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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사당(충의사)
윤봉길(1908 - 1932)의 본관은 파평이며, 본명은 윤우의, 호는 매헌이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을 받아 식민지 노예 교육을 배격하면서 학교를 자퇴하였다. 이후 열네 살 때는 인근 마을의 서당인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공부하며 사서삼경 등 중국고전을 익혔다. 1929년 부흥원(復興院)을 설립하여 농촌 부흥 운동을 본격화하며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30년 만주로 망명하던 윤봉길은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옥고를 치렀으나, 결국 만주로 탈출해 김태식(金泰植), 한일진(韓一眞) 등과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1931년 8월 활동 무대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옮겨 동포 실업가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면서 노동조합을 조직한 뒤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였다. 그해 겨울부터는 임시정부의 김구(金九)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를 호소하기도 하였다. 1932년 한인애국단의 이봉창(李奉昌)이 일본 도쿄에서 일본 왕을 폭살하려다가 실패하며 상하이의 정세가 복잡해지자 윤봉길은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여 4월 29일 이른바 천장절(天長節) 겸 전승축하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하였다. 윤봉길의 거사로 상하이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상하이의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등이 즉사하였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 공사 시게미쓰 등이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은 수류탄 투척 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은 이후 1932년 11월 20일 오사카형무소에 수감, 1932년 12월 19일 총살되었다. 윤봉길은 1932년 일본에서 총살된 후 표식도 없이 매장되었다. 해방 후 유해봉안추진위원회의 주도로 1946년 3월 6일 사형장에서 남쪽으로 3㎞ 떨어진 가나자와[金澤]시 노다[野田]산 시영공동묘지 북측 통행로에서 윤봉길의 유해를 발굴하여 서울특별시 효창동의 효창공원에 국민장으로 안장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윤봉길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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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집
윤봉길(1908 - 1932)의 본관은 파평이며, 본명은 윤우의, 호는 매헌이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을 받아 식민지 노예 교육을 배격하면서 학교를 자퇴하였다. 이후 열네 살 때는 인근 마을의 서당인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공부하며 사서삼경 등 중국고전을 익혔다. 1929년 부흥원(復興院)을 설립하여 농촌 부흥 운동을 본격화하며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30년 만주로 망명하던 윤봉길은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옥고를 치렀으나, 결국 만주로 탈출해 김태식(金泰植), 한일진(韓一眞) 등과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1931년 8월 활동 무대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옮겨 동포 실업가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면서 노동조합을 조직한 뒤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였다. 그해 겨울부터는 임시정부의 김구(金九)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를 호소하기도 하였다. 1932년 한인애국단의 이봉창(李奉昌)이 일본 도쿄에서 일본 왕을 폭살하려다가 실패하며 상하이의 정세가 복잡해지자 윤봉길은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여 4월 29일 이른바 천장절(天長節) 겸 전승축하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하였다. 윤봉길의 거사로 상하이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상하이의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등이 즉사하였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 공사 시게미쓰 등이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은 수류탄 투척 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은 이후 1932년 11월 20일 오사카형무소에 수감, 1932년 12월 19일 총살되었다. 윤봉길은 1932년 일본에서 총살된 후 표식도 없이 매장되었다. 해방 후 유해봉안추진위원회의 주도로 1946년 3월 6일 사형장에서 남쪽으로 3㎞ 떨어진 가나자와[金澤]시 노다[野田]산 시영공동묘지 북측 통행로에서 윤봉길의 유해를 발굴하여 서울특별시 효창동의 효창공원에 국민장으로 안장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윤봉길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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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원 우국기념비
