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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호 묘
독립투사 류성호(柳晟浩)은 1909년 3월 9일 공주군 정안면 운궁리에서 류석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류석우 선생은 3.1독립만세운동에 앞장 선 애국지사이시다. 어렸을 적 일찍이 공주 영명학교에서 신학문을 익힌 선생은 당시 일제 식민지 정책의 모진 강압과 착취에 울분을 금치 못한 나머지 독립투쟁에 몸바치기로 결심하였다. 1936년 9월 중국에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에서 상해 남경 방부지역을 거점으로 항일투쟁에 심혈을 기울이던 중 1941년 7월 체포되어 상해 일본 헌병대에서 밤낮으로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끝끝내 기밀사항을 밝히지 않았다. 이후 요시찰 인물로 분류된 선생은 충남 서산읍 석남리에 강제 압송되어 거주 및 활동이 10리 이내로 제한되는 등 엄중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1941년 11월 일경의 체포 수감 기도를 류붕렬 서산경찰서 고등계 형사로부터 알게 된 선생은 그들의 허점을 틈타 중국 흑룡강성 보청현으로 탈출하여 해방될 때까지 항일독립운동에 힘쓰셨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 후에도 청년 육성 사업, 건국 사업에 힘쓰신 선생은 독립운동으로 얻은 후유증으로 1950년 1월 19일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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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구 충훈비
조중구(1880-1942)는 1910년 국권침탈 이후 1914년 서간도 합니하(西間島哈泥河)에서 동지들과 광제회(光濟會)를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미국 등지에서 발간되는 신한민보(新韓民報)를 국내에 들여와 발행하다가 1915년 초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7년에 중국으로 망명하였고 1920년에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1922년 4월까지 의정원에서 활동하였다. 1921년에는 임시정부 외무부 임시선전원에 임명되어 호북성(湖北省) 등지에 파견되어 선전활동을 했으며, 1922년부터는 중국군에 입대하여 무력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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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달 공적비
논산읍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의 3·1운동에 호응하여 충청남도 논산군 논산읍 일원에서 1919년 3월 12일부터 4월 7일까지 전개된 일제의 조선 식민지 지배에 항거한 일련의 독립만세운동으로 논산읍민뿐만 아니라 학생과 강경읍민까지 가세하여 합동으로 전개된 운동이다.1919년 3월 12일 염중오(廉衆午)·염성필(廉聖弼)·박용진(朴容鎭)·유치만(兪致晩)·이백순(李伯純)·손필규(孫弼奎)·이근옥(李根玉)·김태호(金泰昊) 등이 주도하여 강경읍민과 학생 약 100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논산 읍내로 진입하였다. 이에 논산읍민들도 합세하여 만세를 부르는 군중은 약 1,000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1919년 4월 1일 배영직은 두마면 두계시장의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같은 해 4월 3일에는 욱정과 취암리에서도 주민들이 부근의 산에서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으며 취암리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은 배영달(裵榮達)과 배영술(裵榮述)이 주도하여 마을 주민 약 40명이 모정산에 모여 전개한 횃불만세운동이었다. 이어 같은 달 7일에도 논산에서는 약 100명의 군중들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1919년 3월 12일부터 4월 7일까지 이루어진 충청남도 논산읍 독립만세운동의 결과 이를 주도한 많은 인사들이 일제의 무차별적인 무력 진압에 희생 또는 체포·구금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염중오·염성필·박용진 등이 순국하였으며 10여 명이 구금되었다. 이중 이백순은 징역 10월형을 선고 받았으며 손필규·이근옥·김태호 등도 재판에 회부되어 옥고를 치렀다. 또한 배영달과 배영술은 태형 90대의 형벌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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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술 공적비
