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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환 집
서장환(1890 ~ 1970)은 대구 달성출신으로 서성준(徐聖濬이라는 이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당하여 국권이 침탈되자 항일 비밀결사조직 상의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과 의병가족을 도왔고, 만주와 상해지역으로 군자금을 송달하였다. 또한 기미년 3.1운동 때에는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배포하다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끝에 병으로 풀려났다. 1920년 상해 임시정부를 도와 군자금 모금에 힘썼고, 1921년 자유신보를 간행하여 일제식민지의 부당성을 전세계에 알리기에 힘썼다. 그 후 일본경찰의 끊임없는 감시와 구속을 피하여 1933년 계룡산 신도안으로 일가족이 이주한 후 항일 비밀결사 십이일민회를 조직하였으며, 계롱산에서 동흥의숙(東興義塾)이란 서당을 열고 청소년 교육과 민족의식 고취에 힘쓰면서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등 일제에 항거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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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을규 집
이을규(1894 - 1972)는 3.1독립운동 직후 전 조선민족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결성한 대동단에 가입하여 1919년 10월 대동단의 본부를 상해로 이전하기로 계획하고, 그해 10월 10일 동단의 총재 김가진을 1차로 망명시킨 뒤 의친왕(懿親王)의 상해망명을 추진하였다.강태동과 함께 상해에서 귀국한 그는 의친왕의 망명을 추진하는 한편 상해임시정부로부터 송달된 각종 선전물 3천5백매를 배포하면서 적극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정남용과 함께 의친왕(懿親王)을 상해까지 수행하는 임무를 맡았던 그는 그해 11월 9일 서울을 출발하였으나, 이 사실을 탐지한 일경의 추격을 받아 이들 일행은 11월 11일 만주 안동역에서 피검되었는데, 이 때 그는 일제의 포위망을 뚫고 검거를 피할 수 있었다.하지만 1920년 1월 재입국했다가 붙잡히고 말았다.결국 그는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에 다시 상해로 건너가 무력투쟁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무기제조 및 무장훈련에 힘을 쏟았다. 그 후 만주로 넘어간 그는 1929년 7월 김좌진 등이 주도한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에 참여면서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 계열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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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직 집
배영직(1882 - 1926)은 1919년 충남 논산시 두마면에서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옥고를 치렀다. 지역의 유지이자 자산가인 부친 배대식(裵大植)과 함께 농촌자력갱생운동을 펼쳐왔고 인근의 빈민들에게 양곡을 나누어 주는 등 선행을 베풀어 주민들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9년 4월 1일 오후 4시경 두계장터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자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날 오후 6시경 장터에 운집한 군중들을 향해 독립만세를 선창하였고, 이에 격동된 장사꾼들이 시위대를 형성하여 다시 만세시위운동으로 전개되었으며 그 시위군중의 수가 1,000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또한 시위대의 일부는 일제침략과 수탈의 교량 역할을 하던 철도선로의 파괴를 기도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 일로 체포되어 1919년 4월 18일 공주지방법원 강경지청에서 보안법, 공무집행 방해 등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그 후 1924년에도 만세시위를 하다 다시 체포되어 군산형무소에서 2년 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지 3일 만에 고문 여독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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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의 독립운동가 비
한훈(1889 - 1950)은 1913년 대한광복단을 조직하였고, 1919년에는 조선독립군정서에 가입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러던 중 1920년 일본 고관들을 암살할 계획을 추진하던 중 체포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배영직(1882 - 1926)은 농촌자력갱생운동을 펼쳤고, 1919년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지수(1845 - 1911)는 중추원의관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고, 일제가 그를 회유하기 위해 노인은사금을 주자 거절하며 칼로 자결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양기하(1878 - 1932)는 교육사업에 전념하여 젊은이들에게 항일민족의식을 심어주었다.그 후 남만에서의 마지막 무장항일투쟁의 역사를 장식한 지도자였으나 일제의 습격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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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단 결사대 기념탑
일제의 침략과 국망에 처하여 우국지사들은 신도안에 모여 비밀결사대를 조직하고 항일투쟁의 기지로 삼았다. 광복결사대는 김한종, 박상진, 채기중 등 광복회원 수십 명이 체포되자 한훈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과 협의하여 1920년 조직한 항일단체이다. 이들은 해방 후 독립정신에 입각하여 광복단을 재건하였다. 재건된 광복단은 서울 견지동에 총본부를 신도안에는 지부를 두었다.신도안 지부에서는 중봉산 뒤의 충렬사에 순국선열봉안소를 설치하고 임시정부에서 정한 순국선열기념일에 매년 관민 합동으로 추도제를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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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진 공적비
