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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기념관
심훈(1901-1936)은 경기도 시흥 출신의 소설가이자 독립운동가로, 본명은 심대섭이고 아명은 삼준 또는 삼보이다. 1919년 서울에서 3.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소위 보안법, 출판법으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후 중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뒤,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문필활동에 종사하였다. 1934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상록수>를 당진 필경사에서 집필하였는데, 실화를 바탕으로 식민지 시대의 젊은이가 민족적 현실에 참여하여 이를 극복해가는 과정을 묘사하여 그 당시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을 크게 각성시켰다. 정부는 공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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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집
손병희(1861-1922)는 충청북도 청원 출신으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다. 1882년 동학에 입교하여 1884년 교주 최시형을 만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의 동학혁명 때에는 통령으로서 북접(北接, 동학 교단 조직의 하나)의 동학혁명군과 논산에서 합세하여, 호남과 호서지방을 점령하고 계속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패전하자 원산, 강계 등지에서 은신 생활을 하였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후임자로서 3년간 지하에서 교세 확장을 위해 힘쓰다가, 1908년 박인호에게 교주 자리를 인계하고 우이동으로 은퇴하여 수도에 전념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국에 가까워져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려던 때에, 미국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평소에 뜻을 같이하고 있던 보성고등보통학교장(普成高等普通學校長) 최린, 천도교 도사 권동진, 오세창 등과 함께 독립을 위한 제반 사항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1월 말, 그들과 함께 먼저 동지를 모아서 민족의 대표자로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그 선언서를 각지에 배포하여 국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켜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한편,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 파리강화회의 참가국 위원들에게 조선의 독립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고, 또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써 줄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고, 그 제반 계획의 실행을 최린에게 맡겼다. 이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에 대한 동지 규합이 진행되었다. 2월 26일 최린이 최남선과 수차 협의 끝에 독립선언서와 청원서 및 의견서 등의 초안을 작성하자, 손병희는 권동진, 오세창과 함께 이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있었던 천도교 기도회 종료 보고와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천도교 도사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나용환, 장로 이종훈, 홍병기, 교인 김완규 등에게 독립만세 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권유하여 승낙을 받았다. 3월 1일 오후 2시경 태화관에는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 가운데, 길선주(吉善宙), 유여대(劉如大), 김병조(金秉祚), 정춘수(鄭春洙) 등 4명이 빠지고 29명이 참석하였다. 손병희는 민족대표 중의 대표자로서 엄숙한 독립선언식의 진행을 주도하여, 이종일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100매를 탁상 위에 놓고 돌려보도록 한 후, 한용운의 인사말에 이어 만세삼창을 외치고,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석방되어, 서울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 중 병사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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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한 묘
성재한(1860-1906)은 충청남도 예산 출신으로, 1904년 한일의정서가 발표되자 예산, 홍성, 보령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함께할 동지를 규합하였다.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국권 회복에 몰두할 것을 결심하고 민종식 휘하 의병이 되었다. 의진의 운량관(군량 운반의 일을 맡았던 직책)으로서 홍주입성전에 참가하였고, 5월 9일 탈환 작전을 전개하였다. 형세가 기울기 시작하고 성을 넘어 피신할 수 있었으나, "나는 중한 책임이 있다. 이 문부들을 안고 장차 어디로 간단 말이냐"하고 성을 떠나지 않았다. 결국 성재한은 이 전투에서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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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호지 4.4독립만세운동기념탑
대호지 4.4만세운동은 대호지면에서 남주원, 이인정, 송재만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만세운동이다. 1919년 4월 4일 9시 대호지면 광장에 600여 명이 모여 30자 높이의 대나무에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면장 이인정의 연설에 이어 남주원의 독립선언문 낭독, 한운석이 작사한 애국자 제창이 있은 다음 행동 총책 송재만의 선서 후 만세시위 행진을 시작하여 천의시장으로 이어졌다. 어느새 1,000여 명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정미면에서는 가두시위를 계속하며 당진경찰서 소속 왜경들과 대치하였고, 4명이 부상하자 군중이 왜경주재소를 파괴하고 많은 일경들을 생포하여 구타하였다. 이에 사상자가 5명이 발생하였고, 200명 이상이 구속되어 학살되거나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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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독립만세운동거리 표지석
대호지 4.4만세운동은 대호지면에서 남주원, 이인정, 송재만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만세운동이다. 1919년 4월 4일 9시 대호지면 광장에 600여 명이 모여 30자 높이의 대나무에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면장 이인정의 연설에 이어 남주원의 독립선언문 낭독, 한운석이 작사한 애국자 제창이 있은 다음 행동 총책 송재만의 선서 후 만세시위 행진을 시작하여 천의시장으로 이어졌다. 어느새 1,000여 명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정미면에서는 가두시위를 계속하며 당진경찰서 소속 왜경들과 대치하였고, 4명이 부상하자 군중이 왜경주재소를 파괴하고 많은 일경들을 생포하여 구타하였다. 이에 사상자가 5명이 발생하였고, 200명 이상이 구속되어 학살되거나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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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도항일의병 전적비
