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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병기념탑
홍주의병이란 홍주군(현, 충남 홍성군)을 비롯한 홍주문화권 내에서의 의병항쟁을 말하는 것으로, 1895년과 1906년 말 충청남도 홍성 일대의 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항일 투쟁이다. 안창식(安昌植)과 채광묵(蔡光黙) 등 홍주의 유생들은 1895년 12월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청양의 화성에서 향회를 실시한 뒤 민병을 모아 홍주성을 점령하였다. 이들은 12월 3일(음력) 홍주 관아에 창의소를 설치하고 김복한(金福漢: 1860~1924)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창의소를 차린 지 하루 만에 관찰사 이승우(李勝宇)가 배반하고 의병 지휘부를 체포하였다. 체포를 면한 유생들은 이후 의병의 재기를 시도하였다. 1906년 안병찬(安炳瓚)·채광묵 등은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 소식을 듣고 의병을 재기하였다. 이들은 정산에 거주하고 있는 전 참판 민종식(閔宗植: 1861~1917)을 총수로 추대하고 1906년 3월 15일(음력 2월 21일) 예산의 광시에서 봉기하여 홍주성을 점령하였다. 홍주성에서 일본군이 패퇴하자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일본군 보병 제60연대 대대장 다나카(田中) 소좌 지휘하의 보병과 기병대를 파견하여 의병 참모장 채광묵 부자 등 300여명을 학살하였다. 의병장 민종식은 간신히 예산 대술에 있는 이남규(李南珪)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민종식 등은 그 해 10월 재기를 도모하였으나 일진회원의 밀고로 이용규 등 주도자들이 체포되었다. 민종식은 미리 피신해 체포를 면했으나 11월 20일 공주 탑산리에서 체포되어 교수형을 선고 받았다. 이후에도 홍성 일대 유림들의 재기 움직임에 불안을 느낀 일제는 이들에 대한 감시와 학대를 강화하였다. 1907년 9월에는 이남규 부자를 체포해 가던 중 귀순을 강요하다 거부 당하니 온양 평촌에서 이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1월에는 김복한이 거병을 밀의하였다고 하여 악형을 가하였다. 김복한·안병찬 등은 1919년 유림이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한 문서인 파리장서에 서명하는 등 이후에도 운동을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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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오순난의병장사공묘비
홍주의사총은 홍성지역에서 있었던 의병활동 중 홍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수백 의병들의 유해를 모신 묘소다. 1905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각지에서 의병활동이 일어났는데, 홍성 지역에서는 민종식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이 전개됐다. 민종식은 1906년 고종의 명을 받아 의병을 이끌고 남포와 보령의 일본군을 습격하여 병기를 탈취하였으며, 5월 19일 마침내 홍주성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일본군의 대포 공격이 본격화되면서 5월 31일 폭격으로 조양문이 무너지고 의병 수백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일본군은 민간인과 의병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사격을 가했고 많은 의병들의 시체가 홍성천과 남산 부근에 방치되었다. 이에 광복 이후 의병들의 유해를 남산에 안치하고 ‘병오항일기념비’를 세우며 추모제를 지냈다. 그런데 1949년 현재의 홍주의사총이 있는 구릉에서 또 다른 유골들을 발견하면서, 이 유골들이 옛 홍주의병의 유해임을 확인하고 현 위치에 새로이 의사총을 조성하였다. 사당인 창의사에 900의사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어 구백의총이라 했던 것을 1992년 홍주의사총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홍주의사총은 을미의병으로부터 면면히 계승되어 온 한말 홍주의병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중요한 유적으로, 매년 5월 30일 순국의사 추모제를 올리고 있으며 2001년 8월 17일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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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의비
