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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46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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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학 추모비
조병학 선생은 충남 부여 사람으로 1931년 10월 충남 부여에서 협의회 활동에 참여하고 1933년 5월 부여농민구락부연합회를 결성하고 항일의식 고취와 조직 확대에 힘쓰다가 1933년 8월 일경에게 체포되어 예심 진행중 1935년 3월 1일 병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40여 일만인 1935년 4월 9일 고문 여독으로 순국하였다. 해당 비석은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1984년 부여군이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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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철 추모비
최용철 선생은 충남 부여(扶餘)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월 천도교주 손병희(孫秉熙) 등이 서울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사실을 전해듣고 3월 6일 아침에 박용화(朴容和)·박성용(朴性堯)·황우경(黃宇京)·황금채(黃金彩) 등과 만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서로 다짐한 후 이날 오후 7시경 부여군 임천읍(林川邑)에서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절규하며 면사무소와 공립보통학교로 몰려가서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피체되었다. 이해 4월 4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여 5월 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 형을 언도받고 상고하였으나 5월 3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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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기 추모비
김영기(金永驥)선생은 충남 부여 출신이다. 1920년에 충남 임시교원양성소를 거쳐 잠시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1927년에 일본 동경의 대동문화학원에 입학하였다. 동교 졸업 후에는 귀국하여 1930년부터 조선총독부 학무국 편집과의 촉탁으로 2년간 근무하면서 중학교용 〈중등교육 조선어〉 및 〈한문독본〉을 편찬하였다. 1932년부터는 대구사범학교의 한문·조선어 교사로 근무하였다. 그는 조선어 시간에 학생들에게 우리의 역사·문화 강의를 통하여 민족적 긍지를 심어주었다. 또한 식민지 통치 하에서 민족 혼을 일깨우는 데에는 문학이 가장 적절하다고 보고, 우리나라의 역대 시조 백수를 뽑아 여기에 주석을 붙여 학생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때 시조의 연대 표시는 단기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민족 교육은 학생들의 황도교육비판·민족정신의 함양으로 연결되었고, 대구사범학교 항일학생운동의 정신적 기둥이 되었다. 그리고 실제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의 문예부 등 비밀결사의 조직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그의 실질적 지도 아래 이루어졌다. 이 같은 그의 영향은 문예부뿐 아니라 동교의 비밀결사 연구회 다혁당에도 미쳤음을 물론이고 또 1940년 1월에 발간되었던 교양지 〈반딧불〉도 그의 지도 하에서 간행되었다. 그러던 중 1941년 7월,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경의 손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에 그는 동년 8월 일경에 피체되었고, 그후 6개월 간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이때 함께 구속되었던 학생들이 스승의 관련을 부인하며 변명함으로써 그는 1942년 1월에 풀려나왔다. 광복 후 그는 대구사범학교 교장·경북 교육회장 등을 지냈고 서울시 교육위원 문화위원을 역임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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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마을 표지석(홍산면 조현리)
독립운동가 조병철은 1931년 고향인 부여군 홍산면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펼 것을 목적으로 야학을 개설하고 항일독립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을 쏟았다. 1933년 7월 항일농민운동에 힘쓰던 중 일경에 피체되었다. 피체된 지 3년만인 1936년 6월 예심에 회부되어 집행유예 5년형을 언도받고 공주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독립운동가 조병순은 1931년 고향인 부여군 홍산면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펼 것을 목적으로 야학을 개설하고 항일독립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을 쏟았다. 1933년 10월 7일 공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어 1935년 3월 1일 병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옥중 여독으로 동년 4월 9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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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탑