논산읍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의 3·1운동에 호응하여 충청남도 논산군 논산읍 일원에서 1919년 3월 12일부터 4월 7일까지 전개된 일제의 조선 식민지 지배에 항거한 일련의 독립만세운동으로 논산읍민뿐만 아니라 학생과 강경읍민까지 가세하여 합동으로 전개된 운동이다.1919년 3월 12일 염중오(廉衆午)·염성필(廉聖弼)·박용진(朴容鎭)·유치만(兪致晩)·이백순(李伯純)·손필규(孫弼奎)·이근옥(李根玉)·김태호(金泰昊) 등이 주도하여 강경읍민과 학생 약 100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논산 읍내로 진입하였다. 이에 논산읍민들도 합세하여 만세를 부르는 군중은 약 1,000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1919년 4월 1일 배영직은 두마면 두계시장의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같은 해 4월 3일에는 욱정과 취암리에서도 주민들이 부근의 산에서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으며 취암리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은 배영달(裵榮達)과 배영술(裵榮述)이 주도하여 마을 주민 약 40명이 모정산에 모여 전개한 횃불만세운동이었다. 이어 같은 달 7일에도 논산에서는 약 100명의 군중들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1919년 3월 12일부터 4월 7일까지 이루어진 충청남도 논산읍 독립만세운동의 결과 이를 주도한 많은 인사들이 일제의 무차별적인 무력 진압에 희생 또는 체포·구금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염중오·염성필·박용진 등이 순국하였으며 10여 명이 구금되었다. 이중 이백순은 징역 10월형을 선고 받았으며 손필규·이근옥·김태호 등도 재판에 회부되어 옥고를 치렀다. 또한 배영달과 배영술은 태형 90대의 형벌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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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좌상(칠갑광장)
최익현(1833~1907)은 조선 후기의 지사이다. 1833년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 화서 이항로의 제자이며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典籍)·사헌부 지평(持平)·사간원 정언(正言)·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1868년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관직을 삭탈당했다. 이후 일본과의 통상조약과 단발령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며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林秉瓚)·임락(林樂)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체포되었다. 그러나 순창에서 패하여 대마도에 유배되었고 그 곳에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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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필 묘
유진필(1885-미상)은 1919년 3.1독립운동이 전국에서 퍼져나가자 뜻을 모아 논산시장일에 궐기하기로 결의하고, 5일 오전 4시, 공회당에 모여 간단한 점검 후에 논산 우시장에서 여러 지역의 부락민과 합세하여 오전 9시부터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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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원 추모비
3·10 면천 학생 독립만세운동은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에 소재했던 면천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이 1919년 3월 10일에 일으킨 독립만세운동이다. 당시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원용은은 형 원용하와 함께 서울에서 전개된 고종의 인산에 참례한 후 귀향하여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다. 원용은은 동급생인 박창신(朴昌信), 이종원(李鍾元)과 뜻을 함께한 후, 오후 4시경 전교생 90여 명을 인솔하여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는 현수막을 들고 면천의 동문 밖에서 시내를 관통해 공립보통학교까지 시위를 전개하였다. 반장인 이종원은 행렬의 질서를 유지하고 이탈자를 막기 위해 대열의 선두에 섰고, 부반장인 박성은(朴性殷)은 대열의 후미에 섰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일본 헌병에게 억압당했고, 공립 보통학교 교사들에 의해 만류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우리의 독립을 당당하고 힘차게 외쳤고, 면천 공립보통학교 학생의 독립 열기를 드높였다. 만세 운동이 끝난 뒤, 많은 학생들이 일제 경찰에게 취조와 고문을 받았다. 