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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3.1운동 사적지 표지석(온양초등학교)
1919년 3월 14일 전후로 아산군 거의 모든 면에서 만세 운동 및 시위가 있었는데, 3월 11일 온양공립보통학교(현 온양초등학교)에서 일어난 시위가 아산군의 첫 만세 시위였다. 이 시위는 학생들이 학교 운동장에 뛰어나와 만세시위를 하면서 시작되었고, 일본인 교장이 학생들을 설득하면서 일단 해산되었다. 하지만 다음 날 일부 학생들이 온양 장터에서 주민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이어감으로써 아산군 전반에 만세 시위가 번지게 되었다. 현재 아산시와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 아산시추진위원회에 의해 아산시 읍내동 온양초등학교 교정 내에 위 시위 내용을 기록한 표지석이 건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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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3.1운동 사적지 표지석(인주면 걸매리)
1919년 4월 1~2일 아산군 거의 모든 면에서 봉화 시위가 있었다. 아산군 일대의 봉화 시위는 장소와 운동 상황이 특정되지 않지만 주민들의 증언으로 미루어보아 봉화 시위의 규모가 각 면당 약 600명으로 추정된다. 4월 2일 밤 8시경에 인주면 걸매리 주민들이 안말 갯둑 너머(현재 바다)에서 불을 피우고 만세를 불렀다고 전해진다. 주민분들의 증언에 의하면 시위 참여자들은 이 만세운동으로 인해 체포되어 구금되거나 태형이 집행되는 등의 처분을 받았다고 한다. 현재 아산시와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 아산시추진위원회에 의해 아산시 인주면 걸매리 바닷가에 위 시위현장을 표시하는 표지석이 건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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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3.1운동 사적지 표지석(탕정면 매곡리)
1919년 4월 1일을 전후로 아산군 거의 모든 면에서 봉화 시위가 있었다. 아산군 일대의 봉화 시위는 장소와 운동 상황이 특정되지 않지만 주민들의 증언으로 미루어보아 봉화 시위의 규모가 각 면당 약 600명으로 추정된다. 3월 31일 밤 8시경 탕정면, 염치면, 배방면 등에 있는 산 정상에서 횃불을 올리고 2,500여 명의 군중이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현재 아산시와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 아산시추진위원회에 의해 아산시 탕정면 매곡리에 위 시위현장을 표시하는 표지석이 건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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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3.1운동 사적지 표지석(탕정면 명암리)
1919년 4월 1일을 전후로 아산군 거의 모든 면에서 봉화 시위가 있었다. 아산군 일대의 봉화 시위는 장소와 운동 상황이 특정되지 않지만 주민들의 증언으로 미루어보아 봉화 시위의 규모가 각 면당 약 600명으로 추정된다. 3월 31일 밤 8시경 탕정면, 염치면, 배방면 등에 있는 산에서 횃불을 올리고 2,500여 명의 군중이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탕정면에서 봉화가 오른 곳은 명암리 장무기마을 쪽이었다. 장무기마을 서남쪽 산줄기인 새매에서 주민들이 봉화를 올린 것이다. 현재 아산시와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 아산시추진위원회에 의해 아산시 탕정면 명암리에 위 시위현장을 표시하는 표지석이 건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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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한수 현충비
충남 최초 만세 운동지는 예산이었으며, 한내장터(한내장)에서 열린 한내장 만세운동에 5000여 명이 참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내장터는 내포 일대에서 열리던 가장 큰 장이었으며, 3일과 8일에 열리는 5일장이었고, 주로 내포주민들의 생필품 거래가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고덕만세공원(고덕4.3만세공원)에는 다양한 3.1 만세운동 관련 사적이 존재하는데, 한내장 만세운동에서 희생되신 인한수 의사의 현충비도 존재한다. 인한수(1881-1919)는 충남 예산(禮山) 사람으로, 1919년 4월 3일 예산군 고덕면(古德面) 장날에 대천(大川)장터에 모인 시위군중을 이끌고 대천교(大川橋) 옆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후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대열의 선두에서 활동하였다. 그때 일헌병과 일경들이 휘두른 총검으로 인하여 많은 군중이 부상당하는 것을 보고 격분하였고, 말을 타고 있던 일군 수비대장에게 달려들어 다리를 끌어내렸고, 말에서 떨어진 수비대장이 휘두른 칼에 맞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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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공원 사적비
