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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 3.1 독립만세운동기념탑
본 탑은 1919년 3월 20일 입장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사적이다. 오전 10시경 광명보통학교 학생 80여 명이 교문을 뛰쳐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양대시장으로 향하였다. 양대장터에서는 애국심에 불타는 광부들도 합세하여 시위대열에 앞장서니 장터에 나와 있던 700여 명의 농민들도 함께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28일, 일제 군경의 탄압에 대한 천안시민의 애국정신은 다시금 폭발하여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날의 시위는 충청남도 이래 최초의 순국자가 발생했으며 광부들이 일제의 총칼에 맞서 싸우는 등 격렬한 저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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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섭 묘
홍찬섭(1892-1958)은 1919년 3월 서울에서 3.1운동에 참가했고, 4월 1일 경기 안성 칠곡리에서 이유석(李裕奭)·이근수(李根洙)·이희용(李熙龍)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고,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들어가 지방 선전대로서 활동하였다. 이후 국내선전의 임무를 맡고 활약하다가 마침내 일경에게 체포되어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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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광묵 묘
채광묵(1850-1906)은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박창로(朴昌魯)·안병찬(安炳瓚) 등과 홍주성(洪州城)에서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약속하였으나 목사 이승우(李勝宇)의 배반으로 실패하였다. 의병거사에 실패한 뒤 곧바로 상경하여 10여 차례에 걸쳐 토적상소(討賊上疏)를 올렸고, 조정에서는 내부주사(內部主事)를 제수하였으나, 이를 고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다시 박안기(朴安曁)·이만식(李晩植)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또한, 1906년 4월 민종식(閔宗植)과 의병대를 조직하여 수천 명으로 규합된 대의병진의 참모장으로 추대되어 홍주성을 점령하는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반격하는 일본군과 최후까지 접전하다가 아들 채규대(蔡奎大)와 함께 전사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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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규대 묘
채규대(1890-1906)는 민종식(閔宗植) 홍주의병장 휘하에서 활약한 채광묵(蔡光默)의 아들이다. 1906년 4월 8일 부친과 함께 홍주성 탈환작전에 참가하여 용맹하게 싸웠으나, 부자가 함께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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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훈 사적비
한훈(1889-1950)은 1906년 홍주(洪州)에서 민종식(閔宗植)이 항일의병을 일으켰을 때 참가했으며, 홍주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공격으로 홍주성을 상실하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1년 임병찬(林炳瓚)과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를 조직하였고, 1913년에는 채기중(蔡基中)·유장렬(柳璋烈)·김상옥(金相玉) 등과 함께 비밀항일결사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였다. 1915년 박상진(朴尙鎭)·우재룡(禹在龍) 등과 합류해 광복단을 광복회로 개편, 강화해서 군대식 조직으로 편성하여 활동하던 중 조직이 발각되자 다시 만주로 망명하였다. 1920년 국내에서 결성된 비밀항일결사인 암살단(暗殺團)에 합류하여, 김상옥·김동순(金東淳) 등과 함께 일본총독을 암살하고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을 파괴해 우리 민족의 독립열의를 세계에 알리고자 계획했지만,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19년 6개월간의 복역생활을 하다가 출옥하였으며, 6.25동란 중에 북한군에게 납치 피살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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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태석 사적비
한태석(1876-1949)은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1906년 민종식(閔宗植) 의병부대에 합류하고 홍주성 교전 등에 참전하며 계속해서 활동하다가, 1916년 비밀결사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할 때 재정적으로 지원하였으며, 1920년 8월 사이토[齋藤實] 총독과 정무총감(政務總監)을 저격, 사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으나 한우석(韓禹錫)이 붙잡힘에 따라 무산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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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흥규 묘
순국선열 권흥규의 묘는 충남 청양에 위치해있으며, 권흥규(1852-1919)는 1919년 정산향교(定山鄕校) 직원으로 있었는데, 같은해 4월 5일 1백여 명의 장꾼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시위하였는데 일제 헌병이 일부를 강제 연행하자 석방하라고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의 발포로 인하여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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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덕사(최익현 사당)
모덕사는 충남 청양군 목면에 있으며 최익현이 생전에 살았던 고택에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1984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조선 말 송암리 장구(長久)마을에 최익현이 와서 살았는데,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906년 청양군내 유림들이 발의, 1913년에 공덕사(恭德祠)라는 명칭으로 건립되었다. 그러나 광복 후 사우를 중수하고 고종의 밀지(密旨) 내용 중 ‘慕卿宿德(그대의 큰 덕을 사모함.)’에서 ‘慕’자와 ‘德’자를 따서 모덕사라 이름을 바꾸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1982년과 1985년에 유물전시관·장서각(藏書閣) 등을 건립하고 고택(古宅) 등도 보수하였다. 1982년부터 모덕사관리사무소를 두어 관리하고 있다. 최익현(1833~1907)은 조선 후기의 지사이다. 1833년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 화서 이항로의 제자이며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典籍)·사헌부 지평(持平)·사간원 정언(正言)·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1868년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관직을 삭탈당했다. 이후 일본과의 통상조약과 단발령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며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林秉瓚)·임락(林樂)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체포되었다. 그러나 순창에서 패하여 대마도에 유배되었고 그 곳에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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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충대의의사비
최익현(1833~1907)은 조선 후기의 지사이다. 1833년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 화서 이항로의 제자이며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典籍)·사헌부 지평(持平)·사간원 정언(正言)·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1868년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관직을 삭탈당했다. 이후 일본과의 통상조약과 단발령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며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林秉瓚)·임락(林樂)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체포되었다. 그러나 순창에서 패하여 대마도에 유배되었고 그 곳에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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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좌상(모덕사)
최익현(1833~1907)은 조선 후기의 지사이다. 1833년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 화서 이항로의 제자이며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典籍)·사헌부 지평(持平)·사간원 정언(正言)·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1868년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관직을 삭탈당했다. 이후 일본과의 통상조약과 단발령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며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林秉瓚)·임락(林樂)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체포되었다. 그러나 순창에서 패하여 대마도에 유배되었고 그 곳에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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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흥규 추모비
권흥규(1852-1919)는 1919년 정산향교(定山鄕校) 직원으로 있었는데, 같은해 4월 5일 1백여 명의 장꾼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시위하였는데 일제 헌병이 일부를 강제 연행하자 석방하라고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의 발포로 인하여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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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면출신 정산 3.1만세운동참가자비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이러한 물결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이곳에서도 4월 5일 정산3.1만세운동이 일어나 항일의 기치를 드높였다. 한편, 이로 인해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197명이 태형을 받았는데, 그 중 목면 출신 수형자 41명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