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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설 집(하허당)
이설(1850-1906)의 자는 순명(舜命), 호는 복암(復菴)이며, 1895년 10월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자, 동지 김복한 등과 함께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이듬해 3월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으나, 국왕의 특지로 석방되었다. 1904년에 일본이 전국의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분개하여 전국에 격문을 돌리어 이를 반대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국왕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에 항거하여 일제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나 석방되었다. 곧이어 을사오적 주살(誅殺)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였다. 그는 국권을 잃음에 통분하여 고향에 돌아와서 식음을 전폐한 지 수십 일 만에 1906년 4월 29일 서거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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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설 묘
1895년 10월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자, 동지 김복한(金福漢) 등과 함께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이듬해 3월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으나, 국왕의 특지로 석방되었다. 1904년에 일본이 전국의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분개하여 전국에 격문을 돌리어 이를 반대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국왕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에 항거하여 일제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나 석방되었다. 곧이어 을사오적 주살(誅殺)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였다. 그는 국권을 잃음에 통분하여 고향에 돌아와서 식음을 전폐한 지 수십 일 만에 1906년 4월 29일 서거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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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환 구 묘
서기환(1849-1906)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국에서 애국지사들이 격렬히 반대하며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홍성에서도 민종식이 거의하여 홍주(洪州)성을 점거하고 인근의 의병을 소집하였다. 서기환 또한 전태진, 전경호와 함께 민종식 의진에 참가하여 동문령관(東門領官)에 임명되었다. 4월 9일 물러났던 적군이 전열을 수습하고 홍주성을 탈환하고자 습격해왔고, 서기환은 동문을 수호하며 끝까지 용맹하게 대전하였으나 역부족하여 홍주성은 적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이때 서기환은 남은 군사를 동원하여 힘껏 싸웠으나 마침내 전태진, 전경호와 함께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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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환 사적비
서기환(1849-1906)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국에서 애국지사들이 격렬히 반대하며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홍성에서도 민종식이 거의하여 홍주(洪州)성을 점거하고 인근의 의병을 소집하였다. 서기환 또한 전태진(田泰鎭), 전경호(田慶浩)와 함께 민종식 의진에 참가하여 동문령관(東門領官)에 임명되었다. 4월 9일 물러났던 적군이 전열을 수습하고 홍주성을 탈환하고자 습격해 왔고, 서기환은 동문을 수호하며 끝까지 용맹하게 대전하였으나 역부족하여 홍주성은 적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이때 서기환은 남은 군사를 동원하여 힘껏 싸웠으나 마침내 전태진, 전경호와 함께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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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승태 사적비
서승태 선생은 충남 홍성(洪城) 사람오로 1906년 민종식(閔宗植) 의병장이 의병을 이끌고 남포(藍浦)에서 홍주성(洪州城)을 향하여 행진할 때 지방부호의 창고를 열어 군량미를 제공하는 등 의병을 지원하였다. 이후 1908년 홍주향교의 도유사(都有司)로 있으면서 영재배출을 목적으로 사재를 털어 광천(廣川) 덕명학교(德明學校)를 설립, 57회에 걸쳐 졸업생을 배출하고 후진교육에 이바지하였다. 1919년 3월 18일 홍천군 광천면에서 오인섭(吳仁燮)·이명종(李鳴鍾)·최응모(崔應模)·성인배(成仁培) 등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고 독립선언서 500여매를 등사하여 주민들에게 배부하는 등 시위 준비를 위해 활동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일경에 붙잡혔다. 그리하여 같은 해 4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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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병오의병주둔유지비
이 기념비(洪州丙午義兵駐屯遺址碑, 홍주병오의병주둔유지비)는 홍주의병들이 홍주성 공격을 앞두고 집결하여 주둔했던 장소를 기념하기 위하여 1986년 11월 14일 홍성군에서 건립했다. 홍주의병은 1906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된 다음해에 일어났으며 의병들은 홍산, 서천, 남포, 보령을 거쳐 광천에 이르러 대부대가 되었고 이 본진 부대는 구항 마온리를 지나 신당골을 거쳐 하우고개에 당도하였으며 또 다른 부대는 천북, 결성, 서부에서 궐기하여 서산도로로 우회해서 역시 하우고개에서 본진 부대와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곳에서 홍주성 공격을 알리는 진군 나팔이 울려퍼지자 병오의병의 거사가 시작되었으며 이 곳은 호서지방 의병들의 첫 주둔지로서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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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대 기념비
