년 귀국하여 1896년 중추원(中樞院) 고문(顧問)에 임명되었고, 4월 7일 최초의 한글신문인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하였으며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조직하고 굴욕외교의 상징인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독립문(獨立門)을 건립하는 등 민족의 자주정신을 고취하였다. 1898년 국내 수구파(守舊派)들의 반대로 다시 미국으로 떠나 문구 및 인쇄업으로 크게 성공하였다. 1919년 3·1운동 소식을 전해듣고 한인회의 개최 및 한국친우회를 결성하고 임시정부(臨時政府) 구미위원회(歐美委員會) 위원장을 맡는 등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하고 전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바쳤다. 그 후 성요셉병원 등에서 임상병리학자로 명성을 떨치다 1947년 미군정의 최고 고문이자 과도정부 특별의정관(特別議政官)으로 귀국하여 통일된 민주국가 건설에 매진하여 국민들의 존경과 추앙을 받았으나 정쟁에 휘말린 시국을 개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1951년 1월 5일 87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 정부에서는 그가 독립운동에 끼친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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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총권 묘
고총권(1867-1959)은 전북 익산(益山) 사람이다. 1867년 11월 26일 전라북도 익산군(益山郡) 황화면(皇華面) 마전리(麻田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고, 향리에서 농사를 짓다가 1895년 4월 동학(東學)에 입교하였으며 후일 천도교인이 되었다. 1919년 3월 1~2일경에 전주 천도교구실을 통해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았다. 이에 3월 3일 익산 천도교구실 임원들과 함께 익산군 만세 시위를 조직하기로 하고 거사 일을 제1세 교주 최제우의 순도일인 3월 10일로 정하였다. 기독교인과의 연대를 모색하면서 이때 각 면의 연락 책임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망성면(望城面) 및 금마면(金馬面)의 연락과 동원 책임을 맡았다. 3월 3일 여산면(礪山面) 여산리(礪山里)의 노상에서 행인들에게 “지금 우리 민족대표로 천도교인, 기독교인, 불교인 33인이 합동하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우리도 독립만세를 부르자”라고 하며, 3월 10일 만세 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어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동지인 박영진(朴永鎭)과 정대원(丁大元)이 경찰에게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피신하였다. 2개월여 도피 생활을 하다가 집에 돌아왔다가 체포 기소되었다. 1919년 7월 4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선고받았다. 이후 태형의 여독으로 2년 여 동안 거동을 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1946년 3월 1일 개최된 기미독립선언기념 익산군민대회에서 ‘기미 독립운동에 활약한 공적’으로 표창장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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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철 묘
서정철(1912-1987). 이명은 오오시로 테이테츠(大城廷哲, 창씨개명)이다. 전라북도 여산군 공촌면 하봉리(현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봉동리 하봉마을)에서 아버지 서병은과 어머니 성주 이씨 이정대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대구사범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31년 10월 교내 항일 학생비밀결사 '사회과학연구그룹'에 가입하고, 1932년 1월까지 회원들을 규합하고 《자본론》, 《마르크스주의 강좌》등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그 뒤 1932년 12월 2일 대구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한동안 일본 유학을 고민했으나 어려운 가정형편을 고려하여 포기했고, 대신 귀향하여 농업에 종사하면서 농민을 대상으로 한 야학 운영을 통해 농민 계몽 운동에 앞장섰다. 그 뒤 1987년 12월 5일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20년 8월 15일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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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철식 묘
오철식(1882-1947)은 충청남도 논산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이명은 오재봉(吳再峯), 오명석(吳明石)등이 있다. 1931년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설립한 황석공교에 입교하였다. 황석공교는 김영식(金靈植) 등이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설립한 종교로서 1936년 말까지 이하익(李夏翼) 등 20여 명의 동지를 규합하였고 이후 황극교(黃極敎)로 개칭하였다. 이들은 황석공소서(黃石公素書)에 의거한 믿음, 사랑, 존경을 교의 기본으로 해서 교도들에게 독립 가능성을 인식시키고 민족사상을 주입시키기 위해 항간에 유포되고 있는 소위 '정감(鄭堪)의 예언'에 따라 천서 16자인 주문을 외우면 '삼재팔난'을 면하게 한다고 선전하면서 교도를 획득하였고, 점차 독립의식을 교양시키고 이면으로는 조선독립의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알려서 결사에 가입하게 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오철식은 1937년 음력 3월 은세룡(殷世龍) 등과 함께 교단 조직에 관해 협의하고 충남 논산군 천호산(天護山)에서 독립을 기원하는 천제[천류(天禷)]에 참가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징역 2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1941년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하다 체포돼 2년 2월의 형을 선고받고 공주와 전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사실이 입증되었다. 정부에서 독립운동 위업을 기리어 2010년 3월 1일 제91주년 3.1절을 맞아 건국포장(제2446호)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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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성진 추모비
곽성진(1899-1973)은 1899년 10월 6일 충청남도 논산군(論山郡) 강경면(江景面) 중앙리(中央里)에서 태어났다. 외가가 있던 전라남도 순천에서 순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탑골공원 만세 시위에 참가한 뒤 강경으로 내려왔다. 당시 강경에서는 엄창섭(嚴昌燮)·고상준(高相俊)·추병갑(秋炳甲)·강세형(姜世馨) 등이 창영학교 내에서 만세 운동 실행을 결의하고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강세형의 권유로 3월 10일 이들이 주도한 강경 장날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군중 선동과 치안 방해를 명목으로 일제 군경과 소방조, 재향군인으로 이루어진 자위단에 의해 체포되었다. 4월 14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태 90도에 처해졌다. 1925년 3월 7일 강세형·박금동 등과 한국 민중 해방 운동을 목적으로 혜성단(彗星團)을 조직하였다. 한편, 1925년 11월 간부진의 갈등으로 인해 강경청년회에서 회원 권리 행사를 정지당하기도 하였다. 곧이어 민우회·고용인친목회·형평분사·혜성단 등의 연맹회 발기회에서 집행위원으로 뽑혔고, 1926년 3월 14일 강경전기주식회사의 전기요금 인하를 요구하기 위한 시민대회에서 교섭위원으로 선출되는 등 강경의 사회운동을 주도하였다. 현재 논산시 연산공원 내에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