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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대사
안창식은 두 아들 안병찬, 안병림과 함께 1895년 을미의병에 투신했다. 홍주의진의 선구자들인 박창로.이봉학.이세영 등과 긴밀히 연락을 취하며, 아들 안병찬이 1895년 12월 1일 홍주성에 입성할 계획을 세우고 찾아오자 채광묵과 함께 모집해 놓은 민병 180명을 내놓아 홍주의병을 거의하도록 도왔다.안병찬은 1895년 을미의병을 주도하여 3년형을 선고 받고 고종의 특지로 석방되었으며, 1906년 민종식의 병오홍주의병의 참모로 활약하여 옥고를 치른 후 1919년 파리만국강화회의에 장서서명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안병림은 민종식의 병오홍주의병 당시 참모사 및 돌격장으로 활약했다.안항식은 1906년 4월25일 병오홍주의병 당시 참모사로 활약하여 일제에게 체포 후 대마도로 후송 감금되었다가 4년만에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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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림 묘
안병림(1860-1935)은 안창식의 아들이자 안병찬의 동생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이미 부친은 사망한 뒤였고, 형 안병찬이 의거를 일으켰으나, 패전하여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석방을 전후하여 홍주를 중심으로 다시 대규모의 의진이 형성되었고, 민종식이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고 형 안병찬은 참모(參謀), 안병림은 참모사(參謀士)가 되었다. 의병장 민종식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민문(閔門)의 일원으로 고종의 특지에 따라 석방되었으나, 안병림은 9개월 만에야 가까스로 석방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 (198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으며 삼부자가 모두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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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찬 구 묘
안병찬(1854-1929)의 자는 치규(穉圭)이고, 호는 규당(規堂)이며, 이칭은 안병찬(安炳燦), 한일선(韓一善)이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홍성에서 아버지와 김복한(金福漢)·이설(李偰)·임한주(林翰周)·이근주(李根周) 등과 함께 홍주의진을 형성하여 참모로서 활동하였다. 이후 이승우에 배신당해 10년 유배형을 받았다가 특사로 풀려났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수천 명의 군사를 모아 1906년 합천(合川)에서 접전하였지만, 일진회원이 곳곳에 있어 패전하였다. 다시 의병을 모아 4월 16일 민종식(閔宗植)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참모역을 맡았지만 패전하였고, 홍주의진과 관련된 인물을 조사할 때 공주로 압송되었다. 1919년에는 파리 만국강화회의에 보내는 장서서명사건으로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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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식 묘
안창식(1886-미상)은 안병찬, 안병림의 아버지이다. 안창식은 홍주의진의 선구자들인 박창로(朴昌魯)·이봉학(李鳳學)·이세영(李世永)·정제기(鄭濟驥)·송병직(宋秉稷)·조병고(趙秉皐)·김정하(金正河) 등과 더불어 가만히 서로 왕래하면서 긴밀한 연락을 하고 있었는데, 아들 안병찬(安炳燦)이 김복한(金福漢)·이설과 함께 구체적으로 거사 계획을 세우고 1895년 12월 1일 홍주성으로 입성할 계획을 세우고 찾아왔다. 그때 안창식은 채광묵(蔡光默)과 180명의 민병을 모집해 놓고 있었고, 그 군사를 안병찬에게 주었다. 이승우의 배반으로 의진의 수뇌부가 모두 체포되었고, 아들 안병찬도 체포되었다. 다시 향병(鄕兵)을 모집하여 이승우를 토벌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압송되었으나 안창식은 연로하여 일찍이 고향으로 돌려보내어졌으며, 아들 안병찬은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고종의 특지(特旨)로 석방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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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준 묘
최장준(1890-1968)은 충남 청양군(靑陽郡) 화성면(化城面) 농암리(農岩里)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충청도에서 방방곡곡에서 시위운동이 연일 일어나 극성했을 때는 1919년 3월 27일부터 4월 6일경의 기간으로 이 동안은 경기도에 이어 전국에서 가장 치열한 양상을 보이었고, 4월 6일 후로 15일까지는 황해도에 이어 충청남도가 경상남도와 같이 많은 운동을 전개하였다. 화성면에서는 1919년 4월 5일 면소재지인 산정리(山亭里)에서 약 30명의 주민이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또한 농암리(農岩里)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시위가 일어났다. 이는 강학명(姜學男)이 4월 8일 구장 이병규(李炳圭)에게, 화성면의 농암리와 산정리에서는 열렬하게 독립만세를 부르고 있는데 왜 자기 마을에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느냐고 질타한 사실로부터 알 수 있다. 시위 후 체포된 최장준은 4월 22일 청양헌병분견소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 90도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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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호 기적비