조인원(1875 - 1950)의 호는 야운이며,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3월 3일 고덕면 대천리 한내장 만세운동의 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5월 대한민국임시정부 파견원인 이영식(李英植)과 더불어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충청도지단을 조직했다. 조인원은 서무부장을 맡아 지단장 서병익(徐丙益), 부단장 김석주(金錫周) 등과 함께 독립운동 관련 문건을 배포하는데 주력했다. 1920년 12월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열국이 승인해도 정치적 명령이 국내에서 떨치지 못하는 것은 일제 때문이니, 조선인은 세금을 납부하지 마라. 만약 이에 따르지 않으면 독립군이 국내로 들어올 때 후회할 것이다.”라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명의의 선전물을 예산군 삽교면 역촌리 등에 부착한 일로 체포된 조인원은 1921년 9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조인원은 출감 후 일제의 감시가 삼엄해지자 계몽운동으로 방향을 바꾸어 문맹 퇴치에 힘썼다. 1945년 광복이 되어 윤봉길 의사의 유해를 봉환할 때 동참하였으며, 말년에는 고향에서 살다가 1950년 12월 21일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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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포대도소 터
예포대도소는 개항기의 내포 동학농민혁명을 지휘하던 대도소이다. 박인호의 막골기포에 의해 1894년 9월 29일 내포 전 지역에서 동학에 의한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이에 박인호, 박덕칠 등 지도부에게는 향후 전면전에 대비한 무장투쟁 계획을 수립하고 조직적 활동을 총지휘할 대도소가 절실하였다. 덕의대접주 박인호는 기포령을 내린 후 농민군을 규합해 현 삽교읍 지역에서 가장 큰 성리(城里)마을에 있는 덕산군 장촌면소를 점령하여 진을 설치하고서 ‘예포대도소’라 칭하고 동학농민혁명의 지휘본부로 활용하였다. 예포대도소에서 무장투쟁에 필요한 무기 확보 계획을 논의하여 해미, 덕산, 온양관아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장을 강화하고 전면전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예포대도소에 모인 3,000여 농민군은 각 지역 포(包) 중심 단위로 모여 지휘 체계가 서지 못하고 조직적인 군율이 없었다. 이에 1894년 10월 11일 호연초토사 홍주목사 이승우의 관군에게 기습을 당하여 패퇴하였다. 예포대도소는 물론 성리마을 전체가 동학농민군 소굴로 지목되어 모두 불태워졌고 동학농민군이 확보했던 군량미와 소금 등을 관군에게 빼앗겼다. 예포대도소가 있던 자리는 지금은 예당평야의 중심부에 있는 전형적인 평야지 농촌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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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 우물터
예산, 덕산, 태안, 서산, 해미 지역 등 내포지역 농민군은 1894년 9월 그믐에 기포하여 10월 1일 태안·서산관아를 점령하면서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이들은 호연초토사로 임명된 이승우가 이끄는 관군과 유회군, 또 10월 1일 도착한 일본군의 반격을 받고 목소리 대도소, 해미와 광천 등지에서 패배하여 기세가 위축되기도 했다. 그러나 10월 24일 승전곡 전투와 10월 26일의 신례원 전투에서 일본군과 관군을 크게 물리친 후 농민군은 사기가 충천하여 홍주성을 공략하기 위해 신례원에서 홍주를 향해 전진하였다. 당시 홍주성 공략에 나선 농민군의 수는 대략 2만 5천-3만 명에 이르렀다. 농민군은 일본군과 관군을 물리친 여세를 몰아 10월 27일 예산으로 진입하여 관아를 습격한 다음 삽교 쪽으로 이동하여 역촌(현재 삽교읍 역리와 송산리) 일대에서 하루를 유숙하였다. 11월 6일 이 지역을 지나던 장위영 부영관 이두황은 “지푸라기가 연달아 깔려 있고 빈 볏단도 널려있었다. 불을 피운 자국과 밥 지은 흔적이 수리에 걸쳐 있었다”고 하여 농민군의 수가 매우 많았음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고 있다. 당시 역리 마을 옆에서 주둔하던 농민군들은 취사에 필요한 물을 바로 이 우물에서 길어다 사용했다고 한다. 역리 일대에서 하루를 유숙한 농민군들은 1894년 10월 28일 오후 1시경 홍주성을 향해 진군하여 오후 4시경에 홍주성 외각에 당도하였다. 이때 일본군과 관군은 농민군의 홍주성 공격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농민군은 일본군과 관군의 저항을 뚫고 홍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쳤다. 이것이 바로 동학농민혁명 당시 내포지역에서 일어난 가장 치열한 전투인 홍주성 공방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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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자형 묘
