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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3.1독립운동 항일투쟁공훈종합비
윤익중(1896 - 1963)은 1919년 중앙고보 시절 김상옥이 주도하던 혁신단에 가입 '혁신공보'를 발간하였는데, 주요 기사로는 국내외에서 취재되는 독립운동 전선의 소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논설등을 게재하고 1회에 등사판 1천부씩 찍어냈다. 1920년 3월 20일 구국민단 사건에 연루되어 피체되었으나, 10월 26일 예심 종결로 풀려났다. 1921년 김상옥이 주도하는 암살단에서 활약하다가 피체되어 같은 해 11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윤기순(1900 - 1950)은 경신고보 재학중이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홍성군 작곡면에 내려와 구국 유지 인사와 인근 주민들에게 독립만세 시위의 취지를 설명하고 같이 참가할 것을 역설하였다.맏형 윤형중(1895 - 1935), 당질 윤의석(1901 - 1977)등과 함께 1919년 4월 7일 장곡만세운동에 참가한 500여명의 시위군중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시위 행진으로 도산리에 이르러 면사무소와 경찰주재소를 습격하고 기둥 등을 파괴하며 격렬한 시위를 계속하다가 체포되었다. 윤기순은 이해 10월 18일 고등법원에서 보안법위반으로 징역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고, 윤형중은 동법 위반으로 징역 8월 형에 벌금 20원을 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윤의석은 이해 5월 3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요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았고, 8월 1일 경성 복심법원에 공소하여 징역 10월형을 언도받았으며, 10월 18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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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순 묘
윤기순(1900 - 1950)은 충청남도 홍성(洪城) 사람이며, 이명은 윤낙중이다. 1919년 3·1운동이 서울에서 일어나자 당시 경신학교(儆新學校)에 재학중이었으나, 고향인 장곡면(長谷面) 화계리에 내려와 인근 주민들에게 독립만세시위의 취지를 설명하고 같이 참가할 것을 역설하였다. 거사일인 1919년 4월 7일 오후 8시경 동리 앞산에 모인 500여명의 시위군중 선두에 서서, 윤형중(尹衡重)과 함께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시위 행진으로 도산리(道山里)에 이르러 면사무소와 경찰주재소를 습격하고 기물 등을 파괴하며 격렬한 시위를 계속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이해 10월 18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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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익중 묘
윤익중(1896 - 1963)은 김상옥(金相玉)이 주도하던 혁신단(革新團)에 가입하였다. 이 조직은 독립사상의 고취·선전을 목적으로 하였는데, 단원으로는 그를 포함하여 이춘식(李春植)·정설교(鄭卨敎)·전우진(全宇鎭) 등 9명이 있었다. 혁신단에서는 결성 목적의 실현을 위하여 기관지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간하였는데, 주요 기사로서 국내외에서 취재되는 독립운동전선(獨立運動戰線)의 소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논설 등을 게재하고 1회에 등사판 1천부씩을 찍어냈다. 1920년 3월 20일에는 구국민단(救國民團) 사건에 연루되어 붙잡혔으나, 10월 26일 예심종결로 풀려났다. 1921년에는 김상옥 주도의 암살단(暗殺團)에서 활약하다가 붙잡혀, 같은 해 11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년 4개월만에 가출옥하였다. 출옥 후, 그는 김상옥·이혜수(李惠受) 등과 모의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1923년 1월 12일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에 연루되어 붙잡혔다. 그는 1923년 10월 1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장기(長期) 2년, 단기(短期) 1년 6월형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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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중 묘
윤형중(1895 - 1935)는 충청남도 홍성(洪城) 사람이다. 1919년 윤기순(尹己順)과 함께 고향인 장곡면(長谷面) 화계리(花溪里)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이날 500여명의 독립만세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도산리(道山里)에 있는 면사무소와 경찰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격렬하게 독립만세시위를 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이해 10월 18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8월형에 벌금 20원(圓)의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또한 1923년 1월에는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운동에 동생 윤익중을 통하여 재정지원을 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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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욱 묘
1919년 4월 1일 밤 충남 홍성(洪城)에서는 금마면(金馬面) 가산리(佳山里)에 설치된 임시 연극장에서 관객들이 독립만세를 불렀다. 민영갑(閔泳甲) 등은 가산리 이원교(李元交)의 집에서 연극이 공연되고 있을 때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계획하였고, 이날 관람객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제안하여 동의를 구한 뒤, 20∼30명의 관객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던 것이다. 만세운동이 일경에 의해 해산당하자, 이들은 이튿날 홍성 장터로 나가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윤용욱(1891 - 1966)은 이날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4월 19일 홍성경찰서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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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보균 구 묘
