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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 묘
충청남도 천안에 위치한 김상훈의 묘이다. 김상훈(1874-1925)은 충청남도 천안의 사람으로, 1919년 4월 1일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날 오후 1시경 조인원이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워 놓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아우내 장터에 모인 3천여명의 시위군중이 호응하여 장터는 대한독립만세 소리로 진동하였다. 김상훈은 시위대열에 앞장서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활동하다가 체포되었으며, 그해 9월 11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인물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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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철 시비
김상철(金相喆)[1897~ ]은 1897년 10월 25일 충청남도 천안군 병천면 가전리 463번지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아우내 장터의 독립 만세 운동은 원래 수신면(修身面)·성남면(城南面) 계와 동면(東面)의 조인원(趙仁元)·유관순(柳寬順) 계의 2개의 계열로 나누어 계획되었다. 김상철은 동면 계열로 참여하였다.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조인원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마침 시장에 와 있던 김상철은 군중들에 섞여 만세를 부르며 시장을 누볐다. 이때 출동한 헌병들이 총기를 난사하여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였다. 오후 4시경, 분노한 독립 만세 운동 참여자들이 주재소로 몰려가 헌병들이 빼앗아간 태극기를 다시 높이 들어 만세를 부르며, 유치장의 벽을 헐어 구멍을 내는 등 적극적인 항의를 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상철은 헌병 주재소의 유치장 벽에 발길질을 하는 등의 행위를 하였다. 결국 이날의 활동으로 인하여 김상철은 1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후 김상철은 1921년 경성에 혁신단을 발기하여 통의부원, 혁신단 상무위원을 역임하였다. 또한 3년 후인 1924년에는 중국 체류 중 군자금 조달의 사명을 띠고 귀국 활동을 하던 가운데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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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순 묘
충청남도 천안에 위치한 유창순의 묘이다. 유창순(1880-1943)은 충청남도 천안의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국권을 뺏기자, 국권회복을 위해 채기중, 유장렬 등과 함께 1913년 풍기에서 풍기광복단을 결성하였다. 유창순은 풍기광복단에서 독립군 양성을 위한 무기 구입과 군자금 모집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풍기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이 통합하여 1915년 대한광복회를 결성할 때에도 참여하여 친일 부호 처단에 앞장섰다. 대한광복회의 혁명계획인 의협 투쟁으로서의 총독 처단과 친일 부호 처단 등을 위해 유창순은 경상도 지방의 친일 부호를 조사하여 명단을 작성하는 한편 그들에게 보내는 광복회 명의의 포고문을 발송하였다. 그리하여 1917년 11월에는 채기중·강순필, 임봉주 등과 함께 칠곡의 친일 부호 장승원을 처단하였다. 이때 대한광복회의 처단 고시문을 붙여 광복회가 널리 알려지게 되며 조직이 발각돼 유창순은 1918년에 피체되었고, 10여 년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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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옥 집
충청남도 천안에 위치한 조병옥의 생가이다. 조병옥(1894-1960)은 충청남도 천안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경찰관이자 정치가이다. 1914년 미국으로 건너가 안창호가 주도한 흥사단(興士團)의 조직결성에 참여하였으며, 뉴욕 거주 동포들을 중심으로 한인회(韓人會)를 조직하고 총무를 맡아 독립운동의 진상을 미국에 알리는 등 외교활동에 힘썼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의 결성에 참여하여 35명의 간사 중 일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으며 1929년 신간회 복대표위원회에서 교육부장과 경성지회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에서는 이에 호응하여 민중대회(民衆大會)를 개최할 것을 계획하고 이를 준비하던 중 조병옥을 비롯한 주요 간부들이 일경에 붙잡혀 그는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32년에 조선일보 전무 겸 영업국장을 맡아 민족언론의 육성에 힘썼으며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붙잡혀 2년간의 예심 끝에 고등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아 풀려났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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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배 묘
