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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시 선장면 독립운동가 마을길
아산시 선장면 독립운동가 마을길 표지판은 아산시 4.4만세운동 기념공원 내에 위치하는데, 안내판에는 독립운동가 묘소와 집터, 만세 시위 진행지, 기념시설 등에 관련한 정보가 적혀있다. 아산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 발표에 영향을 받았고, 3월 11일, 온양공립보통학교에서 학생들이 시작한 이후로 4월 4일까지 전개되었다. 이중 가장 치열했던 만세운동이 4.4 아산독립만세운동인데, 1919년 4월 4일 정수길이 서몽조, 임천근, 오상근과 장날에 만세시위를 하기로 하였고, 선장면의 부두 노동자를 겸한 반농반노의 주민들이 선장 장날 군덕리 시장에서 200여 명이 시위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김천봉이 군중들의 선두에 서고 정수길 등이 막대기를 휘두르며 군중들을 이끌고 선장헌병주재소로 이동했으며, 군중들은 주재소 구내로 진입하여 창문, 유리 등을 파괴했다. 이후 주재소 헌병들이 온양에서 출동한 보병 80연대 상등병 이하 7명의 지원을 받아 총기를 발포하여 1명이 순국, 114명이 체포된 항일 독립운동이다. 4.4 아산독립만세운동이 선장면에서 일어난 이유는 포구(배가 드나드는 항구)가 발달하여 주변 지역과 교류가 활발했고, 인천과의 연결된 뱃길을 통해서 많은 물자가 들어왔으며, 장날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아산시는 선장면(선장시장)의 역사성 및 상징성을 반영하여 지역 특화장소로 선정하였으며, 4.4 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를 확대 발전시켜 즐길거리와 볼거리를 제공하고 주민 공동체 의식 함양을 도모하기 위하여 해당 공간을 조성하였다. 4.4만세운동기념공원에는 기념상뿐만 아니라 기미년 선장 4.4 독립만세운동사 기념비, 독립 유공자의 공훈내역을 담은 부조, 유형을 받은 참여자 명단 등이 함께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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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독립만세길
선장독립만세길 안내판은 선장포 노을공원 근처에 위치하는데, 안내판에는 4.4아산독립만세운동사와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인물에 대한 정보, 그리고 4.4아산독립만세운동과 관련한 사적들이 지도 위에 표시되어있다. 아산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 발표에 영향을 받았고, 3월 11일, 온양공립보통학교에서 학생들이 시작한 이후로 4월 4일까지 전개되었다. 이중 가장 치열했던 만세운동이 4.4 아산독립만세운동인데, 1919년 4월 4일 정수길이 서몽조, 임천근, 오상근과 장날에 만세시위를 하기로 하였고, 선장면의 부두 노동자를 겸한 반농반노의 주민들이 선장 장날 군덕리 시장에서 200여 명이 시위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김천봉이 군중들의 선두에 서고 정수길 등이 막대기를 휘두르며 군중들을 이끌고 선장헌병주재소로 이동했으며, 군중들은 주재소 구내로 진입하여 창문, 유리 등을 파괴했다. 이후 주재소 헌병들이 온양에서 출동한 보병 80연대 상등병 이하 7명의 지원을 받아 총기를 발포하여 1명이 순국, 114명이 체포된 항일 독립운동이다. 4.4 아산독립만세운동이 선장면에서 일어난 이유는 포구(배가 드나드는 항구)가 발달하여 주변 지역과 교류가 활발했고, 인천과의 연결된 뱃길을 통해서 많은 물자가 들어왔으며, 장날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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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신창현 기포현장 표지석
동학농민혁명 신창현 기포석이 들어선 선장 노을포 공원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신창현에 속한 선장포구와 장터였으며, 보국안민의 기치로 봉건체제 타파와 일제 침략으로부터 국권수호를 위해 동학농민군이 기포(봉기)한 곳이다. 아산의 동학혁명은 음력 10월 5일 아산관아를 점령하고 내포지역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 동학농민군 접주(지도자)는 곽완, 김경삼, 이신교, 정태영 등으로 이후 정태영 아들 정수길(규희)은 1919년 3.1운동 때 선장 장터에서 4.4만세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1894년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전국 120여개 군현에서 봉기, 조선 관군과 지배층의 군사력에 비해 압도적이었으나 조정이 청에 원병요청을 했다가 일본에 장악된 후 친일내각으로 인해 혁명을 완수하지 못했다. 특히 아산은 백석포에 진주한 일본군이 청을 격파하고 그 위세를 더해 직접적인 고통을 가해오자 반외세(反外勢), 척왜(斥倭)의 분위기가 크게 불타올라 동학농민군이 9월 초부터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2차 기포를 시작했을 때, 아산지역 백성들도 함께 봉기했다. 아산지역의 동학농민군은 당시(음력 10월 5일) 아산현을 혁파하는 등 내포지역을 중심으로 처절히 싸웠으나, 결국 일본군에 장악된 조선 친일내각과 일본군에 의해 엄청난 희생을 당하고, 혁명은 좌절됐다. 하지만 그 정신은 3.1운동과 항일투쟁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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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한일 묘