금마면 철마산 정상에 세워진 봉화대 기념비로서, 1919년 4월 4일, 충청남도 홍성군 금마면에서 500명의 군중들이 불을 피우고 독립만세를 외쳤던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충남 홍성군 금마면의 만세 시위는 1919년 4월 1일, 당시 금마면 가산리에 살던 이재만(1886~1943)은 조재학, 김재홍, 부평리 민영갑(1888~1965), 조환원, 신곡리 김종석(1874~1936), 송강리 최중삼 등 7명과 함께 거사 준비를 완료하였다. 마침 4월 1일, 금마면 가산리 이원교의 집을 임시 연극 공연장으로 이용되는 것을 알고 연극을 관람하러 오는 주민들에게 권유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기로 결의했다. 이에 4월 1일 오후 8시경 민영갑 등은 연극 공연 중에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따라서 관람객 수백 명도 호응하여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으나 홍성경찰서 관할 일경들에게 체포되었으며 민영갑, 이재만 등은 4월 17일 홍성에서 청양을 거쳐 공주로 압송될 때 헌병 2명과 수비대 보병 3명이 칼을 휘둘러서 현금 1원 20전을 강탈당하기도 했다. 이 독립만세운동으로 민영갑 등 6명은 재판에 회부되어 옥고를 겪었다. 만세 열기는 멈추지 않고 금마면 전역에 파급되어 각 리의 뒷동산에 모여 봉화를 올리고 독립만세를 외치도록 퍼져갔는데 1919년 4월 4일 충청남도 홍성군 금마면내 각 처에서 500명의 면민들이 집합해 불을 피우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날 홍성경찰서 부근 4개 면내의 24개소에서 마을 주민들이 산 위에서 불을 피우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4개 면은 금마면을 비롯한 홍동면, 홍주면, 홍북면으로 보인다. 이에 홍성경찰서 관할 일경들이 홍성 수비대 보병들의 지원을 받아 총기를 발포하여 10명이 사망하고 주도 인사 5명이 체포을 당하는 탄압으로 만세 군중들은 해산했다. 이러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1984년 11월 1일 대한노인회 금마면분회 주관으로 기념공원을 조성하였고 1997년 정광호와 최성문이 봉화대 기념비를 건립하였으나 봉화봉이 협소하여 2016년도에 봉화봉을 확장하고 봉화대를 설치, 재정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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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협 묘
이상협 선생은 충남 홍성 사람으로 1919년 4월 1일 밤 충남 홍성(洪城)에서는 금마면(金馬面) 가산리(佳山里)에 설치된 임시 연극장에서 관객들이 독립만세를 불렀다. 민영갑(閔泳甲) 등은 가산리 이원교(李元交)의 집에서 연극이 공연되고 있을 때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계획하였고, 이날 관람객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제안하여 동의를 구한 뒤, 20∼30명의 관객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던 것이다. 만세운동이 일경에 의해 해산당하자, 이들은 이튿날 홍성 장터로 나가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상협은 이날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4월 23일 홍성경찰서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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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중협 묘
권중협(1880-1962)은 충남 홍성 사람으로 1919년 4월 1일 밤 충남 홍성(洪城)에서는 금마면(金馬面) 가산리(佳山里)에 설치된 임시 연극장에서 관객들이 독립만세를 불렀다. 민영갑(閔泳甲) 등은 가산리 이원교(李元交)의 집에서 연극이 공연되고 있을 때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계획하였고, 이날 관람객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제안하여 동의를 구한 뒤, 20~30명의 관객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던 것이다. 만세운동이 일경에 의해 해산당하자, 이들은 이튿날 홍성 장터로 나가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이날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4월 23일 홍성경찰서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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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환 묘
양기환(1892-1957)은 1919년 홍성의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일 밤 충남 홍성(洪城)에서는 금마면(金馬面) 가산리(佳山里)에 설치된 임시 연극장에서 관객들이 독립만세를 불렀다. 민영갑(閔泳甲) 등은 가산리 이원교(李元交)의 집에서 연극이 공연되고 있을 때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계획하였고, 이날 관람객들에게 독립만세를 불렀고 제안하여 동의를 구한 뒤, 20∼30명의 관객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던 것이다. 만세운동이 일경에 의해 해산당하자, 이들은 이튿날 홍성 장터로 나가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양기환은 이날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4월 19일 홍성경찰서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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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두환 묘
양두환(1885-1941)은 1919년 4월 홍성의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일 밤 충남 홍성(洪城)에서는 금마면(金馬面) 가산리(佳山里)에 설치된 임시 연극장에서 관객들이 독립만세를 불렀다. 민영갑(閔泳甲) 등은 가산리 이원교(李元交)의 집에서 연극이 공연되고 있을 때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계획하였고, 이날 관람객들에게 독립만세를 불렀고 제안하여 동의를 구한 뒤, 20∼30명의 관객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던 것이다. 만세운동이 일경에 의해 해산당하자, 이들은 이튿날 홍성 장터로 나가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양두환은 이날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4월 19일 홍성경찰서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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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춘 묘
이인춘(1895-1956)은 충남 홍성 출신으로 1919년 4월 2일 충남 홍성군(洪城郡) 홍성시장(洪城市場)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홍성에서는 4월 1일 밤 금마면(金馬面) 가산리(佳山里)에 설치된 임시 연극장에서 관객들이 독립만세를 불렀다. 민영갑(閔泳甲) 등은 가산리 이원교(李元交)의 집에서 연극이 공연되고 있을 때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계획하고, 이날 관람객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제안하여 동의를 구한 뒤, 20∼30명의 관객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 만세운동이 일경에 의해 해산당하자, 이들은 이튿날 홍성 장터로 나가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인춘은 이날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4월 19일 홍성경찰서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