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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46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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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은 묘
주영은은 1919년 4월 1일 밤 충남 홍성군 금마면(金馬面) 가산리(佳山里)에 설치된 임시 연극장에서 관객들이 독립만세를 불렀다. 민영갑(閔泳甲) 등은 가산리 이원교(李元交)의 집에서 연극이 공연되고 있을 때 관람객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제안하여 동의를 구한 뒤, 20∼30명의 관객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 만세운동이 일경에 의해 해산당하자, 이들은 이튿날 홍성 장터로 나가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주영은은 이날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4월 23일 홍성경찰서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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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독립만세기념비
금마면에서는 가산리 거주 이재만(1886~1943), 조재학, 김재홍, 부평리 민영갑(1888~1965), 조환원, 신곡리 김종석(1874~1936), 송강리 최중삼 등 7명이 주동이 되어 사전에 인근의 친지와 친인척들을 설득하여 은밀히 거사 준비를 완료하고, 인근 홍동면과도 사전 연락을 취하여 4월 1일부터 각 리별로 장소를 정하고 독립만세운동을 하기로 결의하였다. 마침 가산리 이원교 집에서 심파극 공연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저녁 9시경에 3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연극공연이 끝나자 조환원이 선창하고 참석자 전원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금마면 전역에 파급되어 4월 5일부터 연 3일간 각 리의 뒷동산에 모여 봉화를 올리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치열하게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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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기준 묘
복기준(1884-1957) 선생은 충남 홍성 출신이다. 1919년 4월 1일 밤 충남 홍성(洪城)에서는 금마면(金馬面) 가산리(佳山里)에 설치된 임시 연극장에서 관객들이 독립만세를 불렀다. 민영갑(閔泳甲) 등은 가산리 이원교(李元交)의 집에서 연극이 공연되고 있을 때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계획하였고, 이날 관람객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제안하여 동의를 구한 뒤, 20∼30명의 관객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던 것이다. 만세운동이 일경에 의해 해산당하자, 이들은 이튿날 홍성 장터로 나가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복기준은 이날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4월 23일 홍성경찰서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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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건수 묘
최건수(1881-1961)는 충남 홍성 사람이다. 1919년 4월 1일 밤 충남 홍성(洪城)에서는 금마면(金馬面) 가산리(佳山里)에 설치된 임시 연극장에서 관객들이 독립만세를 불렀다. 민영갑(閔泳甲) 등은 가산리 이원교(李元交)의 집에서 연극이 공연되고 있을 때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계획하였고, 이날 관람객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제안하여 동의를 구한 뒤, 20∼30명의 관객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던 것이다.만세운동이 일경에 의해 해산당하자, 이들은 이튿날 홍성 장터로 나가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최건수는 이날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4월 23일 홍성경찰서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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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한 사당(추양사)
김복한(1860-1924)의 본은 안동(安東)이다. 1892년에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하던 중 1894년 6월 갑오개혁이 시작되고 일본식의 신제도가 채택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 충남 홍주(홍성)으로 낙향했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단발령이 내려지자 12월 의병을 일으켰다. 각지의 의병을 모으고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했던 관찰사 이승우에게 창의를 제안하였고, 이승우는 이에 거짓으로 응하는 체 하며 관군을 끌어들여 김복한을 비롯한 의병장들은 구금되었다. 을미 홍주의병에 관련되어 체포된 23명중 6명이 서울로 압송되어 갔고 김복한은 고등재판소에서 문초를 받았다. 다음 해 2월 25일 김복한은 10년 유형을 선고받고 그의 동지들도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그 날 밤 고종은 이들의 충성심을 감안하여 모두 석방 조치하였으며, 그와 관련된 홍주 의진을 이끌었다 피체 수감된 이들도 모두 석방하라는 특지를 내렸다. 이후 관직에 나아가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이를 거절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을사의병이 거국적으로 일어났다. 을미의병의 동지인 안병찬이 민종식(閔宗植)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일군과 크게 접전하다가 1906년 2월 23일 체포되었다. 앞서 이 설은 김복한이 신병으로 누워 있으므로 의거할 짝이 없음을 한탄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홀로 누워 있을 수만은 없었다. 마침내 이 설과 함께 병든 몸을 이끌고 서울에 올라와 상소하여 역적을 성토했다. 이 일로 1개월간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후 김복한은 신병을 앓던 중 홍주 의진과 연관이 있다 하여 10월 28일 공주부(公州府)의 관헌들에 의해 다시 체포되어 11월 1일 서울로 압송되었다. 증거가 없어 석방되었으나 여러 차례 홍주 의진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져 고초를 겪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파리 평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를 작성, 서명하였으며 서명자 137명이 모두 일경에 체포되었고 그는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결국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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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한 항일사적비
