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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전 흉상
김인전 목사는 충청남도 서천에서 출생하였다. 1906년 가산을 정리하여 교육계몽운동의 일환으로 한영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14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전주 서문교회 제 2대 담임목사로 1914-1919년까지 사역하였다. 1914년 독립운동 비밀결사회인 송죽형제회를 조직하고 1919년 3.1만세운동의 전라북도 지도자로 만세운동에 관여하였으며, 1920년 인성학교 교장으로 교육현장에서 직접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에 뽑히고, 재무예산위원·정무조사특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비서국장 겸 임시공채관리국장에 임명되고, 1921년 안창호 등과 함께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를 조직하였다. 1922년 임시의정원 전원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제4대 의장에 뽑혔다. 같은 해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와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였다. 1923년 5월 과로로 순직하였다. 이후 상하이 만국공묘에 묻혔다가, 1993년 8월 유해가 환국하여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1980년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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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풍 묘
이기풍 선생은 황해도 벽성(碧城) 사람이다. 1919년 3월 10일 진학철(陳學哲) 등과 함께, 사리원(沙里院) 장날을 이용하여 서종면 단장리(西鍾面丹墻里)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는 1916년 이래 서울과 평양간의 독립운동·지하조직 연락책으로서 활약하며, 벽성군에서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여 왔다. 1919년 3월 1일 이래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되자, 사인면 만화리(舍人面萬和里) 교회의 신도인 박기영(朴基永)과 연락하며,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제반준비를 마쳐놓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3월 10일 오전 9시, 그는 서종면 단장리에서 그곳 기독교인과 인근의 사리원장에 가는 주민들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는 2백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그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사리원에서 급히 출동한 일본 헌병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결국 이해 5월 29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혐의로 1년 6월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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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 집
김갑수(金甲洙)는 충남 서천(舒川) 사람이다. 1915년 월남 이상재(李商在)와 함께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가 남양(南陽)대학에 다니면서 여운형(呂運亨)·서병호(徐炳浩)·조동호(趙東祜) 등과 교유하였다. 그는 여운형이 이끄는 전 중국대학 축구 대표선수로 선발되어 필리핀에 원정을 가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세계에 호소하고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주장하였다. 또한 상해의 재해외(在海外) 조선인유학생회를 주도하였다. 1918년 애국동지들을 규합하고자 국내에 진입하였으나 군산에서 일경에게 붙잡혀 고문을 받다가 한국인 간수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상해로 갔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의정원 의원으로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이 당시 그는 임시정부 발행채권을 가지고 국내에 들어와 전북 임피(任陂) 등지에서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노력하였다. 그 후 1921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선으로 독일 베를린에 유학 중 베를린 고려학우회(高麗學友會)를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6년 귀국하여 이상재의 권유로 배재학교 교감으로 7개월간 근무하였으나, 일경의 탄압으로 북간도 용정(龍井)으로 건너가 동흥(東興)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1927년 다시 귀국한 그는 민족 자본의 육성을 위해 전북 완주 봉동에서 윤건중(尹建重)이 설립한 봉우산업조합에 참여하여 이사로 활동하다가 1938년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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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 묘
