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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독립만세비
이희춘(1926-2008)은 충남 부여(扶餘) 사람으로 1943년 1월 15일 국내 항일단체인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에 가입하여 김종구(金鍾九)·최헌길(崔憲吉)·조동훈(趙東勳) 등 수명의 동지를 만주(滿洲)로 밀파하는 등 국외 독립운동과의 연계투쟁에 힘썼다.그러던 중 1944년 4월 24일 부여 부소산(扶蘇山) 사비루(泗沘樓) 기둥에 혈서로 조선독립만세라는 글을 써붙이고 동지 최을서(崔乙書)와 함께 만세삼창을 외친 후 1주일간 도피하다가 동년 5월 2일 일경에 붙잡혀 대전지방법원 강경지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인천소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월 가출옥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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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마을 표지석(부여읍 중정2리)
유기섭(1905-1936)은 조선일보 부여지국 기자와 부여청년회 문예부장을 지냈으며, 대왕의숙을 개설하여 아동에게 한글을 교육하는 등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강성구(姜星求) 등의 동지와 함께 1931년 사회주의 사상 비밀결사 화성당(火星黨)을 조직하여 활동하던 중 일경에 붙잡혔고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1931년 봄 이호철·장창선(張昌善)·오기영(吳麒泳) 등과 함께 사회주의 사상을 보급하고 항일독립운동을 펼 것을 목적으로 농민조합의 조직에 착수하였으나 일경의 취체가 심하여 중단하였다. 이들은 이후 전영철(田泳哲)·강도형(姜道馨) 등의 동지를 규합하여 야학을 개설하고 초등교육을 실시하며, 토론회를 개최하여 사회주의 사상과 항일독립의식을 고취하였다. 1933년 부여농민조합연합회(扶餘農民組合聯合會)의 지부로서 대야구락부(大也俱樂部)를 위장·조직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후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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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기념비(부여군 세도면)
3.1운동기념비는 강경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한, 부여군 세도면 창영학교 출신의 엄창섭, 고상준, 추병갑, 김종겸, 추성배, 강세형, 윤동안, 정근섭, 서상종, 한규섭 지사의 애국, 애족 정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2004년 6월 세워졌다. 1919년 3월 5일 전북 익산군 웅포면 대붕암리에 거주하는 군산영명학교 강금옥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창영학교 선생인 엄창섭, 고상준, 추병갑이 주동이 되고, 김종갑, 추성배, 강세형, 윤동만, 정근섭, 서삼종, 한규섭의 협력을 받아 태극기를 제작하여 3월 10일 오전 10시 강경 봉오재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후 당시 일본인이 가장 많이 살고있는 홍교동을 중심으로 구름같이 몰려드는 동포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참가했던 우리 선열들은 옥고를 치뤘으며, 이 업적은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기에 이 비를 1976년 건립했지만, 노후화로 인해 2004년 재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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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마을 표지석(세도면 청송리)
조중구(1880-1942)는 1910년 국권침탈 이후 1914년 서간도 합니하(西間島哈泥河)에서 동지들과 광제회(光濟會)를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미국 등지에서 발간되는 신한민보(新韓民報)를 국내에 들여와 발행하다가 1915년 초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7년에 중국으로 망명하였고 1920년에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1922년 4월까지 의정원에서 활동하였다. 1921년에는 임시정부 외무부 임시선전원에 임명되어 호북성(湖北省) 등지에 파견되어 선전활동을 했으며, 1922년부터는 중국군에 입대하여 무력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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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구 묘
조중구(1880-1942)는 1910년 국권침탈 이후 1914년 서간도 합니하(西間島哈泥河)에서 동지들과 광제회(光濟會)를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미국 등지에서 발간되는 신한민보(新韓民報)를 국내에 들여와 발행하다가 1915년 초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7년에 중국으로 망명하였고 1920년에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1922년 4월까지 의정원에서 활동하였다. 1921년에는 임시정부 외무부 임시선전원에 임명되어 호북성(湖北省) 등지에 파견되어 선전활동을 했으며, 1922년부터는 중국군에 입대하여 무력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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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청년회 독립만세운동 사적비