김복한(1860-1924)의 본은 안동(安東)이다. 1892년에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하던 중 1894년 6월 갑오개혁이 시작되고 일본식의 신제도가 채택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 충남 홍주(홍성)으로 낙향했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단발령이 내려지자 12월 의병을 일으켰다. 각지의 의병을 모으고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했던 관찰사 이승우에게 창의를 제안하였고, 이승우는 이에 거짓으로 응하는 체 하며 관군을 끌어들여 김복한을 비롯한 의병장들은 구금되었다. 을미 홍주의병에 관련되어 체포된 23명중 6명이 서울로 압송되어 갔고 김복한은 고등재판소에서 문초를 받았다. 다음 해 2월 25일 김복한은 10년 유형을 선고받고 그의 동지들도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그 날 밤 고종은 이들의 충성심을 감안하여 모두 석방 조치하였으며, 그와 관련된 홍주 의진을 이끌었다 피체 수감된 이들도 모두 석방하라는 특지를 내렸다. 이후 관직에 나아가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이를 거절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을사의병이 거국적으로 일어났다. 을미의병의 동지인 안병찬이 민종식(閔宗植)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일군과 크게 접전하다가 1906년 2월 23일 체포되었다. 앞서 이 설은 김복한이 신병으로 누워 있으므로 의거할 짝이 없음을 한탄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홀로 누워 있을 수만은 없었다. 마침내 이 설과 함께 병든 몸을 이끌고 서울에 올라와 상소하여 역적을 성토했다. 이 일로 1개월간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후 김복한은 신병을 앓던 중 홍주 의진과 연관이 있다 하여 10월 28일 공주부(公州府)의 관헌들에 의해 다시 체포되어 11월 1일 서울로 압송되었다. 증거가 없어 석방되었으나 여러 차례 홍주 의진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져 고초를 겪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파리 평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를 작성, 서명하였으며 서명자 137명이 모두 일경에 체포되었고 그는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결국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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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한 묘
김복한(1860 - 1924)의 본은 안동(安東)이다. 1892년에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하던 중 1894년 6월 갑오개혁이 시작되고 일본식의 신제도가 채택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 충남 홍주(홍성)으로 낙향했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단발령이 내려지자 12월 의병을 일으켰다. 각지의 의병을 모으고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했던 관찰사 이승우에게 창의를 제안하였고, 이승우는 이에 거짓으로 응하는 체 하며 관군을 끌어들여 김복한을 비롯한 의병장들은 구금되었다. 을미 홍주의병에 관련되어 체포된 23명중 6명이 서울로 압송되어 갔고 김복한은 고등재판소에서 문초를 받았다. 다음 해 2월 25일 김복한은 10년 유형을 선고받고 그의 동지들도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그 날 밤 고종은 이들의 충성심을 감안하여 모두 석방 조치하였으며, 그와 관련된 홍주 의진을 이끌었다 피체 수감된 이들도 모두 석방하라는 특지를 내렸다. 이후 관직에 나아가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이를 거절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을사의병이 거국적으로 일어났다. 을미의병의 동지인 안병찬이 민종식(閔宗植)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일군과 크게 접전하다가 1906년 2월 23일 체포되었다. 앞서 이 설은 김복한이 신병으로 누워 있으므로 의거할 짝이 없음을 한탄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홀로 누워 있을 수만은 없었다. 마침내 이 설과 함께 병든 몸을 이끌고 서울에 올라와 상소하여 역적을 성토했다. 이 일로 1개월간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후 김복한은 신병을 앓던 중 홍주 의진과 연관이 있다 하여 10월 28일 공주부(公州府)의 관헌들에 의해 다시 체포되어 11월 1일 서울로 압송되었다. 증거가 없어 석방되었으나 여러 차례 홍주 의진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져 고초를 겪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파리 평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를 작성, 서명하였으며 서명자 137명이 모두 일경에 체포되었고 그는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결국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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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차제 묘
