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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46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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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인 3.1운동기념비
공주 지역의 3·1독립만세운동은 종교인·유학자 및 교사가 주도하고, 농민과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독립운동이었다. 그들은 주재소를 파괴하고 일제 군경과 대치하면서 무력적 저항을 감행하였다. 또한 횃불만세운동으로 비폭력적·평화적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참여 인원은 1만 명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동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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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청년회관 터 표지석
이 곳은 1932년 공주청년회관이 설립된 곳으로 일제강점기 국내 최대 항일단체인 신간회 공주지회가 활동한 근거지이다. 당시 공주제일교회 담임목회자들이 이 단체에 중요한 직책들을 맡아 수행하였고, 민중계몽과 강연회, 야학회, 토론회, 연극회, 체육회, 민립학교설립 추진등 공주지역의 근대 교육과 문화를 이끌던 뜻 깊은 장소이다. 2019년 공주 3.1만세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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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표 유허비
오강표(1843 - 1910)는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몰두한 유생으로서,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즉각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형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또한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일제치하에서는 살 수 없다고 선언하고 절명사를 지어 공주향교 명륜당의 벽에 붙이고 일장통곡한 후에 강학루에서 목을 매어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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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영 사당(숭의사)
이철영(1867 - 1919)는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일제의 모든 정책을 거부할 것을 촉구하는 창의문(倡義文)을 지어 배포하였다. 1909년 민적법이 공포되자 일본에 맞서 투쟁하다 체포되어 10여년간 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그 후에도 조국과 민족을 위해 항쟁하다가 1919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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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영 묘
이철영(1867 - 1919)는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일제의 모든 정책을 거부할 것을 촉구하는 창의문(倡義文)을 지어 배포하였다. 1909년 민적법이 공포되자 일본에 맞서 투쟁하다 체포되어 10여년간 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그 후에도 조국과 민족을 위해 항쟁하다가 1919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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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두 묘
조병두(1886 - 1906)은 1906년 창의군 민종식이 의병을 일으키려 하자 토지를 매각하여 군자금으로 헌납하였으며, 홍산으로 가 민종식 휘하에서 홍주성 공략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일본군의 역습으로 홍주성을 잃었다. 홍주성에서 탈출한 이용규(李容珪) 등과 함께 다시 모여 부여 노성 연산 부흥리에서 전투에 참여하였으나 중상을 입고 붙잡히고 말았다. 공주로 호송 중 일본군에 대항하다가 대전역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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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종순 구 묘
배종순(1890 - 1947)은 1919년 4월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서명하였다. 손병희, 김정호, 김창숙은 파리평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우리의 독립을 인정하게 하기로 계획하였고, 곽종석(郭鍾錫)에게 유림대표로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하는 서한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배종순은 김창숙(金昌淑), 곽종석(郭鍾錫) 등 유림들이 파리강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서명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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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섭 집
노원섭(盧元燮, 1877~1950)은 1877년 공주 조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7년 고향인 공주 용당(龍堂)에서 거의하여 이승갑(李承甲) 등 의병 500여 명을 이끌고 금산(錦山)지역에서 일본군을 대파하고 일본인 10여 명을 살상하고 금산의 우편국·세무서 등을 소각하였다. 1908년 용당·무주·진산·고산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펼치다 체포되어 전주지방법원에서 12년 유배형을 받고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그는 1910년 소위 합방특사로 풀려나 귀향하였다. 1919년 3·1운동에도 참가하였으며 같은 해 음력 6월 전남 나주에서 임시정부 관련문서 배포 및 군자금 모집 중 체포되어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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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섭 묘
노원섭(1877 - 1950)의 자는 대재(大哉), 호는 송암(松菴) 이명 은 노진섭(盧震燮)이다. 1907년 고향인 공주 용당(龍堂)에서 의병을 일으켜 금산을 공격하여 우편국, 세무서 등을 소각하였다. 1908년에는 진안 금산, 무주 등지에서 60여회에 걸친 일본군과의 교전 끝에 체포되어 12년 유배형을 받고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1910년 소위 합방특사로 풀려나 귀향하였다. 1919년에 3·1운동에 참가하여 활약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초대 공주유도회장과 공주군 민족정기단장을 지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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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 기념비(공주보훈공원)
독립유공자 기념비는 공주보훈공원 내에 위치해있으며, 2015년 광복 70주년을 기념하여 건립하였다. 기념비는 기억, 사람, 미래 세 개의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 '기억'은 태극 모양을 형상화하여 표현하였고, '사람'은 추모의 벽으로 '미래'는 주 조형물로 표현한 테마이다. 기념비 하단에는 공주 출신 독립유공자 88명의 이름을 새겨져 있다. 공주보훈공원 내에는 충령탑, 위패봉안실 등 다른 사적들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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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전쟁전적지 송장배미(용못)
송장배미는 1894년 동학농민군 최후의 전투인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밀리던 농민군이 전사한 곳이다. 동학농민군은 전라도에서 서울 진군하기 위해 공주 우금치를 넘는 과정에서 2차례에 걸친 큰 격전을 벌였다. 용못에서의 전투는 1894년 11월 9일 농민군과 고마나루에서 충청감영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이로 인해 논이었던 용못에 희생된 동학농민군의 송장이 쌓여있었기 때문에 송장배미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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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기념탑(공주종합운동장)
공주는 충청남도 도청 소재지로서 일제의 감시가 삼엄하여 만세운동이 어려웠다. 그럼에도 서덕순, 유준석, 윤봉윤, 김상진, 노명우선생 등이 3월 1일 서울 파고다(탑골) 공원 독립선언문 선포식에 참가하였고, 한 달 뒤인 4월 1일 공주 장날에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영명학교 김관회, 김수철, 이규상 선생이 주도하고 영명학교장 월리엄 선교사와 현석칠, 안창호 목사의 후원 아래 수백여 명이 참가하였다. 특히 영명학교 학생이던 양재순, 노명우, 윤봉균, 강윤과 유관순 열사의 친오빠인 유관옥, 4촌오빠 유준석도 만세운동에 동참하였다. 이에 주동자인 영명학교 선생과 학생 교회목사와 일반인 수백명이 태형과 옥고를 당하였으며 일부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