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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주 흉상
고석주(1867-미상)은 일제강점기 전북 군산(옥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903년 하와이로 이주하여 한인 단체인 자강회, 협성회, 국민회 활동을 통해 민족 의식 고취와 독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대한자강회보, 합성신보, 신한민보 등의 언론 활동에 참여하였으며 Korean Day School의 한문교사와 한인중앙학교 교사로서 교육 활동에 종사하였다. 1916년 6월 귀국하여 영명학교 교사로 있던 중,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보낸 독립 선언서가 동료 교원에게 전해지면서 동지들과 의논한 끝에 독립 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들었으며, 각 방면으로 연락하여 군산(群山) 장날인 3월 6일에 만세 운동을 하기로 계획 추진하였다. 계획이 발각되어 3월 5일에 거행하였으며, 500여 명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고, 독립 선언서 2,000여 장이 발견됨에 따라 고석주는 송정헌(宋正憲)·양성도(梁成道) 등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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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우조 어록비
양우조 어록비는 1940년 가을에 쓴 <나의 가진 민족주의>라는 제목의 어록을 새겨놓았으며, 뒷면에는 양우조 약력이 새겨져있다. 양우조(1897 - 1964)의 호는 소벽, 이칭은 양묵, 양명진이며,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선전위원, 광복군 총사령부 참사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5년 상해로 망명했다가 1916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재미대한인국민회에 가입, 활동하였다. 1921년에는 흥사단(興士團)에 입단, 안창호(安昌浩)의 가르침을 따랐다. 1929년 다시 상해로 건너와 안창호·이동녕(李東寧)·김구(金九)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화남(華南) 및 남양군도(南洋群島) 시찰특파원에 선임되었다. 또한 혁신사(革新社)를 창립해 문화사업도 전개하였다. 1931년 임시의정원의원 중국대표로 선임되었으며, 1932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부의 화남특파원에 선임되어 임시정부의 군자금 조달에 힘썼다. 1936년에는 한국국민당을 조직해 중앙위원이 되었다. 1937년 10월 쓰촨성[四川省] 치장[綦江]에서 국무원(國務員)을 개선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선전위원회를 특설하자 선전위원이 되었다. 1937년 한국독립당 중앙조직부장·훈련부장을 역임하였다. 1941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생계부(生計部) 차장에 취임해 교포의 생활과 지위 향상을 도모하였다. 광복군이 결성되었을 때에는 총사령부 참사 겸 정훈처장에 임명되어 광복군 발전에 기여하였다. 1942년 10월에는 임시의정원 예산결산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44년 충칭[重慶]한국인기독교청년회이사 겸 덕육지육부장(德育智育部長)에 선임되어 활약하다가 1946년 5월에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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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역사관 간토학살 100주년 추모비
관동대학살은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때 일본 관헌과 민간인들이 한국인과 일본인 사회주의자를 학살한 사건이다. 1920년대 전반 일본은 하나의 큰 시대적 전환기에 직면하였다. 밖으로는 한국·중국의 민족해방운동이 격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안으로는 공황으로 노동운동·농민운동·부락해방운동이 사회의 저변을 뒤흔들었다. 여기에 일본의 군부와 국가주의자들은 ‘과격사회운동취체법’ 제정을 시도하고, 이들 운동에 대한 탄압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 때 일어난 대지진으로 민중이 공황 상태로 빠져 버리자, 일본 군부와 군국주의자들은 당면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라 여기고 민중의 보수적 감정을 이용하였다. 대지진이 일어난 직후인 1923년 9월 1일 정부에 출병을 요청함과 동시에 계엄령 선포를 준비하였다. 다음 날 동경과 가나가와현(神奈川縣)의 각 경찰서 및 경비대로 하여금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라는 터무니없는 소문을 퍼뜨리도록 하는 한편 각 경찰서에 진상을 보고하도록 하였다. ‘폭동’의 전문을 준비해 2일 오후부터 3일 사이에 전국의 지방 장관뿐만 아니라 조선총독부·타이완총독부에도 타전되었다. 이와 같은 ‘조선인 폭동’의 터무니없는 소문이 일본 전역으로 퍼져 나가는 가운데 2일 오후 6시 긴급 칙령으로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계엄령은 처음 동경부와 인접 군에 선포되었으나, 3일에는 가나가와현, 4일에는 사이타마현(埼玉縣)과 지바현(千葉縣)에도 확대되었다. 이같은 계엄령 아래에서 군대·경찰을 중심으로, 또한 조선인 폭동의 단속령에 의해 각지에 조직된 자경단(自警團)에 의해 6천여 명의 조선인 및 일본인 사회주의자가 학살되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시체조차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학살이 가장 먼저 행해진 동경과 가나가와현에서는 군대와 경찰이 중심이 되어 행해졌고, 지바·사이타마현 등지에서는 민족배외주의자를 중심으로 한 자경단에 의해 행해졌다. 이들 자경단은 죽창·일본도·곤봉·철봉 등을 들고 도망치는 한국인들을 붙잡아 무차별 학살하였으며, 심지어 경무서내로 도망친 한국인들까지 쫓아 들어와 학살하였는데도 일본 관헌은 사실상 이를 방조하였다. 또한, 일본 정부는 10월 20일 학살 사건의 보도 금지를 해제하였으나 그들은 군대·관헌의 학살은 모두 은폐하고, 그 책임을 자경단으로 돌리는 데만 급급하였다. 그 뒤 일부 자경단원은 형식상 재판에 회부되기도 하였으나 증거 불충분이라는 이유로 모두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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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호국인물 구조물