1894년 조선후기 정치 경제 사회의 갖가지 모순 속에서 심한 흉년과 가난으로 고통 받던 농민들이 탐관오리 숙청과 외세 배격을 요구하는 동학교도들과 뜻을 같이하여 봉기한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으로 퍼지던 때, 홍주지역에서도 수많은 농민들이 목숨을 걸고 항쟁의 대열에 뛰어들었다. 내포 동학군은 홍주목의 중심인 홍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홍주성 인근에 속속 모여 들었다. 당시 홍주성을 지키고 있던 전력은 최정예 일본군 40명과 관군 400명, 그리고 나라가 위험에 처했을 때는 붓을 던지고 칼을 들어 목숨을 버린다는 유교정신이 몸에 배어있는 홍주유생 천여 명이 고작이었다. 이 때 동학군은 홍주성 전체를 포위하고 있었고 홍주향교를 지휘본부로 삼으려 하고 있었다. 당시 향교에는 전란에도 불구하고 향교를 지키려는 7명의 유생들이 있었는데, 오경근 최민지 방세응 방석규 이준복 서종득 최학신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특히 많은 유교서적이 있는 서재를 지키려 하였고, 탐관오리와 양반들에게 시달림을 받은 동학군들이 유생인 그들을 살려둘 리가 없음을 모두 알고 있었다. 이들은 결국 맨몸으로 항거하다 죽음을 맞았고, 문묘와 서적도 소실되었으나 다행히 향교 건물은 지켜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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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장서비(대교공원)
파리장서사건은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기 위해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작성한 사건이다.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유림측에서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서한을 작성하였다. 이 사건은 전에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던 호서지방의 유종(儒宗)인 전 승지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대부분 의병에 참여하였던 김덕진(金德鎭)·안병찬(安炳瓚)·김봉제(金鳳濟)·임한주(林翰周)·전양진(田穰鎭)·최중식(崔中軾) 등에 의해 이뤄졌다. 일본의 배신행위와 명성황후와 고종의 시해, 그리고 한국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고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호서지방 유림들의 활동이 전개되고 있을 때, 영남유림에서도 곽종석(郭鍾錫)·김창숙(金昌淑) 등이 필두로 같은 목적의 일이 추진되고 있었다. 그 뒤 영남유림은 이런 사실을 알고 영남본(嶺南本)을 전용학(田溶學)에게 주며 홍성으로 가서 호서본(湖西本)과 비교, 검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교정본이 작성되기 전에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선정된 김창숙이 시급히 상해(上海)로 출발하게 되었다. 이에 서울유림들은 영남본이나 호서본의 내용이 서로 뜻이 같으나, 영남본이 호서본보다 포괄적이면서도 뜻이 명확하다는 여론에 따라 김창숙에게 영남본을 주어 출발시켰다. 그리고 장서 말미에 134명 유림대표가 서명하였으며, 대표파견 경비는 황일성(黃佾性)이 조달하였다. 그러나 장서는 김창숙이 파리로 가져가지 못하고, 당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대표로 선정되어 파리에 가 있던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되었으며, 또한 국내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런데 같은 해 4월 12일경상북도 성주의 만세시위운동에 관련되어 일본경찰에 붙잡혔던 송회근(宋晦根)에 의해 사건이 발각됨으로써 관계자들이 피체되어 옥고를 겪었다. 호서 출신 김복한 등 17인이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기 위한 서한을 작성하였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파리장서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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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오항일의병기념비
丙午抗日義兵記念碑(병오항일의병기념비) 이청천 서. 이청천이란 이명을 지닌 한국 광복군 총사령관이었던 지청천 장군이 썼으며 1952년 건립되었다. 홍주의병은 전 이조참판 민종식을 중심으로 농민, 유생, 구관리 등이 창의하여 현재의 예산군 광시면에서 출발, 부여군의 홍산면을 거쳐 남포를 지나 홍주성을 탈환하였다. 그러나 우세한 일본군의 화력 앞에 무너지면서 수백명이 전사하고 말았는데, 당시 일본군이 의병들의 시체를 매장하기도 하였으나, 많은 의병들의 시체가 40여 년 간 홍성천과 남산부근에 방치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에 해방된 이후 그들의 유골을 남산에 안치하고 '병오항일기념비'를 세우며 추모제를 지냈는데, 1949년에 현재의 의사총이 있는 구릉에서 또 다른 많은 유골들이 발견되면서, 이 유골들이 옛 홍주의병들의 유해임이 고증되었고, 그 연고로 인하여 현 위치에 새로이 의사총을 조성하게 되었다. 그 후 홍주의사총은 성역화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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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동학기념비