임경호(1888-1945)는 임한주(林翰周)의 조카이며 한말 의병장 김복한(金福漢)의 문인이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목적으로 일제의 죄상을 폭로하고 조국독립의 열망을 담은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자. 임경호는 독립청원서의 발송책임을 맡아 황일성(黃佾性)·이영규(李永珪)·전용학(田溶學) 등과 함께 발송을 준비하였다. 영남지방의 유림들도 독립청원서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는 유진태(兪鎭泰)의 소개로 김창숙과 만나 영남측의 준비에 합류하였다. 이후 1923년 1월에 결성된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의 선전부에 소속되어 활동을 주도하였고, 같은해 7월 기관지 발행위원으로 선임되어 ≪산업계(産業界)≫를 발간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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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주 기적비
임승주(1867-1939)는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공포를 계기로 홍주의병(洪州義兵)을 일으켰고 수백 명씩 홍주성으로 집결시켜 연합의병을 지휘, 주도하였다. 그러나 이승우(李勝宇)의 변심으로 12월 4일 김복한·이설·홍건·안병찬 등과 함께 붙잡혀 구금되었으나 고종(高宗)의 특지(特旨)로 석방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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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헌 묘
이종헌(1890-1957)은 1919년 3월에 대한독립단 안면면(安眠面)결사대를 조직하고, 같은 해 9월에 지단장에 선임되었다. 광영학교(廣英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었고, 이후 군자금 모집에 정진하다가 징역 2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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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양목 생가터(충운사)
문양목(1869-1940)은 1903년 경기도 인천에서 서당교사로 재직 중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며 항일민족운동을 하였다. 1907년 3월 대동보국회(大同輔國會)에 참여하여 이병호와 백일규에 이어 회장이 되었고, 이 단체의 기관지인 『대동공보(大同公報)』의 주필도 맡았다. 1908년 3월 당시 한국정부의 외부고문이던 스티븐스(Stevens, D.W.)가 한국인은 독립할 능력이 없다고 하자, 대동보국회도 항의하였다. 이때 최유섭(崔有涉)·정재관(鄭在寬)·이덕현(李德鉉)·문양목 등이 발언을 정정 취소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스티븐스가 거절하자 그를 구타하고 돌아와 그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후 전명운(田明雲)·장인환(張仁煥)이 스티븐스를 저격, 살해하자 대동보국·독립협회 등은 후원회를 조직하고 변호사 교섭, 통역선택, 경비조달 등을 맡게 되었으며, 변호 비용을 모금하고 판사전담위원이 되어 재무를 맡는 등 구명운동에 힘썼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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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헌 추모비
이종헌(1890-1957)은 충청남도 서산(현 태안) 사람으로, 1919년 3월에 대한독립단 안면면결사대를 조직하고, 같은 해 9월 19일에 지단장에 선임되었다. 이종헌은 광영학교(廣英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어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에 전념하였으며, 조국광복을 위해 군자금 모집에 정진하다가 1920년 3월 9일 일경에 체포되어 1921년 1월 23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7호 위반 및 공갈죄로 징역 2년 6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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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추모탑(오몽근, 가재창, 김정진, 염성한)
대한독립단은 1919년 음력 3월 남만주 유하현에서 조맹선·백삼규·조병준 등이 조직한 독립운동단체로, 국내 진입작전과 남만주 동포사회의 자치를 목표로 했다. 실제 이들은 주로 평안남북도와 황해도지역, 만주 등지에서 항일무장활동을 벌였다.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집중적으로 결사대를 조직해 평안남북도의 조선총독부 경찰을 습격하고, 신의주 등지에서 친일세력을 처단하기도 했다. 대한독립단 안면결사대는 1919년 9월 조직되었고 이종헌이 지단장에 선임되었다. 이들은 군자금 모집, 친일 부호 응징 등 독립활동을 하다가 1920년 일경에 노출되어 단원들이 체포되고 조직이 해체되었다. 지단장 이종헌(1977년 애족장)을 비롯해 가재창(1982년 애족장), 오몽근(1982년 애족장), 김정진(1983년 애족장), 염성환 등이 옥고를 치렀다. 태안 안면 반도청년회는 1983년 8월 대한독립단 안면결사대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애국지사 추모탑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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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년 추모비
김병년(1894-1924)은 평안남도 평원 사람으로, 1906년에 편준익 등과 함께 태안의 두 번째 근대교육 기관인 광영학교/광영신숙(廣英新塾)을 안면도 승언리에 설립하였다. 또한 1919년 3월에는 평원군 일대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여 수천 명의 시위군중과 횃불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김병년은 일경의 일제 검속 때 체포되었으며, 1920년 11월 평양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