서산의 독립운동은 한말 의병운동에서 시작됐다.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 이후 재봉기한 창의대장 민종식의 홍주의병과 1907년 군대해산 이후 봉기한 정주원 의병에 적지 않은 수의 서산 출신의병들이 참여했다. 이후 서산지역의 독립운동은 이철영, 김상정과 같이 직접 몸으로 항거하는 의협투쟁과 국채보상운동, 애국계몽운동으로 이어졌고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는 3.1운동, 청년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의열 투쟁에 나선 독립단 서산지단원 서병철, 조선민족대동단 소속으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음암면 유계리 출신의 김용환, 의친왕을 수행하고 상해 임시정부로 향했던 한기동 등과 같이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펼치는 국외 독립운동 등 다양한 형태의 항일투쟁으로 전개됐다. 전국에서 일어난 학생운동에도 서산출신 학생들은 빠지지 않았다. 운산면 출신 유흥수 선생은 대구사범학생 시절 항일학생단체인 다혁당을 결성해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고취하다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지난 2021년 서산지역 독립운동가 발굴 용역에서 542명이 새롭게 발굴되면서 서산지역의 독립운동에 대해 다시 조명하는 계기가 됐다. 무엇보다 타지역과 비교에서 월등이 많은 숫자의 독립운동가들이 나왔다. 조사는 문헌조사와 일제강점기 당시의 형행기록조사, 관련 주민들의 구술채록을 통해 진행됐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의병 9명, 계몽운동 278명, 3.1운동 112명, 국내항일 82명, 독립운동 지원 1명, 만주방면 2명, 문화운동 11명, 중국방면 1명, 청년운동 42명, 학생운동 3명, 기타 1명이다. 이를 보면 이름 없는, 밝혀지지 않은 독립운동에 나섰던 수많은 서산 주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소난지도에서 최구현 의병과 함께 일본수비대에 항전했던 김태순 의병, 광주학생운동 연합시위 참여를 권유하고 경성역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김병묵 학생, 비밀결사단체 독서회, 적우회 등 적색일반사용인조합 조직해 항일운동에 나선 17세의 민태규, 1929년 광주학생운동 참가, 1934년 신건설사건(제2차 카프검거사건) 주동자로 활동했던 윤붕원 등 일부는 총을 들고, 일부는 대한독립청년단 활동으로, 계몽운동으로, 국채보상운동과 군자금 모집으로, 또 학생은 학생운동으로, 그리고 일반 주민들은 3.1만세시위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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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하 기념비
이봉하 선생은 1919년 4월 8일 충남 서산군 운산면 용현리 보현산 위에서 나상윤·황군성 등과 함께 동리 주민 50여 명을 주도하여 횃불을 들고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 일로 인해 이봉하는 체포되어 1919년 5월 1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정득선생은 1919년 4월 8일 서산군 성연면 갈현리 거주 김옥제는 같은 마을 이종옥 집에서 남명숙 외 수 명에게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권유하였다. 김옥제의 권유를 받은 갈현리 주민들은 함께 성왕산 위에 올라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이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붙잡힌 김정득은 1919년 4월 12일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 90도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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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득 추념비
김정득 선생은 충남 서산군(瑞山郡)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1919년 4월 8일 서산군 성연면(聖淵面) 갈현리(葛峴里) 거주 김옥제(金玉濟)는 같은 마을 이종옥(李種玉) 집에서 남명숙(南明淑) 외 수 명에게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권유하였다. 김옥제의 권유를 받은 갈현리 주민들은 함께 성왕산(聖旺山) 위에 올라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이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붙잡힌 김정득 선생은 1919년 4월 12일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 3월 1일 삼일절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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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정 집
김상정 선생은 충남 서산(瑞山) 사람이다.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서 유거하던 광무황제가 갑자기 훙거한 소식을 듣고 발상문을 작성하여 면사무소 게시판에 게시하고 훈자서 발상하였다. 동년 3월 23일 서산군 해미면에서 3.1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일경들이 민심을 회유한다는 명목으로 면민대회를 개회하였을 때 면민들에게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환기시키고 "불납세(不納稅)는 물론 왜왕의 명령을 맹세코 복종할 수 없다" 하며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작성하여 조선총독에게 발송하였다. 동년 9월 12일에는 면서기가 왜경을 대동하여 소위 호세고지서(戶稅告知書)를 배부하자 "왜왕 대정(大正)은 한국과는 대대로 원수라 죽어서라도 원수를 갚겠다" 하고 중지 2절을 칼로 끊어 혈서를 써서 조선총독에게 발송하였다. 1921년 9월 12일에는 혹심한 전매령에 항거하여 담배를 재배케 하고 '대한유민(大韓遺民) 김상정 종불굴초(種不屈草)'라는 표시를 만들어 세웠는데, 왜경이 벌채를 명하자 손칼로 좌측 귀를 자르고 더러운 소리를 듣지 않겠다며 혈서로 자신의 의지를 나타냈다. 1937년 2월에는 삭발을 하지 않고 상복을 벗지 않음은 사상이 불온하다고 청양주재소에서 무참히 구타당하여 척추절상으로 종신까지 허리를 쓰지 못하였다. 1946년 1월 1일에는 광복으로 환국한 임시정부는 혈서철을 보고 이 사실을 알아 김구 주석 명의의 특행 찬양문을 보내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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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득 묘