김갑수(金甲洙)는 충남 서천(舒川) 사람이다. 1915년 월남 이상재(李商在)와 함께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가 남양(南陽)대학에 다니면서 여운형(呂運亨)·서병호(徐炳浩)·조동호(趙東祜) 등과 교유하였다. 그는 여운형이 이끄는 전 중국대학 축구 대표선수로 선발되어 필리핀에 원정을 가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세계에 호소하고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주장하였다. 또한 상해의 재해외(在海外) 조선인유학생회를 주도하였다. 1918년 애국동지들을 규합하고자 국내에 진입하였으나 군산에서 일경에게 붙잡혀 고문을 받다가 한국인 간수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상해로 갔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의정원 의원으로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이 당시 그는 임시정부 발행채권을 가지고 국내에 들어와 전북 임피(任陂) 등지에서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노력하였다. 그 후 1921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선으로 독일 베를린에 유학 중 베를린 고려학우회(高麗學友會)를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6년 귀국하여 이상재의 권유로 배재학교 교감으로 7개월간 근무하였으나, 일경의 탄압으로 북간도 용정(龍井)으로 건너가 동흥(東興)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1927년 다시 귀국한 그는 민족 자본의 육성을 위해 전북 완주 봉동에서 윤건중(尹建重)이 설립한 봉우산업조합에 참여하여 이사로 활동하다가 1938년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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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엽 묘
박재엽(1894-1942)은 1919년 4월 29일 송기면(宋箕勉)이 주도하여 일으킨 마산면(馬山面) 신장리(新場里)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는데, 일본 경찰에 의해 주동자 송기면과 유성렬(劉性烈) 등 6명이 경찰출장소로 강제 연행되었다. 이에 박재엽은 고시상(高時相)·양재흥(梁在興) 등과 함께 시위군중을 지휘하여 경찰출장소로 몰려가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으며, 징역 3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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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재 추모비(한산면 종지리)
이상재(1851-1927)는 1881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파견할 때에 박정양(朴定陽)의 추천으로 일본의 국정을 시찰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개화사상을 갖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홍영식(洪英植)과 두터운 교분을 맺게 되었고, 1884년에 개화파들이 우정국을 개설하여 근대적 우편제도를 수립하고 홍영식이 그 총판이 되자 그의 요청으로 우정국 주사가 되었다. 갑신정변으로 인해 홍영식이 참살 당하자 낙향하였다. 1887년 박정양의 추천으로 2등 서기관에 임명되어 미국에 가게 되었고,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낙향하였다. 이후 1896년 서재필(徐載弼)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창립하는데 주동적 역할을 하여 중앙위원으로 선출되고 뒤이어 부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독립협회 회원들과 함께 서울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러시아의 내정간섭과 이권요구를 물리치는데 성공하였다. 1902년에는 옛 독립협회 동지들과 국정의 개혁을 논의하다가 개혁당(改革黨)으로 몰리어 투옥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고, 1907년 4월에는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원로회원으로서 활동하였다. 1908년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의 종교부 총무와 교육부장에, 1911년 4월에 황성기독교청년회 종교부장에 취임하였다. 1924년에 조선일보(朝鮮日報)사장에 추대되었고, 1927년 2월 완전독립, 절대독립노선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이 연합하여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新幹會)를 창립하자, 이상재는 그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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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재 집, 기념관
이상재(1851-1927)는 1881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파견할 때에 박정양(朴定陽)의 추천으로 일본의 국정을 시찰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개화사상을 갖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홍영식(洪英植)과 두터운 교분을 맺게 되었고, 1884년에 개화파들이 우정국을 개설하여 근대적 우편제도를 수립하고 홍영식이 그 총판이 되자 그의 요청으로 우정국 주사가 되었다. 갑신정변으로 인해 홍영식이 참살 당하자 낙향하였다. 1887년 박정양의 추천으로 2등 서기관에 임명되어 미국에 가게 되었고,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낙향하였다. 이후 1896년 서재필(徐載弼)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창립하는데 주동적 역할을 하여 중앙위원으로 선출되고 뒤이어 부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독립협회 회원들과 함께 서울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러시아의 내정간섭과 이권요구를 물리치는데 성공하였다. 1902년에는 옛 독립협회 동지들과 국정의 개혁을 논의하다가 개혁당(改革黨)으로 몰리어 투옥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고, 1907년 4월에는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원로회원으로서 활동하였다. 1908년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의 종교부 총무와 교육부장에, 1911년 4월에 황성기독교청년회 종교부장에 취임하였다. 1924년에 조선일보(朝鮮日報)사장에 추대되었고, 1927년 2월 완전독립, 절대독립노선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이 연합하여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新幹會)를 창립하자, 이상재는 그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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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재 수학지(봉서사)
