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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빈 기적비
송종빈(1865 - 1928)은 영가무용단(詠歌舞踊團)을 설립하여 활동하던 중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영가무용단(詠歌舞踊團)을 재정비하고 단원 이내수(李來修)·윤상욱(尹相旭)·김한복(金漢復) 및 임종만(林鍾萬) 등과 함께 전북 및 충남 일대에서 해외 독립운동 단체를 지원하기위한 군자금 모금활동을 펼쳤다. 1921년 11월 25일에는 동지 선영기(宣永基)와 함께 전북 익산군 망성면 어량리에 거주하는 김용보(金溶普)로부터 군자금 108원을 모금한 것을 비롯하여 각처에서 모금활동을 전개하다가 1921년 12월 30일 일경에 붙잡혔다. 1922년 3월 27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 제7호 위반 강도협박 및 장물수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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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기포지 기념비
동학농민혁명기념비는 충청남도 금산군 제원초등학교 정문 옆 제원역터에 위치해있다. 이 기념비는 1894년 3월 8일 금산 제원역의 동학농민혁명 최초의 무장기포지를 기념하는 것이다.동학농민혁명은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민중화 운동이었다. 이 혁명은 낡은 신분제 아래 지방 관리의 과도한 농민 수탈로 인해 촉발되었으며, 1860년 최제우(1824-1864)가 서구 세력과 개신교에 대립하는 의미에서 창시한 민족 종교인 동학에 뿌리를 두고있다. 동학농민혁명은 전국적인 대규모 항쟁으로 발전하였으나, 1895년 금산 대둔산에서의 항쟁을 마지막으로 결국 실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학농민혁명의 근본 정신은 한국인들에게 평등과 저항의 정신을 불어넣었고, 이 후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근간이 되었다. 동학농민혁명 최초 무장기포지이자 최후의 항쟁지인 금산은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이 기념비는 이러한 소중한 역사를 후대에 알리고 목숨을 바쳐 혁명에 참여한 이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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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엽 묘
이동엽(1891 - 1944)는 1919년 4월 1일 이기한(李綺漢)이 주동하여 일으킨 공주군 정안면 일대의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수백명의 시위군중이 모여 독립만세를 고창하였으며, 이날 정오 무렵에는 인근의 광정리까지 도보 행진하여 경찰주재소를 파괴하는 시위가 더욱 격렬해지자, 주재소에서는 공주경찰서에 연락하여 경찰과 헌병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응원병이 타고 온 자동차를 석송리 입구에서 30여 명의 만세시위군중이 가로막고 독립만세를 더욱 높이 외치자, 일본 헌병이 하차하여 주동자를 체포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그는 더욱 거세게 달려들어 헌병의 군도를 빼앗으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었다. 결국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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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 항일 독립 만세 운동 기념비(옥녀봉)
강경 지역의 3.1운동은 3월 10일 오후 3시경 엄창섭(嚴昌燮)의 주도 아래 500여 명의 군중으로 시작하였다. 엄창섭은 부여군 세도면의 창영학교의 교사였으며 고상준, 추병갑, 김종갑, 추성배, 서삼종, 윤동만 등과 함께 태극기를 제작하고 옥녀봉으로 운반하였다. 태극기를 나눠받은 군중들은 다 함께 옥녀봉에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하산하며 일본인이 거주하는 본정통(本町通)을 경유하여 강경시장을 일주하며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였다. 일본 경찰은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하였고, 이 일로 엄창섭은 징역 2년, 고상준과 추병갑은 각각 징역 1년, 강세형·윤동만·정기섭은 각각 징역 8월, 김종갑·추성배는 각각 징역 6월, 서삼종·한규섭은 각각 태형 90의 형을 받았다. 이후 3월 15일 장날 다시 거사하려다가 태극기 55매를 압수당하였고, 제2차 옥녀봉 만세운동이 3월 20일 오후 5시경에 발생하였다. 주동자 이근석(李根奭)은 송재기(宋在紀), 이봉세(李鳳世). 이근오(李根五) 등과 함께 태극기 360본을 제작하고 오후 5시경 옥녀봉에 모여든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행진을 하였다. 시위 군중들이 강경 상시장을 거쳐 서정(西町) 방면으로 진행할 때에는 장꾼들이 합세하여 시위군중은 1천여 명이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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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성결교회-최초 신사참배거부 선도기념비