윤자형(1868 - 1939)은 1891년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을 지냈다. 을사늑약 이후 고종황제는 각지의 신망 있던 인물들에게 은밀히 조칙을 내려 의병장으로 임명, 의병 투쟁을 고무시켰다. 1908년 7월 윤자형은 의병대장 겸 삼남도육군대도독(三南道陸軍大都督)으로 임명되어 호남 삼도의 군량 및 군사권과 장관(將官)의 임면, 직인의 조각 사용 등 대권을 받아 지리산을 중심으로 2년 동안 항전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1914년 이관구(李觀求)가 국내와 만주 지역 독립군과 제휴해 조선총독 암살 계획을 추진할 때 박은식(朴殷植)·이시영(李始榮)·신채호(申采浩)·허성산(許聖山)·한진교(韓鎭敎) 등과 함께 비밀리에 연계해 지원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윤자형은 1923년 중국동북 지역으로 망명하여 원각교를 창시하고 교주가 되어 단군의 홍익인간 정신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하였다. 1936년 광주 무등산에서는 삼황교를 창시하고 종지(宗旨)를 제정하여 포교 활동을 벌였다. 1939년 2월 4일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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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관작리 전적지 표지석
동학농민혁명 관작리전적지 표지석은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내에 위치해있다. 1894년 9월 18일 동학교주 최시형의 기포령에 따라 9월 그믐 예산을 비롯한 내포지역도 2차 봉기인 동학혁명이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내포동학의 조직인 덕포 박인호, 예포 박덕칠의 농민군은 삽교성리에 예포대도소를 설치하고 10월 7일 대흥관아를 점령했으나 홍주진압군이 기습적으로 예포대도소를 공격해오자 농민군은 서산지역으로 퇴각했다. 이후 관군의 무자비한 색출과 탄압이 계속되자 농민군은 운산 여미벌에 재결집 면천 승전곡에서 일본군 정예부대를 대퇴시켰다. 2만여 농민군은 서울공격을 위해 10월 25일 이곳 관작리에 주둔했다. 다음날 아침 홍주진압군은 농민군을 향해 포공격을 개시하자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숫자가 우세한 농민군은 일시 흩어졌다가 포위공격하여 진압군을 패퇴시키고 예산관아를 점령했다. 한나절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대장 김병돈, 영관 이창욱과 수백여 유회군이 전사했고 군량미를 대주던 간량리 출신 농민군 박응하 선생이 목숨을 잃어 농민군보다 진압군 희생이 컸다. 관작리 전적지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새세상을 열망했던 동한농민군과 진압군 사이 서로 죽여야만 했던 참혹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동학농민혁명사에서 중요한 동학유적지가 아닐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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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동학농민군 추모비
내포동학농민군 추모비는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내에 위치해있다. 1894년 9월 18일 동학교주 최시형의 기포령에 따라 9월 그믐 예산을 비롯한 내포지역도 2차 봉기인 동학농민혁명이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내포동학의 조직인 덕포 박인호, 예포 박덕칠의 농민군은 삽교성리에 예포대도소를 설치하고 10월 7일 대흥관아를 점령했으나 홍주진압군이 기습적으로 예포대도소를 공격해오자 농민군은 서산지역으로 퇴각했다. 이후 관군의 무자비한 색출과 탄압이 계속되자 농민군은 운산 여미벌에 재결집 면천 승전곡에서 일본군 정예부대를 대퇴시켰다. 2만여 농민군은 서울공격을 위해 10월 25일 이곳 관작리에 주둔했다. 다음날 아침 홍주진압군은 농민군을 향해 포공격을 개시하자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숫자가 우세한 농민군은 일시 흩어졌다가 포위공격하여 진압군을 패퇴시키고 예산관아를 점령했다. 한나절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대장 김병돈, 영관 이창욱과 수백여 유회군이 전사했고 군량미를 대주던 간량리 출신 농민군 박응하 선생이 목숨을 잃어 농민군보다 진압군 희생이 컸다. 관작리 전적지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새세상을 열망했던 동한농민군과 진압군 사이 서로 죽여야만 했던 참혹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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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 동학혁명기념탑