특히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던 원용은과 박창신은 공주 형무소에 이감되었다가 4개월 만에 석방되었고 결국 퇴학 처분을 받았다. 이종원(1899~1985)은 면천공립보통학교 3.10 만세운동 당시 최고학년 급장으로 전체 학생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하도록 원용은 등과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하고 거사일에는 행진의 선두에서 학생들을 지휘 통솔하고 이끌었다. 후일 만세운동 당시의 상황을 회고록에 자세히 기록하여 소중한 기록이 오늘날까지 알려지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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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돈 추모비
황의돈(1890-1964)은 충청남도 서천 출생의 역사학자이다. 본관은 장수(長水)이고 호는 해원(海圓)이다. 전통적인 유학 가문에서 태어나 1894년 할아버지 황태현(黃泰顯)으로부터 한학을 공부해 17세 되는 1906년까지 한서 수십 권을 통독할 정도로 한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쌓았다. 1907년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근대식 학교인 군산공립보통학교 보습과(補習科)에 입학해 1년 만에 수료하고 그 뒤 2년간은 서울과 일본의 동경(東京)을 내왕하며 근대 학문을 섭렵하였다. 1909년 일제의 침략으로 국운이 존망의 위기에 놓였음을 직시하고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북간도 중영촌(中營村)으로 이주, 명동학교(明東學校)를 창설하고 국사교육 등을 통한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1910년 일제의 강압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귀국,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중국 방면으로 다시 망명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승훈(李昇薰) 등의 만류로 망명을 포기하고, 안주·가산·정주 등지에서 국사교육을 맡아 후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1년 안창호(安昌浩)가 설립한 대성학교(大成學校)에서 국사교육을 맡았으며, 1913년에는 향리에 돌아와 청년들에게 국사를 강의하기도 하였다. 1916년 YMCA강당에서 국사 강연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일본 경찰에 붙잡혔으며, 재직하고 있던 휘문의숙의 교사직에서 파면되기도 하였다. 1920년 이후 약 20여 년 간 보성고등보통학교에서 국사와 한문를 강의하였고, 휘문고등보통학교와 중동학교의 교원도 겸임하였다. 1938년 이후 일제의 침략전쟁인 중일전쟁이 확대됨에 따라 학교에서의 국사·국어교육이 금지되자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사직을 사임하고 조선일보사 기자가 되었다. 조선일보사 기자 재직시에는 고적조사를 담당했으며, 오지영(吳知泳)의 『동학사』 서문을 쓰기도 하였다.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기자직에서 물러나 향리에 은거하였으며, 52세 때인 1942년에는 불교에 귀의하여 오대산에 입산, 방한암(方漢巖) 선사에게 사사하였다. 그 이후 말년에는 주로 국사와 불교의 선과의 결합을 시도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동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후진 교육에 진력하다 75세로 죽었다. 그의 생애는 자신이 술회하였듯이 초년에는 한문학, 중년에는 사학(史學), 말년에는 선학(禪學)에 종사하는 등 세 번이나 배움의 길을 바꾸었으며, 이는 국권상실 시대에 국사교육을 통해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데 그 주된 뜻이 있었다. 저술로는 『대동청사(大東靑史)』·『조선신사(朝鮮新史)』·『중등조선역사(中等朝鮮歷史)』 등의 사서와 『화담 서경덕전』·『이목은전』·『안의사(중근)전』·『손의암(병희)전』 등 전기 다수, 그리고 「갑오혁신운동과 전봉준」 등 여러 편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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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원덕 공적비