이상재(1851-1927)의 호는 월남(月南)이며, 1881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파견할 때에 박정양(朴定陽)의 추천으로 일본의 국정을 시찰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개화사상을 갖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홍영식(洪英植)과 두터운 교분을 맺게 되었고, 1884년에 개화파들이 우정국을 개설하여 근대적 우편제도를 수립하고 홍영식이 그 총판이 되자 그의 요청으로 우정국 주사가 되었다. 갑신정변으로 인해 홍영식이 참살 당하자 낙향하였다. 1887년 박정양의 추천으로 2등 서기관에 임명되어 미국에 가게 되었고,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낙향하였다. 이후 1896년 서재필(徐載弼)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창립하는데 주동적 역할을 하여 중앙위원으로 선출되고 뒤이어 부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독립협회 회원들과 함께 서울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러시아의 내정간섭과 이권요구를 물리치는데 성공하였다. 1902년에는 옛 독립협회 동지들과 국정의 개혁을 논의하다가 개혁당(改革黨)으로 몰리어 투옥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고, 1907년 4월에는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원로회원으로서 활동하였다. 1908년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의 종교부 총무와 교육부장에, 1911년 4월에 황성기독교청년회 종교부장에 취임하였다. 1924년에 조선일보(朝鮮日報)사장에 추대되었고, 1927년 2월 완전독립, 절대독립노선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이 연합하여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新幹會)를 창립하자, 이상재는 그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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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연 집
애국지사 임종연의 생가는 충남 서천에 위치해있으며, 임종연이 생전에 살았던 집이다. 임종연(1882-1945)의 이명은 임지호(林之虎)이며, 1920년 7월 조선민단(朝鮮民團)이 주최한 강연회에서 박무병과 함께 독립사상을 고취(鼓吹)한 강연인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연제로 「우리 민족은 분기하여 독립을 관철하여야 한다'고 강연을 하다가 일경에 붙잡혔으며, 징역 8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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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명 묘
조남명(1870-1947)은 1919년 3월 유재경(劉載璟)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해받고 한백희(韓伯熙)·최경진(崔敬鎭), 이경욱(李敬旭)·정희석(鄭凞錫) 등에게 만세시위를 벌이자고 제안하고, 준비를 갖추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일경에 붙잡혔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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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학규 묘
임학규(1897-1974)는 1919년 4월 송기면(宋箕勉)의 지휘아래 전개된 대규모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 송기면·이근호(李根浩)·유성렬(劉性烈)등 기독교인(基督敎人)들과 함께 이튿날의 신장리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거사하기로 계획하였다. 미리 제작한 태극기 200여 매를 모여드는 군중에게 나누어주며 독립만세운동에 같이 참여하도록 권유하며,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그러나 일경에 의해 연행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다가 체포되었고,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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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전 추모비
김인전(1876-1923)은 1920년 2월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 피선되었으며, 특히 재무예산위원으로 일했다. 같은해 4월에는 임시의정원 정무조사특별위원(군사)으로도 활약하며, 장기적 독립전쟁을 위한 방법, 군사교육 실시, 직접적 전쟁을 대비하기 위한 전열 가다듬기 등을 안건으로 내세워 실천하도록 했다. 동시에 임시의정원의 부의장을 지내다가 1921년 5월에 사퇴하였다. 1921년 8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원(國務院) 학무차장과 이어 학무총장대리로 활약하였다. 그 뒤 다시 임시의정원 전원위원장(全院委員長)으로 선임되었고, 1922년 5월에는 제4대의정원의장에 선임되어 입법활동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략을 계획, 실천하였다. 그 해 10월 김구(金九)·여운형(呂運亨) 등 16명과 함께 군인양성과 독립전쟁의 비용조달을 목적으로 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결성하였다. 그 후 대한적십자회의 상의원으로 김구·이유필·김규식(金奎植)·이규홍(李圭洪)·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923년 5월 과로로 순국하니, 임시정부의 모든 요인들이 장례식에 참석하여 슬픔을 같이하였으며, 상해 외국인묘지(b39)에 안장하였지만, 1993년에 서울현충원 안장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