김정득 선생은 충남 서산군(瑞山郡)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1919년 4월 8일 서산군 성연면(聖淵面) 갈현리(葛峴里) 거주 김옥제(金玉濟)는 같은 마을 이종옥(李種玉) 집에서 남명숙(南明淑) 외 수 명에게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권유하였다. 김옥제의 권유를 받은 갈현리 주민들은 함께 성왕산(聖旺山) 위에 올라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이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붙잡힌 김정득은 1919년 4월 12일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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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정 묘
김상정 선생은 충남 서산(瑞山) 사람으로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서 유거하던 광무황제가 갑자기 훙거한 소식을 듣고 발상문을 작성하여 면사무소 게시판에 게시하고 훈자서 발상하였다. 동년 3월 23일 서산군 해미면에서 3.1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일경들이 민심을 회유한다는 명목으로 면민대회를 개회하였을 때 면민들에게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환기시키고 "불납세(不納稅)는 물론 왜왕의 명령을 맹세코 복종할 수 없다" 하며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작성하여 조선총독에게 발송하였다. 동년 9월 12일에는 면서기가 왜경을 대동하여 소위 호세고지서(戶稅告知書)를 배부하자 "왜왕 대정(大正)은 한국과는 대대로 원수라 죽어서라도 원수를 갚겠다" 하고 중지 2절을 칼로 끊어 혈서를 써서 조선총독에게 발송하였다. 1921년 9월 12일에는 혹심한 전매령에 항거하여 담배를 재배케 하고 '대한유민(大韓遺民) 김상정 종불굴초(種不屈草)'라는 표시를 만들어 세웠는데, 왜경이 벌채를 명하자 손칼로 좌측 귀를 자르고 더러운 소리를 듣지 않겠다며 혈서로 자신의 의지를 나타냈다. 1937년 2월에는 삭발을 하지 않고 상복을 벗지 않음은 사상이 불온하다고 청양주재소에서 무참히 구타당하여 척추절상으로 종신까지 허리를 쓰지 못하였다. 1946년 1월 1일에는 광복으로 환국한 임시정부는 혈서철을 보고 이 사실을 알아 김구 주석 명의의 특행 찬양문을 보내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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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학수 묘
최학수 선생은 충남 서산(瑞山) 사람이다. 그는 1919년 4월 4일 충남 서산군(瑞山郡) 정미면 천의(天宜) 장날을 이용하여 1천여 명의 대호지면(大湖芝面) 면민(面民)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서울에서 3·1운동의 소식을 접하면서 대호지면의 면민들은 3월 중순부터 만세시위를 계획해 갔다. 평소 식민지 통치의 부당성에 대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켜가던 면사무소 사환 송재만(宋在萬)이 행동총책을 맡고, 면장 이인정(李寅正), 면내 유지 남계원(南桂原) 등이 만세시위에 참가하면서 3월 19일에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때 시위 군중은 경찰 주재소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출동한 일본군과 일경에 의해 송재만·이인정 등의 주동인물이 붙잡히고 말았다. 이후 이들 면민을 다시금 만세시위를 추진하여 이웃 정미면 천의 장날인 4월 4일을 기해 대규모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대호지면에서 출발한 이들은 정미면 천의리에 이르러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고 일본인 순사와 순사보 등을 구타하는 한편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러나 서산·당진·공주에서까지 동원된 일본 군경에 의해 이들 만세군중은 해산하고 만세시위에 참가했던 수백 명의 인사들이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4월 24일 서산경찰서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笞刑) 9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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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흥수 집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를 주도했던 효암 유흥수선생은 1939년 대구사범 9기생으로 재학 중 권쾌복(權快福), 배학보(裵鶴甫), 최영백(崔榮百) 등과 비밀결사 백의단(白衣團)을 조직했으며, 1940년 1월 박효준(朴孝濬), 이태길(李泰吉) 등과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을 고취하는 '반딧불' 을 제작 배포하였다. 1941년 2월에는 교내활동 뿐만 아니라 타교생 및 사회인까지 조직을 확대하여 다혁당을 결성했다. 유흥수는 다혁당 활동 중 1941년 7월 '반딧불'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면서 피체되었다. 그는 1943년 11월 대전지방법원에서 5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