곽한일(1896-1936)의 자는 원우, 호는 장암이며, 대한제국기 때 민종식 의진에서 돌격장, 소모장으로 활약한 의병장이다. 1896년 안성방면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일본군과 진위대가 합세하여 공격해옴으로써 아산·예산·청양 등지로 잠행하며 동지를 규합하는 데 힘썼다. 1906년 봄에는 홍산(鴻山)·보령지방에서 민종식(閔宗植)을 중심으로 한 홍주의병에 가담하여 돌격장·소모장(召募將)으로 홍주성 공격에 크게 활약하였다. 홍주성이 일본군에 함락되자, 이용규(李容珪)·박윤식(朴潤植)·김덕진(金德鎭) 등과 활동 중 일진회의 밀고로 붙잡혀, 1907년 7월 종신유배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 투옥된 뒤 다시 전라남도 지도에 유배되었다가 1912년에 풀려났다. 이후 의병을 일으키기 위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군자금 모금에 힘쓰다가 1914년에 붙잡혀 다시 유배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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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한일 송덕비
곽한일(1896-1936)의 자는 원우, 호는 장암이며, 대한제국기 때 민종식 의진에서 돌격장, 소모장으로 활약한 의병장이다. 1896년 안성방면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일본군과 진위대가 합세하여 공격해옴으로써 아산·예산·청양 등지로 잠행하며 동지를 규합하는 데 힘썼다. 1906년 봄에는 홍산(鴻山)·보령지방에서 민종식(閔宗植)을 중심으로 한 홍주의병에 가담하여 돌격장·소모장(召募將)으로 홍주성 공격에 크게 활약하였다. 홍주성이 일본군에 함락되자, 이용규(李容珪)·박윤식(朴潤植)·김덕진(金德鎭) 등과 활동 중 일진회의 밀고로 붙잡혀, 1907년 7월 종신유배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 투옥된 뒤 다시 전라남도 지도에 유배되었다가 1912년에 풀려났다. 이후 의병을 일으키기 위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군자금 모금에 힘쓰다가 1914년에 붙잡혀 다시 유배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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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규 순절의 땅 기념비
이남규(1855-1907)의 자는 원팔, 호는 수당이며, 1855년 11월 3일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향리는 예산이다. 1875년 과거 합격 이후 관직 생활을 하다 을미사변 이후 향리인 예산으로 내려와 왜적을 물리칠 것과 척신(戚臣)의 머리를 베라는 상소문을 올리며 반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6년 민종식 의병장의 홍주의진 선봉장에 임명되었으나 홍주성에 가지는 않았다. 이후 홍주의진이 크게 패하자 민종식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의병 활동을 이어나가기 위한 거사를 준비했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1907년 8월 19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욕된 일은 당하지 않으리라."라고 외치며 압송되었는데, 일본군이 통역관을 통해 일본의 고위 관직을 제시하며 회유를 하였지만, 처음했던 다짐처럼 단호히 거부하였고, 맏아들 이충구와 가마꾼 김응길과 함께 일본군 칼에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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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3.1운동 사적지 표지석(읍내리 만세시위현장2)
1919년 4월 1~2일 아산군 거의 모든 면에서 만세 시위가 있었다. 아산군 일대의 만세 시위는 장소와 운동 상황이 특정되지 않지만 주민들의 증언으로 미루어보아 만세 시위의 규모가 각 면당 약 600명으로 추정된다. 4월 1~2일 밤 8시경에 읍내리, 오목리 등 신창면 주민들 다수가 만세를 부르며 학성산으로 올라갔고 산 정상에서 박진화, 이덕균, 정윤흥, 김양순, 강달성 등은 약 200명의 군중들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현재 아산시와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 아산시추진위원회에 의해 아산시 신창면 읍내리 310에 위 시위현장을 표시하는 표지석이 건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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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3.1운동 사적지 표지석(읍내리 만세시위현장)