1907년 8월 해산군인들이 주도한 의병이 봉기했고, 보령과 이웃한 홍주의 분견대도 봉기한 상황에서 이 중 4-5명이 녹도로 들어왔다. 이들은 도적으로부터 녹도의 풍요를 지키며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일본 화물선을 공격하여 주민들에게 쌀과 소금을 나누어주었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군산의 일본군 수비대 병력 10여 명이 파견되어 와, 의병의 거처를 물었으나 주민들은 협조하지 않았다. 그러다 밤에 일본군의 배가 해안으로 떠밀리자, 의병들은 사격을 가하며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였다. 이후 군산에서 의병 진압을 위해 일본군과 경찰이 녹도로 재차 건너왔으나 주민들은 협조하지 않았다. 그러자 일본군은 이장을 살해하자 녹도를 초토화시켰다. 주민들은 잠시 섬을 떠났지만, 다시 돌아와 평화로운 생활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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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관형 묘
관형(1861-1928)은 충청남도 보령 사람으로,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어난 홍주의병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에 서명한 유림대표 137인 중 1인이었다. 1919년 3.1운동 때는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인이 일본 관헌에 체포되자 김일원과 협의하여 33인의 의사를 계승하여 독립할 때까지 투쟁할 것을 결심하였다. 이에 3월 12일 13도 대표자 명의로 "조선 독립은 우리들 이천만의 요구이다. 우리들은 손병희의 후계자로서 조선 독립을 요구한다." 는 취지를 기술한 애원서(哀願書)를 2통 작성하고 1통을 조선 총독에게 가지고 가서 낭독하다가 체포되었다. 그해 11월에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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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재현 항일의병사적비
황재현(1868-1903)은 충남 보령 사람으로, 1896년 유인석의진에 초청받았으며, 동년 2월 아관파천 이후 충남 보령에서 이세영 등과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였다. 이들은 180여 명의 민병을 모집하고, 다음 날 홍주성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1월 17일 관찰사 이승우의 배반으로 홍주의병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세영은 홀로 홍산으로 빠져나가 2월 남포에서 황재현·이관·김홍제 등과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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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집 항일운동 추모비
최상집(1849-1909)은 보령시 웅천읍 소황리 출신으로 본관이 강릉이고, 자는 중일 호는 남호이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자, 최상집은 58세의 노구를 이끌고 의병을 모집하는 소모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왜병의 반격으로 홍주성이 무너지면서 최상집은 포로가 되어 유준근, 이식, 안항식, 신보균, 신현두, 이상구, 문석환, 남규진 등과 함께 대마도 유배형을 받고 끌려갔다. 그럼에도 일제의 협박과 회유에 굴복하지 않고 절개를 지켰으니, 최상집을 비롯한 이들을 '홍주의병 대마도 9의사'라고 한다. 최상집은 몇 번에 걸친 감형이 이루어져 3년 만인 1908년 10월 석방되어 고국에 돌아왔으나, 의병운동의 후유증으로 병이 들어 이듬해인 1909년 6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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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집 묘
최상집(1849-1909)은 보령시 웅천읍 소황리 출신으로 본관이 강릉이고, 자는 중일 호는 남호이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자, 최상집은 58세의 노구를 이끌고 의병을 모집하는 소모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왜병의 반격으로 홍주성이 무너지면서 최상집은 포로가 되어 유준근, 이식, 안항식, 신보균, 신현두, 이상구, 문석환, 남규진 등과 함께 대마도 유배형을 받고 끌려갔다. 그럼에도 일제의 협박과 회유에 굴복하지 않고 절개를 지켰으니, 최상집을 비롯한 이들을 '홍주의병 대마도 9의사'라고 한다. 최상집은 몇 번에 걸친 감형이 이루어져 3년 만인 1908년 10월 석방되어 고국에 돌아왔으나, 의병운동의 후유증으로 병이 들어 이듬해인 1909년 6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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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제 묘
김정제는 충청남도 보령 출신으로, 김동삼이 민족교육을 위해 신흥무관학교를 설치하였을 때 총무를 맡아 양규열, 이근호, 채 찬 등과 함께 활약하였다. 1920년에는 한족회의 실업 과장이자 상무 사장으로 임명되었고, 1921년에는 대한독립군정서에 가입하여 충청남도 부여 지방에서 강철구 등과 함께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의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출옥 후에 만주로 망명하여 정의부가 조직되자 박정조, 백남준과 함께 재만한인의 생계를 지원하였고, 1926년에는 고활신, 김학선, 김탁, 오대영 등과 함께 정의부의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1927년에는 김기풍, 김진호, 오동진, 김동삼, 현정경 등과 함께 만주 지방으로 이주한 농민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농민호조사를 조직하여 산업상 생산의 증가, 교육 발전, 위생 및 보건의 향상을 위해 힘쓰는 등 지속적인 노력을 이어갔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대통령 표창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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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제 사적지
김광제(1866-1920)는 충청남도 보령 사람으로, 1907년 1월 대구에서 광문사(廣文社)의 사장으로 있으면서 부사장 서상돈 등과 함께 「국채일천삼백만환보상취지서」라는 격문을 전국에 발송하여 국채보상운동을 제의하였다. 이를 계기로 국채보상운동은 큰 호응을 모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또한 대한자강회 강제 해방 후, 독립투사이며 언론인인 신채호, 장지연, 남궁억, 오세창 등과 함께 계몽지 대한협회 회원으로서 구국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크게 활약했다. 1919년 3.1운동 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1920년에 3.1운동 일주년을 맞이하여 유학생들과 함께 3월 1일에 독립선언서를 국내 및 동경의 한국인에게 배포하고 제2의 3.1운동을 일으키려고 하다가 사전에 일제 경찰에 발견되어 체포되었으며, 일인이 독살하였다는 풍설이 있다. 정부는 공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