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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순국선열영세추모비
대호지면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3.1운동은 대호지 4.4만세운동이다. 대호지 4.4만세운동은 대호지면에서 남주원, 이인정, 송재만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만세운동이다. 1919년 4월 4일 9시 대호지면 광장에 600여 명이 모여 30자 높이의 대나무에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면장 이인정의 연설에 이어 남주원의 독립선언문 낭독, 한운석이 작사한 애국자 제창이 있은 다음 행동 총책 송재만의 선서 후 만세시위 행진을 시작하여 천의시장으로 이어졌다. 어느새 1,000여 명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정미면에서는 가두시위를 계속하며 당진경찰서 소속 왜경들과 대치하였고, 4명이 부상하자 군중이 왜경주재소를 파괴하고 많은 일경들을 생포하여 구타하였다. 이에 사상자가 5명이 발생하였고, 200명 이상이 구속되어 학살되거나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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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 승전목 전투지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에 동학교도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봉건, 반외세 운동을 일컫는데, 총 2차에 걸쳐 일어났다. 1차 봉기는 1894년 3월에 봉건 체제개혁을 위한 것이고, 2차 봉기는 같은 해 9월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항일무장투쟁이었다. 승전목은 면천면 면천로와 당진읍 도곡길 사이의 좁고 가파른 계곡으로 어떤 병력도 통과하기 어려운 군사적 요충지이다. 이곳에서 1894년 11월 21일 한명순, 이화심, 박용태, 김현구 등이 이끄는 내포 지역의 2만여 명의 동학군이 10시부터 15시 30분경까지 총과 화전으로 아까마즈 소위가 이끄는 일본군 89명을 공격하였다. 그 결과 동학군 3명이 전사하였으나, 일본군의 78명분의 배낭, 상하 겨울 내의, 밥통, 구두, 쌀자루와 휴대식량 321식분, 탄약 612발 등을 손실시키는 결실을 이루었다. 이 전투는 동학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승리한 전투로, 이후 면천읍을 점령하고 22일 예산군 고덕면 구암포까지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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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0일 학생독립만세운동 기념비
3월10일 학생독립만세운동은 면천보통학교 학생들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서울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온 원용은은 면천 보통학교 제4학년 재학생의 신분으로 동급생 박창신과 만나 은밀히 거사를 논의하였다. 그 후 각 학년 급장과 비밀리에 논의 후 전교생에게 주지시켰다. 원용은, 박창신, 강선필, 원규상 등이 시위 준비를 주도하였고, 박창신은 인접한 당진, 덕산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에게 거사에 함께하자는 밀서를 보냈다. 3월 10일 오후 4시경 송림 골짜기에 전교생이 모였고, 학생들은 태극기와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였다. 학생들을 발견한 교사들은 저지하며 시위를 막으려 했으나, 이에 교사 심상렬이 시위대열의 앞으로 나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려하였다. 학생들은 만세를 부르며 주재소를 통과하려 하였으나, 경찰들의 강경한 저지로 태극기와 현수막을 빼앗겨 해산하였고 교사 박래윤, 안인식, 이흥로, 이돈하가 만류하여 다시 모이지 못하였다. 그러나 원용은은 일부 학생들과 다시 산에 올라 만세를 불렀고, 마을 사람들을 찾아가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다음 날, 원용은은 교사와 가족들의 만류에도 등교하여 자진 체포되었다. 박창신도 자진 출두하여 함께 조서를 받고 공주 형무소에 이감되어 4개월 뒤에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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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의병 전투지(면천읍성)
면천읍성은 당진의병이 1906년 5월 10일 일본군 수비대및 관군과 전투를 벌인곳이다. 당진의병은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뒤 최구현이 모집한 의병이다. 충청남도 당진 일대에서 활동한 항일 의병 단체이며, 1905년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대난지도와 소난지도를 의병의 거점으로 이용하면서 일본경찰대와 수비대의 공격을 무력화시키는 등 해상을 이용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최구현(1866 - 1906)은 1904년 일제가 한일의정서를 강요하자 이에 항거하여 군부참서관을 사임하고 귀향하였다. 일제가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침탈하고, 1906년 2월 통감부를 개설하자, 1906년 봄 창의도소(倡義都所)를 기지시(機池市)에 설치하고 창의문(倡義文)을 각처에 포고하여 면천·당진·고덕·천의·여미 등지로부터 370여명의 의병이 모았다. 그는 창의영도장(倡義領導將)으로서 이 의진을 이끌고 4월 17일 면천성을 공격했으나, 화력의 열세로 패하여 의진을 해산하고, 결사항전을 다짐한 36명의 의병과 함께 당진 소난지도에 들어가 의병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다른 의진의 의병들과 함께 장기적인 항일전을 벌이고자 간도 이주를 준비하던 중 7월 5일 새벽 관군과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체포되어 면천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으나, 12월 23일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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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신 추모비
