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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봉선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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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읍내장터 독립만세운동 기념탑
천안읍내장터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 중 대표적인 것은 1919년 4월 1일에 갈전면 아우내 장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이다. 갈전면에서는 조인원을 중심으로 아우내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하고 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던 중, 인근 수신면과 성남면에서도 김상훈(金相勳)·홍일선(洪鎰善) 등의 20대 청년들이 밤마다 각 마을 근처의 산에 봉화를 올리며 만세를 부르는 것을 알고, 두 계통의 주동자가 만나 만세운동을 합동으로 전개하기로 합의하였다. 4월 1일 조인원이 3,000여 명의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뒤 헌병파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때 일본헌병들이 기관총을 난사해, 유중권 등 많은 사상자가 났고, 시위군중은 일단 후퇴하였다. 그러나 격분을 참지 못한 시위군중은 헌병파견소로 몰려가 일제의 만행을 성토하는 등 과격한 행동을 취하려 하였다. 이에 조인원의 만류와 설득으로 충돌 없이 점차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천안에서 급파된 일본헌병의 무차별 사격으로 현장에서 19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했으며, 많은 사람이 검거되었다. 검거된 주동자 가운데 유관순은 옥중에서도 끝까지 만세를 부르며 항거하다가 마침내는 참혹한 죽음을 당하였다. 그밖에도 입장장터에서는 3월 20일과 28일 두 차례에 걸쳐 양대여숙의 여학생과 직산금광 광부들의 주동에 의해 격렬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3월 29일 천안읍에서 약 3,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출동한 일본헌병에 의해 26명이 검거되었다. 또 3월 14일 목천보통학교학생 120명이 만세운동을 벌이다가 일본헌병과 충돌해 4명이 검거되고, 3월 31일에는 성환면에서 수천 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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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응 묘
김구응(1887 - 1919)의 이명은 김구웅이며, 1919년 4월 1일 홍일선(洪鎰善)·김교선(金敎善)·한동규(韓東奎)·이순구(李旬求)·조인원(趙仁元)·유관순(柳寬順) 등이 갈전면(葛田面) 아우내(竝川) 장날을 기하여 일으킨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이날 오후 1시경 조인원이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3천여명의 시위군중이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니, 아우내 장터는 만세소리로 가득찼다. 시위군중이 계속 독립만세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들고 일본 헌병주재소로 접근하자, 시위군중의 기세에 놀란 일본 군경들이 주재소에서 기총을 난사하고, 또 천안에서 불러들인 헌병과 수비대까지 가세되어 무자비하게 총검을 휘둘러대며, 계속 발포하여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柳重權)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명 이상이 부상하는 일대 참사가 일어났다. 이날 그도 적의 흉탄에 맞아 쓰러졌는데, 일본 헌병은 잔인하게도 다시 머리에 대고 총을 쏘아 죽였고,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아들의 시체를 안고 통곡하던 어머니 최정철(崔貞徹) 마저도 잔악무도하게 창칼로 찔러 순국케 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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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철 묘
최정철(1853-1919)은 충청남도 천안 사람이고, 이명은 채씨이다. 기미년 전해에 부군을 여의고, 다음 해 일어난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던 큰아들 김구응 의사가 일본 헌병에게 살해당했다. 이에 최정철은 "이놈들아! 내 자식이 무슨 죄가 있느냐! 내 나라 독립만세를 부른 것도 죄가 되느냐! 이놈들아! 나도 죽여라!"하고 분노하며 저항하였고 일본 헌병의 총에 맞아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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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철, 김구응 추모비
충청남도 천안에 위치한 최정철 김구응 모자 추모비이다. 김구응(1887-1919)은 천안의 교사이고, 최정철(1853-1919)은 김구응의 어머니이다. 김구응은 1915년에 천안시 수신면 장산리의 감리교회가 운영하는 장명학교의 교사로서 조만형과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을 가르쳤고 1918년부터는 병천리 진명학교에서 교사로서 재직하던 중 3.1운동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이에 1919년 4월 1일 홍일선, 김교선, 한동규, 이순구, 조인원 등과 함께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만세 시위의 선두에 있던 김구응이 일본 헌병이 쏜 총에 맞고 쓰러졌고, 이에 분노한 어머니 최정철이 절규하며 헌병에게 달려들었고 이내 총을 맞아 사망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김구응에게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고, 최정철에게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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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철 묘
충청남도 천안에 위치한 김상철의 묘이다. 김상철(1899-1974)은 천안 사람으로, 본관은 안동이고 호는 불암이며 독립지사인 김정호의 장남이다. 1919년 3월 1일 병천에서 동지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여 체포되었고 1년 여의 옥고를 겪었다. 그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이어나가던 중 자금 조달 차 귀국한 때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다시 3년의 옥고를 치렀다. 독립 후 광복회에서 독립기념사업을 하던 중 1974년에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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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묘