오관리 세광아파트와 목빙고 옆에 있는 홍주동학기념비, 홍주동학군은 이곳 고지에서 일본군과 관군이 있는 홍주성을 공격했다. 1895년 일본군이 철수한 이후 2월까지도 동학도를 체포하는데 혈안이 됐다. 일본군이 노린 것은 접주들이었으며, 동학을 초멸하려면 간부격인 접주들을 체포해야 한다는 방침을 세웠던 것이다. 이는 관군을 물리친 여세를 몰아 홍주의 동학군들은 예산으로 진입해 관아를 습격한 다음 삽다리(삽교)쪽으로 옮겨가 이 일대를 점령하고 유숙했다고 한다. 1985년 11월 6일의 ‘양호우선봉일기’에는 덕산의 삽교천변에 이르러서 보니 “지푸라기가 연달아 깔려 있고 빈 볏섬도 널려 있었다. 불을 피운 자국과 밥을 지은 흔적이 수리에 걸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다른 기록에는 “27일 오후에 발진하여 동군 덕산(德山)의 역촌 뒤뜰에서 유숙하고 익일은 즉, 28일은 대신사주 탄신기도일이라 역촌 후일에서 기도하고 즉발 홍주군(洪州郡)”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관군들은 해미에서 덕산을 거쳐 홍주(洪州)로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이는 연전연승한 동학군이 27일 저녁에 덕산에 진출하여 작전회의를 갖고 홍주성(洪州城) 공격을 결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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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용 묘
최명용(1891-1965)은 충청남도 서산군 태안면 어은리에서 최중식(崔中軾)의 아들로 태어났다. 15살 때 홍성군 결성면 형산리로 이주했고 부친과 동문 수학했던 김복한의 문인이 되었다. 17살 때 고령 박씨와 결혼한 그는 1919년 홍성군 홍동면에서 발발한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며칠간 구류되었고, 이후로는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감시를 받았다.1920년, 최명용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이시영의 조카 이규준(李圭俊), 이강인, 민창근 등과 연락을 맺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했다. 그러나 1921년 2월 22일 경찰에 체포되었고, 그해 10월 1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7년 유교부식회(儒敎扶植會)를 조직하여 유교사상에 입각한 인도주의와 민족의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교화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6년 최명용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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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안 묘
김봉안은 충남 홍성군(洪城郡) 금마면(金馬面) 가산리(佳山里)와 홍성 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때 금마면 가산리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가산리 이원교(李元交)의 집에서 연극이 공연되고 있을 때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하였다. 1919년 4월 1일 밤 임시 공연장에 모인 30여 명의 관중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했다. 하지만 곧바로 일제 경찰에 의해 해산 당했다. 만세운동이 일경에 해산 당하자, 이들은 이튿날 홍성 장터로 나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펼쳤다. 김봉안은 이날의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어 1919년 4월 14일 홍성경찰서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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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사총
한말 홍성군 지역에서 있었던 의병활동 가운데 홍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수백 의병들의 유해를 모신 묘소이다. 1905년 일본과의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각지에서 의병활동이 일어났는데, 충청남도 홍성지방에서는 이조참판 민종식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이 전개되었다. 1906년 고종 황제의 명을 받아 의병을 모아 남포와 보령에 있는 일본군을 습격하여 병기를 탈취하였으며, 3월 20일에는 홍주성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일본군의 대포 공격이 본격화되면서 의병 수백명이 전사하여 시체가 홍주천변과 남산 일대에 흩어져 방치되었다가 1949년에 항일의병의 유골임이 밝혀져 이곳에 모셔졌다. 홍주의병의 핵심적 연구자료인 <홍양일기>. <홍양기사>, <조선최근사> 등의 자료를 종합해 볼 때, 홍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의병 전사자는 최소한 98인, 많게는 수백이라는 기록이 확인되었다. 묘는 봉분 아랫부분에 둘레석을 둘렀고, 묘의 오른쪽에는 정인보가 짓고 심상직이 쓴 묘비가 있으며, 좌우에는 망주석 1쌍이 세워져 있다. 사당인 창의사(彰義祠)에 900의사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어 구백의총이라 했던 것을 1992년 홍주의사총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매년 5월 30일 순국의사 추모제를 올리고 있으며, 을미의병으로부터 연면히 계승되어 온 한말 홍주의병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중요한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