배영진(1864 - 1919)은 1912년 경술국치 이후 만주로 건너가 1912년 만주 동삼성에서 한족회가 조직되자 지방연락책으로 일하였다. 한상룡(李相龍), 김대락(金大洛), 김동삼(金東三) 등과 이주동포의 정착을 협의하고 황무지 개척과 청년교육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1919년 3월 국내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만주에서 태극기를 만들어 독립만세운동에 활동하시다 신병으로 이국땅에서 향년 56세로 서거하셨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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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훈 집
한훈(1890 - 1950)은 악질 친일 군수인 직산 군수를 사살하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경술국치 후 귀국하여 1913년 채기중(蔡基中),유창순(庾昌淳),유장열(柳璋烈),장두환(張斗煥) 등과 같이 풍기(豊基)에서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을 조직하였다. 1919년 5월는 만주 길림성에서 김동순(金東淳)등과 함께 조선독립군정서에 가입하였다. 같은 해 2월말경 중국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김철, 이동휘, 이동녕, 이시영과 회견하고, 서울을 중심으로 조선독립군사령부라는 독립단을 조직할 것을 승인받고 3월에 서울로 돌아와 박문용과 함께 준비에 착수하였다. 1919년 8월에는 일본 고관들을 암살하기 위해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이때 김상옥(金相玉)등의 암살단과 합류하여 계획을 추진하던 중 체포되어 징역 8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의병활동이 발각되어 재차 23년형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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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훈 기념관
한훈(1890 - 1950)은 악질 친일 군수인 직산 군수를 사살하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경술국치 후 귀국하여 1913년 채기중(蔡基中), 유창순(庾昌淳), 유장열(柳璋烈), 장두환(張斗煥) 등과 같이 풍기(豊基)에서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을 조직하였다. 1919년 5월 만주 길림성에서 김동순(金東淳)등과 함께 조선독립군정서에 가입하였다. 같은 해 2월말 경 중국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김철, 이동휘, 이동녕, 이시영과 회견하고, 서울을 중심으로 조선독립군사령부라는 독립단을 조직할 것을 승인받고 3월에 서울로 돌아와 박문용과 함께 준비에 착수하였다. 1919년 8월에는 일본 고관들을 암살하기 위해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이때 김상옥(金相玉)등의 암살단과 합류하여 계획을 추진하던 중 체포되어 징역 8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의병활동이 발각되어 재차 23년 형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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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표 순절지(강학루)
오강표(1843 - 1910)은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월가리에서 태어났다.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몰두한 유생으로서,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즉각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형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또한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일제치하에서는 살 수 없다고 선언하고 절명사를 지어 공주향교 명륜당의 벽에 붙이고 일장통곡한 후에 강학루에서 목을 매어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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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표 순의기적비
오강표(1843 - 1910)은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월가리에서 태어났다.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몰두한 유생으로서,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즉각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형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또한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일제치하에서는 살 수 없다고 선언하고 절명사를 지어 공주향교 명륜당의 벽에 붙이고 일장통곡한 후에 강학루에서 목을 매어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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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 추모비
오동진(1889 - 1944)은 김좌진, 김동삼과 함께 만주 항일무장투쟁의 3대 명장으로 꼽힌다. 호는 송암(松菴), 이명은 순천(順天)이다. 평양의 대성학교를 졸업한 뒤 고향으로 내려와 일신학교를 설립하고 청소년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한 후 만주로 망명해 윤하진 등과 광제청년단 및 대한청년단연합회를 조직했다. 1920년에는 광복군 총영장이 되어 독립군을 편성하고 항일전투를 전개했다.그 후 1926년 고려혁명당을 조직해 일본 군사시설과 국내의 경찰관서 등을 파괴하다 체포되어 18년의 옥살이 끝에 1944년 충남 공주형무소에서 55세로 생을 마감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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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치 전적지, 동학혁명군 위령탑
우금치는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을 상대로 최후의 격전을 벌인 장소이다. 1894년 9월,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과 경제적 약탈을 규탄하며 반봉건·반외세의 기치를 내걸고 재봉기를 했다. 공주를 중심으로 전쟁을 이끌어 나가려던 동학농민군은 죽검으로 총에 맞서 싸우다 결국 거의 전멸하게 되었다. 우금치 싸움 후 전봉준이 체포되어 처형됨으로써 1년 동안 전개된 동학농민혁명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