유관순(1902~1920)은 일제강점기 아우내 3·1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02년에 태어나 1920년에 사망했다.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나 1916년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화학당에 편입했다. 을사늑약 이후 조국독립을 위한 기도회와 시국토론회·강연회 등에 적극 참여했다. 3·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다. 전국적으로 휴교령이 내리자 고향으로 돌아와 서울 소식을 전한 후 4월 1일 병천시장에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검거되어 투옥 중에도 옥중만세운동을 벌였고,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8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1947년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으며, 1951년 순국의열사 심사위원회에서 순국의열사로 선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201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이동녕(1869~1940)은 천안 목천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석오(石吾), 자는 봉소(鳳所)이다. 북간도 용정에 이상설 정순만 등과 같이 서전의숙을 설립하고 청소년 교육에 힘 썼다. 1907년 귀국하여 안창호, 이회영, 김구, 이동휘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고 활약하였으며, 1910년 서간도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13년에는 남만에서 청년운동을 하다가 해삼위로 가서 이상설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1925년부터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국무위원 겸 주석을 역힘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후 반평생을 해외에서 임시정부를 이끌어 조국광복의 일념에 투쟁하던 그는 1940년 3월 13일 72세 때 사천성기강(四川省綦江)에서 과로로 영면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국장(國葬)으로 장례를 치렀으며, 광복 후인 1948년 9월 22일 김구의 주선으로 유해를 봉환 사회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조병옥(1894~1960)은 충청남도 천안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경찰관이자 정치가이다. 1914년 미국으로 건너가 안창호가 주도한 흥사단의 조직결성에 참여하였으며, 뉴욕 거주 동포들을 중심으로 한인회를 조직하고 총무를 맡아 독립운동의 진상을 미국에 알리는 등 외교활동에 힘썼다. 1927년 신간회의 결성에 참여하여 35명의 간사 중 일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으며 1929년 신간회 복대표위원회에서 교육부장과 경성지회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에서는 이에 호응하여 민중대회를 개최할 것을 계획하고 이를 준비하던 중 조병옥을 비롯한 주요 간부들이 일경에 붙잡혀 그는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32년에 조선일보 전무 겸 영업국장을 맡아 민족언론의 육성에 힘썼으며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붙잡혀 2년간의 예심 끝에 고등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아 풀려났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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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만 공적비
이상만(1884~1955)은 충청남도 홍성 사람이다. 1919년 3월 한국독립운동본부 지령으로 중국 북경에 파견되어 박정래(朴正來)·조두진(趙斗珍)·유장연(劉璋淵)·전재홍(田在弘)·유중한(柳重韓)·연병주(延秉柱)·최훈식(崔勳植) 등과 더불어 신대한동맹회를 조직하고 동 회장에는 박정래를 추대하였으며, 그는 동회 총무를 맡아 활동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여러 방면으로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1939년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임되어 의정활동에 참여하였다. 또한 1941년 9월 회계원 검사원으로 선임된 그는 이듬해 10월에는 회계검사원 검사관이 되었으며 임시의정원 의장이던 김붕준(金朋濬)의 탄핵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광복군의 행동준승(行動準繩) 9개항의 취소를 요구하는 등 조국의 광복을 위한 통일된 정국의 방향을 모색하는데 주력하였다. 1943년 5월에는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여 중앙감찰 위원에 선출되었다. 1944년 의정원회의에서 제5차 개헌을 단행하여 지도체제를 개편하게 되자 동년 6월에 그는 국무위원 겸 검사원장이 되어 활약하였으며, 1945년에는 화중구(華中區) 한교선무단장이 되었다. 1946년 임정 주화(駐華)대표가 되었으며, 다음 해에는 대만 한교협회 이사장으로 우리교포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안전 귀국 등의 제반 업무를 처리하다가 과로로 인하여 병을 얻고 1949년에 귀국하여 요양 중 병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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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유적지
