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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민족시인 7위 추모분향단
충청남도 보령에 위치한 항일 민족시인 7위 추모분향단이다. 이 분향단에 모셔진 시인은 이상화, 한용운, 심연수, 윤동주, 이육사, 김영랑, 오일도이다. 이상화(1901-1943)는 경상북도 대구의 저항 시인으로, 대구고보 재학 시인 1919년 3월 8일 장날을 이용하여 동료와 함께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동하였다. 또한 <신라제(新羅祭)의 노래>,<나의 침실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의 일제에 대한 민족 저항시를 집필해 민족의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1935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친형인 이상정(李相定) 중국군 장군과 조국의 독립을 위한 국내 조직을 협의하고 1937년 귀국하였다. 그러나 곧 대구경찰서에 붙잡혀 2개월간 구금되어 고문받고 석방되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용운(1879-1944)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의 불교인이자 저항 시인이다. 1894년의 동학혁명에 가담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만주 간도성 등을 다니며 광복 운동을 하다가, 1905년에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의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33인을 대표하여 그가 인사말을 함으로써 독립선언식을 끝내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심연수(1918-1945)는 강원도 강릉 출신의 민족시인이다. 부모를 따라 고향을 떠나 연해주로 이주했으나 구소련에 의해 강제로 중국으로 이주하는 등, 정착하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어려운 가정 살림에도 불구하고 1941년 일본대학 창작과에 입학하였고, <야업>, <검은 사람>, <과오> 등의 작품을 집필하였다. 1945년 용정으로 귀환하던 중, 일제 앞잡이에 의해 피살되었다. 윤동주(1917-1945)는 함경북도 청진 출신의 저항 시인이다. 어린 시절부터 시를 통한 항일민족정신의 기초를 닦았고,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한 후 송몽규 등과 함께 민족정신과 조국의 독립에 대하여 토론하였으며 <서시(序詩)>, <별 헤는 밤>, <무서운 시간>, <또 다른 고향> 등 많은 항일민족시를 발표하면서 우리 민족의 항일정신을 고취하였다. 1943년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년 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사망하는데, 그의 사망이 복역 중에 정기적으로 맞은 알 수 없는 주사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육사는 경상북도 안동 출신의 저항 시인으로, 본명은 이원록이다. 1925년 독립운동단체 의열단에 가입하여 일본과 북경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26년 잠시 귀국했으나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좌, 3년 형을 받고 투옥되었다. 1935년부터 이육사라는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는데, <황혼>, <청포도>, <광야>, <절정> 등의 작품으로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43년 4월에 귀국했다가 6월에 피검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어 수감 중 북경의 감옥에서 옥사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영랑(1902-1950)은 전라남도 강진 출신의 저항 시인으로, 본명은 김윤식이다.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숨겨서 강진으로 내려왔다. 자택에서 김현상 등 동료와 정세를 논의하고 강진에서도 독립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으나, 이들의 준비와 계획이 강진경찰서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광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으나 공소를 제기한 끝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1930년대에는 <독(毒)을 차고>, <가야금>, <달마지>, <춘향> 등 다수의 민족적인 시를 발표하여 항일의식을 표출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1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오일도(1901-1946)는 경상북도 영양 출신의 민족시인으로, 본명은 오희병이다. 1922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강습소에서 수학한 다음 릿쿄대학 철학부에 입학하여 1929년 졸업하였다. 귀국 후 1년 동안 근화학교에서 무보수 교사로 근무하다 맏형으로부터 사재(私財)를 얻어 1935년 2월 시 전문잡지 『시원(詩苑)』을 창간하였다. 그러나 『시원』은 5호 만에 발행이 중단되었고, 광복 후 상경하여 문학 활동을 재개하면서 『시원』의 복간을 도모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우울한 심정으로 폭음을 계속하다 간경화증으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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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렴산 기미독립운동
충청남도 보령에 위치한 주렴산 기미독립운동 안내판이다. 주렴산 기미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4월 17일 밤을 기하여 보령 출신 18의사가 항거한 만세운동이다. 서울 배재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이종연은 왜경의 감시를 피해 고향으로 내려온 후, 유림 선배들을 규합하여 4월 16일 장날에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삼엄한 왜경의 감시로 거사를 하루 늦추어 17일 저녁에 동지들과 함께 거사를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4월 18일에는 야룡리 복개봉에서 또 만세를 부르기로 약속되었으나 동지 대부분이 체포되어 박윤화 홀로 복개봉에 올라 태극기를 꽃고 만세를 불렀다. 체포된 애국지사들은 태형과 온갖 수모를 당했으며, 일생을 불편한 몸으로 지내다가 일찍 세상을 떠난 의사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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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항일지사의거추모비