1919년 4월 1~2일 아산군 거의 모든 면에서 만세 시위가 있었다. 아산군 일대의 만세 시위는 장소와 운동 상황이 특정되지 않지만 주민들의 증언으로 미루어보아 만세 시위의 규모가 각 면당 약 600명으로 추정된다. 4월 1~2일 밤 8시경에 읍내리, 오목리 등 신창면 주민들 다수가 만세를 부르며 학성산으로 올라갔고 박진화, 이덕균, 정윤흥, 김양순, 강달성 등은 약 200명의 군중들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현재 아산시와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 아산시추진위원회에 의해 아산시 신창면 읍내리 357에 위 시위현장을 표시하는 표지석이 건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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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리 봉화만세시위 현장 표지석
1919년 4월 1~2일 아산군 거의 모든 면에서 봉화 시위가 있었다. 아산군 일대의 봉화 시위는 장소와 운동 상황이 특정되지 않지만 주민들의 증언으로 미루어보아 봉화 시위의 규모가 각 면당 약 600명으로 추정된다. 4월 1~2일 밤 8시경에 읍내리, 오목리 등 신창면 주민들 다수가 만세를 부르며 학성산으로 올라갔고 산 정상에서 불을 피우고 박진화, 이덕균, 정윤흥, 김양순, 강달성 등은 약 200명의 군중들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현재 아산시와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 아산시추진위원회에 의해 아산시 신창면 황산리 326-10에 위 시위현장을 표시하는 표지석이 건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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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린 묘
진수린(1898-1930)은 충남 아산시 신창면 신달리 출신의 항일 독립운동가이며, 1922년경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로부터 군자금 모집을 위해 입국한 사촌 처남 최익수(崔益秀)의 임무를 도왔다. 자신이 근무하던 아산금융조합의 공금을 빼내어 최익수·이종락(李鍾洛)과 함께 중국 상해로 도항하였으며, 그 공금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헌납한 후 임시정부의 재산계 서기로 임명되어 광동(廣東)·무창(武昌)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1927년 11월 상해 한인독립청년회 등을 중심으로 북경, 광둥, 무창 등 중국 각지의 한인독립청년회 대표가 모여 각 청년회를 통합, 비밀결사체인 재중국본부 한인청년동맹을 창립할 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8년 12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무를 가지고 비밀리에 귀국하여 고향인 아산 신창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30년 8월 병을 얻어 가석방된 뒤, 1930년 9월에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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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3.1운동 사적지 표지석(중방리)
1919년 4월 1일부터 2일 까지 아산군 거의 모든 면에서 봉화 시위가 있었다. 아산군 일대의 봉화 시위는 장소와 운동 상황이 특정되지 않지만 주민들의 증언으로 미루어보아 봉화 시위의 규모가 각 면당 약 600명으로 추정된다. 4월 1~2일 밤 8시경에 읍내리, 오목리 등 신창면 주민들 다수가 만세를 부르며 학성산으로 올라갔고 산 정상에서 불을 피우고 박진화, 이덕균, 정윤흥, 김양순, 강달성 등은 약 200명의 군중들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현재 아산시와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 아산시추진위원회에 의해 아산시 염치읍 중방리 38-2에 위 시위현장을 표시하는 표지석이 건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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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내리 봉화만세시위 현장 표지석
1919년 4월 1~2일 아산군 거의 모든 면에서 봉화 시위가 있었다. 아산군 일대의 봉화 시위는 장소와 운동 상황이 특정되지 않지만 주민들의 증언으로 미루어보아 봉화 시위의 규모가 각 면당 약 600명으로 추정된다. 4월 2일 오후 8시에 주민 다수가 영인산에서 봉화시위를 시작했으며, 이를 계기로 상성리 뒷산 대흥당, 신운리 뒷산 형제봉, 백석포 뒷산 및 성내리 뒷산에서도 횃불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현재 아산시와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 아산시추진위원회에 의해 아산시 영인면 성내리 769-1에 위 시위현장을 표시하는 표지석이 건립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