1889년 충청남도 홍성(洪城)에서 출생하였다. 집안은 부유한 명문대가 였으며 15세 때 가노(家奴)를 해방할 정도로 진취적 개화사상이 강하였다. 1905년 서울에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을사늑약 체결 이후 국권회복의 신념을 가지고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며 국운을 바로잡을 것을 결심하였다. 1907년 고향으로 돌아와서 가산(家産)을 정리하여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대한협회 홍성지부를 조직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을 하였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 참여하면서 1909년 《한성신보》의 간부를 지냈고,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서북학회(西北學會)를 조직하였다. 1911년 군자금 모금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투옥되어 2년 6개월 간 복역하였다. 1915년 비밀결사 조직 대한광복회에 가입했고, 1916년에는 노백린(盧伯麟)·신현대(申鉉大) 등과 함께 광복단에서도 활동하였다. 1917년 대한광복회의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었으나, 예심에서 면소판정으로 석방되었다. 1918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으며, 대한광복회 조직이 와해되면서 체포 위기에 처했으나 만주에 있어 체포는 면했다. 그 해 12월 무오(戊午)독립선언서에 민족지도자 39명 중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년 대한정의단의 기반 위에 군정부를 조직하여 본거지를 왕칭현[汪淸縣]에 두고 5분단(分團) 70여 개의 지회를 설치한 뒤 광복운동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였다. 이를 대한민국임시정부 휘하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한 뒤, 그 기관의 총사령관이 되어 1,600명 규모의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이어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치하여 사관훈련과 무기입수에도 힘썼다. 기관총 7문 등으로 무장한 김좌진 휘하의 독립정예군은 만주 일대에서는 가장 막강한 실력의 군대로, 1920년 이후 10여 년 간 본격적인 항일전투를 전개하였다. 1920년 10월 20~23일 청산리(靑山里) 80리계곡에서 유인되어 들어온 일본군을 맞아, 나중소(羅仲昭:참모총장)·박영희(朴英熙:부관)·이범석(李範奭:연성대장) 등과 함께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마록구(馬鹿溝) 등지에서 일본군과 3회의 격전을 전개, 일본군 3,300명을 일시에 섬멸하였다. 이를 청산리전투라 하여 봉오동전투와 함께 독립전쟁사상 최대의 승리로 꼽는다. 그 후 부대를 이동, 헤이룽강[黑龍江] 부근으로 전진하여 국민회군의 안무(安武), 도독부군의 최진동(崔振東) 등과 연합하고 대한독립군단을 결성,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일본군의 격렬한 보복작전의 전개로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다가 이듬해 헤이허[黑河]사변으로 타격을 받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5년 신민부를 창설하여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 부교장으로 독립군간부 양성에도 주력하였다. 1927년 만주의 신민부·참의부·정의부의 3부를 통합하려다 실패하자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在滿策進會)를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 단일단결성을 재촉하였다. 1929년 한족연합회를 결성, 주석에 취임하여 황무지개간, 문화계몽사업, 독립정신 고취와 단결을 호소하였다.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 부근 정미소에서 고려공산청년회 김봉환(金鳳煥)의 감언이설에 빠진 박상실(朴尙實)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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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홍주의병 주둔지(홍주아문)
홍주의진(洪州義陣)은 1895년 및 1906년 충청남도 홍주군 일대에서 결성된 반일 의병부대이다. 두 차례에 걸쳐 결성된 의병부대로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기에 전국적인 항일 의병운동을 선도해 간 대규모 무장투쟁이다. 의병장 김복한(金福漢)과 민종식(閔宗植)은 의진(義陣)을 결성함과 동시에 각국 공사(公使)에게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여 대내외에 주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독립전쟁의 성격을 공표하였다. 홍주의진의 활동은 1910년 국권 상실 이후 독립전쟁으로 계승되어 1910년대 국내외의 독립전쟁과 3 · 1운동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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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기념관