조형물은 5m 높이로 사용된 화강암은 강경산 황등석이고 흰 바탕은 순결, 믿음, 평화, 승리를 상징한다. 위에서 본 모양은 그리스도인을 상징하는 물고기 모양이며 아래의 물은 생명수인 예수를 상징한다. 크기가 다른 두개의 돌은 두루마리 성경을 의미하며 오른쪽 조각은 강경교회 전도사였던 백신영 전도사와 여교사 김복희, 그리고 함께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강경초등학교 학생들이다. 왼쪽 조각은 신사참배를 하기 위해 줄지어 있는 사람들과 일본제국주의를 그렸다. 십자가는 고난을 따르는 신앙을 천사는 미가엘 천사로 하나님의 보호를 상징한다. 아래에 있는 64개의 돌기둥 중 큰 기둥 두개는 백신영 전도사와 김복희 교사이고 나머지 62개의 돌기둥은 학생들을 상징하는데 이 중 57개는 강경성결교회 주일학생들이고 나머지 5개는 일반 학생이다. 후면 상단부는 성결교회의 상징인 "가시밭의 백합화 "를 형상화 하였다. 옆면에는 기념비의 건립경과보고를 새겼고 후면에는 당시 이 사건을 처음으로 보도한 1924년 12월 기독교잡지인 ‘활천’의 내용이 새겨졌다. 강경보통학교의 신사참배거부 사건은 1924년 10월11일, 일제의 신사 참배를 거부한 강경공립보통학교의 교사 김복희를 면직시키고 함께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62명의 어린이들을 퇴학한 사건이다. 당시 김복희 선생과 57명의 학생들은 강경교회에 다니고 있었으며 강경교회에는 대한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잘 알려진 백신영 전도사가 있었다. 또한 57명의 어린이 중에는 일본역사교육 거부사건의 주동자인 윤판석이 포함되어있었다. 한편 당시 강립보통학교의 신사참배 거부사건은 큰 문제로 확대되어 당시 조선총독부에 보고되고,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며, 첨예한 사회적 이슈로 공론화되었으며, 1925년 조선신궁 건립 등 신사참배를 전면 확대하려던 일본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10여년 후퇴시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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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시 독립유공자 공적비
높이 3.7m, 너비 2.4m의 기념비석은 논산출신의 독립유공자 61분의 존함과 그 유족 중 논산에 거주하는 분 8명 그리고 서재필 박사를 포함하여 총 70여 명의 성함을 새겼다. 하단에 새긴 건립비문은 독립유공자 후손인 윤여익님이 쓰고 독립유공자 추진위원회의 권선옥이 지었다고 언급되어있다. "우리 논산은 예로부터 충절과 예학의 고장이었다 불행하게도 나라의 주권과 국민의 행복을 일본 제국에게 빼앗겼을 때 이를 되찾고자 많은 애국지사들이 목숨과 재산을 바쳐 싸웠다. 특히, 우리 논산과 관련된 분들을 찾아서 그 고귀한 정신을 추모하고 본받고자 시민의 정성을 모아 이 비를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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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호 기적비
최영호(1890-1958)는 평북 의주 사람으로 이명은 최호(崔好), 최명우(崔明宇)이다. 1907년 한국군 부위(副尉)로 의주진위대 등에서 복무하였으며, 군대의 강제 해산 후 일진회(一進會) 타도에 앞장섰다.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나자 의주에서 시위에 앞장섰다가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1919년 8월 21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租界)주1에서 안창호(安昌浩)가 발의하고, 홍이관(洪利寬) · 이유필(李裕弼) · 조동호(趙東祜)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로서 『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1923년 임시정부 교통국 이륭양행(怡隆洋行)주2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만주 안동(安東)에 파견되어 활동하다가 1923년 5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이듬해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68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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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진 묘
박용진(1888-1919)은 충청남도 논산(論山) 사람으로 1919년 4월 4일 광석면(光石面)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날 그는 약 200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위를 하다가, 천동리(泉洞里) 부근에서 야만적인 일본 헌병의 발포로 흉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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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상오 묘
염상오(1885-1919)는 충청남도 논산(論山) 사람으로 1919년 3월 12일 오후 3시반 경, 논산군 논산 읍내에서 시위군중 1,000여명과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일본 경찰의 발포로 1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7, 8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이때 염상오도 체포되었으며, 일본 경찰의 혹독한 고문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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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직 공적비