충청남도 보령에 위치한 3.1운동기념비이다. 주렴산 기미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4월 17일 밤을 기하여 보령 출신 18의사가 항거한 만세운동이다. 서울 배재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이종연은 왜경의 감시를 피해 고향으로 내려온 후, 유림 선배들을 규합하여 4월 16일 장날에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삼엄한 왜경의 감시로 거사를 하루 늦추어 17일 저녁에 동지들과 함께 거사를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4월 18일에는 야룡리 복개봉에서 또 만세를 부르기로 약속되었으나 동지 대부분이 체포되어 박윤화 홀로 복개봉에 올라 태극기를 꽃고 만세를 불렀다. 체포된 애국지사들은 태형과 온갖 수모를 당했으며, 일생을 불편한 몸으로 지내다가 일찍 세상을 떠난 의사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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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항일애국지사 추모비
충청남도 보령에 위치한 보령항일애국지사 추모비이다. 추모비에 항일활동에 목숨을 바친 보령 출신의 애국지사들과 그들의 공로를 기술했다. 개항과 함께 밀려오는 일제침략을 막고자 항일 위정척사의 상소를 올렸다가 사형당한 백낙관과 금갑도(전남진도)에 유배당한 황재현, 국내에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벌인 이채우, 정미의병 당시 광복군으로 참여한 성주경, 이종국 등을 나열하면서 그들의 공로를 되새겨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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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렴산 기미독립만세진원지 유적비
충청남도 보령에 위치한 주렴산 기미독립만세진원지 유적비이다. 주렴산 기미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4월 17일 밤을 기하여 보령 출신 18의사가 항거한 만세운동이다. 서울 배재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이종연은 왜경의 감시를 피해 고향으로 내려온 후, 유림 선배들을 규합하여 4월 16일 장날에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삼엄한 왜경의 감시로 거사를 하루 늦추어 17일 저녁에 동지들과 함께 거사를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4월 18일에는 야룡리 복개봉에서 또 만세를 부르기로 약속되었으나 동지 대부분이 체포되어 박윤화 홀로 복개봉에 올라 태극기를 꽃고 만세를 불렀다. 체포된 애국지사들은 태형과 온갖 수모를 당했으며, 일생을 불편한 몸으로 지내다가 일찍 세상을 떠난 의사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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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준근 묘
유준근(1860-1920)은 충남 보령 사람으로, 자는 순경(舜卿), 호는 벽서(碧棲), 우록(友鹿)이며 최익현의 문인이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납세를 거부하고 을사오적과 일본의 침략행위를 공박하여 투옥되었다. 1906년 5월, 전 참판 민종식이 홍산지치(鴻山支峙)에서 거의하자 그 휘하에 들어가 홍주성을 함락한 뒤 유병장과 참모에 임명되었다. 5월 말 홍주성이 함락될 때 일본군에게 잡혀 무기형을 언도받고 남규진 등 8인의 동지와 함께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전개되자 백관형 등 10여 명과 함께 상경하여 순종의 복위 운동을 꾀하던 중 일본 경찰에 잡혀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한편,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파리장서'에 유림 대표 137인 중 1인으로 서명하였으며, 적극적인 독립투쟁 전개를 역설하였다. 한편, 문집 「마도일기(馬島日記)」는 홍주의진의 활약과 대마도 유배지에서의 생활을 일기체로 서술한 것으로 의병운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올려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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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구, 강영국, 이명종 추모비
김사구(1879-1948)는 충남 보령 사람으로, 1919년 3월 10일 이병철·고광춘·한기석 등 8명과 함께 보령군 청소면 성연리에서 독립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하고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할 계획을 추진하던 중 일경에 붙잡혔다. 그해 5월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강영국(1878-1946)은 충남 보령 사람으로, 1919년 4월 10일 김사구와 함께 군중을 선동하여 시위운동을 하기로 계획하고 신태중의 집에 모인 임경진, 이병철 등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고무하였으나 일경에 붙잡혔다. 그해 5월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결국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이명종(1893-1954)은 충남 보령 사람으로, 1919년 3월 6일 충남 홍성군 광천면 광천리에서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하였다. 3월 8일에는 큰 글씨로 쓴 선언문 2매를 작성하여 광천장터와 옹암리에 게시하고 주민들을 규합하며 독립선언문 다수를 군중에게 배포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붙잡혔다. 그해 4월 28일에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아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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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묘
1889년 충청남도 홍성(洪城)에서 출생하였다. 집안은 부유한 명문대가 였으며 15세 때 가노(家奴)를 해방할 정도로 진취적 개화사상이 강하였다. 1905년 서울에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을사늑약 체결 이후 국권회복의 신념을 가지고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며 국운을 바로잡을 것을 결심하였다. 1907년 고향으로 돌아와서 가산(家産)을 정리하여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대한협회 홍성지부를 조직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을 하였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 참여하면서 1909년 《한성신보》의 간부를 지냈고,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서북학회(西北學會)를 조직하였다. 1911년 군자금 모금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투옥되어 2년 6개월 간 복역하였다. 