예산동학농민혁명 기념탑은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내에 위치해있다. 예산동학농민혁명 기념탑은 평등과 평화 등 내포 동학농민혁명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 내포 동학농민혁명 최대 집결지의 의미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하였다.1894년 9월 18일 동학교주 최시형의 기포령에 따라 9월 그믐 예산을 비롯한 내포지역도 2차 봉기인 동학농민혁명이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내포동학의 조직인 덕포 박인호, 예포 박덕칠의 농민군은 삽교성리에 예포대도소를 설치하고 10월 7일 대흥관아를 점령했으나 홍주진압군이 기습적으로 예포대도소를 공격해오자 농민군은 서산지역으로 퇴각했다. 이후 관군의 무자비한 색출과 탄압이 계속되자 농민군은 운산 여미벌에 재결집 면천 승전곡에서 일본군 정예부대를 대퇴시켰다. 2만여 농민군은 서울공격을 위해 10월 25일 이곳 관작리에 주둔했다. 다음날 아침 홍주진압군은 농민군을 향해 포공격을 개시하자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숫자가 우세한 농민군은 일시 흩어졌다가 포위공격하여 진압군을 패퇴시키고 예산관아를 점령했다. 한나절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대장 김병돈, 영관 이창욱과 수백여 유회군이 전사했고 군량미를 대주던 간량리 출신 농민군 박응하 선생이 목숨을 잃어 농민군보다 진압군 희생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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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상 묘
신현상(1905 - 1950)의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호는 일연(一鳶)이다. 호적상의 이름은 신현정(申鉉鼎)이다. 1929년 상해로 건너 가 상해 노동대학을 수료하고,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 국내로 돌아왔다. 그는 고향인 예산에서 정미업을 하던 최석영(崔錫榮)과 협조하여 1930년 2월 호서은행(湖西銀行) 예산지점에서 위조 환증을 이용하여 5만 8천원을 인출하는 데 성공, 중국으로 탈출하였다. 이에 그가 북경(北京)까지 무사히 도착하였다는 소식에 접한 독립투사들은 벅찬 희망에 부풀었고, 상해에서 활약하던 김 구(金九)는 정화암(鄭華岩)으로 하여금 북경으로 향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행히도 천진(天津) 일본영사관 경찰에 탐지되어 1930년 4월 30일에 체포되고 말았다. 본국으로 압송된 그는 1930년 12월 2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그가 전달한 자금의 일부는 동지들의 무정부주의운동 자금으로 활용되어, 유자명(柳子明)·장도선(張道善)·정해리(鄭海理) 등은 1930년 4월 20일 상해 법계(法界)에서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의 결맹식을 거행하고 선언강령 규약을 발표하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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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상 추모비
신현상(1905 - 1950)의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호는 일연(一鳶)이다. 호적상의 이름은 신현정(申鉉鼎)이다. 1929년 상해로 건너 가 상해 노동대학을 수료하고,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 국내로 돌아왔다. 그는 고향인 예산에서 정미업을 하던 최석영(崔錫榮)과 협조하여 1930년 2월 호서은행(湖西銀行) 예산지점에서 위조 환증을 이용하여 5만 8천원을 인출하는 데 성공, 중국으로 탈출하였다. 이에 그가 북경(北京)까지 무사히 도착하였다는 소식에 접한 독립투사들은 벅찬 희망에 부풀었고, 상해에서 활약하던 김 구(金九)는 정화암(鄭華岩)으로 하여금 북경으로 향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행히도 천진(天津) 일본영사관 경찰에 탐지되어 1930년 4월 30일에 체포되고 말았다. 본국으로 압송된 그는 1930년 12월 2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그가 전달한 자금의 일부는 동지들의 무정부주의운동 자금으로 활용되어, 유자명(柳子明)·장도선(張道善)·정해리(鄭海理) 등은 1930년 4월 20일 상해 법계(法界)에서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의 결맹식을 거행하고 선언강령 규약을 발표하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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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종 순국기념비
김한종(1883 - 1921)의 자는 경수, 호는 일우이다. 의병장 민종식(閔宗植)의 휘하에서 소모관(召募官)으로 활약한 김재정(金在貞)의 맏아들이다. 국권이 일제에 의하여 침탈당하자 구국을 맹세하고 1915년 박상진(朴尙鎭)·우재룡(禹在龍)·권영만(權寧萬)·양제안(梁濟安)·김경태(金敬泰) 등과 함께 대구에서 비밀결사인 광복회(大韓光復會)를 조직하였다. 광복회는 1916년 노백린(盧伯麟)·김좌진(金佐鎭) 등 동지를 규합하여 전국 규모의 독립운동단체로 거듭났다. 김한종은 충청지부장으로 임명되어 총사령 박상진과 더불어 각지의 부호로부터 국권회복운동의 자금을 거두었다. 1918년 1월에는 김경태·임봉주(林鳳柱)를 파견하여 친일 악질관리인 충청남도 아산의 도고면장(道高面長) 박용하(朴容夏)를 사살하였다. 그해 1월 조직이 발각되면서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2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경성복심법원은 1919년 9월 22일 기각하였다. 다시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되었다. 1921년 8월에 총사령 박상진과 함께 처형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