배영직(1882-1926)은 충남 논산(論山) 사람으로 1919년 충남 논산군 두마면(豆磨面)에서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옥고를 치렀다. 평소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그는 지역의 유지이자 자산가인 부친 배대식(裵大植)과 함께 농촌자력갱생운동을 펼쳐왔고 인근의 빈민들에게 양곡을 나누어 주는 등 선행을 베풀어 주민들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9년 4월 1일 오후 4시경 향리인 두마면 두계(豆溪) 장터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자 이에 참여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등 활동하였다. 그날 오후 6시경 그는 일본인 순사를 뿌리치고 장터에 운집한 군중들을 향해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격동된 장꾼들이 시위대를 형성하여 다시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오후 7시경에 이르러서는 시위군중이 1,000여 명에 달하였다. 시위대의 일부는 일제침략과 수탈의 교량 역할을 하던 철도선로의 파괴를 기도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 일로 체포되어 1919년 4월 18일 공주지방법원 강경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공무집행 방해 등으로 징역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배영직은 그 후 1924년에도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다시 체포되었으며 군산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지 3일만에 고문 여독으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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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중 묘
윤홍중(1875-1943)은 충남 논산(論山) 사람이다. 윤홍중은 1898년, 강제 단발령에 저항하여 항일 시위를 하였으며, 1907년에는 서울에서 동우회(同友會)를 조직하고 결사대(決死隊)를 구성하여 항일 시위를 하다 붙잡혀 1개월간 구금당하였다. 윤홍중은 1916년,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활동하였다. 대한광복회는 1915년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의 일부 인사들이 제휴하여 결성한 혁명단체로서 군자금 수합, 부일배(附日輩)처단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1918년 대한광복회는 조직이 노출되어 동지들이 붙잡히자 몸을 숨기고 있던 중 1920년 미국의원단의 내한을 계기로 한민족의 독립열망을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 총독과 정무총감 등 일제고관을 암살할 것을 계획하고 한 훈(韓焄)·김상옥(金相玉)·김동순(金東淳) 등과 함께 거사를 준비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그는 1927년 7월 조선소년연합회(朝鮮少年聯合會)의 결성에 참여하여 방정환(方定煥)·변세택(邊世澤)·조문환(曺文煥) 등 14명의 동지와 함께 창립준비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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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식 공적비
백남식(1880-1950)은 충남 논산(論山) 사람으로 1919년 조병채(趙炳彩)·김영진(金瑛鎭)·윤태병(尹太炳)·윤상기(尹相起) 등의 동지와 함께 당시 중국 길림(吉林)에서 활동 중이던 독립군단체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도와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자는데 뜻을 같이 하고, 이를 위해 국내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펼 것을 주목적으로 비밀결사 대한건국단(大韓建國團)을 조직하였다. 동단은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단원들이 함께 모여 다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취지와 표방 아래 서로 연락을 취하면서 국내 각지에서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북로군정서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 휘하의 천경수(千景洙)로부터 군자금 모집지령과 함께 임시정부경리국경고서(臨時政府經理局警告書)·임시정부총간부유고서(臨時政府總幹部諭告書)·특파원증·납금명령서(納金命令書) 등을 인수받아 군자금 모집에 힘을 쏟았다. 이때 그는 조병채·윤태병과 함께 1920년 3월 전북 금산(錦山)의 자산가 송석기(宋錫驥)·윤상응(尹相應)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충남의 공주(公州)·부여(扶餘), 서울 등지에서 수 차례에 걸쳐 군자금을 모연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활동을 펴던 중 그는 일경에 붙잡혀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고 7년 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