1919년 충청남도 공주군 공주면(公州面)에서는 3월 중순경부터 만세운동이 시작되어 4월에도 지속되었다. 공주시장(公州市場)의 장날인 4월 1일 오후 2시경에는 영명학교(永明學校)의 교사와 재학생, 졸업생 등이 주도하여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군중이 이에 호응하여 만세를 부르자 일본 경찰이 즉각 출동하여 시위대를 무력 진압하였다. 결국 시위 지도자가 모두 구금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도 압수되었다. 4월 17일 오후 5시경에는 공주시장의 장꾼 약 1천여 명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일으켰다. 유성배는 이러한 공주 시장의 4월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14일 이른바 ‘보안법·출판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불기소 처분되었다. 정부는 2021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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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원 묘
충청남도 천안에 위치한 조인원의 묘이다. 조인원(1864-1931)은 충청남도 천안 사람으로, 1919년 4월 1일 홍일선, 김교선, 유관순 등과 갈전면 아우내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사전에 계획하였다. 그는 4월 1일 오후 1시경 아우내 장터로 모여든 3천여 명의 시위군중 앞에 나아가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워놓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고, 이를 따라 3천여 명의 군중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며 장터에서 행진을 하다 헌병주재소까지 접근하게 되었다. 이 기세에 놀란 일본 군경들이 야만적으로 기총을 난사하고, 또 천안에서 불러들인 일본 헌병과 수비대까지도 포악무도하게 총검을 휘둘러, 이날 오후 4시경 사망자의 가족과 시위군중이 일군경의 흉탄에 맞아 순국한 시체를 헌병주재소로 옮겨놓고 강력하게 항의할 무렵 그는 아들 조병호, 유중무(柳重武)·유관순 등과 헌병주재소로 달려가 웃옷을 벗어 제치고, 주재소장과 헌병들에게 강력히 항의하다가 체포되었다. 결국 그해 9월 11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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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우석, 조화벽 묘
유우석(1899-1968)은 충청남도 천안 사람으로, 아우내 장터의 독립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유관순의 오빠이자 유중권, 이소제의 아들이다. 3월 12일과 15일에 걸쳐 공주에서 독립 만세운동이 전개된 것에 자극받은 영명학교의 교사 김관회(金寬會)·이규상(李圭商)·현언동(玄彦東)과 졸업생 김사현(金士賢)·재학생 오익표(吳翼杓)·안성호(安聖鎬) 및 목사 현석칠(玄錫七) 등이 공주 독립 만세운동을 결의하였고 이때 유우석도 학생대표로서 이 계획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모의된 독립 만세운동은 일제의 강력하고 신속한 저지로 좌절되어, 비교적 소규모로 전개된 채 끝나고 그는 주동자로 체포되었다. 공주검사국으로 송치된 그는 여기서 여동생 유관순을 잠시 만나기도 하였으나, 그해 8월 2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조화벽(1895-1975)은 강원도 양양 사람으로, 양양군 내의 감리교회에서 많은 청년을 포섭하여 활발히 독립 만세운동을 주도한 조영순 전도사의 딸이다. 전국적으로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당시 개성 호수돈여학교 선배인 권애라 등 여럿과 함께 독립 만세운동 계획을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나누어 준 뒤, 헌병대에서 독립 만세를 높이 외치며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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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권, 이소제 묘
유중권(1863-1919)은 충청남도 천안 사람으로, 유관순과 유우석의 아버지이다. 유중권은 홍일선, 김교선, 조인원, 유관순과 함께 갈전면 아우내 장터의 대대적인 독립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조인원이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워놓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3천여 명이 뒤따라 외치며 행진을 시작하였다. 여세를 몰아 시위군중이 일본 헌병주재소로 접근하자 시위대열의 기세에 놀란 일본 헌병이 기총을 난사하고, 천안에서 불러들인 일본 헌병과 수비대까지 합세하여 총검을 휘둘러대었다. 이때, 유중권도 일본 군경의 흉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소제(1875-1919)는 충청남도 천안 사람으로, 1919년 4월 1일 갈전면 아우내 장터에서 전개된 대대적인 독립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남편 유중권, 딸 유관순과 함께 독립 만세 시위군중에 휩싸여 헌병주재소로 달려가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포악 무도한 일본 경찰이 주재소에서 난사한 기총과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총검에 맞아, 남편과 함께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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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무 묘
충청남도 천안에 위치한 유중무의 묘이다. 유중무(1875-1956)는 충청남도 천안 사람으로 1919년 4월 1일에 갈전면 아우내 장날을 기하여 홍일선, 김교선, 한동규, 조인원, 유관순 등이 일으킨 대대적인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이날 오후 1시경 조인원이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3천여 명이 운집한 아우내 장터는 대한독립만세 소리로 진동하였다. 유중무는 이날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대열의 기세에 놀란 일본 헌병주재소와 천안에서 파견된 일본 헌병 및 수비대의 무자비한 총검에 유중권 등 19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3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유중무는 일본 군경의 발포로 순국한 형 유중권의 시체를 둘러메고 주재소로 달려가, 두루마기의 끈을 풀어 헌병의 목을 졸라매며 헌병보조원 맹성호에게 "너희는 몇십 년이나 보조원 노릇을 하겠느냐"고 꾸짖는 등 항의하다가 체포되었다. 그해 9월 11일에 징역 3년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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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사적지