충남 최초 만세 운동지는 예산이었으며, 한내장터(한내장)에서 열린 한내장 만세운동에 5000여 명이 참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내장터는 내포 일대에서 열리던 가장 큰 장이었으며, 3일과 8일에 열리는 5일장이었고, 주로 내포주민들의 생필품 거래가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고덕만세공원(고덕4.3만세공원)에는 다양한 3.1 만세운동 관련 사적이 존재하는데, 그중 고덕만세공원 조성 사적비에는 이 공원의 설립 계기와 경과, 내력이 기재되어 있다. 이외에도 1919년 4월 3일에 일어난 한내장 만세운동에서 희생되신 인한수 의사와 장문환 의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사당인 대의사와 한내장 4.3 독립만세운동 기념탑을 중심으로 인한수 의사 현충비와 장문환 의거 기념비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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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환 의거기념비
충남 최초 만세 운동지는 예산이었으며, 한내장터(한내장)에서 열린 한내장 만세운동에 5000여 명이 참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내장터는 내포 일대에서 열리던 가장 큰 장이었으며, 3일과 8일에 열리는 5일장이었고, 주로 내포주민들의 생필품 거래가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고덕만세공원(고덕4.3만세공원)에는 다양한 3.1 만세운동 관련 사적이 존재하는데, 한내장 만세운동에서 희생되신 장문환의 의거기념비도 존재한다. 장문환(1887-1947)은 충남 예산(禮山) 사람으로 1919년 4월 3일 그는 예산군 고덕면(古德面) 장날에 대천(大川)장터에 모인 1,000여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장터를 누비고 다니면서 시위를 전개하다가 시위자 7명이 일경에게 검거되자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에서 시위를 하는 등 활동하였다. 이어 일본헌병의 무차별 발포로 시위자 한명이 순국하자 격분한 나머지 시위군중 15명과 함께 시체를 헌병주재소로 운반하여 놓고 "왜 백성을 죽였는가? 이 사람을 살려내라"고 항변하였으나 적헌병 오장(伍長)인 주재소장이 주재소 밖으로 쫓아내려 하자 붙잡아 구타하다가 붙잡혔으며,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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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기념비(예산)
충남 최초 만세 운동지는 예산이었으며, 한내장터(한내장)에서 열린 한내장 만세운동에 5000여 명이 참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내장터는 내포 일대에서 열리던 가장 큰 장이었으며, 3일과 8일에 열리는 5일장이었고, 주로 내포주민들의 생필품 거래가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예산군 한내장 4.3만세운동 유적지는 충남 예산군 고덕면 대천리 647-4에 위치하며, 대의사라는 사당이 있다. 대의사는 1919년 4월 3일에 일어난 한내장 만세운동에서 희생되신 인한수 의사와 장문환 의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사당이다. 그 옆에 한내장 4.3 독립만세운동 기념탑을 중심으로 인한수 의사 현충비와 장문환 의거 기념비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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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춘추대의비
최익현(1833~1907)은 조선 후기의 지사이다. 1833년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 화서 이항로의 제자이며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典籍)·사헌부 지평(持平)·사간원 정언(正言)·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1868년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관직을 삭탈당했다. 이후 일본과의 통상조약과 단발령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며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林秉瓚)·임락(林樂)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체포되었다. 그러나 순창에서 패하여 대마도에 유배되었고 그 곳에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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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오 홍주의병 출진기념비
