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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종식 유허비
민종식 (1861-1917)의 자는 윤조(允朝)이고, 호는 퇴초자(退樵子)이다. 그는 1882년(고종 19)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참판이 되었으며, 1895년 을미사변 후 벼슬을 버리고 충청남도 정산(定山)으로 들어가 은둔하였다.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정산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각처의 의병들로 조직된 연합의병의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1906년 5월 의병들을 홍산(鴻山)에 집결시켰고, 서부의 중심지인 홍주(洪州)를 공략해 점거하였다. 홍주의병의 항일 세력은 일제 헌병에게 큰 위협거리였으며, 5월 31일 홍주성에서 전투가 전개되었다. 이 싸움에서 많은 이들이 전사하고 9명은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민종식은 박창로(朴昌魯)·곽한일(郭漢一)·이용규(李容珪)·이남규(李南珪)와 더불어 다시 의병을 모아 재기를 도모하다가 일경에 붙잡혔고, 1907년 7월 진도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大統領章)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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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종식 집
민종식 (1861-1917)의 자는 윤조(允朝)이고, 호는 퇴초자(退樵子)이다. 그는 1882년(고종 19)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참판이 되었으며, 1895년 을미사변 후 벼슬을 버리고 충청남도 정산(定山)으로 들어가 은둔하였다.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정산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각처의 의병들로 조직된 연합의병의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1906년 5월 의병들을 홍산(鴻山)에 집결시켰고, 서부의 중심지인 홍주(洪州)를 공략해 점거하였다. 홍주의병의 항일 세력은 일제 헌병에게 큰 위협거리였으며, 5월 31일 홍주성에서 전투가 전개되었다. 이 싸움에서 많은 이들이 전사하고 9명은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민종식은 박창로(朴昌魯)·곽한일(郭漢一)·이용규(李容珪)·이남규(李南珪)와 더불어 다시 의병을 모아 재기를 도모하다가 일경에 붙잡혔고, 1907년 7월 진도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大統領章)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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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희 묘
박종희(1889-1929)는 충남 청양 목면(木面)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는데, 청양군의 시위 중 가장 크게 일어났던 1919년 4월 5일부터 7일까지 발생한 정산면 만세시위이다. 이 시위는 목면 안심리(安心里)에 거주하는 정산향교(定山鄕校) 직원 권흥규(權興圭)가 일본 헌병의 총탄에 맞아 순국함으로써 더욱 거세졌다. 박종희는 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었고 태(笞) 90도(度)를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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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채 구 묘
조병채(1878-1950)는 1920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에게 군자금을 제공하기 위하여 김영진(金瑛鎭)과 함께 충남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고, 징역 8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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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구 기적비
윤병구(1889-1929)는 의열단(義烈團)의 일원이었으며, 1922년 총독 및 일제 고관의 처단과 총독부(總督府)·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경찰서 등을 폭파하기 위한 군자금 모집을 유석현(劉錫鉉)·김지섭(金祉燮) 등과 함께하였다. 총독부 판사 백윤화(白允和)에게 2천원의 자금을 약속받았고, 수령을 위해 집을 찾아갔으나 백윤화의 신고로 일경에 붙잡혔으며, 옥고를 치르던 중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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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7투사기적비
일본 제국의 강압으로 주권을 강탈당하자 이에 격분한 애국지사들은 조국을 되찾고자 독립운동의 깃발을 내세웠다. 이곳 청남면에서도 조병채, 임종구, 오준상, 윤기중, 그리고 지곡리 출신 윤병환, 이동명, 이영은 등 7명의 지사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이러한 인물들의 열화같은 투지와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고자 본 비석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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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환 기적비