유관순(1902-1920)은 충청남도 천안의 독립운동가이다. 3월 5일 남대문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조선총독부의 강제 명령에 의해 이화학당이 휴교되자 독립선언서를 감추어 가지고 귀향하였다. 유관순은 인근의 교회와 청신학교 등을 돌아다니며 서울 독립만세운동의 소식을 전하고, 천안, 연기, 청주 등지의 교회 및 학교를 돌아다니며 만세운동을 협의하였다. 또한 기독교 전도사인 조인원과 김구응 등의 인사들과 만나 4월 1일의 아우내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1919년 4월 1일 오전 9시, 3천여 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조인원이 긴 장대에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높이 달아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독립만세를 선창하였고, 이내 아우내 장터는 삽시간에 만세 소리로 진동하였다. 이때 유관순은 미리 만들어 온 태극기를 시위군중에게 나누어주고, 시위대열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행진 하였다. 독립만세운동이 절정에 달하던 오후 1시경 일본 헌병에 의해 최초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나, 조인원의 설득으로 잠잠해졌다. 오후 2시경 파견된 헌병 분견대원과 수비대원 30여 명이 트럭을 타고 도착하여 총검을 휘두르고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였다. 이때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이에 오후 4시경, 유관순은 아버지의 시신을 업고 유중무, 조인원, 조병호, 김용이 등 40여 명과 함께 파견소로 몰려가 일본 헌병들에게 달려들어 강력히 항의하였다. 유관순은 한꺼번에 부모를 잃었을 뿐 아니라 이 독립만세운동 주모자로 체포되어 송치되었다. 결국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이에 불복하였으나 최종 형이 확정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감금되었다. 유관순은 옥중에서도 어윤희, 박인덕 등과 계속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말미암아 18세의 꽃다운 나이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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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집
유관순(1902-1920)은 충청남도 천안의 독립운동가이다. 3월 5일 남대문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조선총독부의 강제 명령에 의해 이화학당이 휴교되자 독립선언서를 감추어 가지고 귀향하였다. 유관순은 인근의 교회와 청신학교 등을 돌아다니며 서울 독립만세운동의 소식을 전하고, 천안, 연기, 청주 등지의 교회 및 학교를 돌아다니며 만세운동을 협의하였다. 또한 기독교 전도사인 조인원과 김구응 등의 인사들과 만나 4월 1일의 아우내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1919년 4월 1일 오전 9시, 3천여 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조인원이 긴 장대에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높이 달아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독립만세를 선창하였고, 이내 아우내 장터는 삽시간에 만세 소리로 진동하였다. 이때 유관순은 미리 만들어 온 태극기를 시위군중에게 나누어주고, 시위대열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행진 하였다. 독립만세운동이 절정에 달하던 오후 1시경 일본 헌병에 의해 최초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나, 조인원의 설득으로 잠잠해졌다. 오후 2시경 파견된 헌병 분견대원과 수비대원 30여 명이 트럭을 타고 도착하여 총검을 휘두르고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였다. 이때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이에 오후 4시경, 유관순은 아버지의 시신을 업고 유중무, 조인원, 조병호, 김용이 등 40여 명과 함께 파견소로 몰려가 일본 헌병들에게 달려들어 강력히 항의하였다. 유관순은 한꺼번에 부모를 잃었을 뿐 아니라 이 독립만세운동 주모자로 체포되어 송치되었다. 결국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이에 불복하였으나 최종 형이 확정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감금되었다. 유관순은 옥중에서도 어윤희, 박인덕 등과 계속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말미암아 18세의 꽃다운 나이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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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만세운동 발원지 기념동판
충청남도 천안에 위치한 천안만세운동 발원지 기념동판이다. 기념동판이 위치한 곳은 1915년에 안창호 목사가 천안 읍내 교회당을 건립하였고, 1919년 3월 29일 천안 읍내장터 독립만세운동이 발원된 곳이다. 고인들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천안만세운동 기념사업회와 천안시 기독교 연합회, 그리고 기독교 대한감리회 천안지방이 힘을 모아 본 기념동판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