병오홍주의병 출진 기념비는 1906년 병오홍주의병이 첫 깃발을 올린 장소인 이 곳 광시장터를 기념하기 위해 1987년 5월 예산군에서 세운 것이다. 이 기념비가 세워진 곳 광시장터는 1906년 3월 14일 민종식 전참판을 총사로 하는 홍주의병이 비밀리에 집결하여 왜적을 토벌하려는 충천의 기세로 깃발을 높이 세우고 박창노, 성달영, 안병찬, 박윤식 등 참모들과 함께 홍주로 진군한 역사적인 곳이다.병오홍주의병은 1895년 을사늑약의 소식을 듣고 안병찬, 채광묵, 박창로, 이세영 등이 봉기한 의병이며, 전참판 민종식을 찾아가 총수의 책임을 맡아 달라고 청하였으며, 이에 따라 민종식 대장을 중심으로 결성된 의병이다. 1906년 3월 광시장터에서 대장단을 세워 천제를 올리고, 이튿날 홍주성을 공격하였으나 관군의 저항에 부딪쳤다. 다음날 청양의 합천으로 진을 옮겼으나 공주에서 파견한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의진은 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용규가 모은 의병을 중심으로 재기하였으며, 남포전투와 홍주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몇 번의 일본 경찰과 헌병대의 공격에도 전세가 의병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자 일본군은 군대를 파견하는데, 치열한 시가전을 감행하면서 맞서 싸웠지만 결국 홍주성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300여 명이 전사하고, 80여 명이 체포되었으며, 9명은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1906년 11월 20일, 예산을 활동의 근거지로 삼고, 민종식을 다시 대장에 추대하기로 뜻을 모았지만, 일진회원의 밀고로 인해 여러 명이 체포되었다. 이후 일제는 불안을 느끼고 중요 인물들에 대한 감시와 학대를 강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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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준 추모비
김상준 의사는 충남 예산(禮山) 사람이다. 국권상실 이후 1916년 김한종(金漢鍾)·김경태(金敬泰)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안을 논의하여 1917년 말까지 총독부를 습격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별적인 투쟁보다는 조직적인 활동이 필요함을 인식하고 비밀결사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하였다. 대한광복회는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의 일부 인사들과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이 제휴하여 결성한 혁명단체로서, 국내에서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의 독립군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확보한 혁명기지를 거점으로 적시에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행동지침은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강령이었고 각처에 곡물상을 설립하여 혁명기지로 삼는 한편, 혁명군을 군자금 조달, 독립군 및 혁명군의 기지건설, 의협투쟁으로서의 총독처단 계획 및 친일부호 처단 등으로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김한종·이재덕(李在德)과 함께 광복회의 고시문을 작성하여 지방 자산가들에게 우송하였으며 또한 김재창(金在昶)·정태복(鄭泰復)과 더불어 정인교(鄭仁敎)를 비롯한 지방 자산가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펴던 중 그는 1917년 일경에 붙잡혀 징역 4년 형을 선고받고 1년여의 옥고를 치른 후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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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묵 묘
김원묵 선생은 충남 예산(禮山) 사람으로 그의 친척으로 애국지사 김재풍, 김재정, 김한종 의사가 있다. 1917년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하여 항일활동을 폈는데, 대한광복회는 1915년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의 일부 인사들이 제휴하여 결성한 혁명단체이다. 동회는 국내에서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의 독립군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확보한 혁명기지를 거점으로 적시에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전국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에 관한 포고문을 발송했는데, 그는 김한종(金漢鍾)·김경태(金敬泰)·이재덕(李在德)·김상준(金商俊) 등과 함께 충청도 지방 부호들의 명단을 작성한 후 고시문·포고문 등을 우송하며 군자금 수합활동을 폈다. 또한 김한종·김경태·임봉주(林鳳柱) 등이 1918년 1월 충남 아산군(牙山郡) 도고면(道高面) 면장으로 친일행동을 자행하던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할 때, 이에 필요한 편의를 제공했으며 처단 시 사용한 권총을 보관하고 있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1919년 2월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