금계청년회 독립만세운동 사적비는 충남 부여에 위치하였으며, 60여명의 회원이 있었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금계청년회를 기념하고 기억하기 위해 건립한 비이다. 김형배를 회장으로 추대하고 허환을 총무로 임명하여 조직하였고, 야학당을 개설하여 문맹을 퇴치하고 애향심을 고취하였다. 1919년 갓개 장터에서 군중들과 대한독립만세 시위를 하였고 이후 임천시장, 홍산, 강경, 한산 등지에서 수개월 동안 만세시위운동을 하였다. 특히 허환은 일본 및 대만에 건너가서 지하독립운동을 하였으며, 대만에서 조선인 친우회를 조직하여 독립자금을 거두는 등 활동하다가 1934년 6월 구속되어 고문 끝에 순국하였다. 이후 일경의 방해로 제대로 된 행렬을 하지 못하였고, 군중의 반일감정은 극에 달아 금계청년회원들의 항일시위는 최고조에 다다랐다. 금계청년회는 충청남부에서 최초로 3.1독립만세를 외쳤고 초왕리는 그 진원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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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마을 표지석(외산면 문신리)
유창열(1897-1980)은 1920년 추재도의 권유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충남지부 특파원이 되어, 사양면 내 자산가 등으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같은 해 자택에서 추재도와 회합하여 ‘애국사상을 가진 조선인 동포는 마땅히 자기의 생활을 돌보지 않고 조선독립운동을 위해 자금을 출연(出捐)해야 한다’는 문서를 만들었고, 1920년 12월 중순 추재도 등과 함께 이기춘·이상덕 등을 방문하여 통지서에 기재된 금액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1921년 이상덕의 집을 재차 방문했다가 일경에 붙잡혔고,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1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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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마을 표지석(외산면 삼산리)
추교철(1885-1951)의 이명은 추재도(秋載道)이며, 1919년 충남 보령에서 만세시위에 가담하였고, 독립애국단을 조직하여 군자금을 모집중이었다. 임시정부로부터 군자금 모금지령서를 교부받아 자산가들에게 수합활동을 했으며, 유창렬을 동지로 포섭하여 충남지부 특파원으로 임명하고 활동토록 했다. 1920년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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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교철 묘
애국지사 추교철의 묘는 충남 부여에 위치하고 있다. 추교철(1885-1951)의 이명은 추재도이며, 충남 보령에서 3.1운동에 가담하였다. 같은 해 7월 임시정부 지원을 목적으로 비밀결사 독립애국단을 조직하였고, 유창렬(劉昌烈)을 동지로 포섭하여 임시정부 충남지부 특파원으로 삼았다. 1920년 9월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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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집
박영희(1896-1930)의 이명은 박두희(朴斗熙), 박영섭(朴寧燮), 박장섭(朴章燮)이며, 만주로 망명 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의 학도단장을 맡았고, 1920년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대한독립군단, 신민부 조직에도 가입 및 참여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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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공적비
박영희(1896-1930)의 이명은 박두희(朴斗熙), 박영섭(朴寧燮), 박장섭(朴章燮)이며, 만주로 망명 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의 학도단장을 맡았고, 1920년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대한독립군단, 신민부 조직에도 가입 및 참여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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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천장터 독립만세운동 기념비
1919년 3월 6일 박용화의 주도로 만세운동이 전개된 곳이며, 박용화는 천도교주 손병희의 독립운동 전개 소식을 듣고 결심하였다. 충화면 출신 박성요 선생 등 7명이 서울의 천도교 교인을 통해 비밀리에 기미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임천장터에서 이를 배포했다. 장터에 모여든 군중은 임천면사무소와 보통학교 앞에서 시위를 벌였으며, 부여헌병대 임천분대로 몰려가 “대한독립 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그 결과 박용화 등 7명이 징역 1년을 선고받았고, 충남 최초의 만세운동인 임천장터 만세운동을 기점으로 지역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