3·10 면천 학생 독립만세운동은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에 소재했던 면천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이 1919년 3월 10일에 일으킨 독립만세운동이다. 당시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원용은은 형 원용하와 함께 서울에서 전개된 고종의 인산에 참례한 후 귀향하여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다. 원용은은 동급생인 박창신(朴昌信), 이종원(李鍾元)과 뜻을 함께한 후, 오후 4시경 전교생 90여 명을 인솔하여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는 현수막을 들고 면천의 동문 밖에서 시내를 관통해 공립보통학교까지 시위를 전개하였다. 반장인 이종원은 행렬의 질서를 유지하고 이탈자를 막기 위해 대열의 선두에 섰고, 부반장인 박성은(朴性殷)은 대열의 후미에 섰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일본 헌병에게 억압당했고, 공립 보통학교 교사들에 의해 만류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우리의 독립을 당당하고 힘차게 외쳤고, 면천 공립보통학교 학생의 독립 열기를 드높였다. 만세 운동이 끝난 뒤, 많은 학생들이 일제 경찰에게 취조와 고문을 받았다. 특히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던 원용은과 박창신은 공주 형무소에 이감되었다가 4개월 만에 석방되었고 결국 퇴학 처분을 받았다.박창신(1895-미상)은 평안북도 창성 출신이고 충청남도 당진에서 보통학교를 다니던 학생이다. 박창신은 면천보통공립학교 3.10 만세운동 당시 거사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선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에 참여하는 학생들을 이끌었다. 이로 인해 원용은과 함께 4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학교에서 퇴학당하였으나,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하며 1년 넘게 감옥 생활을 하였다. 정부는 인물의 공훈을 기리어 2021년에 건국 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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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용은 추모비
3·10 면천 학생 독립만세운동은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에 소재했던 면천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이 1919년 3월 10일에 일으킨 독립만세운동이다. 당시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원용은은 형 원용하와 함께 서울에서 전개된 고종의 인산에 참례한 후 귀향하여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다. 원용은은 동급생인 박창신(朴昌信), 이종원(李鍾元)과 뜻을 함께한 후, 오후 4시경 전교생 90여 명을 인솔하여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는 현수막을 들고 면천의 동문 밖에서 시내를 관통해 공립보통학교까지 시위를 전개하였다. 반장인 이종원은 행렬의 질서를 유지하고 이탈자를 막기 위해 대열의 선두에 섰고, 부반장인 박성은(朴性殷)은 대열의 후미에 섰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일본 헌병에게 억압당했고, 공립 보통학교 교사들에 의해 만류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우리의 독립을 당당하고 힘차게 외쳤고, 면천 공립보통학교 학생의 독립 열기를 드높였다. 만세 운동이 끝난 뒤, 많은 학생들이 일제 경찰에게 취조와 고문을 받았다. 특히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던 원용은과 박창신은 공주 형무소에 이감되었다가 4개월 만에 석방되었고 결국 퇴학 처분을 받았다.원용은(1902-1951)은 충청남도 당진 출신의 학생이다. 서울 탑골공원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귀향하여 면천공립보통학교 전교생이 독립만세 운동을 벌일 것을 결의하고 사전 거사계획을 세워 전교생에게 주지시키는 등 3.10 만세운동의 주도적인 역할 하였다. 이 사건으로 공주교도소에서 4개월간 옥고을 치루고 학교에서 퇴학 당한 후, 공주사범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였으나 독립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입학식 날 제적당하였다. 정부는 인물의 공훈을 기리어 2021년에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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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난지도 의병총
소난지도 의병은 홍원식이 인솔하는 100여 명으로 구성된 항일부대이다. 소난지도에 근거지를 두고 당진 일대의 육지에 상륙하여 일본주재소나 관아를 공격하였으며, 친일파를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홍성 경찰분서에서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1908년 3월 13일, 15명으로 구성된 추격대를 편성하여 소난지도에 파견하였다. 의병은 지형을 이용하여 일본경찰대에 항전하였으나 탄약이 고갈되어 추격을 받게 되었다. 동굴 속에 몸을 숨겼으나 5명이 희생되었고, 집중 총격을 받아 36명이 살해되었으며 나머지 의병들은 바닷물에 뛰어들어 목숨을 부지하고자 하였으나 행방불명되었다. 그 결과, 일본경찰대 15명에 의해 소난지도 의병 100여 명이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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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구현 항일독립대의비