유관순(1902 - 1920)은 일제강점기 아우내 3·1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02년에 태어나 1920년에 사망했다.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나 1916년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화학당에 편입했다. 을사늑약 이후 조국독립을 위한 기도회와 시국토론회·강연회 등에 적극 참여했다. 3·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다. 전국적으로 휴교령이 내리자 고향으로 돌아와 서울 소식을 전한 후 4월 1일 병천시장에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검거되어 투옥 중에도 옥중만세운동을 벌였고,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8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1947년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으며, 1951년 순국의열사 심사위원회에서 순국의열사로 선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201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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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홍주의병 주둔지(조양문, 홍주읍성)
홍주의진(洪州義陣)은 1895년 및 1906년 충청남도 홍주군 일대에서 결성된 반일 의병부대이다. 두 차례에 걸쳐 결성된 의병부대로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기에 전국적인 항일 의병운동을 선도해 간 대규모 무장투쟁이다. 의병장 김복한(金福漢)과 민종식(閔宗植)은 의진(義陣)을 결성함과 동시에 각국 공사(公使)에게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여 대내외에 주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독립전쟁의 성격을 공표하였다. 홍주의진의 활동은 1910년 국권 상실 이후 독립전쟁으로 계승되어 1910년대 국내외의 독립전쟁과 3 · 1운동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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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하 집
양기하(1878-1932)는 충청남도 계룡 사람이다. 공주군수로 재직하던 중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당하여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셨고, 1919년 3월 대한독립단을 조직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셨다. 그 후 광복군사령부 정보국장으로 항일투쟁을 하시던 중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독립외교활동을 지원하셨다. 또한 1922년 10월 김구 선생과 "노동하며 군인이 되는" 한국노병회를 결성하여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 모금에 주력하셨다. 1930년을 전후하여 조선혁명군을 조직하여 항일무장 투쟁을 전개하던 중 1932년 2월 만주 관전현에서 일본경찰대와 만주군의 습격을 받고 격전 중 순국하셨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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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 집
김지수(1845-1911) 선생은 이곳 계룡시에서 출생하셨으며, 사계 김장생 선생의 11대손이다. 호서지역 유학자들과 교유하기 시작하면서 논산지역에서 학계를 조직해 유림들을 결속하고 가문의 위상을 정립하는 활동을 벌여나갔다. 이러한 활동을 기반으로 1900년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었으나 곧바로 사퇴하고 은둔 자정의 길을 선택했다. 1910년 8월 경술국치 후 일제가 내놓은 회유책인 노인은사금(老人恩賜金) 수령을 거절하였으며, 헌병대의 회유와 압박에도 불구하고 일제침략에 저항하다가 망국의 한을 품은채 1911년 칼로 자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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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독립만세운동 발상지 (두계장터)
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 두마면 두계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다. 일제는 1910년 8월 22일 이른바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해 대한제국을 멸망시키고 조선총도구를 설치해 식민통치를 시작했다. 조선총독부는 우리민족의 독립운동을 원천봉쇄하려고 철저한 강압통치를 실시했다. 이에 3.1만세운동이 전국 곳곳에서 일어나자 계룡시민도 배영직 열사의 주도하에 주위의 청년들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두계 장날을 기하여 만세시위운동을 펼치기로 계획하고, 기미년(1919년) 4월 1일 오후 4시경에 두계장터에서 군중들 앞에 나서서 국권회복을 역설,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시위를 선도했다. 이에 격동되어 모인 시위군중이 1,000여 명에 이르렀으며, 그 일부가 일제수탈의 상징인 호남철도 선로를 파괴하려고 시도했다. 이로인해 배영직 열사는 옥고를 치루던 중 모진 고문으로 강제 출감 후 3일 만에 순사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