충청남도 천안에 위치한 김정호의 묘이다. 김정호(?-1955)는 천안 사람으로, 본관은 안동, 이명은 김승호(金昇鎬)이다. 양성읍(현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고 상하이 임시정부의 명을 받고 중국으로 건너가서 독립단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던 중, 독립 자금을 모금하고자 국내로 밀입국하여 광복회원으로 활동하며 서울 중앙 우체국에서 5만 원 상당의 금액을 탈취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1927년 체포되어 7년의 징역을 살았다. 이후에도 만보산사건으로 다시 6개월의 옥고를 치렀으며, 1942년 상해 임시 정부의 밀령으로 중국을 벗어나다가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1년 6개월의 징역을 살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 공로 훈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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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함성' 동상
충청남도 천안에서 일어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기리는 기념비이다.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은 천안에서 3천여 명의 군중들이 태극기를 들고 독립을 외친 만세 운동이다. 1919년 3월 1일 경성(서울)과 평양 등 전국 여섯 개의 도시에서 동시에 시작된 3.1운동을 목격한 유관순은 3.1운동 직후 조선총독부가 휴교령을 내리자, 고향으로 돌아와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는 약 3천 명의 군중들이 모여 3번에 걸쳐 만세 운동을 진행하였다. 일제는 총으로 시위 군중을 강제 진압하였고 이날 현장에서 19명이 사망하고 많은 시위자들이 부상과 투옥 등 고초를 겪었다. 2009년 6월에 건립된 박민섭 작가의 작품으로, 어둠을 뚫고 솟아오르는 태극기의 장엄한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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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내장터 표지석
충청남도 천안에서 일어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기리는 표석이다.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은 천안에서 3천여 명의 군중들이 태극기를 들고 독립을 외친 만세 운동이다. 1919년 3월 1일 경성(서울)과 평양 등 전국 여섯 개의 도시에서 동시에 시작된 3.1운동을 목격한 유관순은 3.1운동 직후 조선총독부가 휴교령을 내리자, 고향으로 돌아와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는 약 3천 명의 군중들이 모여 3번에 걸쳐 만세 운동을 진행하였다. 일제는 총으로 시위 군중을 강제 진압하였고 이날 현장에서 19명이 사망하고 많은 시위자들이 부상과 투옥 등 고초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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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내 독립만세운동 기념비
충청남도 천안에서 일어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기리는 기념비이다.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은 천안에서 3천여 명의 군중들이 태극기를 들고 독립을 외친 만세 운동이다. 1919년 3월 1일 경성(서울)과 평양 등 전국 여섯 개의 도시에서 동시에 시작된 3.1운동을 목격한 유관순은 3.1운동 직후 조선총독부가 휴교령을 내리자, 고향으로 돌아와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는 약 3천 명의 군중들이 모여 3번에 걸쳐 만세 운동을 진행하였다. 일제는 총으로 시위 군중을 강제 진압하였고 이날 현장에서 19명이 사망하고 많은 시위자들이 부상과 투옥 등 고초를 겪었다. 1947년 11월,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가 구미산에 건립하였으며, 2002년에 당시 국가보훈처에서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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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식 묘
충청남도 천안에 위치한 유민식(유정근)의 묘이다. 유민식(1898-1969)은 충청남도 천안의 독립운동가로, 이명은 유정근, 유만송, 유후단이다. 일제에게 국권이 피탈되자 조국 광복의 염원을 안고 만주 등지에서 국권 회복 운동을 벌이고 1919년 4월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홍진, 신규식, 이명교 등과 함께 충청도 대표로 선임되었다. 1923년 5월에는 만주로 넘어가 김좌진을 보좌하고 1925년에는 김혁, 김좌진 등이 조직한 신민부(新民府)에 참여하기도 하는 등 활약했다. 그러나 중국 군벌의 지원을 받은 하얼빈 일영사관경찰대가 신민부의 비밀본거지를 포위 습격하여 본부 직원 모두가 체포되어 1929년 7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5년형이 확정되었다. 1934년, 유민식은 옥중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나 끔찍한 폭행과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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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헌 묘
충청남도 천안에 위치한 김상헌의 묘이다. 김상헌(1893-1919)은 충청남도 천안 사람이다. 김상헌은 1919년 4월 1일, 갈전면 아우내 장날을 기하여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오후 1시경 조인원이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워 놓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아우내 장터에 모인 3천여 명의 시위군중이 일제히 호응하니 장터는 대한독립만세 소리로 진동하였다. 흥분된 시위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들고 일본 헌병주재소로 접근하자 일본 헌병이 기총을 난사하며 위협하였고 이때 김상헌도 일본 군경의 흉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