김차제(1871-1941)는 충남 홍성(洪城) 사람이다. 그는 1919년 4월 7일 장곡면(長谷面)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홍성의 독립만세운동은 홍성읍 장터에서 3월 7일 일어난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각 면에서도 만세시위가 불같이 일어났다. 4월 7일 김동완은 화계리(花溪里) 주민들을 마을 남산에 모아놓고 태극기를 꽂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도산리(道山里) 소재 면사무소로 행진하여 오후 8시에 도착하였다. 이곳에는 각지에서 몰려 온 면민 500여 명이 모여있었다. 시위군중들은 만세를 고창하고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문기둥과 유리창 등을 파괴하였다. 다음 날인 4월 8일 밤 11시, 김차제를 비롯한 시위군중 60여 명이 다시 면사무소에 모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런데 전날 면사무소 습격으로 출동해 있던 일경과 대치하면서, 면사무소를 파괴하였다. 이 일로 그는 붙잡혀, 5월 30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태(笞) 9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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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태봉 묘
임태봉(1895-1977)은 충남 청양 사람이다. 1919년 4월 6일 밤, 충남 청양군(靑陽郡) 운곡면(雲谷面)(雲谷面)에서는 600여 명의 면민들이 면내 여러 곳의 산 위에서 봉화를 올리며 독립만세를 절규하였다. 또한 4월 8일 밤 10시경, 운곡면과 비봉면(飛鳳面) 주민 600여 명이 다시 운곡면 산 위에 모여 봉화를 올리며 만세를 불렀다. 이때 일제가 출동하여 발포하자 시위군중은 해산하였다. 그는 이때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21일 청양헌병분견소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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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3.1운동기념비(장곡면)
충남 홍성군 장곡면에서 있었던 기미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사적이다. 장곡면의 3.1운동 시위는 다음과 같다. 윤익중이 독립선언문 100여 매를 가슴에 품고 귀향하여 30여 명의 동지들과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제작하여 주민들에게 항일운동에 참여할 것을 선도하고 대대적인 항일 시위를 전개할 것을 계획하였다. 4월 7일 충청남도 홍성군 장곡면 화계리 앞 산에서 약 300명이 독립만세를 외치고 이어 도산리 응봉산으로 이동해 만세를 부르고 면사무소를 공격했다. 4월 7일 밤 충청남도 홍성군 장곡면 화계리에서 오경춘이 종을 쳐서 주민들을 모았다. 김동하는 화계리 주민과 이웃 마을 광성리, 신풍리 주민들이 합세하여 약 300명과 함께 마을 앞 산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만세 군중들은 도산리 면사무소 뒷편 응봉산에 올라가서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김동하, 이화춘, 이문재 등은 군중들과 함께 면사무소로 이동했다. 오후 8시경 도산리 면사무소에 도착한 군중들에게 김동하는 ‘면사무소를 부수자’고 권유하고 솔선하여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뜨렸다. 군중들도 돌과 몽둥이 등으로 면사무소 유리창, 굴뚝, 문기둥 등 기물들을 파손시켰다. 이 정보를 접한 홍성경찰서에서는 일경 3명과 수비대 보병 2명을 긴급히 출동시켜 경계를 강화했다. 이 독립만세운동으로 윤낙중 등 6명, 김동하는 각각 별건의 재판에 회부되어 옥고를 겪었다. 본 기념비는 그 날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던 애국선열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기고 후세에 기리고자 1994년 장곡3.1운동 기념비 추진위원회에서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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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하 추모비
김동하(1922-1982)는 충남 홍성(洪城) 사람이다. 1919년 4월 7일 홍성군 장곡면(長谷面)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화계리(花溪里) 앞산에서 주민들을 규합, 5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행진하여 도산리(道山里)에 있는 면사무소를 습격, 건물을 부수며 공문서 및 기물 등을 파손하였다. 이튿날에도 다시 집결하여 면사무소 앞에서 계속해서 시위를 전개하다가 저지하는 일경의 무차별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생겨 시위가 중단되자 신의주(新義州)로 피신하였으나 1920년 1월 신의주에서 일군 헌병에게 붙잡혔다. 이해 2월 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3월 2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고 4월 19일 고등법원에서도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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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운 묘
김동운(1887 - 1955)는 충남 홍성(洪城) 사람이다. 1919년 4월 4일 홍성군(洪城郡) 장곡면(長谷面)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3월 7일 홍성읍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난 것을 시작으로, 홍성지방의 각 면에서는 만세시위가 불같이 일어났다. 장곡면에서는 4월 4일과 6일에 만세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동운은 이화춘(李化春)·김동하(金東河) 등과 함께 4월 7일 화계리(花溪里)의 주민을 이끌고 독립선언식을 가진 후,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윽고 김동운을 비롯한 주동자들은 시위군중을 인도하여 도산리(道山里) 소재의 면사무소로 향하였다. 면사무소에 도착한 시위대는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문 기둥과 유리창 등을 부수면서 식민지 통치의 부당성에 대한 민족적 설움을 표출하였다. 이러한 시위는 다음날에도 이어졌고, 김동운은 밤 11시에 주민들과 함께 면사무소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러자 출동한 일본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했고, 시위군중 다수가 부상을 입거나 붙잡혔다. 이때 김동운도 붙잡혀 1919년 4월 23일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