윤병환(1889-1949)은 1919년 4월 7일 충남 청양 지곡리에서 이동명(李東明)·이영은(李永殷) 등과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마을 뒷산에 올라가서 횃불을 놓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하다가 일경에 붙잡혔으며, 이후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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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돈 묘
최정돈(1898-1950)은 충남 청양군(靑陽郡) 화성면(化城面) 농암리 (農岩里)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충청도에서 방방곡곡에서 시위운동이 연일 일어나 극성했을 때는 1919년 3월27일부터 4월 6일경의 기간으로 이 동안은 경기도에 이어 전국에서 가장 치열한 양상을 보이었고, 4월 6일 후로 15일까지는 황해도에 이어 충청남도가 경상남도와 같이 많은 운동을 전개하였다. 화성면에서는 1919년 4월 5일 면소재지인 산정리(山亭里)에서 약 30명의 주민이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또한 농암리(農岩里)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시위가 일어났다. 이는 강학명(姜學男)이 4월 8일 구장 이병규(李炳圭)에게, 화성면의 농암리와 산정리에서는 열렬하게 독립만세를 부르고 있는데 왜 자기 마을에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느냐고 질타한 사실로부터 알 수 있다. 시위 후 체포된 최정돈은 4월 8일 청양헌병분견소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 90도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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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오홍주의병전적비
병오홍주의병 전적비는 충남 청양에 있으며, 1906년(병오년)에 일어난 홍주의병 중 가장 대규모의 활동을 벌인 화성면에 1992년 3월 세워진 비이다. 병오홍주의병은 1906년 2월 홍주성 진격에 실패하고, 3월 민종식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과 각지에서 모인 의병들이 홍주성 탈환을 위해 화성면 모둠내에 모였을 때 헌병과 마주쳐 대대적인 싸움이 벌어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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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선 묘
윤철선(1865-1927)은 1919년 4월 5일 충남 청양군(靑陽郡) 화성면(化城面) 산정리(山亭里)에서 약 30명의 주민과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윤철선은 체포되어 1919년 4월 6일 청양헌병분견소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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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지사마을비
이곳 물안이 마을은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다. 대표적으로 1895년 을미사변과 1905년 을사늑약에 항거한 1.2차 홍주의병이 봉기한 임승주 지사와 홍양기사를 저술하고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한 임한주지사 형제가 있다. 또한 물안이 마을 청년들은 신정리 출신의 안병찬 지사와 함께 국권을 지키고자 의병항전에 나섰으며, 물안이 주민들은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총독의 포고문이 전해졌음에도 4월 5일부터 전개된 화성장터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임상덕, 임한영, 임준호, 김용옥, 김만식, 안두종, 윤상진, 하래선 지사 등은 일제 헌병대에 체포되는 고초를 겪었다. 임경호 지사는 파리강화회의에서 파리장서를 제출하는 특사로 활동하고, 임긍호지사는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교민단의 의경대원과 한혈단의 단원으로 활약하였다. 이와 같은 물안이 마을을 널리 알리고 이곳 출신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고자 본 비가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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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한주 기적비
임한주(1871-1954)의 이명은 임한청, 임한규(林翰規), 임면주(林冕周)이다. 임한주는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고 이어서 단발령이 내려지자 임한주는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국모의 원수를 갚을 것을 맹세하고 의거할 것을 결의하였고, 홍주(洪州)지방 지사들도 일본의 침략적 행동에 분개하고 있었다. 병력을 홍주로 집결하기로 의논을 정하고 1896년 무장한 군사를 거느리고 홍주성으로 입성하니, 17일 김복한을 주장으로 하는 홍주의진이 구성되었으나 이승우는 의병관계 인사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이로써 1차 홍주의거는 무산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1차 의병운동에 참여하였던 홍주의진이 재조직되어 홍주성을 점령하고 민종식(閔宗植)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으나 적의 끈질긴 공격에 결국 패하고 홍주의진이 무너졌다. 이후 임한주는 홍주의진의 활약상을 담은 <홍양기사(洪陽記事)>를 저술하였다. 1919년 삼일운동이 발발하자, 영남유림 곽종석(郭鍾錫)·김창숙(金昌淑) 등이 주도한 파리장서(巴里長書)에 김복한과 더불어 서명한 일이 일경에 발각되어 체포되었으며, 징역 6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