신보균(1862 - 1912)는 충남 홍주(洪州) 사람이다. 1906년 5월 민종식(閔宗植) 의병장이 홍산(鴻山)에서 창의하고, 서천(舒川)·보령(保寧) 등지를 거쳐 홍주(洪州)에 입성하자 신현두(申鉉斗)·김상덕(金商悳)과 함께 합세하고 유병소 서기에 임명되었다. 1906년 5월 20일에서 5월 31일 사이에 의병진에서 빼앗았던 홍주성(洪州城)을 함락당하자 일본군은 역습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져 여기에서 김상덕(金商悳)을 비롯하여 80여명의 장병이 순국하고, 윤석봉(尹錫鳳)·이상두(李相斗) 등 80여명이 일본군에게 붙잡혔으며, 그중 남규진(南圭振)·문석환(文奭煥) 등 9명과 함께 일본의 대마도(對馬島)에 유배되어 억류생활을 하였다. 이때 억류중에도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과 10명의 의사(義士)간에 우국충절에 관한 시를 많이 지었다. 1906년 12월 17일 최익현(崔益鉉)이 유배지인 대마도(對馬島)에서 순절하자 유배중이던 신보균을 포함한 10명의 의사 임병찬(林炳瓚)·남규진(南奎振) 등 모두가 흰 두건을 쓰고 장례집사가 되어 존제(尊祭)를 지내고 반구(返驅)를 따라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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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도 묘
이희도(1885 - 1919)는 충청남도 홍성(洪城) 사람이다. 1919년 4월 4일 홍성군(洪城郡) 내의 횃불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날 밤 홍성면을 비롯하여 홍북면(洪北面)·금마면(金馬面)·홍동면(洪東面)·구항면(龜項面)의 24개 부락에서 일제히 횃불을 올리며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여 외쳤다. 그 시위가 계속되니 그 기세에 놀란 일본 군대가 동서로 포위하여 집중사격을 가하였다. 그는 이때 적의 흉탄을 맞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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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동면 삼일각
홍동면민들이 주도한 만세운동의 뜻을 기리기 위해 이병익(구정리)과 이창우(팔괘리) 등이 발기해 홍동노인회와 기념비 건립을 제안하여 1973년 3월 기미독립운동기념비를 세우고, 1978년에는 홍성군의 지원으로 비각(정측면 각1칸의 팔작지붕)을 세우고 삼일각(三一閣) 현판식을 거행했다. 홍동지역에서의 3·1만세운동은 4월 4일, 5일, 8일의 3일 동안 네곳에서 전개됐고 4일에 전개된 3·1만세운동은 주민들이 횃불을 들고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는 형태였으나 정확한 참석인원은 확인되지 않는다. 5일의 만세운동은 신기리 만경산에서 전개됐는데, 홍동면민 대부분이 참여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시위 군중에는 김좌진의 제종제인 김종진(金宗鎭)이 합류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만세시위의 영향으로 홍성군의 동북부 4개면(홍북·금마·홍동·구항면)의 24개 촌락에서 횃불시위를 전개했다. 이에 놀란 일제의 수비대가 시위군중에게 발포해 10여 명이 순국했고, 다수가 부상 또는 체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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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윤성 묘
황윤성(1879 - 1919)는 충청남도 홍성(洪城) 사람이다. 홍성군 홍동면(洪東面)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거사하기 위하여 인근 각 부락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에게 1919년 4월 8일 야간을 이용하여 일제히 독립만세 소리를 높이 외치며 시위하도록 하고 이 기세를 이용하여 주재소를 습격하여 강제 연행되어 있던 동지들을 탈출시키기로 결의하였다. 거사일인 4월 8일 밤에 세천 부락은 청광산에서, 주원 부락은 석삼봉에서, 월현 부락은 수현봉에서 일제히 독립만세를 부르고 봉화를 올리며 시위하다 주재소를 습격하여 연행자를 석방시켰다. 그리고 『왜놈들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연창하면서 시위하다 귀가하였으나 이튿날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태형을 받았다. 그후 심한 고문의 여독으로 신음하다가 그해 5월 6일 41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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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기념비 감장 비
1919년 기미년 3·1독립운동에 참여한 김용철이라는 인물에게 감사의 뜻으로 세운 기념비다. 김용철은 공훈록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인물이다. 비석 앞면에는 ‘홍성군 홍북면 신경리 김용철(金溶哲)-기미년 3월 1일 조국광복의 전위로써 신명을 도(賭)ᄒᆞ야 왜적에 항쟁하신 의열에 깁히 감사이 뜻을 표하옵고 자(慈)에 기념배를 진정함. 대한민국 28년 3월 1일 홍성군 3·1독립운동기념대회 군민일동’ 라고 세겨져 있으며, 비석을 세웠던 대한민국 28년은 서기 1946년이다. 그러나 비석의 뒤에는 ‘子 世權’으로 새겨져 있어 건립자가 김용철의 아들 김세권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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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항일독립운동여성상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기 전날 한복을 입은 100년 전 여성이 등불을 비춰주고 교복을 입은 현재의 여성이 판화로 독립선언서를 찍어내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100년 전 힘껏 외쳤던 숭고한 독립의 뜻을 미래 청년에게 전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배경으로 설치한 화강석 기둥에는 항일여자독립선언문 전문과 공식 서훈을 받은 여성독립운동가 472명의 이름을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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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역사인물 부조탑
김좌진(1889 - 1930)은 1908년 박상진과 광복단사건으로 3년을 복역 후 간도로 건너갔다. 후에 3.1운동 당시 동만주의 왕청현에서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총사령으로 활동하였으며 사관연성부를설치하여 독립군 간부양성에 전력하였고, 1920년 9월 동지 나중소, 이범석등과 더불어 청산리 작전에 참가 10배의 왜적을 대파하여 사상 3천3백여명의 전과를 거두었다. 1926년 김혁 등과 더불어 신민부를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며, 1927년 중국 구국군 사령관 양우일과 회담하고 공동전선을 취하였다. 1929년 정신, 민무등과 중동선 일대에서 한족연합회를 조직하고 주석으로 활동중 동년 음12월25일 고려공산청년회원 주중한인청년동맹원 박상업(일명 김신준)의 권총 저격 피살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한용운(1879 - 1944)은 기미독립운동 때 불교계대표로 33인 중 1인이다. 3년 징역을 받았고 출옥 후에도 문학운동과 불교혁신운동에 진력하며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였다. 또한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이해 월간지 ≪불교≫를 인수하여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항일독립 투쟁사상 고취에 힘썼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