1915년 비밀결사 조직 대한광복회에 가입했고, 1916년에는 노백린(盧伯麟)·신현대(申鉉大) 등과 함께 광복단에서도 활동하였다. 1917년 대한광복회의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었으나, 예심에서 면소판정으로 석방되었다. 1918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으며, 대한광복회 조직이 와해되면서 체포 위기에 처했으나 만주에 있어 체포는 면했다. 그 해 12월 무오(戊午)독립선언서에 민족지도자 39명 중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년 대한정의단의 기반 위에 군정부를 조직하여 본거지를 왕칭현[汪淸縣]에 두고 5분단(分團) 70여 개의 지회를 설치한 뒤 광복운동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였다. 이를 대한민국임시정부 휘하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한 뒤, 그 기관의 총사령관이 되어 1,600명 규모의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이어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치하여 사관훈련과 무기입수에도 힘썼다. 기관총 7문 등으로 무장한 김좌진 휘하의 독립정예군은 만주 일대에서는 가장 막강한 실력의 군대로, 1920년 이후 10여 년 간 본격적인 항일전투를 전개하였다. 1920년 10월 20~23일 청산리(靑山里) 80리계곡에서 유인되어 들어온 일본군을 맞아, 나중소(羅仲昭:참모총장)·박영희(朴英熙:부관)·이범석(李範奭:연성대장) 등과 함께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마록구(馬鹿溝) 등지에서 일본군과 3회의 격전을 전개, 일본군 3,300명을 일시에 섬멸하였다. 이를 청산리전투라 하여 봉오동전투와 함께 독립전쟁사상 최대의 승리로 꼽는다. 그 후 부대를 이동, 헤이룽강[黑龍江] 부근으로 전진하여 국민회군의 안무(安武), 도독부군의 최진동(崔振東) 등과 연합하고 대한독립군단을 결성,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일본군의 격렬한 보복작전의 전개로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다가 이듬해 헤이허[黑河]사변으로 타격을 받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5년 신민부를 창설하여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 부교장으로 독립군간부 양성에도 주력하였다. 1927년 만주의 신민부·참의부·정의부의 3부를 통합하려다 실패하자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在滿策進會)를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 단일단결성을 재촉하였다. 1929년 한족연합회를 결성, 주석에 취임하여 황무지개간, 문화계몽사업, 독립정신 고취와 단결을 호소하였다.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 부근 정미소에서 고려공산청년회 김봉환(金鳳煥)의 감언이설에 빠진 박상실(朴尙實)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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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국 묘
강영국(1878-1946)은 충남 보령 사람으로, 1919년 4월 10일 김사구와 함께 군중을 선동하여 시위운동을 하기로 계획하고 신태중의 집에 모인 임경진, 이병철 등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고무하였으나 일경에 붙잡혔다. 그해 5월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결국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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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마을 표지석(구룡면 용당리)
충청남도 부여에 위치한 애국지사마을 표지석 (구룡면 용당리)이다. 박길화(1872-1952)는 충청남도 부여 사람으로, 1912년 향리에서 삼학서원을 설립하여 청소년들에 대한 민족사상교육에 전념하였다. 강철구와 1920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군정서에 가입하여 총재 서일의 비서역으로 활약하다가 독립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임시정부의 독립공채를 소지하고 입국하여 함북 회령, 청진 및 서울 등지에서 동지를 규합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21년 박길화는 동지들과 함께 독립군을 적극 지원하기로 결의하고 군자금을 모집하여 강철구에게 전달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에 강철구는 소지하고 있던 모든 공채를 처분하고 다시 만주로 건너가려고 준비하던 중, 이러한 사실이 일경에 탐지되어 동지들이 모두 체포되었다. 따라서 박길화도 1923년 4월, 징역 1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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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규 생가지비
이용규(1859-1924)는 전라북도 옥구 사람으로, 의병장 민종식이 매부(妹夫)이며, 이남규는 족형(族兄)이다. 민종식과 함께 의거 계획을 의논하던 중, 1906년 6월 을사조약으로 의병운동이 재기하자 민종식, 박창로, 안병찬 등과 논의하여 군사를 모으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 홍주 전투에 참가, 전과를 올린 후 체포되어 종신 유형을 받아 1년간 복역하였다. 이후 지속적으로 의병 항쟁을 도모하였으며, 1919년에는 조선 가정부 조직에 충남 대표로 참석하여 활동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 포장을 추서하였으며,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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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철 추모비
조병철(1908-1950)은 충청남도 부여 사람으로, 1931년에 이호철(李戶喆)·노명우(盧命愚)·유기섭(柳基燮)·장창선(張昌善)·오기영(吳麒泳) 등과 함께 고향인 부여군 홍산면(鴻山面)에서 사회주의 사상 보급 및 항일독립운동을 목적으로 농민조합의 조직에 착수하였으나 일경의 취체가 심하여 중단하였다. 이들은 이후 전영철(田泳哲)·강도형(姜道馨) 등의 동지를 규합하여 마정리, 금송리 등의 각 부락에 야학을 개설하고 농민의 자제들에게 한글·산술 등의 초등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토론회를 개최하여 사회주의 사상과 항일독립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을 쏟았다. 또한 동년 7월 부락 청년들을 규합하여 부여 농민조합연합회의 지부로서 대야구락부를 위장 조직하고 항일농민운동에 힘쓰던 중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피체된 지 3년 만인 1936년 6월 예심에 회부되어 집행유예 5년 형을 언도받고 공주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