원암 문원덕(1915-1986) 선생은 예산군 신암면 탄중리에서 태어났다. 남평 문씨의 집성촌으로 집안 모두가 동학에 입교하였는데 문원덕 지사의 조부가 문장로 의사이다. 문장로 의사는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 당시 태안접주로 태안관아, 승전곡, 신례원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해미, 매현, 홍주성의 전투를 치렀다. 문원덕 의사의 부친은 장남 문병석 의사인데 기미년 3·1혁명 당시 예산 등지에서 만세시위에 앞장섰다. 문원덕 선생의 양부가 차남인 문귀(거북 구)석 지사가 되신다. 문귀석 지사는 태안관아에서 문장로 의사를 체포하기위해 혈안이 되었을 무렵 "아버지 대신 나를 잡아가라"외쳐 자진체포, 총살을 당하였다. 문원덕 선생은 1965년 서산, 태안 지역의 동학 후손들을 찾아다니며 충청 내포지역 동학농민군 288명의 희생자와 유족의 명단을 발굴했는데 거의 유일한 기록에 가깝다.또한 동학농민군 지도자 기록인 <문장준 역사>와 <조석헌 역사>를 알렸다. 문원덕 선생의 집안은 위, 아래 4대에 걸쳐 동학정신 선양사업에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문원덕 선생의 딸인 문영식 회장 역시 동학농민혁명태안군유족회 회장으로 동학농민혁명 선양사업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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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지역 동학전래비
태안지역 동학전래비는 2000년 10월 10일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에서 태안 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의 내용을 후대에 알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태안 지역에 동학이 전해진 것은 1890년으로 서산시 지곡면 장현리에서 살던 최형순에 의해서였다. 최형순은 1890년 3월 16일 경주에서 제2대 교조인 해월 최시형 선생을 만나 동학에 입도하였다. 최형순은 고향으로 돌아와 서태안 지역을 중심으로 충청도 전역에 걸쳐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포교는 매우 빠르게 이뤄졌으며 이원면 포지리를 지나 원북면 방갈리에까지 이뤄졌다. 특히 방갈리는 태안지역 동학의 핵심 거점이 되었는데 1894년 9월 그믐날 자정에 예산 본포에서 기포하여 당시 태안 감옥에 투옥되었던 동학의 지도자를 30여명 구출하였으며 이 때 기포한 동학군 중에 태안 출신은 수백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그 뒤 10월 15일 태안, 서산, 해미지역에서 재기포한 수 만명의 동학혁명군은 해미승전곡에서 관군과 일본군을 맞아 격전 끝에 동학군이 승리하고, 다시 동월 26일의 예산 신례원 전투에서도 동학혁명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10월 28일 홍주전투에서의 패전으로 인해 동학 혁명의 관련 인물과 유가족들은 혹독한 보복을 겪었다. 한편 동학농민혁명은 오랫동안 일부 지역에서 발생한 민란으로 평가되다가 1960년부터 재조명되기 시작하여, 1994년 대중적인 인식의 전환을 이루게 된다. 그 결실로 2004년 동학농민혁명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 2019년,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이 되었다. 본 전래비 역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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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장바위(동학농민군 지도자 피체지)
충청남도 태안군 태안읍 남문리 백화산에 위치한 교장바위에 세운 표지석이다. 이곳은 동학농민군이 주둔하였고 그 지도자들이 체포된 곳이다. 1894년 11월 이곳 태안 백화산에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관군이 몰려와 동학농민군 지도자인 유규회 최성서 최성일 안순칠 피만석을 체포하고 그들을 압송해 갔다. 이 내용은 순무영 선봉장 이규태가 정리한 「순무사정보첩」에 기록되어 있다. 교장바위라는 이름의 유래는 당시 태안 동학농민군들이 붙잡혀 포승줄에 묶여서 교장바위에서 학살을 당하였던 것에서 기인한다. 관군과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을 잡으면 목을 졸라 죽이기도 하고 몽둥이로 때려 죽이기도 하고 창과 칼로 찔러 죽이기도 하고 생매장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살(絞殺: 목졸라 죽임)하거나 장살(杖殺: 때려 죽임)하였다 하여 교장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2011년 태안군에서 비석을 세워 동학농민군의 숭고한 정신을 널리 알리고자 이 비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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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서 송덕비
충청남도 태안 백화산에 위치한 천도교도 청암(淸菴) 김학서(金鶴瑞)의 송덕비이다. 청암 김학서에 대한 기록은 거의 찾을 수 없으며 이 비문은 원암 문원덕이 1970년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보인다. 비문에 따르면 김학서의 도호는 청암(淸菴)이며, 도정(道正:천도교단 내의 직책 이름 중 하나)이었다. 김학서는 포덕 35년(1829) 예포 대장 박덕칠의 지휘로 봉기하였던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또한 김학서는 백화산에서 집단으로 처형당했던 많은 동학 농민들의 영령을 추모하여 합동위령제 올리도록 시작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