최구현(1866-1906)은 1887년 무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훈련원(訓練院) 봉사(奉事)가 되었다. 그러나 1904년 일제가 한일의정서를 강요하자 이에 항거하여 군부(軍部) 참서관을 사임하고 귀향하였다. 1905년에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이를 계기로 항일 의병을 일으켰다. 1906년 봄 창의도소(倡義都所)를 기지시(機池市)에 설치하고 면천, 당진, 고덕 등지로부터 모인 370명의 의병을 이끌고 4월 17일 면천성을 공격하였으나 화력의 열세로 패하고 의병을 해산하였다. 1906년 36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당진 소난지도(小蘭芝島)로 들어가 기존에 주둔하던 홍원식 휘하의 의병세력과 연계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합류한 김태순과 차상길 휘하의 의병까지 결합하여 장기적인 항일전 준비에 착수했으나, 1906년 7월 5일 새벽에 관군과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의병은 사산되고 주모자들은 체포되고 말았다. 이때 체포된 그는 면천 감옥에서 일본군으로부터 모진 고문을 받았다. 1906년 말 무렵 출옥할 수 있었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1906년 12월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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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구현 묘
최구현(1866-1906)은 1887년 무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훈련원(訓練院) 봉사(奉事)가 되었다. 그러나 1904년 일제가 한일의정서를 강요하자 이에 항거하여 군부(軍部) 참서관을 사임하고 귀향하였다. 1905년에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이를 계기로 항일 의병을 일으켰다. 1906년 봄 창의도소(倡義都所)를 기지시(機池市)에 설치하고 면천, 당진, 고덕 등지로부터 모인 370명의 의병을 이끌고 4월 17일 면천성을 공격하였으나 화력의 열세로 패하고 의병을 해산하였다. 1906년 36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당진 소난지도(小蘭芝島)로 들어가 기존에 주둔하던 홍원식 휘하의 의병 세력과 연계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합류한 김태순과 차상길 휘하의 의병까지 결합하여 장기적인 항일전 준비에 착수했으나, 1906년 7월 5일 새벽에 관군과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의병은 사산되고 주모자들은 체포되고 말았다. 이때 체포된 그는 면천 감옥에서 일본군으로부터 모진 고문을 받았다. 1906년 말 무렵 출옥할 수 있었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1906년 12월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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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원 묘
정주원(1870-1925)은 충청남도 당진의 유생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분노하고 항일 의병투쟁에 신명을 모두 바쳐 국권을 수호하리라 다짐했다. 1907년 의병대장이 되어 8월 경기도 안성 의병회의에 참가하고 그해 9월까지 용인, 안성 등지에서 의병을 규합한 뒤, 그 중 300여 명의 1개 부대를 직접 지휘하며 다음 해 7월까지 당진, 서산, 부천 등을 누비며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다 1908년 7월 당진군 대호지면 적서리 해안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었고, 그해 9월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 선고를 받았다. 이후 11월에 종신형으로 감형되었으며 다시 징역 3년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르고 석방되었다. 정부는 인물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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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대섭 집 (필경사)
심훈(1901-1936)의 본명은 심대섭이며, 경기도 시흥 출신의 소설가이자 독립운동가로, 본명은 심대섭이고 아명은 삼준 또는 삼보이다. 1919년 서울에서 3.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소위 보안법, 출판법으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후 중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뒤,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문필활동에 종사하였다. 1934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상록수>를 당진 필경사에서 집필하였는데, 실화를 바탕으로 식민지 시대의 젊은이가 민족적 현실에 참여하여 이를 극복해가는 과정을 묘사하여 그 당시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을 크게 각성시켰다. 정부는 공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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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대섭 묘
심훈(1901-1936)은 경기도 시흥 출신의 소설가이자 독립운동가로, 본명은 심대섭이고 아명은 삼준 또는 삼보이다. 1919년 서울에서 3.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소위 보안법, 출판법으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후 중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뒤,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문필활동에 종사하였다. 1934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상록수>를 당진 필경사에서 집필하였는데, 실화를 바탕으로 식민지 시대의 젊은이가 민족적 현실에 참여하여 이를 극복해가는 과정을 묘사하여 그 당시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을 크게 각성시켰다. 정부는 공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